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본기

삼국사기와 위서의 비교-끝

상 상 2011. 11. 1. 08:16

 

내용 5: 주몽의 부여탈출 과정과 고구려 건국

삼국사기(동명성왕 본기)

위서((魏書)

그래서 주몽은 오이(烏伊) ·마리(摩離) ·협보(陜父) 등 세 사람을 벗으로 삼아 함께 갔다.

 

엄시수(淹㴲水)<또는 개사수(蓋斯水)라고도 한다. 지금[고려]의 압록강(鴨淥江) 동북쪽에 있다.>에 다다라 건너려 하였으나 다리가 없어 추격병에게 잡히게 될 것이 두려워 물에게 고하기를

 

“나는 천제(天帝)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이다. 오늘 도망가는데 추격자들이 다가오니 어찌하면 좋은가?” 하자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었으므로 주몽은 건널 수 있었다. 물고기와 자라가 곧 흩어지니 추격하는 기마병이 건널 수 없었다.

 

주몽은 모둔곡(毛屯谷)에 이르러<위서(魏書)에는 『보술수(普述水)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세 사람을 만났다. 그 중 한 사람은 삼베옷[麻衣]을 입었고,

한 사람은 중 옷[衲衣]을 입었으며,

한 사람은 마름옷[水藻衣]을 입고 있었다.

 

주몽은 “자네들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가?

성은 무엇이고 이름은 무엇인가?” 하고 물었다.

삼베옷 입은 사람은 “이름은 재사(再思)입니다.”라고 하였고,

중 옷 입은 사람은 “이름은 무골(武骨)입니다.”라고 하였고,

마름옷 입은 사람은 “이름은 묵거(默居)입니다.”라고

대답하였으나, 성들은 말하지 않았다.

주몽은 재사에게 극씨(克氏), 무골에게 중실씨(仲室氏), 묵거에게 소실씨(少室氏)의 성을 주었다. 그리고 무리에게 일러 말하였다.

 

“내가 이제 하늘의 큰 명령을 받아 나라의 기틀을 열려고 하는데 마침 이 세 어진 사람들을 만났으니 어찌 하늘이 주신 것이 아니겠는가?” 마침내 그 능력을 살펴 각각 일을 맡기고

그들과 함께 졸본천(卒本川)<위서(魏書)에서는 『흘승골성(紇升骨城)에 이르렀다.』고 하였다.>에 이르렀다.

 

그 토양이 기름지고 아름다우며, 산하가 험하고 견고한 것을 보고 마침내 도읍하려고 하였으나, 궁실을 지을 겨를이 없었으므로 다만 비류수(沸流水) 가에 초막을 짓고 살았다. 나라 이름을 고구려(高句麗)라 하고 그로 말미암아 고(高)로써 성을 삼았다.

 

<다른 기록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주몽은 졸본부여에 이르렀다. [그] 왕에게 아들이 없었는데 주몽을 보고는 범상치 않은 사람인 것을 알고 그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왕이 죽자 주몽은 왕위를 이었다.』>

이때 주몽의 나이가 22세였다.

이 해는 한(漢)나라 효원제(孝元帝) 건소(建昭)

2년(서기전 37), 신라 시조 혁거세(赫居世) 21년 갑신년이었다.

 

 

주몽은 이에 오인 오위(烏引·烏違) 등 두 사람과 함께 부여를 버리고 동남쪽으로 도망하였다.

 

중도에서 큰 강을 하나 만났는데, 건너려 하여도 다리는 없고, 부여 사람들의 추격은 매우 급박하였다. 주몽이 강에 고하기를,

 

“나는 태양의 아들이요, 하백(河伯)의 외손이다. 오늘 도망길에 추격하는 군사가 바짝 쫓아오니, 어떻게 하면 건널 수 있겠는가?” 하자, 이 때에 고기와 자라가 함께 떠 올라와 그를 위해 다리를 만들어 주었다. 주몽이 건넌 뒤 고기와 자라는 금방 흩어져버려 추격하던 기병들은 건너지 못하였다.

 

주몽은 마침내 보술수(普述水)에 이르러

우연히 세 사람을 만났는데, 한 사람은 삼베 옷을 입었고, 한 사람은 무명 옷을 입었고, 한 사람은 부들로 짠 옷을 입고 있었다.

 

[그들은] 주몽과 함께 홀승골성(紇升骨城)에 이르러

마침내 정착하고 살면서 나라 이름을 고구려(高句麗)라 하고 인하여 성을 고씨(高氏)라 하였다.

 

 

 

 

 

 

 

 

 

 

 

 

 

 

 

 

 

 

 

 

 

 

 

 

 

 

 

 

 

 

내용 5「주몽의 부여탈출 과정과 고구려 건국」의 비교

 

1) 여기서도 삼국사기가 기본적으로 위서의 내용과 줄거리를 그대로 따랐음을 볼 수 있다.

 

2) 역시 여기서도 구삼국사(舊三國史)를 보충적으로 채택하고 있으나 오히려 위서의 내용을 바로 잡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김부식은 구삼국사를 원본으로, 위서는 고구려 시조의 이야기가 중국으로 퍼진 파생본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삼국사를 그대로 싣지 않고 위서를 따랐다는 것은 모화주의자의 행위이며 사대주의라고 볼 수 있다.

 

4) 그렇다고 해서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은 김부식의 창작이며 조작이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 라는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은 방향이 완전히 다른 이야기로써

삼국사기가 구삼국사(舊三國史)와 위서(魏書), 그리고 그밖의 다른 고기(古記)를 재단(오려 붙이기)하여 편집한 것임을 비추어 볼 때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은 명백히 잘못된 이야기이고 턱도 없는 거짓말이다.

삼국사기의 흠을 틈타 삼국사기를 매도해 보려는 뻔뻔스러운 사기꾼의 행위이며 학문적 꼼수에 불과하다.

 

5) 또한 삼국사기는 구삼국사(舊三國史)가 아닌 다른 고기(古記)의 내용을 삽입하고 있음도 볼수 있다.

 

6) 위서는 삼국사기 동명성왕의 8개 내용 중에서 3개밖에 없는 동명성왕 기록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즉, 위서는 삼국사기의 원본내지 저본이 아님을 알 수 있다.(삼국사기 동명성왕의 원본은 구삼국사舊三國史임)

 

7) 삼국사기를 볼수 있는 싸이트: http://koreandb.nate.com/history/saki/

   위서를 볼수 있는 싸이트: http://db.history.go.kr/url.jsp?ID=j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