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년 (AD 190) : 가을 9월에 서울에 눈이 여섯 자나 내렸다
[번역문]
12년(190) 가을 9월에 서울에 눈이 여섯 자나 내렸다.
중외대부 패자 어비류(於畀留), 평자(評者) 좌가려(左可慮)가 모두 왕후의 친척으로서 나라의 권력을 잡고 있었는데,
그 자제들이 모두 세력을 믿고 교만하고 사치하였으며 남의 자녀와 전택을 빼앗았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원망하고 분하게 여겼다.
왕은 이것을 듣고 노하여 죽이려고 하니, 좌가려 등이 4연나(四椽那)와 더불어 반란을 꾀하였다.
13 년 (AD 191) : 좌가려 등이 무리를 모아 왕도를 공격하였다.
[번역문]
13년(191) 여름 4월에 좌가려 등이 무리를 모아 왕도를 공격하였다.
왕은 기내(畿內)의 군사를 동원하여 평정하고, 마침내 명령을 내렸다.
“근래에 총애하는 바에 따라 관직을 주고 덕이 없어도 [벼슬]자리에 나아가니, 해독이 백성에게 미치고 우리 왕실을 흔드니,
이것은 과인이 똑똑하지 못한 소치이다. 이제 너희 4부는 각각 어질고 착한 사람으로서 아래에 있는 자를 천거하여라.”
이에 따라 4부가 함께 동부(東部)의 안류(晏留)를 천거하자, 왕은 그를 불러 국정을 맡겼다.
안류가 왕에게 말하였다.
“미천한 신은 용렬하고 어리석어 본래 큰 정치에 참여하기에 부족합니다. 서압록곡(西鴨淥谷) 좌물촌(左勿村)의 을파소(乙巴素)란
사람은 유리왕 때의 대신 을소(乙素)의 손자로서, 성질이 굳세고 지혜와 사려가 깊으나, 세상에서 쓰여지지 못하고 힘들여 농사지어
자급합니다. 대왕께서 만약 나라를 다스리려 하신다면 이 사람이 아니고는 할 수 없습니다.”
왕은 사신을 보내 겸손한 말과 두터운 예로써 모셔, 중외대부로 임명하고 작위를 더하여 우태로 삼고 말하였다.
“내가 외람되이 선왕의 업을 이어 신민(臣民)의 위에 있으나, 덕이 부족하고 재주가 짧아 정치에 익숙하지 못하오.
선생은 능력을 감추고 지혜를 나타내지 않으면서 궁색하게 시골에서 지낸 지 오래 되었오.
이제 [당신이] 나를 버리지 않고 마음을 바꾸어 왔으니, [이것은] 나의 기쁨과 다행일 뿐만 아니라, 사직과 백성의 복이오.
가르침을 받으려 하니 공은 마음을 다하기를 바라오.”
[을]파소가 뜻은 비록 나라에 허락하였으나 받는 관직이 일을 다스리기에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대답하였다.
“신의 둔하고 느린 것으로는 엄명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어질고 착한 사람을 뽑아 높은 관직을 주어서
대업을 이루십시오.”
왕은 그 뜻을 알고 곧 국상으로 임명하고 정사를 맡게 하였다.
이리하여 조정의 신하와 왕실의 친척들이 [을파]소가 신진으로서 구신(舊臣)들을 이간한다고 하며 미워하였다.
왕은 교서를 내려 『귀천을 막론하고 국상을 따르지 않는 자는 멸족시키겠다.』고 말하였다.
[을파]소가 물러나와 사람에게 말하였다.
“때를 만나지 못하면 숨고, 때를 만나면 벼슬하는 것이 선비의 마땅한 도리이다. 지금 임금께서 나를 후의로써 대하니
이전에 숨어 지내던 것을 어찌 다시 생각할 수 있겠느냐?”
그리고는 지성으로 나라를 받들고 정교(政敎)를 밝게 하고 상벌을 신중히 하니, 인민이 편안하고 안팎이 무사하였다.
겨울 10월에 왕은 안류에게 말하였다.
“만약 그대의 한마디 말이 없었다면 나는 [을]파소를 얻어 함께 다스리지 못하였을 것이다.
지금 많은 공적이 쌓인 것은 그대의 공이다.” 그리고는 대사자(大使者)로 삼았다.
사론(史論): 옛날의 밝은 임금이 어진 이를 대할 때,
등용하는 데에 구애됨이 없고 등용하면 의심하지 않았다. 은(殷)나라 고종(高宗)의 부열(傅說)에 대한 것이나,
촉(蜀)나라 선주(先主)의 공명(孔明)에 대한 것이나, 진(秦)나라 부견(苻堅)의 왕맹(王猛)에 대한 것이 그와 같다.
그런 후에야 어진 사람이 자리에 앉고 능력있는 사람이 직분을 맡아 정교가 밝게 닦아져서 나라를 보전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왕이 결연히 홀로 결단하여 [을]파소를 바닷가에서 뽑아 여러 사람의 입놀림에도 흔들리지 않고 모든 관료의 윗자리에 두었으며,
또 천거한 자에게도 상을 주었으니 선왕의 법을 얻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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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국사기 원본 출처: http://koreandb.nate.com/history/saki/
2. 해설 및 분석:
오늘 올린 본문은 1)‘좌가려의 난(亂)’과 2)‘을파소의 등용’이 주요 내용입니다.
1) 좌가려의 난:
어비류(於畀留)와 좌가려(左可慮)는 모두 왕후의 친척으로 벼슬이 각각 패자, 평자로써
이를 한문으로 표시하면 좌보, 우보입니다.
이제는 다 아시다시피 고구려에 3정승이 있으니 원래 이름은 신가, 팔치, 발치이며
이두로 말하면 대로(상가), 패자, 평자이고 한문으로 말하면 대보(국상), 좌보, 우보입니다.
(근거:단재 신채호 선생의 조선상고사)
그 중에서 어비류와 좌가려는 좌보와 우보로써 3정승 중 둘을 차지하고 있으니,
나라의 권력을 잡고 있었다는 말이 허언이 아님을 알수 있습니다.(게다가 모두 왕후의 세력들임)
이러한 막강한 세력을 믿고 그들의 자식들이 교만하고 사치하고 남의 자녀와 집과 재산을 빼앗아 나라 사람들이 원망하고 분하게
여겨서 왕은 이것을 듣고 노하여 죽이려 하니, 오히려 좌가려 등이 4연나(四椽那)와 더불어 반란을 일으킵니다.
본래 왕후 우씨는 ‘제나부(堤那部) 우소(于素)의 딸’이라고 했고, 어비류 좌가려는‘왕후 우씨의 친척들’이니
어비류 좌가려는 제나부 출신이고, 좌가려 등이 자기들의 세력 본거지인 4연나(四椽那)와 더불어 반란을 일으켰으니
‘제나부’란 ‘연나부’를 말합니다.
그런데 왜 ‘4연나(四椽那)와 더불어’인가?
연나부(서부)도 5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연나부도 동 서 남 북 중, 즉 5연나(五椽那)인데 그중에서 왕후와 그들의 친척인
어비류 좌가려는 연나부의 한개 부 사람이니 나머지 4연나(四椽那)와 더불어 반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따라서 연나부 전체가 반란을 일으킨 것임)
그들은 왕도를 공격까지 할 정도로 막강한 힘을 가진 자들이어서 고국천왕은 기내(畿內-왕이 직접 관할하는 서울 인근의 직할지,
즉 중부)의 군사를 동원하여 평정합니다.
이 좌가려의 난은 고구려 최초의 반란 사건입니다.
그것은 왕후의 세력이며 왕후의 세력들이 왕을 공격하고 왕은 서울과 그 인근 군대를 동원해서야 겨우 평정 할수 있는 지경입니다.
왕후의 세력인 연나부(서부)의 세력이 그만큼 막강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을파소의 등용
좌가려의 난을 겪은 고국천왕(남무)은 훌륭한 인재를 찾아 나라를 다스려고 합니다.
처음 천거된 사람이 동부사람 안류(晏留)이고 안류가 을파소를 천거합니다.
고국천왕(남무)는 처음 을파소에게 낮은 지위인 우태로 삼습니다.
이 우태라는 직위는 도부(圖簿)와 사령(辭令)을 맡아보는 비교적 낮은 직위입니다.
을파소는 이러한 낮은 직위로는 큰 일을 할 수 없어 천거 받음을 사양하니 고국천왕은 최고의 지위인 국상(대보)으로 임명합니다.
그리고 조정의 신하와 왕실의 친척들이 을파소를 시기 하였을때
왕은 교서를 내려 『귀천을 막론하고 국상을 따르지 않는 자는 멸족시키겠다.』고 강경한 지시를 내립니다.
이렇게 을파소에게 강한 힘을 실어주니 을파소가 자기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여 나라가 발전하여 태평성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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