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본기

고구려 제10대 산상왕- 2

상 상 2011. 12. 6. 19:38

다음날 새벽에 [왕후가] 선왕의 명령이라고 사칭하고,

여러 신하들에게 명령하여 연우를 왕으로 세웠다.(앞선 글과 두줄 중복기재)

 

발기가 이것을 듣고 크게 노하여 군사를 동원해서 왕궁을 둘러싸고 소리쳐 말하였다.

“형이 죽으면 아우가 잇는 것이 예이다. 너는 차례를 뛰어 넘어 찬탈하였으니 큰 죄이다.

마땅히 빨리 나오너라. 그렇지 않으면 주멸함이 처자식에게까지 미칠 것이다.”

 

연우는 3일 동안 문을 잠그고 있었다. 나라 사람들도 또한 발기를 따르는 자가 없었다.

발기가 어려운 것을 알고 처자를 거느리고 요동으로 도망가서 태수 공손도(公孫度)를 뵙고 고하였다.

 

“나는 고구려 왕 남무(男武)[고국천왕]의 친동생입니다. 남무가 죽고 아들이 없었는데,

나의 동생 연우가 형수 우씨와 왕위에 오를 것을 공모하여 천륜의 의를 그르쳤습니다.

이 때문에 분하여 상국에 투항해 왔습니다. 엎드려 원컨대 병사 3만을 빌려 주어, 그들을 쳐서 난을 평정케 하십시오.”

공손도가 그 말에 따랐다.

 

연우는 동생 계수를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막게 하니, 한나라 군사가 크게 패하였다.

계수는 스스로 선봉이 되어 패잔병을 추격하니, 발기(發歧)가 계수에게 말하기를

“네가 지금 늙은 형을 차마 해칠 수 있느냐?”고 하였다.

 

계수는 형제에 대하여 무정할 수 없어 감히 해치지 못하고 말하였다.

“연우가 나라를 양보하지 않은 것은 비록 의가 아니지만,

당신은 한 때의 분노로 조종(祖宗)의 나라를 멸하려 하였으니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죽은 후 무슨 면목으로 조상들을 뵙겠습니까?”

 

발기(發歧)가 그 말을 듣고 부끄럽고 후회스러움을 이기지 못하여 배천(裴川)으로 달아나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계수는 슬퍼 통곡하며 그 시체를 거두어 짚으로 가매장하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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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국사기 원본 출처: http://koreandb.nate.com/history/saki/

 

2. 해설 및 분석:

 

1) 오늘 올린 본문은 역사 기록상 매우 중요합니다. 그 까닭은

 

첫째, 발기의 형제가 몇 명이고, 누가 형이고 누가 아우인지를 알수 있다는 점입니다.

 

즉, 발기가 말하기를

“나는 고구려 왕 남무(男武)[고국천왕]의 친동생입니다. 남무가 죽고 아들이 없었는데,

나의 동생 연우가 ...(하략)” 이렇게 말했고, 이어서

 

그밑 본문에 ‘연우는 동생 계수를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막게’ 했다는 내용을 보면,

발기의 형제가 넷이고,

 

그 순서를 보면

남무가 큰 형이고, 동생이 발기, 다음 동생이 연우이며, 다음 동생이 계수입니다.

 

따라서 맏형이 남무(男武), 둘째가 발기(發歧), 셋째가 연우(延優), 넷째가 계수(罽須)임을 알수 있습니다.

 

둘째, 남무는 아들이 없음을 알수 있습니다.

남무가 죽고 아들이 없었다고 했으니 남무는 아들이 없음을 알수 있습니다.

 

 

셋째, 어떤 사람의 후계를 둘러싼 내분인가가 분명해졌습니다

 

즉 발기가 말하기를 “나는 고구려왕 남무의 친동생” 이라고 했고,

“남무가 죽고 아들이 없었는데, 나의 동생 연우가 형수, 우씨와 왕위에 오를 것을 공모” 했다고 말했으니,

남무의 후계를 둘러싸고 일어난 내분입니다.

 

남무의 후계를 둘러사고 일어난 내분이 발기와 연우의 싸움임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삼국지와 고국천왕 본기에 있듯, 백고의 후계를 둘러싸고 일어난 내분이 아님)

 

넷째, 왕의 이름과 왕호를 분명히 알수있게 되었습니다.

발기(發歧)가 말하기를 “나는 고구려왕 남무의 친동생”이라고 말했고,

남무의 후계를 둘러싸고 발기와 연우가 싸워서 연우가 이겨 산상왕(10대)이 되었으니,

남무는 고구려 9대 왕인 고국천왕의 이름임이 명백해졌습니다.

즉, 고국천왕의 이름은 남무임이 명백합니다.

(고국천왕 본기 일부와 삼국지에 있는 이이모는 고국천왕이 아님)

 

다섯째, 신대왕 백고의 아들이 몇 명이고 누구 누구인지를 알수 있습니다.

남무 형제들 즉, 남무, 발기, 연우, 계수는 다같이 신대왕 백고의 아들이므로

백고(신대왕)의 아들은 4명이며 이름 및 순서는 남무, 발기, 연우, 계수입니다.

 

(삼국지는 백고의 아들이 둘이고 큰아들이 발기(拔奇), 작은 아들이‘이이모’라고 하였으나

백고의 아들은 넷이며, 발기(拔奇)는 백고의 맏아들이 아니고 둘째 아들이다.

 

또한, 고국천왕 본기가 삼국지의 내용을 오려 붙인 결과인 ‘고국천왕은 신대왕 백고의 둘째 아들이다. 백고가 죽자,

나라 사람들은 맏아들 발기(拔奇)가 불초하였으므로 함께 이이모를 세워 왕으로 삼았다.’는 기록도 틀린 기록임을 알수 있다)

 

※ 고국천왕 본기와 삼국지의 발기는 拔奇로 기록되어 있고, 산상왕 본기에 있는 발기는 發歧로 기록 되어 있어

김부식은 이를 다른 두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만 기록된 사건과 인물을 보면 동일인 임을 알수 있습니다.

즉, 김부식은 동일인을 두사람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조선상고사 참조)

 

여섯째, 왕위계승 순서를 분명히 알수 있다는 점입니다.

남무 형제들 즉, 남무, 발기, 연우, 계수는 다같이 신대왕 백고의 아들이고

 

왕위계승 순서는

백고(신대왕, 8대)→남무(고국천왕, 9대)→연우(산상왕, 10대)입니다.

 

< 삼국지에 있듯 백고(신대왕)에서 이이모(연우, 산상왕)으로 왕위가 이어진 것이 아니며, 삼국지는 고국천왕을 빠뜨린 것임.

삼국지는 저번에 차대왕을 기록에서 빠뜨린데 이어 또다시 고국천왕을 빠뜨림으로써 삼국지가 얼마나 엉터리 사서인지를 여실히

보여 주었음 >

참고: 신대왕- 2편 

 

결론적으로, 삼국지의 기록은 틀린 기록임을 알 수 있다.

 

이와같은 사실은 너무나 명백한데 왜 이런 얘기를 새삼스럽게 하는가?

몇몇 사서를 보면 사실과 다르게 버젓이 기록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서가 어떻게 틀린 기록을 해놓았는지는 다음 기회에 밝혀보고 잘목된 기록도 무엇이 옳은지 밝혀보겠습니다.

 

2) 오늘 올린 본문의 주요 내용을 보면...

발기가 연우(산상왕)을 쳤으나 실패하여 요동태수 공손도에게 도망가서 항복하고

군사 3만을 빌려 고구려를 치자 연우(산상왕)은 막내동생 계수(罽須)를 보내 발기를

무찌르고 발기는 조국을 공격한 부끄러움에 자결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내용이 고국천왕 본기와 일부 겹쳐, 중복 기재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래는 내용 중복과 관련된 고국천왕 본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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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국천왕 본기>

 

『0 년 (AD 179) : 고국천왕이 왕위에 올랐다.

[번역문]

고국천왕(故國川王), <혹은 국양- 國襄 이라고도 한다>의 이름은 남무(男武)이다.

<혹은 이이모(伊夷謨)라고도 하였다.>

신대왕 백고의 둘째 아들이다. 백고가 죽자, 나라 사람들은 맏아들 발기(拔奇)가 불초하였으므로 함께 이이모를 세워 왕으로 삼았다.

 

한나라 헌제(獻帝) 건안(建安) 초에 발기가 형으로서 왕이 되지 못한 것을 원망하여 소노가(消奴加)와 함께 각각

하호(下戶) 3만여 명을 거느리고 공손강(公孫康)에게 가서 항복하고, 돌아와 비류수 가에 머물렀다.

 

6 년 (AD 184) : 한나라 요동태수가 군대를 우리를 쳤다.

[번역문]

6년(서기 184년) 한나라 요동태수가 군대를 일으켜 우리를 쳤다. 왕은 왕자 계수(罽須)를 보내 막았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왕은 친히 날랜 기병을 거느리고 가서 한나라 군대와 좌원에서 싸워서 이겨 벤 머리가 산처럼 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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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런 중복기재라는 일이 생겼을까?

이는 삼국사기가 우리민족에게 전해져오는 사서인 고기(古記)를 오려(재단하여) 편집하고

또한편, 중국사서를 오려(재단하여) 편집하다보니 이와같은 중복기재가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같은 사건이 고기(古記)와 삼국지 두 종류의 사서에 나오는데 년도(시간)와 표기가 다르게 나와

년도(시간)가 앞선 삼국지의 기록은 제9대 고국천왕 본기에 싣고,

년도(시간)이 뒤쳐진 것으로 기록되고 산상왕편에 나오는 고기(古記)의 기록은 산상왕 본기에 실어서

이와같은 중복 기록이 나온 것 같습니다.

 

또한 같은 사건(일)이 삼국지에는 희평 연간(서기 172~177년)으로 기록되어 있고,

고기(古記)의 기록으로 보이는 산상왕 본기는 197년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때,

대개 신라시대에 씌여진 것으로 보이는 고기(古記)가 고구려 역사를 줄였다는 증거이라고 말할수 있는 것이

발기의 기록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참고로 삼국지 고구려전 중에서 삼국사기에 재단하여 편집한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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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동이전 고구려전>

 

『희평(熹平) 연간(A.D.172~177)에

백고(伯固)가 죽고 두 아들이 있었는데, 큰 아들은 발기(拔奇), 작은 아들은 이이모(伊夷模)였다.

발기(拔奇)는 어질지 못하여, 국인(國人)들이 함께 이이모(伊夷模)를 옹립하여 왕(王)으로 삼았다.

 

○ 건안(建安) 연간(A.D.196~219; 고구려 고국천왕18-高句麗 故國川王 18~산상왕-山上王 23)에 공손강(公孫康)이 군대를 보내어

고구려를 공격하여 격파하고 읍락을 불태웠다.

발기(拔奇)는 형(兄)이면서도 왕이 되지 못한 것을 원망하여, 연노부(涓奴部)의 [대(大)]가(加)와 함께 각기 하호(下戶) 3만명을 이끌고

[공손(公孫)]강(康)에게 투항하였다가 돌아와서 비류수(沸流水) 유역에 옮겨 살았다.

 

[지난 날] 항복했던 호(胡)[족(族)]도 이이모(伊夷模)를 배반하므로

이이모(伊夷模)는 새로 나라를 세웠는데 오늘날 [고구려가] 있는 곳이 이곳이다.

 

발기(拔奇)는 드디어 요동(遼東)으로 건너가고, 그 아들은 [고(高)]구려(句麗)에 계속 머물렀는데,

지금 고추가 교위거(古雛加 駮位居)가 바로 그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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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지를 볼수 있는 싸이트: http://db.history.go.kr/url.jsp?ID=jo

 

3) 본문 중에 동생 계수가 형 발기에게 한 말이 가슴을 찌릅니다. 

 

“연우가 나라를 양보하지 않은 것은 비록 의가 아니지만,

당신은 한 때의 분노로 조종(祖宗)의 나라를 멸하려 하였으니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죽은 후 무슨 면목으로 조상들을 뵙겠습니까?”

 

4) 이 혼란스러운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를 명확하게 가르쳐 주실분 역시 단재선생입니다

본인이 조선상고사를 올릴때 보시면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깨끗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 조선상고사를 볼수 있는 싸이트:

http://ko.wikisource.org/wiki/%EC%A1%B0%EC%84%A0%EC%83%81%EA%B3%A0%EC%82%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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