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삼국사기를 알아야 하는 이유: 2. 한심한 국사학계의 현실

상 상 2011. 10. 13. 08:02

아래에 보이는‘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이 한국 국사학계에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다.

 

『<삼국사기> 초기기록은 김부식이 허위로 창작한 것』이라는 둥,

따라서 『<삼국사기> 초기기록은 역사적 사실의 기록이 아니다』라는 둥의 왜인들이 남긴

식민지 사관이 아직도 시퍼렇게 살아있는 것이 한국 국사학계에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다.

 

우리가 삼국사기를 살펴볼때 정말로 삼국사기 초기기록이 김부식이 창작한 것인지,

아니면 일제 식민지 사학자들의 거짓말을 아직도 그 앞잡이들이 계승하고 있는지

명백하게 판별하여 어느 한쪽을 단죄해야 할 것이다.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에 따라서 우리가 국사를 배울때 고조선을 이어서 배운 것이

삼국사기에 의한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역사가 아닌,

떼놈들이 쓴 삼국지 동이전에 의한 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 삼한(마한 진한 변한)이다.

 

우리 역사를 우리 역사서가 아닌 남의 역사서로 배운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한심한 현실이다.

 

일제 식민지 사학자들과 그들의 앞잡이들이 삼국사기를 사대주의의 산물이라고 떠들면서

삼국사기를 안보게 해놓고, 한국인들로 하여금 우리역사의 무식쟁이로 만든 다음,

그들이 제멋대로 꾸며놓은 우리역사를 국민들 앞에 펼쳐서, 우리국민들로 하여금

저들의 거짓에 넘어가게 교묘히 꾸며놓았다.

 

즉, 사대주의를 핑계로 국민들의 눈을 가린 다음

일제 식민지 사관으로 우리 역사를 바꿔치기한 것들이

일제식민지 사관을 이은 개들이다.

 

따라서 우리역사를 아는 첫걸음은 바로 삼국사기 읽기이며 삼국사기 바로 알기이다.

 

단재선생께서 김부식을 호되게 질책할때 연대(年代)가 잘못되었다고 질책하고

그 관점이 잘못되었다고 질책했지

삼국사기 내용 자체가 김부식의 창작이라거나 엉터리없는 거짓이라고 질책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먼저 삼국사기를 제자리에 가져다 놓고 그 다음에 고칠 것을 고치면 된다

연대를 고치고 잘못된 관점인 사대주의를 걷어내면

우리역사가 본 모습 그대로 훌륭하게 나타나는 게 바로 삼국사기이다.

 

위 아래 관절 고치고, 모자 벗기면 우리역사의 본 모습이 그대로 나타나는 훌륭한 역사서가 바로 삼국사기이다.

 

물론 삼국사기에 빠진 것이 있다.

그것은 단재선생의 저서와 중국사서를 가지고 채워 넣으면 되는 것이다.

 

일제 식민지 사관을 이은 개들의 교묘한 속임수에 속아 우리 사서인 삼국사기를 버리고

남의 사서로(삼국지) 우리역사를 가르치는 한심한 작태를 하루빨리 끝내야 할 것이다...

===================================================================================

<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 >

 

한국 사학계 주류의 정설(定說) 중의 하나가 이른바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이다.

<삼국사기> 초기기록은 김부식이 허위로 창작한 것이지 역사적 사실의 기록이 아니라는 내용이다.

 

현행 <국사교과서>에 삼국의 시조가 누락되어 있는 것도 이런 사관의 반영이다.

 

제7차 교육과정 이전의 <국사교과서>는 부록의 ‘역대 왕조 계보’에서 삼국 초기 국왕들의 재위연대도 삭제했었다.

고구려는 제6대 태조왕(53~146)부터 재위 연대를 기록했고, 백제는 제8대 고이왕(234~286)부터,

신라는 한술 더 떠서 제17대 내물왕(356~402)부터 재위 연대를 기록하고 있었다.

 

“임나일본부 얘기 없어 조작 사료”조선사편수회 쓰다 소우키치 주장에 부정확한 ‘동이열전’ 그대로 수용

주류학계, 교과서에서 삼국시조 빼

 

<삼국사기>는 신라의 건국연대를 서기전 57년, 고구려는 서기전 37년,

백제는 서기전 18년으로 기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못 믿겠다는 것이었다.

 

7차 교과과정의 <국사교과서> 부터는 그 이전 왕들의 재위연대도 수록했지만

주류 사학계가 자신들의 고대사 인식의 문제점을 반성하고 넣은 결과가 아니다.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에 참여했던 교육부 관료들이 이 문제에 대한 문제의식을 느끼고 강력히 요구한 결과 마지못해 수용한

결과였다. 이 과정에서 초기 왕들의 재위연대를 누락시킨 채 인쇄했던 일부 <국사교과서>를 폐기 처분하는 소동까지 있었다.

역사학자들이 교육부 관료들보다 저차원의 역사의식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런 소동을 거쳐 현행 <국사교과서>의 부록에는 삼국 초기 국왕들의 재위연대가 들어갔지만 본문 서술에서는

여전히 초기 국왕들의 존재가 부인된다.

고구려는 태조왕, 백제는 고이왕, 신라는 내물왕 때 사실상 건국했다고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의 고고관에는 ‘원삼국실(原三國室)’이란 전시실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원삼국시대에 대해 “서력 기원을 전후로 한 시기부터 300년경까지 약 3세기간을 이른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 기간 동안 삼국은 존재하지 않거나 아주 작은 부락(部落)단위에 불과했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해당 시기의 유물이 출토되면 삼국의 유물이라고 하지 않고 원삼국이라고 분류하는 것이다.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의 고고학판이 국립중앙박물관의 원삼국실로서 아비(삼국)를 아비라고 부르지 못했던

일제시대가 계속되는 듯한 착각이 인다.

 

심지어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인용한 논문은 통과되지 않는 것이 학계의 상식일 정도로

사학계 주류에서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은 도그마가 되었다.

 

삼국사기, 편년체라 조작 어려워

 

» 가야의 ‘말머리 가리개’. 일제는 가야를 고대판 조선총독부인 임나일본부라고 주장했으나 거꾸로 가야가 고대 일본을 지배했다는

물증이 속속 드러나면서 현재는 일부 국수주의자를 제외하고는 그런 주장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을 처음 창안해 낸 인물은 조선사편수회의 식민사학자 쓰다 소키치다.

그는 <고사기 및 일본서기 연구(古事記及び日本書紀の硏究:1919)>의 부록인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대하여(三國史記の新羅本紀について)’에서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을 최초로 주장했다.

 

그러나 이는 <삼국사기>에 대한 면밀한 연구 결과 나온 이론이 아니라

일본 고대 사서인 <고사기>와 <일본서기> 연구의 부수물로 연구한 결과물에 불과한 것이다.

 

쓰다 소키치는 <고사기> <일본서기>의 왜(倭) 관련 기록과 <삼국사기>의 왜 관련 기록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발견했다.

둘 중의 하나는 사실과 다르게 정치적 목적에 의해서 조작된 것이다.

 

쓰다 소키치는 <일본서기>의 14대 쥬아이(仲哀)천황까지는 신화시대의 천황으로 후대인에 의해 조작되었고

15대 오진(應神)천황부터 실재했던 국왕이라고 주장했던 인물인데 동일한 잣대를 <삼국사기>에도 들이댔던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로마신화 비슷한 <고사기> <일본서기> 등과 달리

<삼국사기>는 기전체 형식의 편년체 사서이기 때문에 조작이라고 주장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대하여’에서

“<삼국사기> 상대(上代) 부분을 역사적 사실의 기재로 인정하기 어렵다는 것은

동아시아의 역사를 연구하는 현대의 학자들 사이에서 이론이 없기 때문에

왜(倭)에 관한 기재 역시 마찬가지로 사료로서는 가치가 없다고 보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주장했다.

 

자신이 처음으로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을 주장하면서도 많은 학자들의 지지를 받는 것처럼 위장한 것이다.

물론 그때나 지금이나 식민사학자들과 그 후예들은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조작이라고 생각한다.

 

» 소위 원삼국 시기의 철제무기. 철제 무기의 출현은 고대국가 성립의 지표로 해석하는 것이 세계 고고학계의 통설이지만

한국에서는 서기전 1세기부터 서기 3세기까지 신라와 백제는 부락수준에 불과했다면서 굳이 원삼국이란 틀에 가두어 설명하고 있다.

 

쓰다 소키치의 말 중에 핵심은 ‘(<삼국사기>의) 왜에 관한 사료 역시 사료로서 가치가 없다’는 말이다.

그가 같은 글에서 “(<삼국사기>에는) 4세기 후반부터 5세기에 걸쳐

‘우리나라(일본)가 가야를 근거로 신라에 당도했다’라는 명백한 사건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라고 쓴 것처럼

한반도 남부에는 고대 왜가 설치했다는 임나일본부가 존재해야 하는데

<삼국사기>에는 그런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가 <조선역사지리>에서 “(한반도) 남쪽의 그 일각(一角)에 지위를 점유하고 있던 것은 우리나라(倭國)였다.

변진(弁辰)의 한 나라인 가나(加羅:가야)는 우리 보호국이었고,

임나일본부가 그 땅에 설치되어 있었다”라고 쓴 것처럼 쓰다의 관심은 임나일본부였다.

 

그래서 쓰다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대하여’에서“<삼국사기> ‘신라본기’ 상대(上代)에 보이는 외국관계나 영토에 관한 기사는

모두 사실이 아닌 것으로 이해된다”라고 비판했다.

 

임나일본부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삼국사기>의 ‘외국관계나 영토’ 관계 기사가 모두 조작되었다는 주장이다.

 

그의 논리 중에는 “혁거세의 건국을 갑자년(甲子年 BC 57)으로 한 것은 간지(干支)의 시작을 맞춰놓은 것”이므로 가짜라는

주장까지 있다. 신라가 갑자년에 건국되었다고 쓴 것이 조작의 증거라는 뜻이니

굳이 반박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는 저열한 수준이다.

 

쓰다 소키치가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부인하는 일관된 이유는 단 하나 <삼국사기>에 임나일본부가 기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에 임나일본부가 나오지 않을 뿐더러 <삼국사기> 기록처럼 한반도 중남에 강력한 고대국가인 신라와 백제가 존재했다면

임나일본부가 존재할 수 없기에 <삼국사기>를 부정했던 것이다.

 

<삼국사기>를 부정해야 했던 쓰다의 눈에 확 들어온 것이 진수(陳壽)의 <삼국지> 동이열전 한(韓)조였다.

<삼국지> 한(韓)조는 ‘마한은 54개 소국, 진한과 변한은 각각 12개 소국으로 도합 78개 소국이 있다’고 <삼국사기>와는 달리

기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수는 이 글에서 “한(韓)은 대방(帶方)의 남쪽에 있다”고 썼기 때문에 대방군의 위치에 따라서

삼한의 위치도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쓰다 소키치는 대방이 한반도에 있었으며 삼한도 모두 한반도 남부에 있었다고

전제하고 논리를 전개했다.

 

한반도 남부가 78개 소국으로 나뉘어 있다면 임나일본부가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에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말살한 자리를

<삼국지> 한조로 대치시켰던 것이다.

쓰다는 “한지(韓地:한반도)에 관한 확실한 문헌은 현존하는 것으로는 <삼국지> ‘위지’의 한(韓)전과 그것에 인용된 위략(魏略)이

최초의 것으로서 그것에 의하면 3세기의 상태가 알려졌다”라고

<삼국지>가 중국 3세기 삼국시대(220~265)에 대한 기술이니 그 한(韓)조도 당연히 3세기의 상황을 반영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면 3세기 한반도 중남부에는 강력한 고대 국가 신라·백제가 아니라

78개 부락(部落) 단위의 소국이 우글대고 있었던 것이 된다.

 

그러나 진수의 <삼국지> 동이열전은 예(濊)나라를 설명하면서 ‘지금(今) 조선의 동쪽이 모두 그 지역이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서기 3세기가 아니라 고조선이 멸망하기 전인 서기전 2세기 이전의 상황을 기록한 구절이다.

물론 3세기의 상황을 기록한 구절도 있다. 이처럼 <삼국지> 동이열전은 진수가 부정확한 전문에 의거했거나

정리되지 않은 사료를 가지고 쓴 부정확한 기록에 불과하다.

 

해방 후 한국 주류 사학계는 국사교과서에서 임나일본부라는 말은 빼버렸다.

그렇다면 <삼국사기> 초기기록은 되살려야하지만  <삼국사기> 초기기록은 계속 부정하면서

<삼국지> 동이열전을 경전으로 삼는 우를 범하고 있다.

 

현행 <국사교과서>의 ‘여러 나라의 성장’ 부분에는

‘부여, 고구려, 옥저와 동예, 삼한’ 순서로 기술하면서 ‘신라와 백제’를 누락시켰다.

진수의 <삼국지> 동이열전의 ‘부여, 고구려, 동옥저, 읍루, 예(濊), 한(韓:삼한)’과 같은 순서의 기술이다.

 

쓰다 소키치가 <삼국지> 동이열전을 빌미로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부인한 식민사관이 <국사교과서>에 그대로 살아 있는 것이다.

해방된 지 한 갑자가 훨씬 지났지만 대한민국에서 조선사편수회는 과연 해체되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

 

일반인들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대로 고구려, 백제, 신라가 기원전 1세기경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인식하고 있지만

한국 사학계는 이를 부인하는 것이 정설이다.

 

한국 사학계는 일제강점기 식민사학자들이 고안한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三國史記初期記錄不信論)'에 따라

삼국사기의 초기기록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김부식(金富軾)의 창작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고구려는 태조대왕(太祖大王, 재위 53~146년)대에 이르러서야 역사적 사실로 믿을 수 있고,

백제는 고이왕(古爾王, 재위 234~286년)대, 신라는 내물마립간(奈勿麻立干, 재위 356~402년)대에 이르러서야 사실로 믿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삼국사기의 신라, 고구려, 백제의 건국 순서가 고구려, 백제, 신라로 뒤바뀐 연유 또한 식민사학자들의

'삼국사기 초기기록 죽이기'에 기초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아직도 식민사학의 시대에 살고 있다.

 

●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三國史記初期記錄不信論)

 

고구려, 백제, 신라의 초기 역사에 대한 한국인들의 일반 인식과 역사학계의 통설에는 커다란 괴리가 있다.

일반 국민들은 세 나라가 개국했을 때부터 고대국가로 발전했을 것이라고 막연히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삼국이 고대국가로 발전한 때는 훨씬 후대라는 것이 역사학계의 통설이다.

국정 국사교과서가 바로 이런 통설을 대표하고 있다.

 

제7차 교육과정에 따라 2002학년도부터 사용하는 국정 고등학교 국사교과서의 '삼국의 성립'편을 보자.

 

삼국 중 제일 먼저 국가체제를 정비한 것은 고구려였다. 졸본성에서 국내성으로 도읍을 옮긴 고구려는 대무신왕(大武神王) 때에

정복국가로 발돋움하고 1세기 후반 태조대왕(太祖大王) 때에 이르러 정복활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중략)

 

백제는 한강 유역의 토착세력과 고구려 계통 유이민세력의 결합으로 성립되었는데(B.C. 18), 우수한 철기문화를 보유한 유이민집단이

지배층을 형성했다. 백제는 한강 유역으로 세력을 확장하려던 한(漢)의 군현(郡縣)을 막아내면서 성장했다.

3세기 중엽 고이왕(古爾王) 때 한강 유역을 완전히 장악하고, 중국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 정치체제를 정비했다.

이 무렵 백제는 관등제를 정비하고 관복제를 도입하는 등 지배체제를 정비하여 중앙집권국가의 토대를 형성했다.

 

신라는 처음 진한(辰韓) 소국의 하나인 사로국(斯盧國)에서 출발했는데, 경주 지역의 토착집단과 유이민집단의 결합으로

건국되었다(B.C. 57). 이후 동해안으로 들어온 석탈해(昔脫解) 집단이 등장하면서 박, 석, 김의 3성이 교대로 왕위를 차지했다.

유력 집단의 우두머리는 이사금(왕)으로 추대되었고, 주요 집단들은 독자적인 세력 기반을 유지하고 있었다.

  -'고등학교 국사' 49~50쪽-

 

삼국의 성립을 기술한 이 부분에는 통상 특정 국가의 성립을 설명할 때 배놓을 수 없는부분이 누락되어 있다.

바로 삼국의 시조(始祖) 부분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신라는 기원전 57년에 혁거세거서간(赫居世居西干)에 의해 건국되었고,

고구려는 기원전 37년 추모왕(鄒牟王)에 의해 건국되었으며, 백제는 기원전 18년 온조왕(溫祚王)에 의해 건국되었다.

그런데 국사교과서는 개국 시조의 이름을 모두 누락했을 뿐만 아니라 개국 순서도 고구려, 백제, 신라 순으로 바꾸어 놓았다.

 

왜 그랬을까?

 

여기에는 일제강점기에 창안되어 현재까지 한국 사학계의 주류로 행세하고 있는 특정한 고정관념이 숨겨져 있다.

바로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三國史記初期記錄不信論)'이라는 고정관념이다.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은 한 마디로 말하면 삼국사기의 초기기록은 역사적 사실이 아닌 허위 사실을 기록한 것으로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그 뿌리는 일제 식민사관에 닿아 있다.

 

이에 따르면 고구려사(高句麗史)는 태조대왕(太祖大王) 때에 이르러서야 역사적 사실로 믿을 수 있고,

백제사(百濟史)는 고이왕(古爾王) 때, 신라사(新羅史)는 내물왕(奈勿王) 때에 이르러서야 사실로 믿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기준에 의하면 기원전 37년 추모왕(鄒牟王)에 의해 건국된 고구려는 약90~180여년의 역사가 사라지게 되고,

기원전 18년 온조왕(溫祚王)에 의해 건국된 백제는 252~304년의 역사가,

기원전 57년에 박혁거세(朴赫居世)에 의해 건국된 신라는 무려 413~459년의 역사가 사라지게 된다.

 

그리고 앞의 교과서가 보여주듯 실제 이 기간의 역사는 사라졌다.

 

이들이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三國史記初期記錄不信論)'의 근거로 제시하는 것은

3세기 후반 진(晉)의 학자 진수(陳壽)가 편찬한 삼국지(三國志) 위지동이전(魏璡夷傳)의 삼한에 관한 기록인 한(韓)조다.

이에 따르면 이 시기까지 한반도 중남부에는 무려 78개의 소국으로 구성된 삼한이 있었는데

 

백제는 마한 54개국 중의 하나인 백제국(伯濟國)에 지나지 않고 신라는 변진(弁辰) 24개국 중의 하나인 사로국(斯盧國)에 불과하다.

이런 이론은 1919년 식민사학자인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에 의해 처음 제시되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에 일본 학계에서 한국 고대사를 바라보는 시각은 1~3세기 한반도 남부에는 삼한의 78개 소국들이 있었고

북부에는 한군현이 설치되어 있었다는 것이었다.

 

이는 한반도 중남부가 78개의 자그마한 소국으로 나누어져 있어야 4세기 후반 왜(倭)의 한반도 출병과 임나일본부 설치라는 논리가

가능해지기 때문이었다. 일본 군국주의 침략 세력은 그래서 왜(倭)가 한반도에 출병하는 4~5세기까지 한반도 중남부를 수십 개의

소국이 난립해 있는 공백 상태로 만들었다. 그러면서 그 근거로 제시한 것이 삼국지의 한(韓)조였다.

 

그런데 한국 학계는 해방 이후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은 줄기차게 부인하면서도 삼국지 삼한조는 받아들여 삼국사기의 초기기록을

부인하는 자기 모순에 빠졌다.

 

그나마 고구려는 백제와 신라에 비해 크게 대접받아 100여년 밖에 사라지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중국 기록에 고구려의 여섯번째 국왕인 태조대왕(太祖大王)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앞서 2001년까지 사용된 교과서에는 대무신왕(大武神王)도 존재하지 않았었다.

2002년부터 사용되는 교과서에 대무신왕의 묘호가 실린 이유도 삼국사기의 초기기록을 받아들여서가 아니라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東夷列傳) 구려(句麗)조에 "건무(建武) 8년에 고구려가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는 구절이 나오기 때문이다.

건무 8년은 서기 32년으로서 고구려 대무신왕(大武神王) 15년이다. 물론 이전에는 중국 기록에 나오는데도 배제당했다.

 

국사교과서에 따르면 백제의 고이왕(古爾王) 이전 국왕들은 우리 역사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했다 해도 마한 54개국 중 하나의 우두러미로서 일개 추장 같은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그나마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은 열세번째 제왕인 근초고왕(近肖古王) 이전까지는 인정하지 않던 것을 매국사학자 이병도(李丙燾)가

고이왕(古爾王) 27년, 28년에 육좌평(六佐平) 등 각종 관등과 복식 등을 제정한 것을 역사적 사실로 신용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나서면서야 역사적 사실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병도는 삼국사기(三國史記) 고이왕(古爾王) 27, 28년조의 역주에서 이렇게 썼다.

 

'학자에 따라서는 백제본기(百濟本記)에 나타나는 기록 중 계왕(契王) 이전의 것은 신용할 수 없고 근초고왕(近肖古王) 이후라야

신용할 수 있는 역사적 사실로 인정한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이 고이왕(古爾王) 27, 28년간에 있어서의 일련의 국가제도 정비에 관한 기록은 거의 그대로 신용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즉 나는 이것을 백제가 일개 성읍국가에서 탈피하여 뚜렷한 고대국가로 변모하는 전환을 말하는 중요한 기사라고 생각한다.'

 

이병도의 스승이자 식민사학자인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가 백제는 근초고왕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고대국가가 되었다고 주장한

것을 이병도가 100여년 끌어올린 것이었다.

이병도는 이를 나름의 학문적 업적이라고 생각했겠지만 백제 국가기원의 판단 기준은 근초고왕이나 쓰다 소키치의 생각이 아니라

온조왕(溫祚王)이고 삼국사기라는 점에서 고이왕 이전 300여년의 백제사(百濟史)가 사라진 것은 맹자(孟子)의 오십보 백보 논리와

다를 바 없는 것이다.

 

또 국사교과서는 이병도(李丙燾)의 한국사대관(韓國史大觀)을 거의 그대로 받아들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병도는 1973년에 편찬한 '신수(新修) 한국사대관(韓國史大觀)'에서 백제의 시조(始祖)에 대한 네가지 설을 설명했다.

그 중 온조(溫祚)가 시조라는 설이나 비류(沸流)가 시조라는 설은 믿을 수가 없다며 주서(周書)를 근거로 구태(仇台)가

백제의 시조라고 주장했다. 이병도의 주장을 살펴보자.

 

'구태설(仇台說)은 중국의 사자가 백제에 와서 직접 견문한 바에 의한 것으로, 그 국도(國都)에는 시조 구태 묘가 있어

매년 네번씩 제사를 지낸다고 했다. 이는 가장 정확한 사료로 보지 아니하면 아니된다. 그러면 구태는 어떤 사람인가?

나의 조사에 의하면 구태의 태(台)자는 원음이 '이(夷)'음(音)인즉, 구태는 '구이(仇夷)'로 발음할 수 있는 동시에

이와 근사음인 백제의 고이왕(古爾王)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다. 바꿔 말하면 구태(이)는 즉 고이의 이사(異寫)로

동일인임에 틀림 없을 것이다. 실제 상술과 같이 고이왕 때라야 엄밀한 의미의 건국이 가능하므로, 이를 백제의 태조(太祖)로

비정함에 하등 불가함이 없는 까닭이다. 고이왕 이전의 세계(世系)는 추존(追尊)일 것이다.'

이병도(李丙燾)의 신수(新修) 한국사대관(韓國史大觀) 중에서...

 

그런데 이병도가 가장 정확한 사료라고 주장했던 주서(周書) 백제전(百濟傳)의 해당 기록은 "구태(仇台)란 이가 있어

처음으로 대방(帶方)에 나라를 세우니, 해마다 네 번씩 그 시조 구태의 사당에 제사를 지낸다."는 구절이 전부이다.

이 짧막한 기사가 삼국사기 초기 기사를 모조리 부인할 수 있는 요술 방망이로 둔갑한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국 학계는 백제의 국가 성립을 고이왕(古爾王) 때라고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신라 초기사도 마찬가지다. 쓰다 소키치는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記) 실성왕(實聖王) 이전의 기록은 믿을 수

없다고 했다. 이병도는 이에 대해서 내물왕(奈勿王)때부터는 믿을 수 있다면서 "신라의 엄연한 건국기는 내물왕 때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해 쓰다 소키치보다 약 50년을 끌어올렸다.이에 따라 백제는 고이왕 때 국가가 성립되었고 신라는 내물왕 때 고대국가가

성립된 것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마음대로 재단하다 보니 삼국사기의 초기기록을 모두 부인해야 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그 많은 내용을 김부식이 모두 창작했다고 보기에는 자신들이 생각해도 무리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이른바 '주갑제(周甲制)'다. 주갑제란 갑(甲), 을(乙), 병(丙), 정(丁)의 순서로 시작되는 10가지 천간(天干)과

자(子), 축(丑), 인(寅), 묘(卯)로 시작하는 12가지 지지(地支)를 순서대로 조합해 해와 달과 일과 시간을 구분하는 동양의 전통

시간체계를 말한다. 해를 기준으로 한 바퀴 도는 데에 꼭 60년이 걸리는데 이를 1주갑 또는 회갑(回甲)이라고 한다.

따라서 2주갑은 120년, 3주갑은 180년이 된다.

 

삼국사기가 백제의 온조왕(溫祚王)이 마한을 정복했다고 기록한 것을 3주갑(180년) 끌어내려 초고왕(肖古王) 때의 일로 보거나

4주갑(240년) 끌어내려 고이왕(古爾王) 때인 249년의 일로 보거나 심지어 6주갑을 끌어내려 근초고왕 때인 369년의 일이라고

해석하는 것 등이 그런 예들이다. 주갑제를 받아들이는 학자들조차 180년에서 360년 사이를 오간다는 사실이 주갑제가

아무런 원칙이 없음을 대변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온조왕의 마한 정복 기사를 180년에서 360년까지 끌어내려 해석해야 할 아무런

과학적 근거가 없다는 뜻이다.

 

이런 주갑제를 삼국사기 초기기록에 적용시키려는 발상은 일본서기(日本書紀)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일제(日帝)의 대표적인 황국사관론자(皇國史觀論者)로서 많은 한국인 제자들을 두고 있는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는 1942년

비공개로 열린 재판에서 나카니시 요이치[中西栗一] 재판장에게 다음과 같은 이유로 금고 3개월, 집행유예 2년의 판결을 받았다.

 

"혹은 숭신왕(崇神王), 수인왕(垂仁王) 이조(二朝)의 존재를 가정한다고 말하거나 또 혹은 제기(帝紀) 편찬 당시에 있어서

중애왕(仲哀王) 이전의 역대(歷代)에 대하여서는 그 계보에 관한 재료가 존재한 형적이 없고 그에 관한 역사적 사실도 거의 전하여

있지 않다는 등 황공하게도 신무왕(神武王)으로부터 중애왕(仲哀王)에 이르는 역대 일왕(日王)의 존재에

대하여 의혹을 품게 할 우려가 있는 강설(講說)을 감히 함으로써 왕실의 존재를 모독하는 문서를 제작하고...(후략)"

 

이 재판의 요지는 쓰다 소키치가 일본의 열다섯번째 국왕인 응신왕(應神王) 이전의 일왕(日王)들은 그 실재가 불분명하다고 말한 것이

왕실을 모독했다는 것이다. 소키치가 대표적인 황국사관론자라는 점에서 이는 일본서기가 갖고 있는 고민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270년인 응신왕 즉위 이후 약 150년 가량의 일본서기의 한반도 관계 기사들은 약 2주갑 올라가 있다가 웅략왕(雄略王) 20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삼국사기와 연대가 맞아 들어간다.

 

일본서기(日本書紀) 신공왕후(神功王后) 섭정 55년(서기 255년)조에 백제의 초고왕(肖古王)이 훙(薨)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삼국사기(三國史記)에 기록된 근초고왕(近肖古王)의 사마연대는 375년으로서 정확히 120년 차이가 난다. 또한 일본서기에는

근초고왕의 아들인 근구수왕(近仇首王) 사망 연대를 신공왕후 섭정 65년(264년)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삼국사기는 384년이라고 기록하고 있어 정확히 120년 차이가 난다.

또한 삼국사기의 진사왕(辰斯王) 즉위년(392년)을 일본서기는 응신왕(應神王) 2년(372년)이라 해서 정확히 120년의 차이가 난다.

 

120년을 끌어내려야 삼국사기의 기록과 같아지는 일본서기의 한반도 관계 기록은 웅략왕(雄略王) 20년(476년)조에 와서야

"고구려왕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백제를 쳐 멸망시켰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삼국사기의 고구려본기(高句麗本記)에

장수태왕(長壽太王)이 475년 백제의 한성을 함락시켰다는 기사와는 1년밖에 차이가 나지 않게 된다.

 

이처럼 일본서기는 삼국사기라는 기준에 비추어 볼 때 2주갑을 끌어내려 계산해야 정확한 연대가 나오게 된다.

때문에 지금껏 일본서기의 연대는 삼국사기라는 기준에 의해 많이 수정되어 왔다.

그런데 어느덧 일본서기의 잘못된 연대를 교정해 주는 기준 역할을 하던 삼국사기의 연대가 잘못되었음을 입증할 수 있는 기준은

어디에도 없다. 다만 일본의 식민사학자들이 일본서기도 잘못되었으니 삼국사기 역시 잘못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했고,

그 추측에 의한 마구잡이식 재단을 그들의 한국인 제자들이 받아들인 것뿐이다.

 

여기에 삼국사기의 편찬자 김부식이 사대주의자이므로 그가 편찬한 기록은 사대주의적 잣대에 의해 왜곡되었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혐의까지 작용했다. 실제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와 함께 한국 고대사 축소 및 왜곡에 앞장 선 이마니시 류[今西龍]는

혁거세(赫居世)가 신라를 건국한 기원전 57년이 갑자년이라는 이유로 신라 건국연대는 조작이라고 주장했다.

신라가 갑자년에 건국했다는 것은 조작이라는 이마니시 류의 비실증적인 주장은 실증주의를 표방하는 현재 한국의 학계에서도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다.

 

김부식을 사대주의자라고 비난하면서도 그가 진정 사대주의자라면 왜 후한서(後漢書)나 삼국지(三國志) 같은 중국 기록의

한반도 관련 기사를 따르지 않았을까라는 의문은 정작 제기하지 않는다.

 

일본에서 2001년에 출간된 '역대일본제국천황총람(歷代日本帝國天皇總覽)'이라는 책은

첫번째 일본 국왕인 진무왕[神武王]에서부터 열네번째 국왕인 쥬아이왕[仲哀王]까지를 '신화시대의 제왕',

열다섯번째 국왕인 오진왕[應神王]에서부터 여든한번째 국왕인 안토쿠왕[安德王]까지를 '고대의 제왕'이라고 시대구분을 하고 있다.

 

'삼국사기 초기기록 부정론(三國史記初期記錄否定論)'을 이런 기준에 적용시키면

고구려는 여섯번째 국왕인 태조대왕(太祖大王), 백제는 여덟번째 국왕인 고이왕(古爾王),

신라는 열일곱번째 국왕인 내물왕(奈勿王) 전까지는 '신화시대의 제왕'이 된다.

 

현재 한국의 고대사학자들은 겉으로 드러내놓고 말은 못하지만 실제로는 이들을 실존하지 않았던 신화시대의 제왕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 발굴된 백제의 풍납토성(風納土城) 유적이나 신라의 경주시 서면 사라리 유적들은 삼국의 고대 국왕들을

신화 속 인물로 취급하는 그런 사고들이야말로 진짜 신화임을 말해주고 있다.

 

서울시 풍납동의 풍납토성은 판축기법으로 쌓은 토성이다.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은 2.2km 정도지만 원래는 3.5km가 넘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성벽의 폭은 40m에 높이는 최저가 9m에 달하는데 남아 있는 성벽 중에서도 가장 높은 곳은 15m에 달한다.

 

중요한 점은 풍납토성의 축성 시기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記) 온조왕(溫祚王)조의 "전한(前漢) 성제(成帝)의 홍가(鴻嘉) 3년에 하남(河南) 위례성(慰禮城)에

도읍을 정했다."는 기록에서 홍가 3년은 곧 기원전 18년이다. 과거에는 몽촌토성(夢村土城)을 백제의 도읍인 위례성이라고 비정하다가

현재는 풍납토성(風納土城)으로 비정하고 있는데 풍납토성이 위례성이라면 그 축조 시기는 기원전 1세기경이 되어야 한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온조왕(溫祚王) 42년조에는 "2월에 한수(漢水) 동북(東北) 모든 부락 사람 중 15세 이상을 징발해 위례성을

수리했다."는 기록이 있다.풍납토성의 성벽 몸통 맨 아래쪽에서 출토된 삼발형 토기는 서기 1~2세기의 유물로 추정된다.

또한 풍납토성 유적지에서 출토된 목탄과 목재, 토기 등 13점의 사료에 대한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법의 시행 결과,

가장 빠른 것은 기원전 199년, 가장 늦은 것은 서기 231년으로 나타났다.

이는 늦어도 서기 200년경에는 백제가 확실한 고대국가로 발돋움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3세기 중, 후반 고이왕 때 백제가 고대국가가 되었다는 기존의 통설은 수정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또한 최근 발굴된 경주시 서면 사라리 유적의 130호 목관묘에서는 S자형 말 재갈과 목 긴 항아리를 비롯한 토기류 그리고

청동제 칼집 등이 출토되었다. 청동제 칼집과 말 재갈 등은 강력한 정치집단의 존재를 말해주는 것으로

이 무덤의 축조 연대는 1세기 초반에서 2세기 초까지로 추정되고 있다.

 

이는 1세기 초반 경주 일대에 말과 칼을 사용하는 강력한 정치세력이 존재했음을 증명하는 것이자,

신라가 기원전 57년 건국되었고 이후 경북 일대를 정복하기 시작했다는 삼국사기 초기기록의 합리성을 대변하고 있다.

 

 

● 내물왕(奈勿王)은 강력한 정복군주인가?

 

그러나 신라는 4세기 내물왕 때에 이르러서야 고대국가로 발전한다는 것이 현재 학계의 통설이다.

이런 통설을 대변하는 고등학교 국정 국사교과서의 내용을 보자.

 

4세기 내물왕(奈勿王) 때에 신라는 활발한 정복 활동으로 낙동강 동쪽의 진한(辰韓) 지역을 거의 차지하고 중앙집권국가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 때부터 김씨에 의한 왕위 계승권이 확립되었다. 또한 국왕의 칭호도 대군장(大君長)을 뜻하는 마립간(麻立干)으로

바뀌었다. 이것은 왕권이 안정되고 다른 집단들에 대한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강화되었음을 의미한다.

- '고등학교 국사' 49~50쪽-

 

이 기술에서는 열일곱번째 국왕인 내물왕(재위 356년~402년)이 신라사(新羅史)의 만능키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신라사의 여러가지 문제가 내물왕 때 한거번에 해결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실증을 통해 살펴보자.

내물왕에 관한 사료는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記) 내물왕(奈勿王) 조의 기록과 삼국유사(三國遺事) 내물왕과

김제상(金堤上; 朴堤上) 조, 영락기공비문(榮樂紀功碑文) 등이다. 내물왕이 진한 지역을 거의 차지하고, 김씨에 의한

왕위 세습권을 확립하며, 마립간이라는 창호를 사용하고 다른 집단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했다는 내용은 얼마나 현존 사료들에

부합하는 것일까?

 

먼저 내물왕 때의 정복 기사를 검토해 보자. 신라본기 내물왕 조에는 모두 세 차례의 전쟁 기록이 등장한다.

재위 9년과 재위 38년에 신라에 침입한 왜병을 물리쳤으며, 40년에는 북쪽 변경을 침략한 말가을 물리쳤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백제와는 재위 11년과 13년 우호 관계를 맺을 정도로 사이가 좋았다가 18년에는 300여명의 백제인들을 받아들이는 바람에

근초고왕의 항의를 받은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재위 26년 봄에 전진(前秦)의 부견(符堅)에게 위두(偉頭)를 사신으로 보내고,

재위 37년에 이찬(伊贊) 대서지(大西知)의 아들 실성(實聖)을 고구려에 인질로 보냈는데, 실성이 재위 46년 7월 귀환했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즉, 진한을 정복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따르면 신라는 세번째 국왕인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

때부터 주변 국가 정복에 나서 첨해왕(沾解王) 때쯤이면 진한 전 영역을 이미 정복한 상태였다. 내물왕(奈勿王) 이전까지는

경주 일대의 작은 소국이었던 신라가 갑자기 강국이 되어 지난 일대를 정복했다는 주장은 적어도 삼국사기에서는 그 근거를 찾을 수

없는 비실증적 내용들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기록된 내물왕이 치른 세 차례의 전쟁이 모두 방어전(防禦戰)인 것은

그가 정복군주(征服君主)가 아니라 수성군주(守城君主)임을 말해준다.

 

삼국유사(三國遺事) 내물왕(奈勿王)과 김제상(金堤上) 조의 문헌은 어떤지 살펴보자.

이 조의 주요 내용은 내물왕이 왜국에는 자신의 셋째 아들 미해(美海)를 인질로 보내고 고구려에는 아우 보해(寶海)를 인질로

보냈는데, 김제상이 자신의 목숨을 대신 바치고 두 왕자를 환국시켰다는 이야기이다. 내물왕이 자신의 아들과 동생을 타국에 보내고,

총애하던 신하의 목숨을 희생시켜서야 귀국시킬 수 있었다는 사실은 위대한 정복군주의 위상과는 맞지 않는다.

 

그렇다면 영락기공비문(榮樂紀功碑文)은 내물왕이 위대한 정복군주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을까?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의 아들 장수태왕(長壽太王)이 세운 이 비문은 일부 과장은 있을 수 있지만 당대에 기록한 1차 사료라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여기에 내물왕 관련 기사가 등장한다.영락(榮樂) 9년(서기 399년)에 백제가 서약을 어기고 왜(倭)와 화통(和通)했다.

태왕이 평양(平壤)을 살피고자 내려오니 신라가 사신을 보내 말하기를 "倭.人들이 나라 안에 가득하여 성과 못을 부수니

이 노객(奴客)은 태왕의 신민(臣民)이 되어 태왕께 귀복(歸伏)하여 청하옵니다."라고 했다.

(중략) 10년 경자년(400년)에 교서를 내리어 보병과 기병 5만을 파견해 신라를 구원하게 하니 남거성(男居城)에서 신라성(新羅城)에

이르기까지 가득하던 왜군이 태왕의 군사가 이르자 도망갔다.

- 영락기공비문(榮樂紀功碑文) 중에서...

 

내물왕은 이렇듯 자신을 '노객(奴客)'으로 비칭하며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에게 군사 지원을 요청하는 것이다.

이 역시 신라사(新羅史) 초기의 모든 문제점을 단번에 해결하는 위대한 정복군주의 위상에는 걸맞지 않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記) 내물왕(奈勿王) 44년(399년) 조에는 이런 내용이 없으나 38년에 왜.인(倭.人)들이 금성을

포위 공격하는 기사가 있으므로 왜.인(倭.人)의 공격 때문에 내물왕이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한 것은 사실로 보인다.

후에 내물왕의 아들이 있었음에도 고구려에 가 있던 실성(實聖)이 내물왕의 뒤를 이어 임금이 되는 것은 신라에 대한 고구려의

영향력이 적지 않았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 영향력의 기반은 이 때의 군사 지원에 있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혜성같이 등장했다는 정복군주라면, 고구려의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처럼 거침없이 사방으로 뻗어 나가거나,

백제의 근초고왕(近肖古王)같이 고구려의 고국원왕(故國原王)을 전사하게 했어야 한다. 하지만 내물왕(奈勿王)과 관련해 현존하는

모든 사료인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영락기공비문(榮樂紀功碑文) 등에서는 내물왕이 위대한 정복군주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없다. 오히려 내물왕은 왜국과 고구려에 자신의 아들과 동생을 인질로 보내고 자신을 '노객(奴客)'으로 비칭하며

군사 지원을 요청해야 했던 군주였다.

 

내물왕을 신라 초기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만능키로 보는 기존의 통설은 따라서 아무런 사료적 뒷받침이 없는 창작에 불과한

것이다.

 

또한 통설은 내물왕(奈勿王) 때 마립간(麻立干)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을 왕권 강화의 중요한 표지로 삼고 있으나 마립간이라는

용어에 지나치게 집착할 이유도 없다. 마립간이라는 용어가 마치 전제군주와 같은 의미로 해석되면서 내물왕을 만능키로 만드는 데

중요한 구실을 했으나 이 역시 문제가 있다. 더구나 삼국사기에는 내물왕이 마립간이 아니라 이사금(尼斯今)으로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 왕력(王歷) 조에 내물왕이 마립간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전가의 보도로 삼지만 정작 삼국유사는 마립간에

대해 앞뒤가 다르게 적고 있다. 일연(一然)은 왕력 조에서 내물왕을 마립간(麻立干)이라고 적어 놓았으나, 막상 본문

기이편(紀異篇)의 지철로왕(智哲老王)조에는 "우리말[指稱]에 국왕을 마립간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임금 때부터 시작되었다."라고 적어

지증왕(智證王)을 최초의 마립간으로 기록하고 있다. 일연 자신이 혼동하고 있는 마립간이라는 용어 사용을 기준으로 내물왕을

최초의 중앙집권군주라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마립간이라는 용어에 대해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화랑세기(花郞世紀)의 저자 김대문(金大問)의 말을 인용해

"마립이란 말뚝을 뜻하는 방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후세의 품계석처럼 왕의 말뚝 아래 신하의 말뚝이 늘어서므로 이렇게 이름 지은

것이라는 설명이다. 그런데 일부 신라사(新羅史) 연구자들이 '내물왕(奈勿王)= 마립간(麻立干)'을 고집하다 보니 많은 무리수를

낳았다.

 

그 중 하나가 중국 측 기록에도 마립간(麻立干)이 나온다는 것이다. 내물왕(奈勿王)은 381년 전진(前秦)의 국왕 부견(符堅)에게

위두(偉頭)를 사신으로 보내는데 이를 중국의 문헌에서는 "그 나라의 왕인 루한(樓寒)이 위두를 사신으로 보내 미녀를 바쳤다.

[基王樓寒遣使偉頭貢美女]"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이병도(李丙燾)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내물왕 조에 대한 해설에서 루한을

왕명이 아니라 마립간의 중국식 표기라고 주장한다. 루(樓)를 '마루'로 훈독라면 '마립(麻立)'과 같이 볼 수 있고,

한(寒)은 간(干)처럼 취음(取音)한 글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루'가 '마루'이고 '마립'으로 연결된다는 주장은 약간의 언어학적

지식만 있어도 할 수 없는 지나친 비약이다. '한(寒)'의 중국음은 'han[한]'이고 '간(干)'의 중국음은 'gan[간]'으로서

전혀 다른 글자이다. 이 역시 억지로 꿰맞춘 자의적 해석일 뿐인 것이다.

 

중국 역사서는 주변 이민족의 임금들을 기록할 때 '송서(宋書)' 고구려전(高句麗傳)의 '고구려왕(高句麗王) 고련(高璉; 長壽太王),

남사(南史) 백제전(百濟傳)의 백제왕(百濟王) 여영(餘映; 塼支王), 양서(梁書) 신라전(新羅傳)의 신라왕(新羅王) 모진(募秦)이라는

기록처럼, 전통적으로 국왕의 이름을 적었지 해당 지역에서 부르던 왕호(王號)를 중국식으로 음차(音借)해 적은 예는 없다.

 

또한 내물왕 때부터 김씨에 의한 왕위 세습권이 확립된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이 신라가 비로소 중앙집권국가가 되었다는 증거는

아니다. 석씨 또한 아홉번째 국왕 벌휴왕(伐休王) 때부터 열여섯번째 흘해왕(訖解王) 때까지 중간의 열세번째 미추왕(味鄒王)만

빼놓고는 왕위를 세습했다. 신라는 이 무렵 이미 중앙집권국가로 성장한 것이다.

 

그는 석씨, 박씨집단과 격렬한 왕위 계승투쟁 끝에 임금이 된 것이 아니라 "흘해왕이 죽고 아들이 없으므로 내물왕이 그 뒤를 이었다."

삼국사기의 기록처럼 자연스레 즉위했다. 그렇기에 내물왕은 이전의 임금들처럼 신라 왕실의 전통에 따라 재위 3년에 박혁거세를

모시는 시조 묘에 제사를 지낸 것이다. 즉 내물왕은 위대한 정복군주가 아니라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영락기공비문(榮樂紀功碑文) 등

여러 사료가 전하는 대로 힘겹게 나라를 지킨 수성군주였던 것이다.

 

● 과연 김부식은 삼국사기(三國史記)를 조작했는가.

 

그렇다면 김부식(金富軾)은 삼국사기(三國史記)를 조작했을까?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조작했다는 의심에는 근거가 없다. 예를 들어 삼국사기 고구려본기(高句麗本記) 태조대왕(太祖大王) 70년 조의

문헌을 보면 "왕이 마한(馬韓), 예맥(濊貊)과 함께 요동(遼東)을 공격하자 부여왕(夫餘王)이 구원병을 보내 현도(玄淘)를 구하는

동시에 아군(我軍)을 격파했다."는 기록이 있다. 김부식은 이 기사에 주를 붙여 이런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마한은 백제 온조왕(溫祚王) 27년에 멸망했는데 지금 고구려왕(高句麗王)과 함께 군사 행동을 했다 하니,

이것은 곧 멸망한 후 다시 부흥한 것일까?" 서기 9년에 멸망한 마한이 113년 후인 122년에 다시 등장하는 것을 김부식은

이해하지 못했다. 즉 김부식은 자신이 삼국사기를 편찬할 당시 남아 있는 기록들을 가지고 삼국사기를 편찬했던 것이다.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기록이 나오면 이처럼 스스로 의문을 표시했지 120년, 240년을 마음대로 재단해 갖다 붙이는 식으로

비학문적 창작을 하지 않았다.이 기사처럼 삼국사기에는 우리는 물론 김부식 자신도 이해하지 못한 기술들이 있다.

이는 우리가 삼국사기의 해당 기록들을 진지하게 연구함으로써 합리적인 해석을 해내야 한다.

그럼으로써 고대 우리 선조들의 원형질의 모습을 복원할 생각을 해야 한다.

 

일본의 식민사학자들은 삼국사기의 초기기록을 부인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럴 이유도 근거도 없다. 1~3세기 무렵의 국가발전 과정들에 대한 삼국사기의 기록을 거짓이라고 단정할 아무런 근거가

없으며 풍납토성(風納土城)과 사라리 유적들이 전하는 당대의 유물들을 부정할 근거도 없다.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三國史記初期記錄不信論)'이라는 고정관념을 빨리 해체하고 삼국사기의 초기기록을 진지하게

연구하는 것이야말로, 말로는 식민사관을 비판하면서 실제로는 식민사관에 따라 기술하는 현재의 모순된 삼국 초기사 서술 태도에서

벗어나는 지름길일 것이다.

 

▶참고서적

휴머니스트(humanist) 版「살아있는 한국사 -한국 역사 서술의 새로운 혁명」

경세원 版「다시 찾는 우리 역사」

한국 교육진흥 재단(재단법인) 版「반만년 대륙 역사의 영광- 하나되는 한국사」

대산출판사 版「고구려사(高句麗史) 7백년의 수수께끼」

서해문집 版「발해제국사(渤海帝國史)」

충남대학교 출판부 版「한국 근현대사 강의」

두리미디어 版「청소년을 위한 한국 근현대사」

 

▶해설자

이덕일(李德一) 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 소장

한영우(韓永愚) 한림대학교 인문학부 석좌교수

고준환(高濬煥) 경기대학교 법학과 교수

서병국(徐炳國) 대진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이인철(李仁哲) 한국학중앙연구원 학술위원

박걸순(朴杰純) 충남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조왕호(趙往浩) 대일고등학교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