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고구려와 중국의 관계-219, 당나라때-43 (11. 신당서 태종본기②)

상 상 2014. 4. 2. 17:18

 

고구려와 중국의 관계-219, 당나라때-43 (11. 신당서 태종본기②)

 

차례

 

1. 구당서 돌궐전

2. 구당서 고조본기

3. 구당서 태종본기(상)

4. 구당서 태종본기(하)

5. 구당서 고종본기(상)

6. 구당서 고종본기(하)

7. 구당서 동이열전

8.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당과의 관련부분)

9. 신당서 돌궐전

10. 신당서 고조본기

11. 신당서 태종본기

12. 신당서 고종본기

13. 신당서 동이열전

14. 신구당서 돌궐전 분석 및 해설

15. 신구당서 고조본기 분석 및 해설

16. 신구당서 태종본기 분석 및 해설

17. 신구당서 고종본기 분석 및 해설

18. 신구당서 동이열전 분석 및 해설

19.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분석 및 해설

20. 고구려와 당나라의 관계

 

 

11. 신당서 권2 태종본기②

1) 원문 출처: 新漢籍全文(http://hanchi.ihp.sinica.edu.tw/ihp/hanji.htm)

※ 원문에 들어가는 방법: 위 홈페이지/ 免費使用/ 史/ 正史/ 新唐書/ 本紀/ 卷二

번 역 문

원 문

618

무덕원년(618년),(이세민을) 상서령、우익위대장군으로 삼고,진급시켜 진왕으로 책봉하였다. 설거가 경주를 침구하자,태종을 서토(西討: 서쪽 토벌) 원수로 삼고,진급시켜 옹주목의 지위를 주었다. 7월,태종이 병이 있어,여러 장수들이 (설)거에게 패배를 당하였다. 8월,태종은 병이 조용해지자,다시 고척성에 주둔하여,60여 일을 서로 대치하였다. 얼마 후 (설)거가 죽고,그 아들 (설)인고가 그 무리를 거느리고 싸움을 청하니,태종은 군사들을 막고 움직이지 않았다. 오랜 시간이 지나자,(설)인고의 군량이 다하여,무리들이 점점 사이가 벌어져 떠나가니,태종이 말하기를:「됐다!」라고 하였다. 이에 행군총관 양실을 보내 얕게 흘러나오는 물의 원천(수원:水原)에 울타리를 치게 하였다. (설)인고가 종라후를 거느리고 (양)실을 치니,태종이 장군 방옥을 보내 (양)실을 구원하게 하였으나,(방)옥의 군대가 패할 기미를 보이자,태종이 병사를 거느리고 그 배후로 나아가니,(종)라후가 패하여 달아나,태종이 추격하여,그(설인고의) 성 아래 이르니,(설)인고가 이에 나와 항복하였다.

武德元年,為尚書令、右翊衞大將軍,進封秦王。薛舉寇涇州,太宗為西討元帥,進位雍州牧。七月,太宗有疾,諸將為舉所敗。八月,太宗疾閒,復屯于高墌城,相持六十餘日。已而舉死,其子仁杲率其眾求戰,太宗按軍不動。久之,仁杲糧盡,眾稍離叛,太宗曰:「可矣!」乃遣行軍總管梁實柵淺水原。仁杲將宗羅睺擊實,太宗遣將軍龐玉救實,玉軍幾敗,太宗率兵出其後,羅睺敗走,太宗追之,至其城下,仁杲乃出降。

619

(무덕)2년(620년) 정월,(고조가 이세민에게) 장춘궁에 군대를 주둔하여 지키게 하고,진급시켜 좌무후대장군、양주총관의 지위를 부여하였다. 이때,유무주는 병주에 웅거하고,송금강은 회주를 함락시켰으며,왕행본은 포주에 웅거하고,이하현 사람 여숭무는 현령을 살해하고 (유)무주에 호응하였다. 고조가 두려워하여,명령하기를 여러 장군들은 황하의 동쪽(하동)을 포기하고 관중을 지키라고 하였다. 태종이 포기는 옳지 않다고 하면서,원컨대 병사 3만을 주면 적을 격파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하였다. 고조가 이에 관중의 병사들을 다 징발하여 (이세민에게 군사를) 덧붙여 주었다. 11월,용문관을 나가,백벽에 주둔하였다.

二年正月,鎮長春宮,進拜左武候大將軍、涼州總管。是時,劉武周據幷州,宋金剛陷澮州,王行本據蒲州,而夏縣人呂崇茂殺縣令以應武周。高祖懼,詔諸將棄河東以守關中。太宗以為不可棄,願得兵三萬可以破賊。高祖於是悉發關中兵益之。十一月,出龍門關,屯于柏壁。

 

620

(무덕)3년(621년) 4월,송금강을 백벽에서 쳐 패배시켰다. (송)금강이 개주로 달아나니,태종이 추격해,하루 낮 밤 동안 2백리를 달려,작서곡의 서쪽 언덕에 묵었다. 군사 모두 굶주렸으며,태종도 밥을 못 먹은 것이 2일이 었는데,행군하여 호주(浩州)에 도착해서야 밥을 먹었으나,(송)금강의 장수 울지경덕、심상 등이 다 투항하였다. 유무주가 두려워하여,돌궐로 달아나고,그 장수 양복념은 병주를 들어 항복하였다. 고조는 소우를 보내 즉시 군중(軍中)에서 태종에게 익주도행대 상서령의 직위를 부여하였다. 7월,왕세충을 토벌하여,북망(산)에서 패배시켰다.

三年四月,擊敗宋金剛于柏壁。金剛走介州,太宗追之,一日夜馳二百里,宿于雀鼠谷之西原。軍士皆饑,太宗不食者二日,行至浩州乃得食,而金剛將尉遲敬德、尋相等皆來降。劉武周懼,奔于突厥,其將楊伏念舉幷州降。高祖遣蕭瑀即軍中拜太宗益州道行臺尚書令。七月,討王世充,敗之于北邙。

622

(무덕)5년(623년) 정월,유흑달을 명주에서 토벌하여,패배시켰다. (유)흑달이 항복하고서,얼마 후에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고조가 분노하여,태자 건성에게 명하여 산동 남자 15(살) 이상 (먹은 자)을 잡아 모두 구덩이에 파묻어 죽이고,그 어린 아이와 부녀자를 몰아 관중(지방)에 채우라고 하였다. 태종이 않된다고 절실히 간하여,마침내 그쳤다.

五年正月,討劉黑闥於洺州,敗之。黑闥既降,已而復反。高祖怒,命太子建成取山東男子十五以上悉阬之,驅其小弱婦女以實關中。太宗切諫,以為不可,遂已。

624

(무덕)7년,돌궐이 변경을 침구하여,태종 그들과 빈주에서 만나,수행원 백명의 기병과 함께 (나가) 그 가한과 말을 하니,이에 (돌궐이) 동맹을 맺고 떠나갔다.

七年,突厥寇邊,太宗與遇于豳州,從百騎與其可汗語,乃盟而去。

626

(무덕)9년 6월,태종이 병사를 데리고 현무문에 들어가,태자 건성과 제왕 원길을 살해하였다. 고조가 크게 놀라,태종을 황태자로 삼았다.

九年六月,太宗以兵入玄武門,殺太子建成及齊王元吉。高祖大驚,乃以太宗為皇太子。

8월 갑자일,동궁 현덕전에서 황제에 즉위하였다. 배적을 보내 남쪽 교외에서 (황제가 되었음을) 알렸다. 대사면령을 내리고,무덕 (시기의) 떠돌이는 돌려보냈다. 문무관에게 훈장과 작위를 하사하였다. 관내(장안 지방)과 포(주)、예(주)、우(주)、태(주)、섬(주)、정(주)의 6주(州)는 2년간 조(세)와 부역을 면제해 주고,천하에는 1년간 부역과 조세를 면제해 주었다. 백성 80 이상 자에게는 곡식과 비단을 하사하고,백세 이상 자에게는 판수(版授?)를 더해 주었다. 동관으로부터 동쪽(지방)인 빈하의 여러 관문을 폐지하였다. 계유일,궁녀3천여명을 풀어주었다. 병자일,장손씨를 황후로 삼았다. 계미일,돌궐이 편교에 침구하였다. 을유일,돌궐의 힐리(가한)과 편교에서 동맹을 맺었다.

八月甲子,即皇帝位于東宮顯德殿。遣裴寂告于南郊。大赦,武德流人還之。賜文武官勳、爵。免關內及蒲、芮、虞、泰、陝、鼎六州二歲租,給復天下一年。民八十以上賜粟帛,百歲加版授。廢潼關以東瀕河諸關。癸酉,放宮女三千餘人。丙子,立妃長孫氏為皇后。癸未,突厥寇便橋。乙酉,及突厥頡利盟于便橋。

 

628

(정관)2년 정월 신해일,장손무기가 파직되었다. 계축일,토욕혼이 민주(岷州)를 침구하여,도독 이도언이 패배시켰다.

二年正月辛亥,長孫无忌罷。癸丑,吐谷渾寇岷州,都督李道彥敗之。

4월 기묘일,수나라 사람의 드러난 뼈를 묻어 주었다.

임인일,삭방 사람 양락인이 양사도를 살해하고 항복하였다.

四月己卯,瘞隋人暴骸。壬寅,朔方人梁洛仁殺梁師都以降。

629

(정관)3년 정월 신미일,배적이 파직되었다.

三年正月辛未,裴寂罷。

8월 기사일 초하루,일식이 있었다. 정해일,이정을 정양도행군대총관으로

삼아,돌궐을 정벌하게 하였다.

八月己巳朔,日有食之。丁亥,李靖為定襄道行軍大總管,以伐突厥。

11월 경신일,병주도독 이세적을 통막도 행군총관으로,화주자사 시소를 금하도 행군총관으로,임성군왕 (이)도종을 대동도 행군총관으로,유주도독 위효절을 긍안도 행군총관으로,영주도독 설만숙을 창무도 행군총관으로 삼아,돌궐을 정벌하게 하였다.

十一月庚申,幷州都督李世勣為通漠道行軍總管,華州刺史柴紹為金河道行軍總管,任城郡王道宗為大同道行軍總管,幽州都督衞孝節為恆安道行軍總管,營州都督薛萬淑為暢武道行軍總管,以伐突厥。

12월 계미일,두여회가 파직 되었다.

十二月癸未,杜如晦罷。

이해에,장성밖과 열린 사이(四夷)로부터 돌아온 중국인으로서 주현(州縣) 사람이 된 자가 120여 만명이다.

是歲,中國人歸自塞外及開四夷為州縣者百二十餘萬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