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와 중국의 관계-177(당나라때)
차례
1. 구당서 돌궐전
2. 구당서 고조본기
3. 구당서 태종본기(상)
4. 구당서 태종본기(하)
5. 구당서 고종본기(상)
6. 구당서 고종본기(하)
7. 구당서 동이열전
8.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당과의 관련부분)
9. 신당서 돌궐전
10. 신당서 고조본기
11. 신당서 태종본기
12. 신당서 고종본기
13. 신당서 동이열전
14. 신구당서 돌궐전 분석 및 해설
15. 신구당서 고조본기 분석 및 해설
16. 신구당서 태종본기 분석 및 해설
17. 신구당서 고종본기 분석 및 해설
18. 신구당서 동이열전 분석 및 해설
19.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분석 및 해설
20. 고구려와 당나라의 관계
1. 구당서 권194 돌궐전(상권)
고구려와 당의 관계는 당나라의 초기 역사가 중요하므로 당나라의 초기 역사를 잘 볼 수 있는 구당서 돌궐전을 통하여
당나라 초기, 당나라의 위상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원문 출처: 新漢籍全文(http://hanchi.ihp.sinica.edu.tw/ihp/hanji.htm)
※ 원문에 들어가는 방법: 위 홈페이지/ 免費使用/ 史/ 正史/ 舊唐書/ 列傳/ 卷一百九十四 上
2) 번역문 출처: 구당서 돌궐전(동북아역사재단: 여기 있는 번역문은 번역 원문을 참고하여 본인이 수정 보완한 것임)
번 역 문 |
원 문 |
돌궐의 시원(始原)과 계민(가한) 이전(시대의 내용은) 수서에 기재되어서 오직 (당)나라가 들어선 이후의 일만 기술하였다. |
突厥之始,啟民之前,隋書載之備矣,祇以入國之事而述之。 |
1. 시필가한, 돌길이라는 자는 계민가한의 아들이다. 수나라 대업 연간에 지위를 이어받았는데, 마침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져서 중국인이 도망간 자가 많았다. 그 종족이 강성하게 되어 동쪽으로 거란, 실위로부터 서쪽으로 토욕혼 고창(과 같은) 여러나라에 이르기까지 모두 신속해, 기마궁사(공현-控弦)가 100여만이니, 북적(돌궐)의 강성함이 일찍이 이런 적이 없었다. (이로인해 중국 사람들은) 음산(에 사는 돌궐)을 높이 보고, (돌궐족은) 중국(중하-中夏)을 가벼이 여기는 생각이 있었다. (돌궐의) 가한은 옛날 (흉노의) 선우와 같았고, 그 처는 가하돈이라고 불렀는데 옛날 알씨와 같았다. 그 아들과 동생을 특근이라고 불렀고, 다른 부락(별부-別部)에서 병사를 부리는 사람을 설이라고 하며, 그 최고위 관직(대관-大官)을 굴률철, 그 다음을 아파,그 다음을 힐리발,그 다음을 토둔,그 다음을 사근이라고 하였는데, 모두 그 관직을 대대로 세습하며 정해진 숫자가 없었으며, 아버지와 형이 죽으면 아들과 아우가 (지위를) 이어받았다. |
始畢可汗咄吉者,啟民可汗子也。隋大業中嗣位,值天下大亂,中國人奔之者眾。其族強盛,東自契丹、室韋,西盡吐谷渾、高昌諸國,皆臣屬焉,控弦百餘萬,北狄之盛,未之有也,高視陰山,有輕中夏之志。可汗者,猶古之單于,妻號可賀敦,猶古之閼氏也。其子弟謂之特勤,別部領兵者皆謂之設,其大官屈律啜,次阿波,次頡利發,次吐屯,次俟斤,並代居其官而無員數,父兄死則子弟承襲。 |
고조가 태원에서 의(병)을 일으켰을 때(617년 5월) 대장군부의 사마 유문정을 보내 시필(가한)에게 폐백(幣帛)을 보내고 예를 갖추어 방문하여 구원을 이끌어내었다. (이에) 시필(가한)이 특근(아들, 동생)강초리 등을 보내 말 천필을 보내고 강군에서 만나 또 2천 기병을 보내 군을 도와 경성을 평정하는데 따르게 하였다. (이에따라) 고조가 즉위할 때 앞뒤로 상을 준 것이 기록할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시필(가한)은 그 공을 스스로 믿고 더욱 교만하여 매번 사자를 장안으로 보냈는데 그들 대부분이 교만 방자하였으나 고조는 중원이 아직 평정되지 못하였으므로 매번 그들을 우대하여 용납하였다. 무덕원년(618년) 시필(가한)이 골돌록 특근을 (당나라)조정에 보내니 (고조는) 태극전에서 연회를 베풀고 구부악을 연주하였으며 비단 베 명주 등을 차등있게 주었다. (무덕)2년(619년) 2월 시필(가한)이 군대를 인솔하고 황하를 건너 하주에 이르니, 도적 우두머리 양사도가 군대를 보내 만나 (당나라 안으로)들어와 노략질 하기로 모의하고, 마읍 도적 우두머리 유무주에게 5백여 기병을 주어 구주(산)에 들어가게 보내고, 또 추가로 병력을 크게 모아 태원을 침략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그달에 시필(가한)이 죽고 그 아들 십발필이 나이가 어려 지위 잇기를 감당할 수 없어, 니보설에 즉위케하여 동편에 살게 하였는데 (그 땅은) 유주의 북쪽에 있었으며, 그 동생 사리불설이 (가한에)즉위하니 이가 바로 처라 가한이다. |
高祖起義太原,遣大將軍府司馬劉文靜聘于始畢,引以為援。始畢遣其特勤康稍利等獻馬千匹,會于絳郡,又遣二千騎助軍,從平京城。及高祖即位,前後賞賜,不可勝紀。始畢自恃其功,益驕踞,每遣使者至長安,頗多橫恣,高祖以中原未定,每優容之。武德元年,始畢使骨咄祿特勤來朝,宴于太極殿,奏九部樂,賚錦綵布絹各有差。二年二月,始畢帥兵渡河至夏州,賊帥梁師都出兵會之,謀入抄掠,授馬邑賊帥劉武周兵五百餘騎,遣入句注,又追兵大集,欲侵太原。是月,始畢卒,其子什鉢苾以年幼不堪嗣位,立為泥步設,使居東偏,直幽州之北,立其弟俟利弗設,是為處羅可汗。 |
2. 처라가한이 지위를 잇고 또 수나라 의성공주를 처로 삼으며, 사자를 보내 조정에 들어와 초상을 알렸다. 고조가 죽음을 애도해 3일간 조회를 폐지하고 황제의 명령으로 백관들에게 객관에 가 그 사자에게 조문하게 하며 또 내사사인 정덕정을 보내 가서 처라(가한)을 조문케 하고 부의물(초상집에 주는 물건) (비단)3만단을 보냈다. 처라(가한)은 이후에 빈번히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이보다 먼저 수양제의 소황후와 제왕 (양)간의 아들 (양)정도가 두건덕에게 잡혀 있었는데, (무덕)3년(620년) 2월 처라(가한)이 (그들을) 맞이하여 아소(처라가한의 처소, 궁)에 오자 (양)정도를 수왕에 즉위케 하였다. 수나라 말기 노정(돌궐의 궁중)에 있었던 중국인은 모두 (양)정도에게 예속시키고, 수나라 정삭을 따르게 하며, 백관을 두어, 정양성에 살게 하였는데, 무리가 1만이었다. 이때는 태종이 번왕으로 있었으므로 유무주를 토벌하라는 명령을 받고, 군대를 태원에 이르게 하였는데 처라(가한)이 그 아우 보리설을 보내 2천 기병을 인솔하고 관군(태종의 군대)와 마주치게 하였다. 6월 처라(가한)이 병주에 이르니 총관 이중문이 나아가 맞이하고 노고를 위로하였는데, 3일간 머무르며 성안의 아름다운 부인들을 대부분 잡아갔음에도 (이)중문은 (이를)제지할 수 없었다. 얼마후 처라(가한)이 죽었는데 의성공주는 그의 아들 오사설이 추하고 약해서 (가한으로) 즉위시키지 못하고 폐하며 드디어 처라의 아우 돌필을 즉위시키니 이가 바로 힐리가한이다. |
處羅可汗嗣位,又以隋義成公主為妻,遣使入朝告喪。高祖為之舉哀,廢朝三日,詔百官就館弔其使者,又遣內史舍人鄭德挺往弔處羅,賻物三萬段。處羅此後頻遣使朝貢。先是,隋煬帝蕭后及齊王暕之子政道陷于竇建德,三年二月,處羅迎之,至于牙所,立政道為隋王。隋末中國人在虜庭者,悉隸于政道,行隋正朔,置百官,居于定襄城,有徒一萬。時太宗在藩,受詔討劉武周,師次太原,處羅遣其弟步利設率二千騎與官軍會。六月,處羅至并州,總管李仲文出迎勞之,留三日,城中美婦人多為所掠,仲文不能制。俄而處羅卒,義成公主以其子奧射設醜弱,廢不立之,遂立處羅之弟咄苾,是為頡利可汗。 |
3. 힐리가한이라는 자는 계민가한의 셋째 아들로 처음 막하돌설이 되었을때 아(궁정)를 오원(군)의 북쪽에 두었다. 고조가 장안에 들어갔을 때 설거가 여전히 농우를 차지하고, 그의 장군 종라(후)를 보내 평량군을 공격해 함락하면서, 북으로 힐리(가한)과 연결하였다. 고조가 (이를)걱정을 하여 광록경 우문흠을 보내 금과 비단을 힐리(가한)에게 뇌물로 주었다. (우문)흠이 (힐리를)설득하여 설거와 절교하게 하였다. 애초에 수나라 오원태수 장장손은 전란이 일어나자 그 소속 부락 오원성을 가지고 돌궐에 예속하였다. (그래서) (우문)흠은 또 힐리(가한)에게 장장손을 보내 입조케하고, 오원 땅을 우리(당나라)에게 되돌리도록 설득하였다. 힐리(가한)는 모두 (이를)따랐고 이로인하여 돌궐 병사와 (장)장손의 무리가 출발하여 모두 태종 군대가 있는 곳에 모였다. 무덕3년(620년) 힐리(가한)이 의성공주를 받아들여 처로 삼고 시필(가한)의 아들 십발필을 돌리가한으로 삼으며, 사신을 보내 입조하여 처라(가한)이 죽었음을 알리니 고조는 조정을 하루 파하였으며 백관으로 하여금 객관으로 가서 그 사신을 조문하도록 명하였다 |
頡利可汗者,啟民可汗第三子也,初為莫賀咄設,牙直五原之北。高祖入長安,薛舉猶據隴右,遣其將宗羅攻陷平涼郡,北與頡利連結。高祖患之,遣光祿卿宇文歆齎金帛以賂頡利。歆說之,令絕交於薛舉。初,隋五原太守張長遜因亂以其所部五原城隸於突厥。歆又說頡利遣長遜入朝,以五原地歸于我。頡利並從之,因發突厥兵及長遜之眾,並會於太宗軍所。武德三年,頡利又納義成公主為妻,以始畢之子什鉢苾為突利可汗,遣使入朝,告處羅死,高祖為之罷朝一日,詔百官就館弔其使。 |
힐리(가한)이 처음 지위를 이을때 아버지와 형의 자산을 이어받아 병마가 강성하였으므로 세력을 믿고 중국을 침범하려는 뜻이 있었다. 고조는 중원을 안정시킨지 얼마되지 않아 밖을 도모할 수 없어서 매번 우대하여 용인하니 물자를 준 것이 셀수가 없었고 힐리(가한)의 언사가 거칠고 거만하며 (자기가) 청구한 (물건에도) 만족하지 않았다. (무덕)4년(621년) 4월 힐리가한이 스스로 만여 기병을 이끌고 마읍의 도적 원군장의 장병 6천명과 더불어 함께 안문을 공격하니 정양왕 이대은이 쳐서 달아나게 하였다. 이에 앞서 한양공 (이)괴、태상경 정원숙、좌효위대장군 장손순덕 등이 각각 돌궐에 사신으로 갔는데 힐리(가한)이 모두를 구속하고, 우리(나라) 역시 그의 사신을 전후로 여러명 구류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이)대은이 좌절시키자, 이에 비로소 두려워하여 (장손)순덕을 석방하여 돌아오게 하고, 다시 화목과 우호관계를 청하며, 어교 수십근을 바치면서, 두나라가 이 아교처럼 하나가 되기를 바란다고 훈계하였다. 고조가 기뻐하며 그 사자 특근 열한、아사덕 등을 석방하여 번(돌궐)으로 돌아가게 하면서 금과 비단을 주었다. |
頡利初嗣立,承父兄之資,兵馬強盛,有憑陵中國之志。高祖以中原初定,不遑外略,每優容之,賜與不可勝計,頡利言辭悖傲,求請無厭。四年四月,頡利自率萬餘騎,與馬邑賊苑君璋將兵六千人共攻雁門,定襄王李大恩擊走之。先是漢陽公瓌、太常卿鄭元璹、左驍衞大將軍長孫順德等各使于突厥,頡利並拘之,我亦留其使前後數輩,至是為大恩所挫,於是乃懼,仍放順德還,更請和好,獻魚膠數十斤,欲令二國同於此膠。高祖嘉之,放其使者特勤熱寒、阿史德等還蕃,賜以金帛。 |
(무덕) 5년(622년) 봄, 이대은이 아뢰기를 돌궐이 기근이 들어 황폐해졌기 때문에 마읍을 도모할 수 있다고 하였다. 조서로 (이)대은으로 하여금 전내소감 독고성과 더불어 군사를 거느리고 원군장을 토벌하도록 명하고 2달을 기한으로 마읍에서 만나기로 하였는데 (독고)성이 후에 기일에 도착하지 못하니, (이)대은이 홀로 진격할 수 없어, 신성에 병사를 주둔시키고 기다렸다. 힐리(가한)이 수만 기병을 보내 유흑달과 군대를 합하고, 진격하여 (이)대은을 포위하니, 군이 패배하여, (이)대은은 진중에서 죽었으며, 죽은 자가 수천명이었다. 6월 유흑달이 또 돌궐 만여 기병을 이끌고 들어와 하북을 노략질하자 힐리(가한)이 다시 스스로 오만 기병을 인솔하고 남침하여 분주에 이르러, 또 수천 기병을 보내 서쪽으로 영주, 원주 등에 들어오니, 조서로 은태자를 빈주도에서 나가고 태종을 포주도에서 나가 토벌하게 하였다. 힐리(가한)이 병주를 포위 공격하고 또 병사를 나누어 분주 노주 등에 들어가 남녀 5천여명을 노략질 할 때 태종의 병사가 포주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병사를 이끌고 변경을 나갔다. |
五年春,李大恩奏言突厥飢荒,馬邑可圖。詔大恩與殿內少監獨孤晟帥師討苑君璋,期以二月會于馬邑,晟後期不至,大恩不能獨進,頓兵新城以待之。頡利遣數萬騎與劉黑闥合軍,進圍大恩,王師敗績,大恩歿于陣,死者數千人。六月,劉黑闥又引突厥萬餘騎入抄河北,頡利復自率五萬騎南侵,至于汾州,又遣數千騎西入靈、原等州,詔隱太子出豳州道,太宗出蒲州道以討之。時頡利攻圍并州,又分兵入汾、潞等州,掠男女五千餘口,聞太宗兵至蒲州,乃引兵出塞。 |
(무덕)7년(624년) 8월, 힐리、돌리 두 가한이 거국적으로 (당나라 를)침범하여 길이 원주로부터 (당나라)군영 남쪽 위까지 이어지자 태종이 조서를 받고 북쪽을 토벌하였으며, 제왕 (이)원길은 (그에)예속되었다. 애초, 관중에 장마비가 내려 군량운송이 두절되자 태종이 자못 걱정하였는데 여러 장수들도 걱정하는 기색을 드러내며 병사들을 빈주에 주둔시켰다. 힐리, 돌리가 만여 기병을 거느리고 갑자기 (빈주)성 서쪽에 도착하여 높은 곳에 올라 진을 치니 장수와 병사들이 크게 놀랐다. 태종이 이에 친히 기병 백명을 거느리고 돌궐 진영에 빠른 걸음으로 나아가, 알려 말하였다.「(당)나라와 가한은 서로 배신하지 않기로 맹세하는데 어찌하여 약속을 위배하고 깊숙이 우리땅을 침입하였소? 내가 진왕이요. 왔으니 한번 결판내 봅시다. 가한이 만약 혼자 나온다면 나는 마땅히 가한과 둘이서만 싸울 것이고, 만약 군사를 총동원해 오고자 해도 나는 오직 백명의 기병만으로 상대할 것이요.」힐리가 헤아릴수 없자 웃으면서 상대하지 않았다. 태종이 또 앞으로 나아가 기병에게 명령하여 돌리(가한)에게 말하기를 「네가 이전에 나와 맹세하며 급한 어려움이 있을때 서로 돕기로 하였는데, 네가 지금 장병과 함께 왔으니 어찌하여 서약했던 정(향화지정)이 없어졌는가? 또한 마당히 빨리 나와서 한번 승부를 내보자.」돌리 역시 상대하지 않았다. 태종이 앞으로 나아가 장차 개울물을 건너려할 때, 힐리(가한)가 태종이 경무장으로 나오고, 또 서약했다는 정이라는 말을 듣고, 이에 남 몰래 돌리(가한)를 시기하여 사신을 보내 말하였다. 「(진)왕은 개울물을 건너지 마시오, 나는 악의가 없소, 다시 왕과 함께 스스로 명확하게 결정하는 게 마땅한지 (알아보려고) 했을 뿐이오.」 이에 조금씩 물러나다가 각각 군대를 거두어 퇴각하였다. 태종이 돌리(가한)에게 반간계를 쓰자 돌리(가한)가 기뻐하며 투항할 마음을 갖게 되어, 마침내 싸우려고 하지 않았다. 그 숙부와 조카의 내부 분열로, 힐리(가한)가 싸우려고 하였으나 싸울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돌리(가한)이 협필특근 아사나사마를 보내 (황제를) 뵙고 화친을 청하니, 허락하였다.
돌리(가한)는 스스로 태종에게 의지하려 하여서 형제맺기를 원했다.
(아사나)사마가 처음 (황제를)뵐때 고조가 이끌어 어좌까지 올라오라고 했는데 머리를 조아리며 극구 사양하자 고조가 말하였다. 「힐리(가한)이 성심으로 특근을 보내 조정에 배알하는데 지금 특근을 보니 힐리(가한)을 보는 것과 같구나.」극구 끌어당기니 와서 앉았으며, 얼마후 (아사나)사마를 봉하여 화순왕으로 삼았다. |
七年八月,頡利、突利二可汗舉國入寇,道自原州,連營南上,太宗受詔北討,齊王元吉隸焉。初,關中霖雨,糧運阻絕,太宗頗患之,諸將憂見於色,頓兵於豳州。頡利、突利率萬餘騎奄至城西,乘高而陣,將士大駭。太宗乃親率百騎馳詣虜陣,告之曰:「國家與可汗誓不相負,何為背約深入吾地?我秦王也,故來一決。可汗若自來,我當與可汗兩人獨戰;若欲兵馬總來,我唯百騎相禦耳。」頡利弗之測,笑而不對。太宗又前,令騎告突利曰:「爾往與我盟,急難相救,爾今將兵來,何無香火之情也?亦宜早出,一決勝負。」突利亦不對。太宗前,將渡溝水,頡利見太宗輕出,又聞香火之言,乃陰猜突利,因遣使曰:「王不須渡,我無惡意,更欲共王自斷當耳。」於是稍引却,各斂軍而退。太宗因縱反間於突利,突利悅而歸心焉,遂不欲戰。其叔姪內離,頡利欲戰不可,因遣突利及夾畢特勤阿史那思摩奉見請和,許之。突利因自託於太宗,願結為兄弟。思摩初奉見,高祖引升御榻,頓顙固辭,高祖謂曰:「頡利誠心遣特勤朝拜,今見特勤,如見頡利。」固引之,乃就坐,尋封思摩為和順王。 |
(무덕)8년(625년) 7월. 힐리(가한)이 병사 10여만을 모아 삭주를 크게 약탈하고, 또 장군 장근을 태원에서 습격하니 (장)근의 모든 군사가 모두 죽었으며, (장근은) 몸을 빼어 이정에게 달아났다. (이정이) 군사를 출동시켜 적을 막아 싸우니, 힐리(가한)이 전진하지 못하고, 병주에 주둔하였다. 태종이 군사를 거느리고 토벌하려고 (장안을) 떠났으며, 다음으로 포주에 도달하니, 힐리(가한)이 병사를 이끌고 돌아갔으며 태종도 군사를 돌려 돌아왔다. (무덕)9년(626년) 7월 힐리(가한)이 스스로 10여만 기병을 거느리고 무공(현)으로 진격해 들어오자 서울(경사:장안)이 계엄에 들어갔다. 기묘일 고릉까지 진격해 들어오자 행군총관 좌무후대장군 울지경덕이 경양에서 싸워 대파하였으며 사근 아사덕오몰철을 잡고 천여명의 목을 베었다. 계미일, 힐리(가한)이 그 심복 집실사력을 보내 입조케하고 조정을 엿보면서 스스로 허장성세를 부리며 말하였다.「두 가한이 병사 백만을 거느리고 지금 이미 (이곳에) 도착하였다.」태종이 일러 말하기를「나와 돌궐은 얼굴을 맞대고 화친하였는데, 너희가 바로 배반을 하였으니 나는 실로 부끄러워할 것이 없다. 또 의로운 군대가 서울로 들어올 초기에 너희 부자가 모두 친히 우리를 따라와서 너희에게 옥과 비단을 준 것이 전후로 지극히 많은데, 어떤 까닭으로 갑자기 군대가 우리 서울근처의 현에 들어왔는가? 너희가 비록 돌궐이지만, 또한 모름지기 사람의 마음을 갖고 있는데 무슨 까닭으로 큰 은혜를 다 잊고 스스로 강성함을 자랑하는가. 내가 마땅히 먼저 너를 죽일 것이다. 」(집실)사력이 두려워하여 살려달라고 빌었으나 태종이 불허하고 문하성에 잡아두었다. |
八年七月,頡利集兵十餘萬,大掠朔州,又襲將軍張瑾于太原,瑾全軍並沒,脫身奔於李靖。出師拒戰,頡利不得進,屯于并州。太宗帥師討之,次蒲州,頡利引兵而去,太宗旋師。九年七月,頡利自率十餘萬騎進寇武功,京師戒嚴。己卯,進寇高陵,行軍總管左武候大將軍尉遲敬德與之戰于涇陽,大破之,獲俟斤阿史德烏沒啜,斬首千餘級。癸未,頡利遣其腹心執失思力入朝為覘,自張形勢云:「二可汗總兵百萬,今已至矣。」太宗謂之曰:「我與突厥面自和親,汝則背之,我實無愧。又義軍入京之初,爾父子並親從我,賜汝玉帛,前後極多,何故輒將兵入我畿縣?爾雖突厥,亦須頗有人心,何故全忘大恩,自誇強盛。我當先戮爾矣。」思力懼而請命,太宗不許,縶之於門下省。 |
태종과 시중 고사렴、중서령 방현령、장군 주범치 및 6명의 기병이 위수 가에 행차하여 힐리(가한)과 강을 사이에 두고 말을 하였는데, 약속을 저버린 것을 책망하자 그 추장들이 크게 놀라, 모두 말에서 내려 죽 늘어서 함께 절하였다. 잠시 후 여러 군대들이 계속 도착하고, 힐리(가한)이 (당나라)군용이 성대함을 보았으며, 또 (집실)사력이 곧 구속되었음을 알고서 크게 두려워하였다. 태종 홀로 힐리(가한)과 강 양쪽에서 말을 주고받자, 예하 여러부대는 물러나 진을 쳤다. 소우가 (태종이) 적을 가볍게 여기자 말 앞에서 굳게 간하니, 태종이 말하였다. 「내가 생각하였던 것은 경이 알고 있는 것과 다르다. 돌궐이 그 경내를 다 털어 바로 위수가에 들어 온 것은 분명 우리 국가가 처음에 안으로 어지러움이 있었다는 것을 듣고, 짐 또한 새로 등극한지 얼마되지 않아, 장차 감히 (자신들을)막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짐이 만약 문을 걸어 닫았다면, 오랑캐들은 반드시 크게 약탈할 것이니, 기세의 강하고 약함은 지금 한번의 행동을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있다. 짐은 이런 까닭에 홀로 나온 것이며, (돌궐군을)가벼운 것처럼 보이려고 한 것이고, 또 군대의 위용을 잘 갖추어 반드시 싸우려고 한다는 것을 알리려고 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일이 뜻밖으로 발생하여, (돌궐이) 그 본래의 의도를 어그러뜨릴수 있는데, 오랑캐들이 이미 깊이 침입하였으니, 이치상 마땅히 스스로 두려워 할 것이다. (그들과) 싸우면 반드시 이길 것이고, 화친하면 반드시 튼튼할 것이니, 흉노(돌궐)를 제압하여 복종시키는 것은 이로부터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이날 힐리(가한)이 화친을 청하여, 조서로 허락하고, 황제는 그날 즉시 환궁하였다. 을유일, 또 성 서쪽에 행차하여, 백마를 잡아 힐리(가한)과 함께 편교 위에서 동맹을 맺으니(위수지맹: 626년 7월) 힐리(가한)이 병사를 이끌고 물러났다. 소우가 나아가 말하였다. 「애초에 힐리(가한)이 화친을 하려고 하지 않자, 계략을 세우는 신하나 맹장들이 대다수 전쟁을 청하였는데 폐하가 받아들이지 않아 신은 의아했습니다. (그러나) 오랑캐가 스스로 물러났으니 그(런) 묘책이 어디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황상이 말하였다. 「내가 돌궐의 병사를 보니 비록 많으나 정돈되지 않았고, 군신들의 생각은 오직 재물의 이익만 본다. 가한이 홀로 위수 서쪽에 있었는데, 추장들은 모두 와서 나를 찾아뵈니 내가 그로 인하여 그 무리를 습격하면 그 기세는 썩은 나무를 꺾듯이 쉬울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이미 (장손)무기와 이정에게 영을 내려 유주에 복병을 설치한 뒤 기다리라고 하였는데 오랑캐가 만약 되돌아 달아난다면, 복병이 그 앞에서 막고, 대군이 그 후미를 뒤쫓아, 뒤집어 엎어버리기는 손바닥 뒤집기와 같았다. 내가 싸우지 않은 것이, 즉위한지 얼마 되지않아 나라를 위하는 도리이고 안정에 힘써야 하기 때문이며, 한번 오랑캐와 싸우면 사상자가 있기 때문이다. 또 오랑캐가 한번 패하면 혹 당연히 두려워하여 덕을 닦으면서도 우리에게 원한을 맺어, 근심이 작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군사를 거두어 싸우지 않고 옥과 비단을 먹이면 탐욕스러운 오랑캐들의 오만방자함이 반드시 이로부터 시작될 것이니 점점 파멸하는 것이 여기에 있다.‘장차 얻으려 한다면 반드시 주어야 한다’함은 이를 이르는 것이다.」9월, 힐리(가한)이 말 3천필, 양 만마리를 바쳤으나 황상이 받지 않고, 조서로 힐리가 잡아간 중국 호구(호적)로 되어 있는 자를 다 돌아오게 하도록 명하였다. |
太宗與侍中高士廉、中書令房玄齡、將軍周範馳六騎幸渭水之上,與頡利隔津而語,責以負約,其酋帥大驚,皆下馬羅拜。俄而眾軍繼至,頡利見軍容大盛,又知思力就拘,由是大懼。太宗獨與頡利臨水交言,麾諸軍却而陣焉。蕭瑀以輕敵固諫于馬前,上曰:「吾已籌之,非卿所知也。突厥所以掃其境內,直入渭濱,應是聞我國家初有內難,朕又新登九五,將謂不敢拒之。朕若閉門,虜必大掠,強弱之勢,在今一舉。朕故獨出,以示輕之;又耀軍容,使知必戰。事出不意,乖其本圖,虜入既深,理當自懼。與戰則必克,與和則必固,制服匈奴,自茲始矣。」是日,頡利請和,詔許焉,車駕即日還宮。乙酉,又幸城西,刑白馬,與頡利同盟于便橋之上,頡利引兵而退。蕭瑀進曰:「初,頡利之未和也,謀臣猛將多請戰,而陛下不納,臣以為疑。既而虜自退,其策安在?」上曰:「我觀突厥之兵,雖眾而不整,君臣之計,唯財利是視。可汗獨在水西,酋帥皆來謁我,我因而襲擊其眾,勢同拉朽。然我已令無忌、李靖設伏於幽州以待之,虜若奔還,伏兵邀其前,大軍躡其後,覆之如反掌矣。我所以不戰者,即位日淺,為國之道,安靜為務,一與虜戰,必有死傷;又匈虜一敗,或當懼而修德,結怨於我,為患不細。我今卷甲韜戈,啗以玉帛,頑虜驕恣,必自此始,破亡之漸,其在茲乎!將欲取之,必固與之,此之謂也。」九月,頡利獻馬三千匹,羊萬口,上不受,詔頡利所掠中國戶口者悉令歸之。 |
정관원년(627년),음산 이북의 설연타、회흘、발야고 등 여타 부족들이 모두 연달아 (돌궐을) 배반하여 그(돌궐)의 욜곡설을 공격하여 패주시켰다. 힐리(가한)이 돌리(가한)을 보내 토벌하였으나 군사가 또 패하여, (돌리가한이) 경무장한 기병으로 달아나 돌아왔다. 힐리(가한)이 분노하여, 10여일을 구속하니 돌리(가한)이 이로 인하여 원망하여 속으로 배신하고자 하였다. 그 나라에 큰 눈이 내려 평지에 수척이나 쌓이니 양과 말이 모두 죽고 사람들이 크게 굶주렸다. 이에 우리(당나라) 군대가 그 틈을 타고 출전할까봐 두려워하여 병사를 이끌고 삭주에 들어와 여럿이 모여 사냥한다고 떠벌렸으나, 실은 (당나라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측근 신하들이 모두 말하였다. 「이적(夷狄)은 믿을 수 없으니 먼저 스스로 의심을 품고, 동맹을 맺은 다음에도 군사를 끌고, 홀연히 (우리)강역의 경계를 넘어 옵니다. 그(들의) 편안함을 위해 여러번 약속을 배반하였기 때문에 토벌해야 합니다.」태종이 말하였다. 「필부의 한마디도 모름지기 신용을 지켜야 하는데 어찌 하물려 천하의 주인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어찌 친하다고 하여 (그들과) 화친을 하였는데 그의 재난을 이용해 위급함을 틈 타 (그들을) 없앨수 있겠는가? 여러분들이 그렇게 하자고 해도 짐은 그렇게 할 수 없다. 돌궐부락이 반란을 일으켜 다 없어지고, 모든 가축이 다 죽어도 짐은 끝까지 신의를 보일 것이니, 망령되게 토벌하지 않고, 그 무례를 기다렸다가 사로잡아 손에 넣을 뿐이다.」 |
貞觀元年,陰山已北薛延陀、迴紇、拔也古等餘部皆相率背叛,擊走其欲谷設。頡利遣突利討之,師又敗績,輕騎奔還。頡利怒,拘之十餘日,突利由是怨望,內欲背之。其國大雪,平地數尺,羊馬皆死,人大飢,乃懼我師出乘其弊,引兵入朔州,揚言會獵,實設備焉。侍臣咸曰:「夷狄無信,先自猜疑,盟後將兵,忽踐疆境。可乘其便,數以背約,因而討之。」太宗曰:「匹夫一言,尚須存信,何況天下主乎!豈有親與之和,利其災禍而乘危迫險以滅之耶?諸公為可,朕不為也。縱突厥部落叛盡,六畜皆死,朕終示以信,不妄討之,待其無禮,方擒取耳。」 |
(정관)2년(628년) 돌리(가한)이 사신을 보내 힐리(가한)과 틈이 생겼다고 말하며, (힐리기한을) 칠 것을 주청하니, 조서로 진무통으로 하여금 병주의 군대로 상황에 따라 대응하라고 명하였다. (정관)3년(629년) 설연타가 스스로 고비사막 북쪽에서 가한을 칭하고, 사신을 보내와 지방물건을 바쳤다. 힐리(가한)이 처음 신하를 칭하며 공주와 결혼해 사위의 예를 익힐 것을 청하였다. 힐리(가한)이 매번 여러 호인(胡人)들에게 (정사를) 위임하여, (자신의) 족속들과 서먹서먹하게 되자, 호인들은 탐관오리가 되고 성격이 대부분 변덕스러워, 법령이 날로 번잡해졌는데, 군대가 해마다 출동하자, 나라사람들이 근심하여, 여러부락이 딴 마음을 품었다. 해마다 큰 눈이 내려 모든 가축이 대부분 죽고, 나라 안은 큰 굶주림에 들었으나 힐리(가한)은 쓸만큼 주지않고, 다시 거듭 여러 부에서 세금을 걷어, 이런 이유로 부하들이 명령을 감당하지 못하고 안팎으로 대부분 반란을 일으켰다. 황상이 (그들이) 화친을 청하면서, 뒤에 다시 양사도를 돕자, 조서로 병부상서 이정、대주도독 장공근은 정양도로 나가고,병주도독 이적、우무위장군 구행공은 통한도로 나가고,좌무위대장군 시소는 금하도로 나가고,위효절은 긍안도로 나가고,설만철은 창무도로 나가되,모두 (이)정의 통제를 받아 (힐리가한을) 토벌하도록 명하였다. 12월, 돌리가한과 욱사설、음내특근 등이 모두 소속 부락을 거느리고 도망쳐왔다. |
二年,突利遣使奏言與頡利有隙,奏請擊之,詔秦武通以并州兵馬隨便應接。三年,薛延陀自稱可汗于漠北,遣使來貢方物。頡利始稱臣,尚公主,請修壻禮。頡利每委任諸胡,疏遠族類,胡人貪冒,性多翻覆,以故法令滋彰,兵革歲動,國人患之,諸部攜貳。頻年大雪,六畜多死,國中大餒,頡利用度不給,復重斂諸部,由是下不堪命,內外多叛之。上以其請和,後復援梁師都,詔兵部尚書李靖、代州都督張公謹出定襄道,并州都督李勣、右武衞將軍丘行恭出通漢道,左武衞大將軍柴紹出金河道,衞孝節出恆安道,薛萬徹出暢武道,並受靖節度以討之。十二月,突利可汗及郁射設、蔭奈特勤等並帥所部來奔。 |
(정관)4년(630년) 정월, 이정이 진군하여 악양령에 주둔했다가, 밤에 정양을 습격하자, 힐리(가한)이 놀라 소요를 일으켜서 아(궁정)를 적구(磧口)로 옮겼으며, 호인 추장 강소밀 등이 마침내 수나라 소후와 양정도를 데리고 투항하였다. 2월, 힐리(가한)이 계책이 막혀 철산에 숨었는데 , 병력이 아직 수만이었으나 (심복) 집실사력으로 하여금 내조케하여 사죄하고 나라를 들어 항복하겠다고 청하였다. 태종이 홍려경 당검、장군 안수인을 보내 절을 가지고 가서 안심시키니, 힐리(가한)이 조금 안정되었다. (이)정이 그 틈을 타서 습격하여 대파하고 마침내 그 나라를 멸망시켰다. 힐리(가한)은 천리마를 타고, 홀로 사촌형제의 아들 사발라 부락으로 달아났다. 3월 행군부총관 장보상이 무리를 거느리고 갑자기 사발라 (군)영에 도착해서, 힐리(가한)을 생포하여 서울(경사: 장안)로 보냈다. 태종이 일러 말하였다.「무릇 나에게 공이 있는 자는 반드시 잊지 않지만, 나에게 악하게 한 자는 끝까지 기억하지 않는다. 너의 죄상을 논하자면 실로 작지 않으나 일찍이 위수에서 얼굴을 맞대고 맹약을 맺었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아직 심한 범죄가 없었기 때문에 이를 참작하여 너를 문책하지 않을 뿐이다.」 이에 조서로 그의 가족을 돌려주고, 태복(시)에 묵게하며 지방관에게 주던 봉급을 지급하도록 명하였다. 힐리(가한)은 울적하고 바라던 일을 뜻대로 이루지 못하자 그 가족과 함께 혹은 마주보며 슬프게 노래하고 울었다. 황제가 (힐리가한이) 야위어가는 것을 보고, 괵주자사를 제수했는데 그 땅에는 사슴이 많아, 그 사냥을 마음대로 하게 하여 여러 가지 본래의 습성을 잃지않게 하였다. 힐리(가한)이 사양하며 가기를 원치않자, 마침내 우위대장군을 제수하고 밭과 집을 주었다. (정관)5년(631년) 태종이 측근 신하들에게 일러 말하였다. 「하늘의 이치는 착한 이에게 복을 주고 음탕한 자에게 화를 주는 것인데 일도 영향을 받는다. 옛날 계민(가한)이 나라가 망하여 수나라로 도망해 왔는데 (수)문제는 곡식과 비단을 아끼지 않았고, 관리와 백성을 크게 일으키며 위(衞)를 만들어 안치해주자 비로소 (계민가한이) 존립할 수 있었다. 이후 강성해지면 마땅히 자자손손 그 은덕에 보답하겠다고 마음속으로 깊이 생각하여야 했다. (그러나) 겨우 시필(가한)에 이르러 (시필가한은 계민가한의 아들임), 즉시 병력을 일으켜 (수)양제를 안문에서 포위해서 수나라가 장차 난에 이르게 하고 또 강성함을 믿고 깊이 침입하여 마침내 앞서 그 가족과 나라를 안전하게 세워 준 사람 자신과 자손 모두 힐리(가한) 형제에게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힐리가한 역시 계민가한의 아들임, 셋째 아들) 지금 힐리(가한)이 파괴되어 멸망한 것은 어찌 배은망덕의 소치라고 아니할수 있겠느냐!」(정관)8년(634년) (힐리가한이) 죽자, 조서로 그 나라사람으로 하여금 장례를 치르도록 명하고, 그 풍속의 예절에 따라 시체를 파수의 동쪽에서 불태웠다.(그에게) 귀의왕을 추증하였으며 시호를 황(荒)이라고 하였다. 그의 옛 신하 호록달관 토욕혼사가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해 순사(殉死)하였다. |
四年正月,李靖進屯惡陽嶺,夜襲定襄,頡利驚擾,因徙牙於磧口,胡酋康蘇密等遂以隋蕭后及楊政道來降。二月,頡利計窘,竄于鐵山,兵尚數萬,使執失思力入朝謝罪,請舉國內附。太宗遣鴻臚卿唐儉、將軍安修仁持節安撫之,頡利稍自安。靖乘間襲擊,大破之,遂滅其國。頡利乘千里馬,獨騎奔于從姪沙鉢羅部落。三月,行軍副總管張寶相率眾奄至沙鉢羅營,生擒頡利送于京師。太宗謂曰:「凡有功於我者,必不能忘,有惡於我者,終亦不記。論爾之罪狀,誠為不小,但自渭水曾面為盟,從此以來,未有深犯,所以錄此,不相責耳。」仍詔還其家口,館於太僕,廩食之。頡利鬱鬱不得志,與其家人或相對悲歌而泣。帝見羸憊,授虢州刺史,以彼土多鹿,縱其畋獵,庶不失物性。頡利辭不願往,遂授右衞大將軍,賜以田宅。五年,太宗謂侍臣曰:「天道福善禍淫,事猶影響。昔啟民亡國奔隋,文帝不吝粟帛,大興士眾,營衞安置,乃得存立,既而強盛,當須子子孫孫思念報德。纔至始畢,即起兵圍煬帝於雁門,及隋國將亂,又恃強深入,遂使昔安立其家國者,身及子孫,並為頡利兄弟之所屠戮。今頡利破亡,豈非背恩忘義所致也!」八年卒,詔其國人葬之,從其俗禮,焚屍於灞水之東,贈歸義王,諡曰荒。其舊臣胡祿達官吐谷渾邪自刎以殉。 |
(토욕)혼사라는 자는 힐리(가한)의 어머니, 파시씨의 가신이었으며, 힐리(가한)이 처음 태어나자 (토욕)혼사에게 주어 (키웠는데) 이에 이르자 애통해하며 죽었다. 태종이 듣고 기이하게 여겨 중랑장을 추증하고 이에 힐리(가한) 묘의 옆에 묻어주며 비문을 세워 기록하게 했다. |
渾邪者,頡利之母婆施氏之媵臣也,頡利初誕,以付渾邪,至是哀慟而死。太宗聞而異之,贈中郎將,仍葬於頡利墓側,樹碑以紀之。 |
4. 돌리가한, 십발필이라는 자는 시필가한의 정통을 이어받은 아들이며, 힐리(가한)의 조카이다. 수나라 대업 연간에 돌리(가한)이 나이를 먹자, 시필(가한)이 그 동쪽 아(牙:조정)의 병력을 거느리도록 보내고 니보설이라고 불렀다. 수나라 회남공주가 북쪽으로 (피난)오자 마침내 처로 삼았다. 힐리(가한)이 뒤를 이어 즉위하자 돌리가한으로 삼으니 아(牙:조정)를 유주 북쪽에 설치했다. 돌리(가한)은 동쪽에 치우쳐 있으면서, 해와 습 등 수십 부족을 관할하였는데 세금을 걷는데 법도가 없어 여러 부족이 대다수 원망하였다. 정관 초기에 해와 습 등이 모두 와서 (당나라에) 귀부하니 힐리(가한)이 그 무리를 잃은데 분노하여, 북으로 (설)연타를 정벌하라고 보냈으나 또 군대를 잃어 마침내 매질을 하였다. |
突利可汗什鉢苾者,始畢可汗之嫡子,頡利之姪也。隋大業中,突利年數歲,始畢遣領其東牙之兵,號為泥步設。隋淮南公主之北也,遂妻之。頡利嗣位,以為突利可汗,牙直幽州之北。突利在東偏,管奚、霫等數十部,徵稅無度,諸部多怨之。貞觀初,奚、霫等並來歸附,頡利怒其失眾,遣北征延陀,又喪師旅,遂囚而撻焉。 |
돌리(가한)은 일찍이 무덕시기(618~626)부터, 깊이 스스로 태종과 맺고자 했고, 태종 역시 은의로 달래니 형제를 맺어, 동맹을 맺고 돌아갔다. 뒤에 힐리(가한)에게 정란(政亂)이 일어나자 급히 돌리(가한)에게 병사를 징발하였으나 (돌리가한이) 거절하고 주지않자 이런 이유로 틈이 생겼다. 정관3년(629년), (돌리가한이) 표를 올리고 입조할 것을 청하니 (황)상이 측근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짐이 전 시대에 나라를 다스린 자들을 보건데 마음을 써서 만백성을 걱정하면 나라의 수명이 오래 갔지만, 사람을 부려 자신을 받들게 하면 사직이 반드시 망하였다. 지금 북번(돌궐) 백성들이 (나라를) 잃고 망한 것은 진실로 그 군주가 군주 노릇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돌리(가한)으로 하여금 진정 입조를 원하게 이른 것도 만약 곤궁하지 않았다면 어찌 이에 이를 수 있었겠는가? 이적(夷狄)이 약하면 변경에 걱정이 없게 되므로, 역시 심히 위로가 되지만 그 망하는 것을 보면 또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는데, 왜냐하면 자신도 미치지 못할까 우려되고 또 너희에게 화란이 생길까 두렵기 때문이다. 짐이 지금 보아도 멀리 볼수 없고 들어도 멀리 들을 수 없어 오직 공들의 충의와 원조에 의지하고자 하니 게으르게 굴지 말고 다투어 논의를 하도록 하라」돌리(가한)이 얼마 있지 않아 힐리(가한)에게 공격을 받아 사신을 보내 와서 군사를 구걸하자 태종이 측근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짐과 돌리(가한)이 형제를 맺어 구하지 않을 수 없다.」두여회가 나아가 말하였다. 「이적(夷狄)은 신용이 없음은 그 유래가 오래 되었으니 나라가 비록 약속을 지킨다해도 저들은 반드시 배신할 것입니다. (이는) 어려움을 이용해 취하는 것만 못합니다. (이것은) 이른바 어려움을 이용해 취하고 망하면 업신여기는 방법입니다.」태종은 그렇다고 여겼다. 그래서 장군 주범을 태원에 주둔케함으로써 나아가 취하게 하자, 돌리(가한)이 그 무리를 인솔하고 도망오니 태종이 심히 후하게 예우하여 여러번 황제의 음식을 주었다. (정관)4년(630년) (돌리가한에게) 우위대장군을 제수하고, 북평군왕에 봉하며 식읍 7백호에 봉하고 그 휘하 병사들과 백성들을 순(주)과 우(주) 등 주에 배치한 뒤 부락을 거느리고 번(돌궐)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태종이 말하였다. 「옛날 너의 할아버지 계민(가한)이 병마를 잃고 홀로 수나라에 투신하였는데, 수나라에서는 (계민가한을) 굳건히 세워, 마침내 강성하게 되었는데는 수나라의 은혜를 입고도 일찍이 그 덕에 보답한 적이 없었다. 너의 아비 시필가한에 이르러서는 도리어 수나라의 걱정거리가 되었고, 너 이후로부터는 중국을 침범하지 않은 해가 없었다. 하늘은 실로 탐욕스러운 사람에게 벌을 내리기 때문에 재난과 이변이 크게 일어나 너희 백성들이 흩어지고 어지럽게되어 거의 죽은 것이다. 일이 이미 터져 곤궁하게 된 이후에 와서야 투항하니 내가 너를 가한으로 세워줄 수 없는 것은 바로 계민 가한의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이전의 법을 바꾸어 중국을 오래 안정되게 하고 너희 종족도 영원히 한결같게 만들기 위해 너에게 도독을 제수한다. 마땅히 우리나라의 법에 의거해 관할하는 부락을 바로잡을 것이고 망령되게 침략하지 못하게 할 것이니 만약 어긴다면 마땅히 중죄를 받을 것이다.」(정관) 5년(631년) 입조하라고 부르자 병주에 이르러 도중에 병으로 죽었는데 나이 29세였다. 태종이 애도하고 조서로 중서시랑 잠문본으로 하여금 그 비문을 쓰도록 하며 아들 하라골에게 (지위를) 잇도록 명하였다. |
突利初自武德時,深自結於太宗,太宗亦以恩義撫之,結為兄弟,與盟而去。後頡利政亂,驟徵兵於突利,拒之不與,由是有隙。貞觀三年,表請入朝,上謂侍臣曰:「朕觀前代為國者,勞心以憂萬姓,世祚乃長;役人以奉其身,社稷必滅。今北蕃百姓喪亡,誠由其君不君之故也。至使突利情願入朝,若非困迫,何能至此?夷狄弱則邊境無虞,亦甚為慰,然見其顛狽,又不能不懼,所以然者,慮己有不逮,恐禍變亦爾。朕今視不能遠見,聽不能遠聞,唯藉公等盡忠匡弼,無得惰於諫諍也。」突利尋為頡利所攻,遣使來乞師,太宗謂近臣曰:「朕與突利結為兄弟,不可以不救。」杜如晦進曰:「夷狄無信,其來自久,國家雖為守約,彼必背之。不若因其亂而取之,所謂取亂侮亡之道。」太宗然之。因令將軍周範屯太原以圖進取,突利乃率其眾來奔,太宗禮之甚厚,頻賜以御膳。四年,授右衞大將軍,封北平郡王,食邑封七百戶,以其下兵眾置順、祐等州,帥部落還蕃。太宗謂曰:「昔爾祖啟民亡失兵馬,一身投隋,隋家竪立,遂至強盛,荷隋之恩,未嘗報德。至爾父始畢反為隋家之患,自爾已後,無歲不侵擾中國。天實禍淫,大降災變,爾眾散亂,死亡略盡。既事窮後,乃來投我,我所以不立爾為可汗者,正為啟民前事故也。改變前法,欲中國久安,爾宗族永固,是以授爾都督。當須依我國法,整齊所部,不得妄相侵掠,如有所違,當獲重罪。」五年,徵入朝,至并州,道病卒,年二十九。太宗為之舉哀,詔中書侍郎岑文本為其碑文,子賀邏鶻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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