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와 중국의 관계-88(북위때)
차례 Ⅰ. 조공 Ⅱ. 책봉 Ⅲ. 배(拜)와 삼았다(以~爲~) 1. 북량 2. 토욕혼
2. 토욕혼 1) 토욕혼의 왕위계승 2) 토욕혼의 역사①(약사) 3) 토욕혼의 역사②(위서 토욕혼전) 4) 토욕혼과 북위의 논쟁(위서 토욕혼전)
<토욕혼과 북위의 논쟁 및 그 논쟁에서 알수 있는 점>
1. 토욕혼과 북위의 논쟁 위서 토욕혼전에 나오는 토욕혼의 주장과 북위의 대답, 그리고 그 결과를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1) 토욕혼의 주장: (1) 우리가 북위의 큰 적인 혁련정을 무찔러 사로잡으니 북위가 달라고 요청하여 주었다. 그런데 북위가 그 보답이라고 한 것은 왕이라고 한다는 문서와 수레 깃발 뿐이었다. (2) 그것은 허울 뿐이니 실질적 보상인 땅과 재물을 달라. (3) 그리고, 북위에 떠돌아 다니는 토욕혼의 백성을 돌려보내 달라. (4) 마지막으로 걸불일련 등을 데려가라.
2) 북위의 대답: (1) 왕이라는 명칭과 그에 상응하는 수레와 깃발을 준 것은 토욕혼이 북위와 반열이 동등함을 표시한 것이어서 토욕혼에게 국가와 외교적인 측면에서 커다란 보답을 한 것이다. (2) 따라서 더 이상 땅과 재물은 줄 수 없다 (3) 토욕혼의 백성은 돌려보내 주겠다. (4) 걸불일련 등은 데려가지 않겠다.
3) 결과 토욕혼은 북위와 관계를 축소하고 유송과 국교를 확대하며 더욱 돈독히 하고있다.
2. 토욕혼과 북위의 논쟁에서 알수 있는 점
토욕혼에서는 북위가 보답으로 왕이라는 명칭과 수레 깃발을 준 것은 허울이요 껍데기라고 하는데 북위에서는 그것이 북위와 동등한 반열을 표시한 것이니 토욕혼국에 대하여 국가나 외교적으로 대단한 보답을 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토욕혼에서 ‘땅이나 재물이라는 실질적 보답이 없는 것은 껍데기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쉽게 이해할수 있는데, 북위에서 왕이라는 명칭과 그에 상응하는 수레와 깃발을 준 것이 어째서 토욕혼을 북위와 동등한 반열로 표시하는 것이며 또한 그것이 어째서 외교적으로 상당한 보답을 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지는 얼른 이해가 가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북위가 왜 그런 주장을 하는지, 어떠한 생각에 입각해서 그러한 주장을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북위는 중국의 춘추 전국시대 제도에 입각해서 그러한 주장하고 있는데 자치통감을 보면 북위가 춘추 전국시대의 제도에 입각해서 자기들의 주장을 전개하고 있음을 쉽게 알수 있을 것이다.
자치통감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주(周) 위열왕 23년(무인년, 기원전 403년) 처음으로 진(晉)의 대부(大夫)인 위사(魏斯), 조적(趙籍), 한건(韓虔)을 제후로 삼았다.』 (【周紀一】威烈王二十三年(戊寅) 初命晉大夫魏斯、趙籍、韓虔為諸侯)
이로부터 중국은 춘추시대로부터 전국시대로 넘어간다. 이 기사를 써놓고 자치통감을 저술한 사마광은 구구절절한 평을 써놓고 있다. 이 사마광이 써놓은 사평(史評)을 보면 북위가 왜 그런 주장을 하는지 알 수 있다. 사평(史評) 가운데 북위의 주장을 알수 있는 부분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위 내용을 보면 명칭과 기물은 오로지 군주만 가질수 있는 것이어서 남에게 빌려주어서도 않된다고 하는데 북위는 명칭(왕)과 기물(수레와 깃발)을 아예 주었다.
이렇게 북위가 토욕혼에게 왕이라는 명칭과 그에 해당하는 기물인 수레와 깃발을 준 것은 토욕혼은 북위와 똑같은 군주임을 표시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토욕혼)의 반열은 상국(북위)과 같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한 것이며 그 때문에 토욕혼을 상당히 대우 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북위와 토욕혼의 관계는 상하관계가 아니라 동등관계임을 북위 스스로 국내외에 선포한 것이기 때문에 국가적으로나 외교적으로 상당한 대우를 하였고 따라서 더 이상의 영토와 재물을 줄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북위의 주장인, 북위의 공경대신 279명이 조당(朝堂)에 모여 의논한 결과를 위서 토욕혼전에 있는 문장을 그대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옛날 멀고 먼 곳의 밖에 있는 군주는,비록 사람이 많고 영토가 넓어도,작위가 화하(중국)과 비길 수가(같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폐하께서 (그 나라의) 왕과 관리를 더욱 총애하여,정상적인 분수를 넘는,수레와 깃발 장식을 허용하셨으니, 그들의 반열은 상국(북위)과 같게 되었습니다.(古者要荒之君,雖人土眾廣,而爵不擬華夏。陛下加寵王官,及越常分,容飾車旗,班同上國)”
이와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토욕혼이 그에 더하여 영토와 재물을 더 달라고 하는 것을 가지고 “탐욕은 가히 끝이 없다 하겠습니다.”라고 북위의 공경대신 279명이 함께 말한 것이다.
여기서 또한번 반드시 확인해야 할 사항은 왕이라는 명칭과 그에 해당하는 기물인 수레와 깃발을 준 것, 즉, 토욕혼의 모괴에게 대장군 서진왕을 배(拜)한 행위(拜慕璝為大將軍、西秦王)는 “그들(토욕혼)의 반열이 상국(북위)과 같게 되었다.”는 북위의 자백이다.
왕을 배(拜)한 행위가 토욕혼이 북위의 하위국가임을 표시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 행위가 북위와 반열이 동등한 국가임을 북위 스스로 표방한 행위라는 점이다.
다시말해서 남북조의 여러나라가 고구려와 국교를 맺으면서 왕이라는 명칭과 그에 해당하는 기물인 수레와 깃발, 심지어 의관과 칼 및 패물(佩物), 복물(服物)까지 주고 있는데 그것은 중국 남북조 여러나라와 고구려의 반열이 동등함을 중국 남북조 여러나라가 스스로 표방한 것이라는 점을 반드시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왕을 배(拜)한 행위는 남북조 여러나라가 고구려를 자기들의 하위국가임로 선포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반드시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3. 토욕혼과 북위의 논쟁의 결과에서 알수 있는 점
토욕혼은 북위가 토욕혼을 자기들과 동등한 반열로 대우를 하였다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영토와 재물을 더 이상 주지않자 토욕혼은 북위와의 관계를 축소하고 유송과 외교관계를 확대하고 돈독히 하고 있다. 즉, 토욕혼이 왕이라는 명칭과 그에 해당하는 기물(수레 깃발)을 받은 후에도 토욕혼은 북위의 하위국가나 종속국이 아닌 자주 독립국가로써 자국의 이익에 따라 양다리 외교행위를 하고 있음을 볼수 있다.
이것으로 볼때 왕이라는 명칭과 그에 해당하는 기물(수레 깃발)을 받았다는 것이 그것을 준 나라의 하위국가나 종속국가가 되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있다.
결론적으로, 왕이라는 명칭과 그에 해당하는 기물인 수레와 깃발을 준 것(왕을 배-拜 한 것) 은 그것을 받은 국가와 그것을 준 국가의 반열이 동등한 국가임을 그것을 준 국가 스스로 표방한 행위이며
반대로 왕이라는 명칭과 그에 해당하는 기물(수레 깃발)을 받은 행위는 그것을 준 나라의 하위국가나 종속국가가 되었다는 것을 뜻하는 게 아니다.
이 점을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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