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고구려와 중국의 관계-237, 당나라때-61 (14. 돌궐전 분석 및 해설⑤)

상 상 2014. 5. 16. 20:49

 

고구려와 중국의 관계-237, 당나라때-61 (14. 돌궐전 분석 및 해설)

 

차례

 

1. 구당서 돌궐전

2. 구당서 고조본기

3. 구당서 태종본기()

4. 구당서 태종본기()

5. 구당서 고종본기()

6. 구당서 고종본기()

7. 구당서 동이열전

8.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당과의 관련부분)

9. 신당서 돌궐전

10. 신당서 고조본기

11. 신당서 태종본기

12. 신당서 고종본기

13. 신당서 동이열전

14. 신구당서 돌궐전 분석 및 해설

15. 신구당서 고조본기 분석 및 해설

16. 신구당서 태종본기 분석 및 해설

17. 신구당서 고종본기 분석 및 해설

18. 신구당서 동이열전 분석 및 해설

19.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분석 및 해설

20. 고구려와 당나라의 관계

 

 

14. 신구당서 돌궐전 분석 및 해설

1) 돌궐과 당나라의 관계

2) 돌궐의 멸망

3) 돌궐전의 기록에 관하여

4) 돌궐전에 나오는 사실관계의 규명 및 해설

 

 

4) 돌궐전에 나오는 사실관계의 규명 및 해설

신구당서 돌궐전을 읽다보면 몇가지 앞뒤 상황을 알수 없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번에는 그것들을 알아보자.

 

1) 수양제의 소황후

2) 수나라 의성공주

3) 특근 강초리, 골돌록 특근, 특근 열한, 음내 특근

4) 니보설, 사리불설, 보리설, 오사설, 막하돌설, 욱사설

 

1) 수양제의 소황후

구당서 돌궐전과 신당서 돌궐전을 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수양제의 소황후와 제왕 양간의 아들 양정도가 두건덕에게 잡혀 있었는데,

무덕 3(620) 2월 처라 가한이 그들을 맞이하여 아소(처라가한의 처소, )에 오자 양정도를 수왕에 즉위케 하였다.:

<구당서 돌궐전>

 

처라 가한이 수나라 소황후와 제왕 양간의 아들 양정도를 두건덕의 처소에서 맞이하여양정도를 세워 수나라 왕으로 삼아...(후략): <신당서 돌궐전>

 

수양제의 소황후는 누구이며

소황후가 어떻게 해서 두건덕에게 잡혀 있었고

두건덕은 왜 돌궐의 처라 가한에게 소황후 일행을 순순히 넘겨주었으며

이후에 소황후는 어떻게 되었는가?

 

 

소황후는 누구인가?

소황후의 아버지는 후양(後梁, 또는 서량-西梁)의 제2대 황제인 효명제 소규(蕭巋)이다.

그러면 후량(또는 서량)은 어떤 나라이며 소규(蕭巋)가 누구인가?

 

중국 남북조시대에 양나라를 세운 사람은 양무제 소연(蕭衍)이며

양무제의 태자가 바로 소명태자 소통()이다.

 

양무제 소연(蕭衍)은 북제를 배반하고 남쪽으로 내려온 후경이 죽이고 한()나라를 세우니 양나라는 일단 망하였다.

 

이때 강릉에서 양무제의 일곱째 아들 소역((蕭繹)왕승변을 시켜 후경을 진압하고 황제에

오르니 이를 원제(元帝)라고 한다. 그러나 원제(元帝)는 강릉에서 서위에게 붙잡혀 살해당하고

서위에 의해서 강릉쪽에 꼭두각시 정권으로 세워진 나라가 바로 후양(서양)이다.

 

이때 소찬(蕭詧)을 초대 황제로 세웠는데 소찬은 소통()아들이다.

그리고 후양(서양)의 두 번째 황제로 오른 사람이 바로 효명제 소규(蕭巋)이다.

 

수문제 양건은 그의 둘째 아들 양광으로 하여금 남쪽 진()나라를 쳐서 중국을 통일하였는데

이때 남쪽으로 내려온 양광(뒷날의 수양제)이 소규(蕭巋)의 딸을 아내로 삼으니 이 사람이 바로 소황후이다.

 

 

소황후가 어떻게 해서 두건덕에게 잡혀 있었는가?

 

61410월 수양제는 끝내 고구려 침략에 실패하고 장안으로 돌아왔다.

그 다음 해인 6158월 수양제는 북쪽 변방을 순시하였다가 안문에서 돌궐에게 포위당하여 죽을뻔하자

수양제는 북쪽이 무서워져 장안(서도)와 동도(낙양)에서는 더 이상 있지 못하고

6167월 친위대인 효과군을 데리고 남쪽 강도(강소성 양주, 양자강 바로 위)로 도망갔다.

그런데 효과군은 원래 관중(장안) 사람들이라 남쪽이 맞지 않았다.

그래서 6179월 효과군의 군사들이 떠나자 수양제가 강도(江都) 사람의 딸과 과부를 효과군에게 나누어 주어 군심을 안정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61711월 이연이 장안을 차지하고 수양제의 손자 대왕(代王) 양유를 황제로 세우자 효과군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6183월 우문화급이 주동이 되어 수양제를 죽였다. 이때 우문화급이 소황후를 차지한다.

그 다음 우문화급 등의 효과군은 처와 자식들을 다 데리고 장안으로 떠난다.

수양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이연은 6185월 양유를 밀어내고 황제에 오른다.(무덕원년)

장안으로 돌아가던 우문화급은 6186월말 이밀과 전투를 벌였는데 뜻밖에 이밀에게 패하여 북쪽으로 달아나게 되고

결국 6192(무덕 2) 요성에서 우문화급은 두건덕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이래서 소황후와 제왕 양간의 아들 양정도가 두건덕에게 잡혀있었던 것이다.

  

두건덕은 왜 돌궐의 처라 가한에게 소황후 일행을 순순히 넘겨주었는가?

 

돌궐의 처라 가한의 부인이 된 의성공주(義成公主)는 이연이 이미 장안에서 황제를 칭했다는 말을 듣고,

소황후의 소식을 수소문하여 그들의 행방에 대하여 듣자,

6202(무덕3) 두건덕에게 사신을 보내어 소황후를 영접한다.

두건덕은 감히 돌궐의 처라 가한에게 대항하지 못하고, 소황후 및 황족을 온 사신에게 곱게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이때 두건덕은 당고조 이연, 왕세충 등과 마찬가지로 돌궐의 처라가한을 임금으로 모셨기 때문이다.

(근거: 신당서 돌궐전두건덕설거유무주양사도이궤왕세충 등 일어나 패자가 된 자들도다 신하로써 처라가한을 임금으로

모셨다.)

  

이후에 소황후는 어떻게 되었는가?

 

돌궐은 628(정관 2) 내분에 휩싸이고 그것을 이용하여 당태종이 629(정관3) 11월 군사를 동원하여 돌궐을 공격하고,

630(정관4) 1월 이정이 힐리 가한을 습격하니 돌궐의 강소밀 등이 소황후와 양정도를 데리고 당나라에 항복한다.

이리하여 소황후는 당태종이 차지하고 67세에 당나라의 궁중에서 죽었다.

(소황후의 남자: 수양제, 우문화급, 두건덕, 처라가한, 힐리가한, 당태종)

  

2) 수나라 의성공주

615(수양제 대업 11) 8월 을축일(수양제) 북쪽 변방을 순시하였다.

무진일돌궐의 시필 가한이 기병 수십만을 거느리고황제가 탄 수레를 습격하려고 하니의성공주가 사신을 보내 변란을 알렸다.

<수서 양제 본기>

처라 가한이 지위를 잇고 또 수나라 의성공주를 처로 삼으며

무덕3(620) 힐리(가한)이 의성공주를 받아들여 처로 삼고<구당서 돌궐전>

 

<<수서>>의 기록에 따르면, 의성공주가 원래 시집간 것은 계명가한(啓明可汗)이었다.

그러나, 몇년후에 남편이 죽어버린다. 어떡할 것인가. 의성공주는 바로 계명가한의 아들 시필가한에게 간다.

 아쉽게도 시필가한도 '단명'했다. 그가 죽은 후, 이어받은 계승자는 차례로 그의 동생인 처라가한(處羅可汗)과 힐리가한(頡利可汗)이었다.

  

3) 특근 강초리, 골돌록 특근, 특근 열한, 음내 특근

위에서 말하는 특근(신당서에는 특륵)은 구당서 돌궐전의 처음부분에 나오는 것처럼 돌궐 가한의 아들과 동생을 말한다

  

4) 니보설, 사리불설, 보리설, 오사설, 막하돌설, 욱사설

설이란 역시 구당서 돌궐전의 처음부분에 나오는 것처럼 다른 부락(별부-別部)에서 병사를 부리는 사람을

말한다. 따라서 니보설은 니보 부락의 군대 지휘자, 사리불설은 시리불 부락의 군대 지휘자 등등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