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고구려와 중국의 관계-176(수나라때, 고구려와 수나라의 관계-7, 끝.)

상 상 2013. 11. 11. 17:23

 

차 례

1. 수서 본기

2. 수서 고려전

3. 자치통감(수기2,5,6 등)

4. 수서 본기 분석

5. 수서 고려전 분석

6. 자치통감(수기2, 5,6 등) 분석

7. 고구려와 수나라의 관계

 

 

7. 고구려와 수나라의 관계

1) 수서 본기로 본 고구려와 수나라의 관계

2) 수서 고려전으로 본 고구려와 수나라의 관계

3) 자치통감으로 본 고구려와 수나라의 관계

4) 고구려와 수나라의 관계 결론

 

 

4) 고구려와 수나라의 관계 결론②

 

(3) 수서 고려전 개황17년(597년) 조에 있는 「원(영양왕)이 표문을 올려 사례함과 아울러 상서(祥瑞)를 축하하면서 왕으로 봉하여 줄 것을 청하였다. 고조(수문제)는 원을 우선 책봉하여 왕으로 삼았다.」

 

이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수서 고조 본기 개황18년(598년) 조에 있는조서를 내려 고려왕 고원의 관작을 없애도록 하였다.」는 무엇인가?

 

그 정체를 밝혀보자

 

식민사관의 개들이 주장하는 이른바 근거를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첫 번째 문장은 전형적인 가필(加筆)로써 나중에 거짓을 꾸며넣은 것이다.

두 번째 문장은 고구려 임금의 왕위를 삭탈했다는 말이 아니며,

오히려 첫 번째 문장이 가필(加筆)로써 거짓이라는 증거가 된다.

 

하나씩 살펴보자.

 

첫 번째 문장이 전형적인 가필(加筆)로써 나중에 거짓을 꾸며넣은 것이라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① 영양왕(원)은 왕으로 봉해달라고 청할 이유도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첫번째 문장을 보면 다음과 같다.

「원이 표문을 올려 사례함과 아울러 상서(祥瑞)를 축하하면서 왕으로 봉하여 줄 것을 청하였다. 고조는 원을 우선 책봉하여 왕으로 삼았다.」

 

이 문장의 뒷부분을 보면,

 

원(26대 영양왕)이 왕으로 봉해달라고 청하여 수나라 고조(문제)가 왕으로 책봉하였다고 되어있고

그 때문에 원(영양왕)은 고구려 왕이 된 것처럼 되어 있다.

그리고 이 일은 수서 고려전 개황17년(597년) 조에 있다.

 

그런데,

원(영양왕)은 고구려의 왕위 계승 법도에 따라 590년(년도 근거: 삼국사기)에 이미 왕이 되었는데

597년에 또다시 왕이 되겠다고 수나라에게 왕으로 봉해달라고 청할 이유가 없었다.

 

즉, 원(영양왕)은 그의 아버지 고양이 수서 고조 본기에 있는대로 개황10년(590년) 가을 7월 신해일에 죽었기 때문에

그날 바로 태자로 있었던 원이 왕위에 올랐다.(삼국사기 영양왕 본기)

따라서 597년에 또다시 왕이 되겠다고 수문제에게 왕으로 봉해달라고 청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원이 왕으로 봉하여 줄 것을 청하였다. 고조는 원을 우선 책봉하여 왕으로 삼았다.」는 것은 거짓이며,

그 문장은 전형적인 가필(加筆)로써 나중에 거짓을 꾸며넣은 것이다.

 

이는 고구려왕은 고구려 자체의 왕위 계승 방법에 따라 왕이 되는 것이지

수나라의 책봉에 의해 고구려의 왕이 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고구려 왕이 고구려 자체의 왕위 계승 방법에 따라 왕이 되었다는 증거는 삼국사기에 무수히 나오지만

수서 본기에서도 그 증거가 나온다.

 

수서 본기 개황원년(581년) 12월 임인일 조를 보면

「고려왕 고양이 사신을 보내 조공하여,(고)양에게 대장군、요동군공을 주었다.」고 되어 있다.

 

여기서도 보면 고양은 이미 고려왕 즉, 고구려 왕이다.

고구려 왕의 자격으로 수나라에 사신을 보낸 것이다.

다시말해서 고구려 임금은 수나라와 관계없이 이미 왕이다.

즉, 고구려 임금은 고구려의 자체 왕위계승 방법에 따라 왕이 된 것이지

수나라가 왕으로 책봉해서 왕이 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또한, 수문제는 고양에게 대장군 요동군 공을 주었다고만 되어있고 왕으로 책봉했다고 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나중에 수나라는 고구려 임금을 왕으로 부르고 있는데 이를보면 고구려 왕은 타국의 왕으로서

그 나라에서 정해진 것을 그대로 부른 것이지 수나라에서 봉했기 때문에 왕이라고 부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구체적으로 말해서「(고)양에게 대장군、요동군공을 주었다.」는 것이 개황원년(581년) 12월 임인일인데

수서 고려전 개황 17년(597년) 조를 보면 고구려 임금을 왕이라고 수없이 부르고 있다.

(이것은 가필된「고조는 원을 우선 책봉하여 왕으로 삼았다.」는 문장 이전에 있는 것임)

 

이러한 것을 보았을때 영양왕(원)은 왕으로 봉해달라고 청할 이유도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따라서,

원이 왕으로 봉하여 줄 것을 청하였다. 고조는 원을 우선 책봉하여 왕으로 삼았다.」는 것은 거짓이며,

그 문장은 전형적인 가필(加筆)로써 나중에 거짓을 꾸며넣은 것이다.

 

② 원(영양왕)이 표문을 올려 사례함과 아울러 상서(祥瑞)를 축하했다는 것도 거짓이다.

수서 고조본기 개황원년(581년) 12월 임인일 조에는,

원(영양왕)의 아버지인 고려왕 고양에게 대장군、요동군공을 주었다고 하는데

수서 고려전 개황17년(597년) 조에는 (가필된 것을 제거하면)

영양왕에게는 그보다 못한 상개부 의동삼사를 배(拜:부여)하고 있다.

 

수서 백관지에 의하면 대장군은 정3품이고, 상개부 의동삼사는 그보다 한단계 낮은 종3품이다.

자기에게 아버지보다 높은 품계를 주지는 못할 망정 더 낮은 품계를 주어 자기를 모욕했는데

표문까지 올려 사례 할 사람이 누가 있는가? 이는 명백한 거짓말이다

따라서 원이 표문을 올려 사례했다는 것 역시 거짓이다.

 

또한, 「상서(祥瑞)를 축하했다.」고 하는 것 역시 근거가 없다.

 

이 일이 개황17년(597년)에 있었던 일이라고 수서 고려전에 있지만,

같은 수서 고조본기 개황17년(597년) 조는 물론 수서 고려전 개황17년(597년) 조에도 상서(祥瑞)라고 할만한 일이 없다.

 

다시말해서, 「원이 표문을 올려 사례함과 아울러 상서(祥瑞)를 축하하면서 왕으로 봉하여 줄 것을 청하였다. 고조는 원을 우선 책봉하여 왕으로 삼았다.」는 문장 전체가 거짓이며,

전형적인 가필(加筆)로써 나중에 거짓을 꾸며넣은 것이다.

 

영양왕(원)이 개황18년(598년)에 말갈(靺鞨)의 기병 만여명을 거느리고 요서(遼西)에 침구하고 있다.

이것은 고구려의 왕이 수나라의 책봉을 받지 않았다는 명백한 증거이며 고구려와 수나라의 관계가 원활하지 못함을 말하고 있다.

 

고구려가 수나라의 책봉을 받아 수나라에게 눌려 있었다면 고구려는 수나라를 먼저 공격할 수 없다.

고구려 임금이 수나라에게 왕으로 봉해줄 것을 요청하고 수나라가 왕으로 책봉해 주는 원만한 관계라면

고구려가 수나라를 칠 이유가 없다.

 

고구려가 수나라의 책봉을 받지 않았고, 따라서 수나라에게 눌려 있지 않았기 때문에

고구려가 수나라를 먼저 침구할 수 있었던 것이고,

고구려 임금이 왕을 봉해 달라고 요청하지도 않았고,

수나라가 고구려 임금을 왕으로 책봉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영양왕이 수나라의 요서를 공격하는 것이다.

즉, 고구려와 수나라는 상하관계도 원만한 관계도 아니었기 때문에 고구려가 수나라를 공격하였다는 말이다.

 

두나라 간의 좋지않은 관계가 고구려의 공격 원인일 것이고

급박하지도 않은데 먼저 공격하는 것은 상대방을 만만하게 보았기 때문이다.

즉, 고구려가 수나라를 먼저 공격한 것은 고구려와 수나라가 좋지 않은 관계에 있었고

게다가 고구려가 수나라를 만만하게 보았기 때문이다.

고구려가 만만하게 보는 수나라가 어떻게 고구려의 왕을 책봉해 주는 힘쎈 상국(上國) 될 수 있는가?

 

따라서,

원이 왕으로 봉하여 줄 것을 청하였다. 고조는 원을 우선 책봉하여 왕으로 삼았다.」는 것은 거짓이며,

그 문장은 전형적인 가필(加筆)로써 나중에 거짓을 꾸며넣은 것이라는 말이다.

 

④「원이 표문을 올려 사례함과 아울러 상서(祥瑞)를 축하하면서 왕으로 봉하여 줄 것을 청하였다. 고조는 원을 우선 책봉하여 왕으로 삼았다.」는 문장이 거짓말을 만들어 나중에 끼워넣은 가필이라는 것은

이 문장을 제거하면 앞뒤 문장이 자연스럽게 통하는 것을 봐도 알수 있다

반대로 이 문장이 있음으로써 이 문장과 뒷 문장이 서로 모순된다는 점에서도 알수 있다.

 

윗 문장을 제거하고 그의 앞뒤 문장을 나열해 보면,

「아들 원(元)이 이어서 즉위하니, 고조는 사신으로 하여금 원에게 상개부 의동삼사를 배(拜:부여)하고

요동군공의 작위를 이어받게 하며 옷 한벌을 주었다.」와 「이듬해 원이 말갈의 무리 만여 기병을 거느리고 요서에 침구하였는데 영주총관 위충이 치니 달아났다.」이다.

 

위의 문장을 풀이해 보면,

원(영양왕)이 볼때 자기(영양왕)의 아버지인 고려왕 고양에게 대장군、요동군공을 주었는데

자기(영양왕)에게는 그보다 못한 상개부 의동삼사를 배(拜)하고 있다.

 

자기에게 아버지와 같거나 높은 품계를 주지는 못할 망정 더 낮은 품계를 주어 자기를 모욕한 것이다.

따라서 모욕을 느낀 원(영양왕)이 수나라를 쳤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는다.

 

그러나 위 문장이 있으면서 그 뒤 문장을 나열해 보면,

「원이 표문을 올려 사례함과 아울러 상서(祥瑞)를 축하하면서 왕으로 봉하여 줄 것을 청하였다. 고조는 원을 우선 책봉하여 왕으로 삼았다.」와 「이듬해 원이 말갈의 무리 만여 기병을 거느리고 요서에 침구하였는데 영주총관 위충이 치니 달아났다.」이다.

 

위의 상황을 보면,

원(영양왕)이 사례하고 왕으로 봉해줄 것을 청하니 고조(수문제)가 원을 왕으로 책봉해 주고있다.

그런데 이듬해 원(영양왕)이 요서를 쳤다. 두나라가 원만한 관계인데 고구려가 수나라를 쳤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이것은 위의 문장이 처음에는 없었던 문장이라는 말이며

나중에 거짓말을 만들어 끼워넣다 보니 앞뒤가 모순되는 이상한 글이 되어버린 것이다.

 

따라서,

「원이 왕으로 봉하여 줄 것을 청하였다. 고조는 원을 우선 책봉하여 왕으로 삼았다.」는 것은 거짓이며,

그 문장은 전형적인 가필(加筆)로써 나중에 거짓을 꾸며넣은 것이다.

 

 

⑤「조서를 내려 고려왕 고원의 관작을 없애도록 하였다(下詔黜高麗王高元官爵)」고 하는 것은

고구려가 수나라의 책봉을 받은 나라라는 증거가 아니며 오히려 책봉을 받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왕으로 책봉하였다는 증거로 제시되는

「고조(수문제)는 원을 우선 책봉하여 왕으로 삼았다.(高祖優冊元為王)」을 기준으로 보면,

조서를 내려 고원의 관작을 없애도록 하였다(下詔黜高元官爵)」로 해야 맞다.

만약에 수나라가 원(영양왕)의 왕위를 제멋대로 주거나 빼앗았다면

고려왕(高麗王)이라는 말을 할 필요가 없다.

원(고원)을 왕으로 책봉하였다면 원(고원)의 관작을 없애버리면 그만이라는 말이다.

 

「고려왕 고원의 관작을 없애도록 하였다.」는 것은 그 위에 있는

자기들이 멋대로 배(拜:부여)한‘상개부 의동삼사’라는 관(벼슬)과‘요동군 공’이라는 작위를 없앴다는 것이지

자기들과는 아무 상관없는 고구려의 왕위를 없애도록 한 것이 아니다.

 

다시말해서 고려 왕이라고 말한 것은 관작을 없앤 대상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것은 고구려의 왕위는 수나라로부터 책봉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증거이다.

 

혹시 원을 왕으로 책봉하여 고려왕이라는 말을 쓴 것이라고 우긴다면

수서 본기 개황원년(581년) 12월 임인일 조에 「(고)양에게 대장군、요동군공을 주었다.」고 되어있어,. 왕으로 책봉한 것이 아닌데,

수서 고려전 개황 17년(597년) 조를 보면 고구려 임금을 왕이라고 수없이 부르고 있다.

(이것은 가필된「고조는 원을 우선 책봉하여 왕으로 삼았다.」는 문장 이전에 있는 것임)

따라서 수나라가 고구려 임금을 왕으로 책봉했기 때문에 고려왕이라고 부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또한, 수서 양제본기 대업3년(607년) 8월 을유일 기록을 보면,

『황상(수양제)이 고려 사자에게 이르러 말하기를「돌아가 너의 왕에게 말하라(上謂高麗使者曰:「歸語爾王)」』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 역시 수나라가 고구려 왕을 책봉했기 때문에 고려왕이라고 부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이렇다.

조서를 내려 고려왕 고원의 관작을 없애도록 하였다(下詔黜高麗王高元官爵)」는 것이 개황18년(598년)이다.

만약 이것이 왕위도 없애도록 한 것이라면 598년 이후에는 고구려의 임금을 왕이라고 부르지 말아야한다.

 

그런데 대업3년(607년) 8월에‘너의 왕’이라고 말함으로써 고구려의 왕은 수나라에서 봉한 것이 아님을 알수 있다는 말이다.

사자에게 말한 것이기 때문에‘너의 왕’이라고 했다고 우긴다면 다른 기록에는 전부 이름인‘원’이라고 말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수양제가 고구려에게 대패하여서 원한에 사무쳐 고구려의 왕을 가르킬 때는 전부 악의에 차서 ‘원’이라고 이름만 부르고 있다. 그렇다면 사신에게도 「돌아가 원에게 가서 말하라」라고 했어야 한다.

 

그러나 감히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은 남의 나라 왕에게 그렇게 함부로 이름을 부르지 못한 것이고,

고구려 왕위는 자기가 삭탈한 관직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서를 내려 고려왕 고원의 관작을 없애도록 하였다(下詔黜高麗王高元官爵)」는 것은

고구려가 수나라의 책봉을 받은 나라라는 증거가 아니며 오히려 책봉을 받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이와같은 것을 보았을때

「원(영양왕)이 표문을 올려 사례함과 아울러 상서(祥瑞)를 축하하면서 왕으로 봉하여 줄 것을 청하였다. 고조(수문제)는 원(영양왕)을 우선 책봉하여 왕으로 삼았다.」는 것은 거짓으로서,

그 문장은 전형적인 가필(加筆)로써 나중에 거짓을 꾸며넣은 것이며,

조서를 내려 고려왕 고원의 관작을 없애도록 하였다(下詔黜高麗王高元官爵)」는 것은

고구려가 수나라의 책봉을 받은 나라라는 증거가 아니라 오히려 책봉을 받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같이

고구려가 수나라의 조공 책봉 체계 하에 있었다는 주장은 완전히 거짓말이며

그러한 주장을 한 근거인 「고조(수문제)는 원을 우선 책봉하여 왕으로 삼았다.」는 가필한 것으로 사기이다.

 

따라서,

마치 수나라가 마음대로 고구려 임금을 왕으로 책봉하고, 고구려 임금의 왕위를 빼앗은 것처럼 말하고

따라서 고구려는 수나라의 조공 책봉체계 하에 있는 나라라고 선전하는 것은

제대로 된 수많은 증거를 감추고 무슨 소리인지도 잘 모르는 애매한 단 두 문장을 적당히 엮어서

역사를 모르는 사람들을 속이려는 수작이었다.

 

그것은 식민사관의 개들이 우리역사에 재를 뿌리고 모욕한 개수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결국,

고구려가 수나라의 조공책봉체계 하에 있었다는 주장은 거짓과 무식의 소산이었던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식민사관의 개들은 되지도 않는 헛소리로 우리역사에 재나 뿌리자는 왜놈들의 수작을 그대로 본받아

우리역사에 먹칠을 하며 히히덕거리는 못된 패륜아 들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