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년 (AD 165) : 신대왕이 왕위에 올랐다.
[번역문]
신대왕(新大王)의 이름은 백고(伯固)<고(固)는 구(句)라고도 썼다.>이다.
태조대왕의 막내 동생으로서 용모와 자태가 뛰어나고 성품이 인자하고 너그러웠다.
이전에 차대왕이 무도하여 신하와 백성들이 따르지 아니하므로,
화란(禍亂)이 있어 해가 자신에게 미칠까 두려워 마침내 산골로 숨었다.
차대왕이 피살되자 좌보(左輔) 어지류(渪支留)가 여러 사람과 함께 의논하여 사람을 보내 맞이하였다.
[그가] 이르자 어지류가 무릎을 꿇고 국새(國璽)를 바치며 말하였다.
“선왕이 불행히 나라를 버리고 비록 아들이 있으나 나라를 다스릴 수 없습니다. 대개 사람들의 마음이 지극히 어진 이에게 돌아가니,
삼가 엎드리고 머리를 조아려 왕위에 오르기를 청합니다.” 이리하여 [그는] 엎드려 세 번을 사양한 후에 즉위하였다.
이때 나이가 77세였다.
2 년 (AD 166) : 봄 정월에 명령을 내려 말하였다.
[번역문]
2년(166) 봄 정월에 명령을 내려 말하였다.
“과인은 욕되게도 왕의 친척으로 태어났으나 본래 임금될 덕망이 없다. 저번에 형제의 우애로 아우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으나
[아우는] 그 끼쳐준 대업(大業)을 어그러지게 하였다. [과인은] 해를 입을 것이 두렵고 편안하지 못하여서 무리를 떠나 멀리 숨었다가
왕이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고 다만 극도로 슬플 뿐이었다. 어찌 백성들이 기꺼이 받들고 여러 대신들이 [왕위에] 나아가도록 권할 줄을
생각했겠는가? 보잘 것 없는 몸이 잘못 높은 자리에 앉게 되어 편안할 겨를이 없고 [마치] 바다를 건너는 것과 같다.
마땅히 은혜를 베풀어 멀리 미치게 하고 백성과 더불어 스스로 새롭게 하고 나라 안에 크게 사면을 베풀 것이다.”
나라 사람들이 사면의 명령을 듣고, 모두 기뻐 소리지르고 손뼉 치며 “신대왕의 덕이 크다.”고 하였다.
이전에 명림답부의 난이 있었을 때 차대왕의 태자 추안(鄒安)이 도망하여 숨어 있었는데,
새 왕의 사면령을 듣고 궁문에 나아와 아뢰었다.
“지난번 나라에 재화(災禍)가 있었을 때 신은 죽을 수 없어서 산골로 숨었습니다.
지금 새 정치를 베푼다는 말을 듣고 감히 죄를 아룁니다.
만약 대왕께서 법에 따라 정죄하여 목을 베어 저잣거리에 버리더라도 오직 명을 따르겠습니다.
만약 죽이지 않고 멀리 쫓아보내신다면 이것은 죽은 자를 살려 뼈에 살이 돋게 하는 은혜며,
신의 소원이나 감히 바라지 못하겠습니다.”
왕은 곧 구산뢰(狗山瀨)·누두곡(婁豆谷) 두 곳을 주고 양국군(讓國君)으로 봉하였다.
명림답부를 국상(國相)으로 임명하고 작위를 더하여 패자로 삼아서,
중앙과 지방의 군사[內外兵馬]를 담당하고 아울러 양맥 부락을 거느리게 하였다.
좌·우보를 바꾸어 국상이라 한 것은 이것에서 비롯되었다.
3 년 (AD 167) : 졸본(卒本)에 가서 시조묘에 제사지냈다.
[번역문]
3년(167) 가을 9월에 왕은 졸본(卒本)에 가서 시조묘(始祖廟)에 제사지냈다. 겨울 10월에 왕은 졸본으로부터 돌아 왔다.
4 년 (AD 168) : 한나라 현도태수 경림(耿臨)이 침략
[번역문]
4년(168)에 한나라 현도태수 경림(耿臨)이 침략해 와서 우리 군사 수백 명을 죽였다.
왕은 스스로 항복하여 현도에 복속되기를 빌었다.
5 년 (AD 169) : 현도태수 공손도를 도와 부산적을 토벌
[번역문]
5년(169) 왕은 대가 우거(優居), 주부(主簿) 연인(然人) 등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현도태수 공손도(公孫度)를 도와 부산적(富山賊)을 토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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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국사기 원본 출처: http://koreandb.nate.com/history/saki/
2. 해설 및 분석:
1) 삼국사기는 차대왕도 태조대왕의 동생이라고 하고, 여기 나오는 신대왕도 태조대왕의 동생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이로 보면 차대왕은 태조대왕의 24세 아래이고
(태조대왕이 100세에 차대왕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는데 그때 차대왕의 나이가 76세)
차대왕이 명림답부에게 피살당하고 신대왕이 왕위에 오른 때가 차대왕 20년,
태조대왕이 119세로 세상을 떠난 때입니다.(서기 165년)
이해에 신대왕이 왕위에 올랐고 이때의 나이가 77세이니 태조대왕과는 42세의 나이차이가 납니다.
태조대왕이 왕위에 오를 때, 태조대왕의 아버지 재사는 이미 늙어서
왕위를 아들 태조대왕에게 양보했음을 보면 무언가 이상하기도 합니다.
(단재선생은 차대왕과 신대왕이 태조대왕의 동생, 즉 재사의 아들이 아니고 모두 태조대왕의 서자라고 합니다.)
2)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의 왕위 계승은 장자승계(또는 아들승계)가 아니고 형제승계와 아들승계가 혼합되고,
나라사람들이 왕을 세우는 것(추대)이 다시 섞여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시조 주몽에서 2대 유리왕의 왕위계승은 맏아들 승계(장자승계)이고
3대 대무신왕(무휼)은 3남이나 맏아들과 둘째가 죽었으니 장자승계라고 할수 있으나,
4대 민중왕(해색주)은 ‘대무신왕의 아우’이니 형제간에 왕위를 승계하였고, ‘추대’가 함께 사용 되었습니다.
5대 모본왕(해우)은 대무신왕의 맏아들이니, 숙질간 승계요, 대무신왕의 입장에서 보면 맏아들 승계입니다.
6대 태조대왕은 유리왕의 아들 재사의 아들이니 모본왕과는 4촌이니 4촌간 승계요,
(대무신왕, 민중왕, 재사는 모두 유리왕의 아들로, 형제가 되니 대무신왕의 아들 모본왕과 재사의 아들 태조대왕은 4촌임)
나라사람들이 왕을 세웠으니 ‘추대’입니다.
7대 차대왕은 태조대왕의 동생이니 형제간 승계요, 이때는 ‘양위’를 한 것입니다.
8대 신대왕은 태조대왕의 막내 동생이니 차대왕과는 형제요 따라서 ‘형제간 승계’이며
나라사람들이 왕을 세웠으니 ‘추대’입니다.
즉 여덟분의 왕중에서 일곱 번의 왕위 계승이 있었는데, 장자승계(아들승계 포함)가 두 번뿐이고,
형제승계가 세 번이며, (사촌형제를 포함하면 네 번)‘추대’가 세 번, 양위가 한번입니다.
3) 신대왕 2년(서기 166년) 기록 중 ‘명림답부를 국상(國相)으로 임명하고...(중략)...
좌·우보를 바꾸어 국상이라 한 것은 이것에서 비롯되었다.’는 기록도 단재선생으로부터 호된 힐난을 받은 부분입니다.
여기에 대한 단재선생의 말씀을 다시한번 되새겨 보겠습니다.
『김부식(金富軾)이 삼국사기를 지을 때에, 이두와 한역(漢譯)의 이동(異同-다르고 같음)을 구별하지 못하고
철없는 붓으로 마구 빼고 마구 넣고, 마구 섞고 마구 갈라놓았으므로, “좌우보(左右輔)를 고쳐 국상(國相)을 만들었다.”
“패자(沛者) 아무로 좌보를 삼았다.” 하는 따위의 웃음거리가 그 사기 가운데 가끔 있다.』
(조선상고사 중에서...)
무슨 말씀인가하면, 고구려에는 3정승이 있는데
대보(大輔)- 다른 이름으로는 국상(國相)과 좌보(左輔)와 우보(右輔)이며
이것을 이두문으로 표시하면 대로(對盧), 패자(沛者), 평자(評者)입니다.
따라서 좌우보(左右輔)는 대보 즉, 국상(國相)을 보좌하는 두 정승인데
“좌우보(左右輔)의 명칭 고쳐 국상(國相)을 만들었다.”고 한 것이나,
패자(沛者)가 바로 좌보(左輔)인데 “패자(沛者) 아무로 좌보를 삼았다.”는 것은
우리 역사를 모르는데서 온 무식을 드러낸 것으로 웃음거리라는 것입니다.
4) 4년(AD 168)조, 한나라 현도태수 경림(耿臨)이 침략했다는 기록과
5년(AD 169)조, 현도태수 공손도를 도와 부산적을 토벌했다는 기록은 후한서의 기록을 오려 삼국사기에 붙인 것이며,
신대왕 때 요동에 공손도가 등장하고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 후한서를 볼수 있는 싸이트: http://db.history.go.kr/url.jsp?ID=jo
신대왕(新大王) 기록은 두 번에 걸쳐서 글을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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