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배(拜)와 ‘삼았다(以~爲~)’는 것의 실체9(토욕혼의 역사①-약사)

상 상 2013. 4. 8. 18:14

 

고구려와 중국의 관계-86(북위때)

 

차례

Ⅰ. 조공

Ⅱ. 책봉

Ⅲ. 배(拜)와 삼았다(以~爲~)

    1. 북량

    2. 토욕혼

 

 

2. 토욕혼

1) 토욕혼의 왕위계승

2) 토욕혼의 역사①(약사)

 

 

2) 토욕혼의 역사(약사)

 

위서와 북사, 수서, 구당서를 중심으로 토욕혼의 역사를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토욕혼국은 토욕혼이 건국하였다. 토욕혼은 요동 선비족이고 아버지는 도하섭귀이다.

도하섭귀의 서장자(庶長子: 첩이 낳은 큰 아들)가 바로 토욕혼이고

둘째 아들이 선비 모용씨의 창시자 약락외(모용외)이다.

아버지 도하섭귀가 죽자 약락외(모용외)가 대통을 이었고,

이에 따라 토욕혼은 서쪽으로 부한(현재 감숙성 임하시)으로 이주하여 독립하였다.

토욕혼이 죽자 토연, 섭연, 쇄해, 시련 순서로 아들과 그 아들들이 왕위를 이었는데,

 

시련이 죽자 그 동생 시비가 뒤를 이었고

시비가 죽자 그 동생 오흘제가 왕위를 이었다.(시비의 아들 수락간 등이 어렸기 때문).

 

오흘제는 시비의 처를 다시 자기의 처로 맞아 모괴 모리연 두 아들을 낳았다.

 

즉, 시비의 처는 시비와 혼인하여 시비의 아들 수락간과 아시를 이미 낳았고

또한 시동생 오흘제의 처가 되어, 다시 오흘제의 아들 모괴 모리연을 낳았다.

 

오흘제는 죽을 때 시비의 아들인 수락간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수락간이 죽고 그 동생 아시가 뒤를 이었으며 아시는 처음으로 유송과 통교한다.

 

아시는 자기의 맏아들인 위대를 제쳐두고 모괴에게 왕위를 넘겨주었다.

모괴는 북중국의 강자, 하나라의 3대 황제 혁련정을 쳐서 사로잡았고

북위가 인도를 요구하자 북위에게 넘겨주었다.(북중국의 강자로 등장한 것임)

모괴 때에 처음으로 북위와 국교를 트는 한편 유송과도 계속 국교를 유지하였다.

모괴가 죽자 모리연이 뒤를 이었는데 이때에 문제가 생겼다.

 

모리연이 왕위에 오르자 아시의 큰 아들 위대가 모리연이 자기를 해칠까봐 북위로 도망가려다가 모리연에게 발각되어

죽음을 당하였다.(아마 북위에서 토욕혼을 치기위해 이간질을 한 것으로 보임)

 

이 때문에 위대의 동생 질력연 등 8명이 북위의 서울로 도망가서 군대를 보내 모리연을 칠 것을 청하였다.

북위의 세조는 진왕 탁발복라 등에게 명령하여 모리연을 치니 모리연은 백란으로 도망가고

모리연의 사촌동생 복념, 장사 부구려, 부대, 숭아 등이 무리 1만 3천 여락을 이끌고 북위에 투항하였다.

 

이후 북위는 정서장군 고량왕 탁발나 등을 보내 백란에서 모리연을 쳤다.

모리연이 우전국을 침입하여 그 왕을 살해하고 수만명을 죽였다. 모리연이 남쪽으로 계빈을 쳤다.

한편으로 모리연은 유송에 물건을 바치며 만약 북위가 우전국을 치면 유송에 들어갈수 있도록 요청하고 유송의 허락을 받았으나

북위는 우전국을 쳐들어 오지 않았다.

태평진군7년(446년) 모리연은 마침내 다시 옛 땅으로 돌아왔다.

 

모리연이 죽자 수락간의 아들 습인이 왕위에 올랐다.

6대 시비부터 12대 습인까지의 왕위계승을 다시한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왕위 계승

 

                    <동생>

6대 시비--------------------------------> 7대 오흘제

↓(아들)                                        ↓(아들)

↓            <동생>                            ↓            <동생>

8대 수락간-------------> 9대 아시            10대 모괴---------------------> 11대 모리연

↓(아들)                   ↓(아들)

↓                         ↓

12대 습인                위대: 반란

 

북위 문성제 때(452~465) 정양후 조안이 표를 올려 습인이 지키고 있는 백란에는

금 은 소 말이 많아 그곳을 친다면 크게 노획할 수 있다고 하였다.

논의 한 결과 모두 반대했으나, 조안의 말에 따라 습인을 쳤는데 습인이 달아나자 별볼일 없이 돌아왔다.

 

헌문제(466~470)가 다시 습인을 치니 습인이 나와 맞아 싸웠고

습인이 패배하여 습인이 밤에 달아나 숨었다

습인의 부락이 굶주리자 여러차례 요하(북위의 영토)를 침구하였다.

이에 헌문제는 다시 습인을 쳤으나 별볼일 없게 되자 군대를 물리면서 인질을 요구하였다.

습인이 아들 비두근을 보내 입시하도록 하니 헌문제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근을 돌려보냈다.

습인이 다시 변경을 침구하자 옛 땅을 돌려주는 조건으로 화의하여 습인은 다시 옛 땅으로 돌아왔다.

이후 토욕혼과 북위는 다시 통교하고 통상교역을 계속하였다.

 

이후 습인의 아들 도역후와 그 아들 복련주가 왕위를 이었고 

복련주 때 6진의 난이 일어나 막절념생이 양주를 치고 자사 송영을 감금하였는데

송영이 복련주에게 구원을 청하니 복련주가 친히 무리를 이끌고 가서 송영을 구하였다.

그 뒤 6진의 난으로 길이 끊겨 토욕혼과 북위의 통상교역도 끊어졌다.

 

복련주가 죽자 아들 과려가 뒤를 이었으며 이때 비로소 스스로 가한(황제)이라 하였다.

이때에 동위와 혼인 동맹을 맺는다.

과려가 그 사촌 누이동생을 천거하여 정제(동위의 효정제)가 이를 빈으로 삼았고,

또 동위에서는 제남왕 (원)광의 손녀를 광락공주로 삼아 과려의 처가 되게 하였다.

토욕혼과 동위가 대등한 관계가 된 것이다.

 

동위에 이어 토욕혼은 수나라와 또다시 혼인동맹을 맺는다

과려가 죽자 아들 세복이 수나라에 청혼하였으나 거절당했다.

그러나 수문제는 591년 광화공주를 세복의 처로 삼도록 하였다.

 

다음해 토욕혼에서 큰 난리가 나서 나라 사람들이 세복을 죽이고 세복의 동생 복윤을 세웠다.

복윤이 또 공주에게 장가 들수 있게 해달라고 하자 들어주었다.

 

수양제가 즉위하여 복윤이 아들 순을 수나라에 보내었고

수양제가 철륵으로 하여금 토욕혼을 치게 해 토욕혼이 격파되니 복윤은 동쪽으로 달아나

서평을 점유하였다. 양제가 다시 복윤을 치니 복윤은 달아나 그들의 땅이 비게 되었다.

그래서 동서 4천리 남북으로 2천리의 토욕혼의 땅을 수나라가 차지하였다.

 

수양제는 순을 돌려보내지 않고 수나라의 서울에 머물게 하였다.

복윤은 수천기를 이끌고 당항으로 갔다.

양제는 순을 세워 그들의 군주로 삼아 옥문 밖으로 나가 나머지 무리를 다스리도록하고

이락주를 보좌하도록 하였는데 그들이 서평에 이르자 이락주를 살해하니 순은 그곳에 가보지도 못하고 돌아왔다.

수양제 대업(605~617) 말에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복윤은 옛 땅으로 돌아왔고 토욕혼이 누차

하우(河右: 황하 오른쪽)를 침구하였으나 (수나라) 군현에서는 이를 통제하지 못하였다.

 

토욕혼의 혼인동맹은 당나라 때에도 계속된다.

당나라가 들어서자 토욕혼은 또 당나라에 혼인동맹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당태종은 혼담을 거절하고 복윤을 쳤으나 별볼일 없이 철수하였다.

다시 당나라는 복윤을 쳤는데 순이 항복하였으며 복윤은 자살하였다.

이에 나라 사람들이 순을 세워 가한(황제)으로 삼았다.

그러나 순은 오랫동안 수나라의 인질로 있었기 때문에 그 나라 사람들이 따르지 않았고

신하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그리고 그의 아들 낙갈발이 뒤를 이었다.

 

낙갈발이 다시 청혼하자 당태종은 홍화공주를 그에게 시집보냈다.

태종이 죽고 고종이 뒤를 잇자 다시 공주를 낙갈발에게 시집보냈다.

 

토욕혼의 끝은 지금의 티베트인 토번과의 싸움에서 패했기 때문인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토욕혼과 토번(티베트)는 서로 공격하다가 토번이 토욕혼을 제압하니 낙갈발은 홍화공주와 함께

당나라의 양주로 피신하고 당 고종은 설인귀를 보내 토욕혼을 구원하였으나

토번의 송첸캄포에게 패하여 토욕혼은 영토를 토번에게 전부 빼앗겼다.

이로써 토욕혼은 멸망하였다.

 

한편 낙갈발은 (당나라) 영주 땅으로 옮겨 그곳을 당에서 안락주(安樂州)를 설치해주어

거기서 여생을 마쳤다. 그 후 충, 선조, 휘호 순서로 아들과 그 아들들이 대를 이었으나

토번이 안락주마저 집어 삼키자 그 후손들은 삭방 하동의 경내로 흩어져 거주하였다.

덕종14년(798년) 이후 모용복이 죽자 그들의 대가 끊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