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년 (BC 28) : 여름 4월 그믐 기해에 일식이 ...
[번역문]
30년(서기전 28) 여름 4월 그믐 기해에 일식이 있었다.
낙랑인들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침범하려다가 밤에도 집의 문을 잠그지 않고,
노적가리를 들에 그대로 쌓아둔 것을 보고는 서로 말하였다.
"이 지방 백성들은 서로 도둑질을 하지 않으니 도(道)가 있는 나라라 할 만하다.
우리들이 몰래 군사를 거느리고 습격한다면 도둑과 다름이 없으니 부끄럽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에 군사를 이끌고 되돌아갔다.
32 년 (BC 26) : 가을 8월 그믐 을묘에 일식이..
[번역문]
32년(서기전 26) 가을 8월 그믐 을묘에 일식이 있었다.
38 년 (BC 20) : 봄 2월 호공을 마한에 보내...
[번역문]
38년(서기전 20) 봄 2월에 호공(瓠公)을 마한(馬韓)에 보내 예방(禮訪)하였다.
마한왕이 호공을 꾸짖어 말하였다.
"진한 변한 두 나라는 우리의 속국인데 근년에 공물(貢物)을 보내지 않으니, 큰 나라를 섬기는 예의가 이와 같은가?"
[호공이] 대답하였다.
"우리 나라는 두 성인이 일어나서부터 인사(人事)가 잘 다스려지고
천시(天時)가 순조로와, 창고는 가득 차고 백성은 공경하고 겸양할 줄 압니다.
그래서 진한의 유민으로부터 변한, 낙랑, 왜인에 이르기까지 두려워하는 마음을 품지 않음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임금님은 겸허하게 신하인 저를 보내 안부를 묻게 하였으니, 예가 지나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대왕께서는 크게 노하여 군사로써 위협하니 이것이 무슨 마음입니까?"
[마한]왕이 격분하여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좌우의 신하들이 간언(諫言)하여 말리니, 이에 돌아갈 것을 허락했다.
이보다 앞서 중국 사람들이 진(秦)나라의 난리를 괴로워하여 동쪽으로 오는 사람이 많았는데,
그 다수가 마한의 동쪽에 터를 잡고 진한 사람들과 더불어 섞여 살았다. 이때 이르러 점점 번성해진 까닭에
마한이 그것을 꺼려서 책망한 것이다. 호공이라는 사람은 그 종족과 성(姓)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본래는 왜인이었다.
처음에 박을 허리에 매고서 바다를 건너온 까닭에 호공(瓠公)이라 불렀다.
39 년 (BC 19) : 마한 왕이 죽었다.
[번역문]
39년(서기전 19) 마한왕이 죽었다. 어떤 사람이 임금을 달래어 말하였다.
"서한의 왕이 지난번에 우리의 사신을 욕보였는데 지금 상을 당하였으니 그 나라를 치면 쉽게 평정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임금이 말하기를 "다른 사람의 재난을 다행으로 여기는 것은 어질지 못한 일이다." 하고는 따르지 않고, 사신을 보내 조문하였다.
40 년 (BC 18) : 백제의 시조 온조가 왕위에 올랐다.
[번역문]
40년(서기전 18) 백제(百濟)의 시조 온조(溫祚)가 왕위에 올랐다.
43 년 (BC 15) : 봄 2월 그믐 을유에 일식이
[번역문]
43년(서기전 15) 봄 2월 그믐 을유에 일식이 있었다.
53 년 (BC 5) : 동옥저의 사신이 와서 좋은 말 20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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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년(서기전 5) 동옥저(東沃沮) 사신이 와서 좋은 말 20필을 바치면서 말하기를
"저희 임금이 남한(南韓)에 성인이 났다는 소문을 듣고 신을 보내 [말을] 바치게 하였습니다."라 하였다.
54 년 (BC 4) : 봄 2월 을유에 살벌이 하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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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년(서기전 4) 봄 2월 을유에 살별이 하고(河鼓) [별자리]에 나타났다.
56 년 (BC 2) : 봄 정월 초하루 신축에 일식이...
[번역문]
56년(서기전 2) 봄 정월 초하루 신축에 일식이 있었다.
59 년 (AD 2) : 가을 9월 그믐 무신에 일식이...
[번역문]
59년(서기 2) 가을 9월 그믐 무신에 일식이 있었다.
60 년 (AD 3) : 가을 9월에 두 마리의 용이 금성의 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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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서기 3) 가을 9월에 두 마리의 용이 금성의 우물 가운데에서 나타났다.
갑자기 천둥이 치고 비가 내렸으며 금성 남문에 벼락이 쳤다.
61 년 (AD 4) : 봄 3월에 거서간이 ...
[번역문]
61년(서기 4) 봄 3월에 거서간이 죽었다[昇遐]. 사릉(蛇陵)에 장사지냈는데, [능은] 담암사(曇巖寺) 북쪽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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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국사기 원본 출처: http://koreandb.nate.com/history/saki/saki?kind=b
2. 해설과 분석
1) 30년(서기전 28)조에 보이는 낙랑은 낙랑국임.
2) 38년 (BC 20)조에 보이는 문구
「이보다 앞서 중국 사람들이 진(秦)나라의 난리를 괴로워하여...」는 본인이 전편에서 소개한 삼국지 동이전 한전(韓傳) 내용이다.
김부식이 삼국지의 내용을 약간 변형하여 오려 붙인 것이다. 삼국지의 그 내용이 엉터리임은 전편에서도 밝혔다.
삼국지는 위에 있는 것처럼‘중국 사람들이... 진한 사람들과 더불어 섞여 살았다.’는 그것이 아니라,
진한 사람들 자체가 진시황의 진(秦)나라 사람들이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김부식이 보았을때도 진한 사람들은 우리 민족이지, 중국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에 즉, 그것은 너무 뻔한 거짓말이기 때문에
‘중국 사람들이 진(秦)나라의 난리를 피하여...마한의 동쪽에 터를 잡고 진한 사람들과 더불어 섞여 살았다.’라고 고쳐 쓴 것이다.
그러나 원전(原典)인 삼국지가 엉터리 거짓말이므로 고쳐쓴 것도 거짓임을 물론이다.
다시말해서 중국 사람들이 난리를 피하여 마한의 동쪽 즉 진한에 터를 잡고 살았다는 자체가 거짓말이다.
왜냐하면 진(秦)나라의 난리를 피하여 도망 왔으면 가까운 고조선으로 도망 왔어야지
무슨 머나먼 경상도 땅까지 대다수가 도망올 수 있는가?
고조선의 국경에도 군사들이 지켜서 월경을 함부로 못할텐데 무슨 고조선을 마음대로 건너서
머나먼 경상도 땅까지 대다수가 와서 살수 있었다는 말인가? 또한 하필이면 경상도 땅에서 살았다는 말인가?
사기 조선열전에도 "만(滿-위만)은 노관(盧綰)이 흉노로 도망가자 위만(滿)도 망명하여, 무리 천여인(千餘人)을 모아...
고조선과 진(秦)나라의 국경 완충지대였던 진(秦)의 옛 공지(空地), 상하장(上下鄣)에 살았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위만도 고조선을 함부로 들어갈 수 없어서 고조선과 진(秦)나라의 국경 완충지대로써
옛날에 비워 놓은 땅에서 살았는데 만리장성을 쌓는 고역을 피하여(진秦나라의 난리를 괴로워하여)온 평민들이
어떻게 함부로 고조선을 뚫고 들어 갈 수 있으며, 제멋대로 고조선을 헤집고 다니고,
그 머나먼 경상도 땅까지 갈수 있었다는 말인가? 사리에도 맞지않는 뻔한 거짓말이다.
원전인 삼국지 동이전을 그럴듯하게 고쳐, 갖다 붙이다 보니
「중국 사람들이... 진한 사람들과 더불어 섞여 살았다」는 거짓말 기록이 나온 것이다.
3) 전편 21년(서기전 37)조에 나오는
「이 해에 고구려의 시조 동명(東明)이 왕위에 올랐다」는 기사와
위에 있는 본문 40년(서기전 18)조에 나오는「 백제(百濟)의 시조 온조(溫祚)가 왕위에 올랐다.」기사는
신라 사람들이 고구려와 백제의 역사를 줄인 결과 삼국사기에 이런 기사가 나온 것으로 보인다.
4) 53년 (BC 5)조에 나오는‘동옥저(東沃沮) 사신이 말을 바쳤다’는 기사도 단재선생으로부터 비판을 받은 기사이다.
조선상고사를 보면『처음 건국할 당시의 신라는 경주 한 구석에 의거하여 여러나라 중에서 가장 작은 나라였는데,
'변한이 나라로 들어와서 항복하였다.'느니, `동옥저가 좋은 말 200마리를 바쳤다.' 느니 함이 거의 사세에 맞지 아니할 뿐 아니라...』
이렇게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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