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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8 |
태종 문무대성대광효황제의 이름은 세민이며,고조의 둘째 아들이다。어머니는 태목순성황후 두씨이다. 수나라 개황 18년(598년) 12월 무오일,무공의 별관에서 태어났다. |
太宗文武大聖大廣孝皇帝諱世民,高祖第二子也。母曰太穆順聖皇后竇氏。隋開皇十八年十二月戊午,生於武功之別館。 |
619 |
(무덕)2년(619년) 11월,태종이 무리를 거느리고 용문관으로 달려가,얼음을 밟고 건너,나아가 백벽에 주둔하여,적장 송금강과 서로 대치하였다. 얼마 안 되어 영안왕 효기가 하현에서 패해서,우균、독고회은、당검 모두 적장 심상、울지경덕에게 붙잡혀,장차 회주로 돌려보내지려고 하였다. 태종이 은개산、진숙보를 보내 미량천에서 기다려,대파하니,(심)상 등은 겨우 몸만 빠졌으나,다 그 무리에게 포로가 되어,도로 백벽으로 돌아갔다. 이에 모든 장수들이 다 싸움을 청하니,태종이 말하였다.:「(송)금강이 멀리 떨어진 곳에 군대를 보내,우리땅에 깊숙이 들어와,정예병과 날랜 장수가,모두 이곳에 있다. (유)무주는 태원을 근거로 삼았으나,오로지 (송)금강에 기대어 지켰다. 장병은 비록 많으나,내실은 공허하니,뜻은 속전에 있다. 내가 병영을 굳게 하여 날카로움을 쌓으면,(그들은) 양식이 다 없어지고 꾀가 궁해져,스스로 마땅히 달아나야 할 것이다.」 |
二年十一月,太宗率眾趣龍門關,履冰而渡之,進屯柏壁,與賊將宋金剛相持。尋而永安王孝基敗於夏縣,于筠、獨孤懷恩、唐儉並為賊將尋相、尉遲敬德所執,將還澮州。太宗遣殷開山、秦叔寶邀之於美良川,大破之,相等僅以身免,悉虜其眾,復歸柏壁。於是諸將咸請戰,太宗曰:「金剛懸軍千里,深入吾地,精兵驍將,皆在於此。武周據太原,專倚金剛以為捍。士卒雖眾,內實空虛,意在速戰。我堅營蓄銳以挫其鋒,糧盡計窮,自當遁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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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0 |
(무덕)3년(620년) 2월,(송)금강이 마침내 (그들의) 무리가 굶주리자 달아나니,태종이 추격하여 개주에 이르렀다. (송)금강이 진을,남북 7리에 (걸쳐) 펼쳐,관군을 막았다. 태종이 총관 이세적、정금、진숙보를 보내 그 북쪽을 담당케 하고,적장손、진무통을 보내 그 남쪽을 담당케 하였다. 모든 군이 싸우다 조금 물러나며 적의 틈을 엿보았다. 태종이 정예기병을 거느리고 쳐,그 진의 뒤를 찌르니,적의 무리가 대패하여,추가로 수십리를 달아났다. (울지)경덕과 (심)상이 무리 8천을 거느리고 투항하니,또다시 (울지)경덕으로 하여금 통솔하도록 명하고,여러 군영과 서로 참여하도록 하였다. 굴돌통이 변란을 일으킬까 두려워하여, 재빨리 알렸다. 태종이 말하였다:「옛날 소왕 추는 거짓 없는 참된 마음은 사람 뱃속에 둔다고 하였는데,모두 목숨을 다 할수 있는 것이다. 지금 (울지)경덕에게 위임하였는데,또 어찌 의심하겠는가.」이에 유무주가 돌궐로 달아나니,병(주)와 분(주)의 옛 땅이 다 수복되었다. 조서로 태종에게 익주도행대 상서령의 벼슬을 덧붙여 주었다. |
(무덕)三年二月,金剛竟以眾餒而遁,太宗追之至介州。金剛列陣,南北七里,以拒官軍。太宗遣總管李世勣、程金、秦叔寶當其北,翟長孫、秦武通當其南。諸軍戰小卻,為賊所乘。太宗率精騎擊之,衝其陣後,賊眾大敗,追奔數十里。敬德、相率眾八千來降,還令敬德督之,與軍營相參。屈突通懼其為變,驟以為請。太宗曰:「昔蕭王推赤心置人腹中,並能畢命,今委任敬德,又何疑也。」於是劉武周奔於突厥,并、汾悉復舊地。詔就軍加拜益州道行臺尚書令。 |
624 |
(무덕)7년 가을,돌궐의 힐리、돌리 두 가한이 원주로부터 쳐들어와,관중을 침범하여 소요를 일으켰다. (어떤 사람이)고조에게 설득하여 말하였다.:「이는 정부의 창고와 자녀가 서울에 있기 때문에 돌궐이 온 것이니,만약 장안을 소각하여 도읍이 아니라면,오랑캐들의 침구는 저절로 그칠 것입니다.」고조는 이에 중서시랑 우문사급을 보내 산 남쪽에 거주할 만한 땅을 살펴보게 하고,즉시 도읍을 옮기려고 하였다. 소우 등이 모두 옳지 않다고 (생각)하였으나,끝내 감히 (고조의) 체면을 침범하여 바른 말을 할 수 없었다. 태종이 홀로 말하기를:「곽거병은,한나라 조정의 (일개) 장수일뿐이나,오히려 흉노를 멸할 뜻을 가졌습니다. 신은 제후왕(藩維:번유)의 자리를 욕되게 하고 있으나,오히려 오랑캐의 흙먼지가 쉬지 않아,마침내 폐하께서 천도를 하려는 논의를 명하시니,이 신의 책임입니다. 다행히 한번 거듭 신의 미약한 효력를 들어 주신다면 ,저 힐리(가한)을 잡겠습니다. 만일 2년 안에 그 목을 잡아매지 못한다면,천천히 도읍을 옮겨 건설하는 정책에 대해서,신은 마땅히 감히 두 번 다시 말하지 않겠습니다.」고조가 분노하여,이에 태종을 보내 30여 기병을 거느리고 순시하게 하였다. 돌아온 날,굳게 도읍 을 옮기는 것은 반드시 안된다고 아뢰니,고조가 마침내 그쳤다. |
七年秋,突厥頡利、突利二可汗自原州入寇,侵擾關中。有說高祖云:「祗為府藏子女在京師,故突厥來,若燒卻長安而不都,則胡寇自止。」高祖乃遣中書侍郎宇文士及行山南可居之地,即欲移都。蕭瑀等皆以為非,然終不敢犯顏正諫。太宗獨曰:「霍去病,漢廷之將帥耳,猶且志滅匈奴。臣忝備藩維,尚使胡塵不息,遂令陛下議欲遷都,此臣之責也。幸乞聽臣一申微効,取彼頡利。若一兩年間不係其頸,徐建移都之策,臣當不敢復言。」高祖怒,仍遣太宗將三十餘騎行剗。還日,固奏必不可移都,高祖遂止。 |
626 |
(무덕)9년,황태자 건성、제왕 원길이 태종을 해치려고 모의하였다. 6월 4일,태종이 장손무기、울지경덕、방현령、두여회、우문사급、고사렴、후군집、정지절、진숙보、단지현、굴돌통、장사귀 등을 거느리고 현무문에서 주살하였다. 갑자일,황태자가 되어,온갖 정사를 모두 단호히 결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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九年,皇太子建成、齊王元吉謀害太宗。六月四日,太宗率長孫無忌、尉遲敬德、房玄齡、杜如晦、宇文士及、高士廉、侯君集、程知節、秦叔寶、段志玄、屈突通、張士貴等於玄武門誅之。甲子,立為皇太子,庶政皆斷決。 |
8월 계해일,고조가 황태자에게 전위(傳位)하니,태종이 즉시 동궁 현덕전에서 즉위하였다. 사공 및 위국공 배적이 남쪽 교외에서 섶을 불살라서 하늘에 고하는 제사를 지내며 알렸다.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렸다. 갑술일,돌궐의 힐리、돌리(가한)이 경주를 침구하였다. 을해일,돌궐이 진격하여 무공을 침구하니,서울에 계엄령을 내렸다. 병자일,비(妃) 장손씨를 황후로 삼았다. 기묘일,돌궐이 고릉을 약탈하였다. 신사일,행군총관 울지경덕과 돌궐이 경양에서 싸워,대파하고,목 천여급을 베었다. 계미일,돌궐의 힐리(가한)이 위수 편교의 북쪽에 도착하여,추장 장수 집실사력을 보내 조정에 들어와 엿보게 하면서,스스로 허장성세를 부리니,태종이 가두라고 명하였다. 친히 현무문을 나가,6명의 기병을 데리고 달려 위수 가에 행차하여,힐리(가한)과 강나루를 사이에 두고 말하며,약속 깬 것을 질책하였다. 잠시 후 많은 군대가 계속 도착하니,힐리(가한)이 군대의 위용이 이미 성대한 것을 보고,또 (집실)사력이 바로 구속되었음을 알고는,크게 두려워하여,마침내 화친을 청하니,조서로 허락하였다. 그날 바로 환궁하였다. 을유일,또 편교에 행차하니,힐리(가한)이 백마를 잡아 동맹의 단(壇)을 설치하여 (동맹을 맺은 뒤),돌궐은 (군사를) 이끌고 물러났다. |
八月癸亥,高祖傳位於皇太子,太宗即位於東宮顯德殿。遣司空、魏國公裴寂柴告于南郊。大赦天下。甲戌,突厥頡利、突利寇涇州。乙亥,突厥進寇武功,京師戒嚴。丙子,立妃長孫氏為皇后。己卯,突厥寇高陵。辛巳,行軍總管尉遲敬德與突厥戰於涇陽,大破之,斬首千餘級。癸未,突厥頡利至于渭水便橋之北,遣其酋帥執失思力入朝為覘,自張形勢,太宗命囚之。親出玄武門,馳六騎幸渭水上,與頡利隔津而語,責以負約。俄而眾軍繼至,頡利見軍容既盛,又知思力就拘,由是大懼,遂請和,詔許焉。即日還宮。乙酉,又幸便橋,頡利刑白馬設盟,突厥引退。 |
9월 병술일,힐리(가한)이 말 3천필、양 1만구를 바쳤으나,황제가 받지않고,힐리(가한)에게 약탈한 중국 호적인 사람을 돌려보내도록 명하였다. |
九月丙戌,頡利獻馬三千匹、羊萬口,帝不受,令頡利歸所掠中國戶口。 |
이 해에,신라、구자、돌궐、고려、백제、당항 모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
是歲,新羅、龜茲、突厥、高麗、百濟、党項并遣使朝貢。 |
628 |
정관2년(628년) 2월 병술일,말갈이 내속하였다. |
貞觀二年二月丙戌,靺鞨內屬。 |
여름 4월 기묘일,조서로 해골이 노출된 것은,그곳에 무덤을 만들어 묻으라고 명령하였다. 병신일,거란이 내속하였다. |
夏四月己卯,詔骸骨暴露者,令所在埋瘞。丙申,契丹內屬。 |
629 |
(정관)3년 봄 정월 신해일,거란의 우두머리가 내조하였다. |
三年春正月辛亥,契丹渠帥來朝。 |
가을 8월 기사일 초하루,일식이 있었다. 설연타가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
秋八月己巳朔,日有蝕之。薛延陀遣使朝貢。 |
겨울 11월 병오일,서돌궐과 고창이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경신일,병주도독 이세적을 통한도행군총관으로,병부상서 이정을 정양도행군총관으로 삼아,돌궐을 쳤다. |
冬十一月丙午,西突厥、高昌遣使朝貢。庚申,以并州都督李世勣為通漢道行軍總管,兵部尚書李靖為定襄道行軍總管,以擊突厥。 |
12월 무진일,돌리가한이 도망쳐 왔다. |
十二月戊辰,突利可汗來奔。 |
이해에,호부에서 아뢰었다.:장성밖에서 돌아오고 돌궐에서 전후로 내부하고 사이(四夷)에서 움직여 주와 현민이 된 중국인이,남녀 1백2십여만명입니다. |
是歲,戶部奏言:中國人自塞外來歸及突厥前後內附、開四夷為州縣者,男女一百二十餘萬口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