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위만조선(5) - 사기 조선열전(5)

상 상 2011. 3. 21. 19:36

13)○ 원봉(元封) 3년(B.C.108) 여름, 니계상(尼谿相) 삼(參)이 사람을 시켜

조선왕 우거(右渠)를 죽이고 항복하여 왔으나, 왕검성(王險城)은 함락되지 않았다.

 

죽은 우거의 대신(大臣) 성기(成已)가 또 [한(漢)에] 반(反)하여 다시 군리(軍吏)들을 공격하였다.

 

좌장군은 우거의 아들 장항(長降-䧄)과 상(相) 노인(路人)의 아들 최(最)로 하여금

그 백성을 달래고 성기(成已)를 죽이도록 하였다.

이로써 드디어 조선을 평정하고 사군(四郡)을 설치하였다.

 

 

삼(參)을 봉하여 획청후(澅淸候)로, 음(陰)은 적저후(荻苴候), 협(唊)은 평주후(平州候), 장(長)은 기후(幾候) 로 삼았으며,

최(最)는 아버지가 죽은데다 자못 공이 있었으므로 온양후(溫陽候)로 삼았다.

 

 

14)○ 좌장군을 불러 들여 [그가] 오자, 공(功)을 다투고 서로 시기하여

계획을 어긋나게 한 죄로 기시(棄市)하였다.

누선장군도 병사를 거느리고 열구(洌口)에 이르렀다면

마땅히 좌장군을 기다려야 할 것인데도

제멋대로 먼저 군사를 풀어 많은 병사들을 잃어버렸으므로

주살함이 마땅하나 속전(贖錢)을 받고 서인(庶人)으로 삼았다.

 

 

선자평(撰者評)

○ 태사공(太史公)은 말한다.

우거는 험고(險固-험한 요새와 견고한 지세)함을 믿다가 나라의 사직을 잃었다.

섭하(涉何)는 공(功)을 속이다가 전쟁의 발단을 만들었다.

누선은 장수의 그릇이 좁아서 난(難)을 당하고 죄에 걸렸으며,

[앞서] 번우(番禹)에서의 실패를 후회하다가 도리어 의심을 받았다.

순체는 공로를 다투다가 [공손]수와 함께 주살되었다.

결국 양군(兩軍)이 함께 욕을 당하고, 장수로서 열후(列侯)된 사람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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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중국정사 조선전 중 사기 조선열전(국사편찬위원회)

중국정사 조선전: http://db.history.go.kr/url.jsp?ID=j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