8 년 (AD 172) : 한나라가 군사를 거느리고 쳐들어 왔다.
[번역문]
8년(서기 172년) 겨울 11월에 한나라가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우리나라로 쳐들어 왔다.
왕은 여러 신하들에게 싸우는 것과 지키는 것 중 어느 쪽이 나은지를 물으니, 모두 의논하여 말하였다.
“한나라 군대가 수가 많은 것을 믿고 우리를 가볍게 여길 것이니,
만약 나아가 싸우지 않으면 그들은 우리를 비겁하다고 여겨서 자주 올 것입니다.
또 우리 나라는 산이 험하고 길이 좁아, 이것은 소위 「한 사람이 관(關)을 지키면 만 사람이 당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나라 군사가 비록 수가 많으나 우리를 어떻게 할 수 없을 것이니, 군대를 내어서 막기를 청합니다.”
[명림]답부가 대답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한나라는 나라가 크고 백성이 많은데 지금 강병을 거느리고 멀리 와서 싸우려고 하므로
그 기세를 당할 수 없습니다. 또 군사가 많은 자는 의당 싸워야 하고, 군사가 적은 자는 의당 지켜야 하는 것이 병가의 상식입니다.
지금 한나라 사람들이 군량을 천 리나 옮겼기 때문에 오래 견딜 수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도랑을 깊이 파고 보루를 높이며 들을 비워서 대비하면,
그들은 반드시 만 한 달을 넘기지 못하고 굶주리고 곤핍해져서 돌아갈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날랜 군사로 치면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왕은 그렇다고 생각해서 성을 닫고 굳게 지켰다.
한나라 사람들이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사졸들이 굶주리므로 이끌고 돌아갔다.
[명림]답부는 수천의 기병을 거느리고 뒤쫓아 가서 좌원(坐原)에서 싸웠는데,
한나라 군대가 크게 패하여 한 필의 말도 돌아가지 못하였다.
왕은 크게 기뻐하고 [명림]답부에게 좌원과 질산을 식읍으로 주었다.
12 년 (AD 176) : 신하들이 태자를 세우기를 청하였다.
[번역문]
12년(서기 176년)봄 정월에 여러 신하들이 태자를 세우기를 청하였다. 3월에 왕자 남무(男武)를 왕태자로 삼았다.
14 년 (AD 178) : 겨울 10월 그믐 병자에 일식이 있었다.
[번역문]
14년(서기 178년) 겨울 10월 그믐 병자에 일식이 있었다.
15 년 (AD 179) : 국상 명림답부와 왕이 죽었다
[번역문]
15년(서기 179년)가을 9월에 국상 [명림]답부가 죽었는데 나이가 113세였다.
왕은 스스로 애통해 하며 7일 동안 정사를 보지 않았다. 마침내 질산에 예로써 장사지내고 수묘(守墓) 20가(家)를 두었다.
겨울 12월에 왕이 죽었다. 고국곡(故國谷)에 장사지내고 왕호를 신대왕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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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국사기 원본 출처: http://koreandb.nate.com/history/saki/
2. 해설 및 분석:
1) 신대왕 8년(서기 172년) 겨울 11월에 한나라가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쳐들어 옵니다.
이때, 나아가 싸울 것인가(공격)? 지킬 것인가(수비)?를 가지고 의논을 합니다.
‘우리는 산이 험하고 길이 좁아 좁은 길목을 지키면 많은 사람도 물리칠 수 있다.
따라서, 길을 막고 기세를 꺾은 다음 공격하여 무찌르자’는 주장과
‘속전은 한나라가 바라는 바이니 그렇게 하면 안되고 멀리 왔으므로 굳게 지키면
군량이 떨어져 굶주리고 곤핍해져서 돌아갈 것이니 그때 치는 것이 좋다’는 주장 중에서 신대왕은 뒤의 주장(명림답부의 주장)을
채택합니다.
명립답부의 계책에 대로 한나라 군사가 물러날 때 명림답부가 한나라 군사를 뒤쫒아 가서 좌원에서 대승을 거둡니다.(좌원대첩)
2) 한나라는 제3대 대무신왕(무휼)때 요동태수가 쳐들어왔다가
고구려가 이번과 똑같은 전략을 써서 굳게 지키니 물러난 적이 있었습니다.(대무신왕 11년 -서기28년 참조)
이번에도 한나라에서 직접 쳐들어 왔다가 좌원의 싸움에서 대패를 하게 됩니다.
이와같이 고구려는 먼저 수비하여 적이 양식 떨어지고 피로에 지쳐 후퇴할 때 치는(공격하는) 전법을 써서
중국과의 전쟁에서 계속 승리합니다.
멀리온 적은 군량조달이 어려워 오래 버티지 못하고, 산 아래에서 험한 산위에 있는 고구려를 쳐야 되지도 않으니
고구려는 기다리기만 하면 됩니다.
이른바 시간의 싸움에서 시간이 고구려의 편에 있으므로 중국은 속전속결을 원하나 응해주지도 않고,
초조해진 나머지 어설프게 공격했다가는 대패를 당하고
그렇다고 공격을 못하고 시간이 가면 군량이 떨어지고, 군대사기도 꺾여 후퇴해야 할텐데 전쟁에서 후퇴는 곧 패배라...
이번처럼 후퇴하다가 뒤에서 치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게 중국입니다.
이러한 경험이 쌓여 중국은 말로만 큰소리치고 실제로는 고구려에 아무런 실력도 행사 하지 못했습니다.
3)12년(서기 176년)봄 3월에 왕자 남무(男武)를 왕태자로 삼습니다.
4)15년(서기 179년)가을 9월에 국상 [명림]답부가 사망합니다.
국상은 고구려의 최고 재상이고 국상은 대보라고도 하였습니다.
그 다음 명림답부는 연나(椽那) 사람인데 연나는 고구려 서부입니다. 이 고구려 ‘서부’인 연나는 고구려 역사에서 늘 말썽인데,
아마 고구려에서 힘이 특히 강한 곳이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고구려 서부이면 중국과 맞닿은 곳인데 따라서 이곳에 고구려의 힘(무력)이 집중되어 있어서 그런 것으로 추측됩니다.
5) 연나에 대한 기원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대무신왕이 부여를 정벌한 일이 있었고 그때 부여왕 대소를 죽인 후 대소왕의 사촌 동생이 나라(부여)를 일으킬 수 없다고 하여
부여 사람 만명과 함께 고구려에 투항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대무신왕은 그 사람을 왕으로 봉하고 연나부에 두고 ‘낙’씨 성을 준일이 있었습니다.(대무신왕 2편 참고)
삼국지 위서 동이전을 보면 고구려의 ‘호수(戶數)는 3만’으로 되어 있음을 볼 때 만명이 고구려에 투항한 것은
엄청난 숫자가 고구려에 온 것이고 연나부에 배치된 것입니다.(그 당시 부여는‘호수-戶數가 8만’이었음)
이후 연나부(서부)는 힘이 강한 곳이 되어 그런지 고구려 역사에서 늘 큰 사건을 일으킵니다.
6) 태조대왕으로 부터의 왕위 계승에 대하여...
①삼국사기는 태조대왕(궁)이 큰형이고, 차대왕(수성)이 둘째이며, 신대왕(백고)가 막내라고 하였습니다.
②그런데 삼국지 위서 동이전은 ‘궁(宮)이 죽고 그 아들 백고(伯固)가 왕(王)이 되었다.’
(원문:‘宮死, 子伯固立’) 이렇게 되어있고,
☆ 삼국지를 볼수 있는 싸이트: http://db.history.go.kr/url.jsp?ID=jo
③후한서 동이열전에는 ‘궁(宮-태조대왕)은 이에 사자(嗣子) 수성(遂成)에게 군사 2천여명을 거느리고 가서 요광(姚光) 등을 맞아
싸우게 하였다.’(원문: 宮乃遣嗣子遂成將二千餘人逆光等,) 이렇게 되어 있으며,
이어서 ‘이 해에(건광 원년-建光 元年-서기121년) 궁(宮-태조대왕)이 죽고, 아들 수성(遂成-차대왕)이 왕이 되었다.’
(원문: 是歲宮死, 子遂成立), 라고 되어 있으며
그 다음에,
‘遂成이 죽고 아들 伯固가 王이 되었다.’(원문: 遂成死, 子伯固立)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 후한서를 볼수 있는 싸이트: http://db.history.go.kr/url.jsp?ID=jo
즉,
①삼국사기는 태조대왕(궁), 차대왕(수성), 신대왕(백고) 순서로 왕위를 계승하였으며
그들의 관계는 형제(첫째, 둘째, 셋째)라고 기록하고 있고,
②삼국지 위서 동이전에는 태조대왕(궁)에서 신대왕(백고)으로 왕위가 계승 되었으며,
신대왕은 태조대왕의 아들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태조대왕 다음은 차대왕인데 차대왕, 수성이 빠졌음)
③후한서 동이열전에는 태조대왕(궁), 차대왕(수성), 신대왕(백고) 순서로 왕위가 계승되었으며, 그들의 관계는
차대왕(次大王:수성)은 태조대왕(太祖大王:궁)의 사자(뒤를 이을 아들, 큰아들)이며,
신대왕(新大王:백고)은 차대왕(수성)의 아들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중에서 삼국지 위서 동이전은 차대왕(次大王)을 빼먹었으니 명백히 틀렸고,
삼국사기와 후한서는 왕위 계승 순서는 같으나, 세분의 관계가 틀립니다.
이제 논점은 ‘세분의 관계가 무엇이냐’로 모아지는데 그것을 올바르게 가르쳐 주실 분은 단재선생입니다.
단재선생의 말씀에 의하면,
차대왕(次大王)과 신대왕(新大王)은 태조대왕(太祖大王)의 서자(庶子: 첩이 낳은 아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를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삼국사기 |
삼국지 |
후한서 |
조선상고사 | |
태조대왕(6대) |
큰형 |
아버지 |
아버지 |
아버지 |
차대왕(7대) |
둘째 |
기록에 없음 |
태조대왕의 아들 |
태조대왕의 서자 |
신대왕(8대) |
셋째 |
태조대왕의 아들 |
차대왕의 아들 |
차대왕의 동생 |
7) 여기에서 보면 사료적 가치가 높다는 ‘삼국지 위서 동이전’도
우리역사 기록에는 이 모양으로 엉터리임을 알수 있습니다.
이렇게 중국사서가 우리역사를 엉터리로 기록한 원인을 보면
첫째, 중국사서가 자기네 일은 상세하게 외국의 일은 간략하게(상내략외-詳內略外) 써서 그렇고
(외국의 일은 성의없게 씀, 관심도 없고 자기네와 관련된 일만 간략하게 씀)
둘째는 멀리 떨어지고 비교적 오래된 정보를 바탕으로 썼기 때문에 거기서 오는 자료의 부정확성 때문입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앞머리, 서(序)에 해당하는 부분을 보면,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황역(荒域) 밖은 여러 번의 통역을 거쳐야 이르게 되어,
[한인(漢人)의] 발걸음이나 수레가 닿지 않기 때문에, 그 나라의 풍속이 중국과 다른 것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우(虞)나라로부터 주(周)대에 이르기까지 서융(西戎)은 백환(白環)을 바쳤고 동이(東夷)에서는 숙신(肅愼)의 조공이 있었으나,
모두 여러 해가 지나서야 도달하였으니 그 머나먼 거리가 이와 같다.』
이렇게 되어있으니,
첫째, 통역을 여러번 거쳐야 했으므로, 그 중간에 통역 오류가 있을 수 있고,
둘째, 그 나라의 풍속을 알수 없으니 부정확한 정보를 바탕으로 사서에 기록할 가능성이 많으며
셋째, 이러한 대표적인 사례로 서융과 동이 중 숙신과의 교류를 들고 이 교류가 여러해가 지나서야 도달했다고 하면서,
‘서융과 동이’의 먼 거리가이와 같다고 설명하며,
오래된 정보를 바탕으로 사서를 써서 시간상 오류가 있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록의 오류가 있을 수 있음에 그 대표적인 사례를 든 것이 서융(중국 서쪽에 사는 사람들)과 동이(중국 동쪽에 사는 사람들,
우리민족이 동이족)입니다.
다시말해서
①통역의 오류, ②풍속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오류
③시간상 오류(언제 일어난 일인지 모름, 따라서 시간상 앞뒤가 바뀔 수 있음) 때문에, 사실인지 사실이 아닌지도 모르면서,
또는 뭐가 뭔지도 모르면서, 또는 언제 일어난 일인지도 모르면서 우리민족에 관한 일을 자기네 사서(중국사서)에 썼다는 얘기입니다.
즉 관심도 없고 부정확한 정보를 바탕으로 중국사람들이 자기네 사서에 우리역사를 썼기 때문에
중국의 정사(正史)중에서 우리역사에 대한 기록은 틀리는 것이(엉터리인 것이) 많을 것입니다.
따라서, 중국정사에 기록된 것은 앞뒤를 잘 따지고 사리를 잘 분별하여 정확한 사실만을 가려내어서 우리역사로 써야 하겠습니다.
(중국의 정사라고 해서 그 기록을 역사적 진실 그 자체로 아는 것은 금물이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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