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배(拜)와 ‘삼았다(以~爲~)’는 것의 실체11(토욕혼과 북위의 논쟁)

상 상 2013. 4. 12. 17:25

 

고구려와 중국의 관계-88(북위때)

 

차례

Ⅰ. 조공

Ⅱ. 책봉

Ⅲ. 배(拜)와 삼았다(以~爲~)

    1. 북량

    2. 토욕혼

 

 

2. 토욕혼

1) 토욕혼의 왕위계승

2) 토욕혼의 역사①(약사)

3) 토욕혼의 역사②(위서 토욕혼전)

4) 토욕혼과 북위의 논쟁(위서 토욕혼전)

 

<토욕혼과 북위의 논쟁 및 그 논쟁에서 알수 있는 점>

 

1. 토욕혼과 북위의 논쟁

위서 토욕혼전에 나오는 토욕혼의 주장과 북위의 대답, 그리고 그 결과를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1) 토욕혼의 주장:

(1) 우리가 북위의 큰 적인 혁련정을 무찔러 사로잡으니 북위가 달라고 요청하여 주었다.

    그런데 북위가 그 보답이라고 한 것은 왕이라고 한다는 문서와 수레 깃발 뿐이었다.

(2) 그것은 허울 뿐이니 실질적 보상인 땅과 재물을 달라.

(3) 그리고, 북위에 떠돌아 다니는 토욕혼의 백성을 돌려보내 달라.

(4) 마지막으로 걸불일련 등을 데려가라.

 

2) 북위의 대답:

(1) 왕이라는 명칭과 그에 상응하는 수레와 깃발을 준 것은 토욕혼이 북위와 반열이 동등함을 표시한 것이어서

    토욕혼에게 국가와 외교적인 측면에서 커다란 보답을 한 것이다.

(2) 따라서 더 이상 땅과 재물은 줄 수 없다

(3) 토욕혼의 백성은 돌려보내 주겠다.

(4) 걸불일련 등은 데려가지 않겠다.

 

3) 결과

토욕혼은 북위와 관계를 축소하고 유송과 국교를 확대하며 더욱 돈독히 하고있다.

 

 

2. 토욕혼과 북위의 논쟁에서 알수 있는 점

 

토욕혼에서는 북위가 보답으로 왕이라는 명칭과 수레 깃발을 준 것은 허울이요 껍데기라고 하는데

북위에서는 그것이 북위와 동등한 반열을 표시한 것이니

토욕혼국에 대하여 국가나 외교적으로 대단한 보답을 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토욕혼에서 ‘땅이나 재물이라는 실질적 보답이 없는 것은 껍데기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쉽게 이해할수 있는데,

북위에서 왕이라는 명칭과 그에 상응하는 수레와 깃발을 준 것이 어째서 토욕혼을 북위와 동등한 반열로 표시하는 것이며

또한 그것이 어째서 외교적으로 상당한 보답을 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지는 얼른 이해가 가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북위가 왜 그런 주장을 하는지,

어떠한 생각에 입각해서 그러한 주장을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북위는 중국의 춘추 전국시대 제도에 입각해서 그러한 주장하고 있는데 자치통감을 보면

북위가 춘추 전국시대의 제도에 입각해서 자기들의 주장을 전개하고 있음을 쉽게 알수 있을 것이다.

 

자치통감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주(周) 위열왕 23년(무인년, 기원전 403년)

처음으로 진(晉)의 대부(大夫)인 위사(魏斯), 조적(趙籍), 한건(韓虔)을 제후로 삼았다.』

(【周紀一】威烈王二十三年(戊寅) 初命晉大夫魏斯、趙籍、韓虔為諸侯)

 

이로부터 중국은 춘추시대로부터 전국시대로 넘어간다.

이 기사를 써놓고 자치통감을 저술한 사마광은 구구절절한 평을 써놓고 있다.

이 사마광이 써놓은 사평(史評)을 보면 북위가 왜 그런 주장을 하는지 알 수 있다.

사평(史評) 가운데 북위의 주장을 알수 있는 부분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신 (사마)광이 아룁니다.『신이 듣건데 천자의 직책은 예(禮)보다 큰 것이 없고, 예는 분(分)보다 더 큰 것이 없으며, 분(分)은 명칭보다 큰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무엇을 예라고 합니까? 기강이 바로 이것입니다. 무엇을 분(分)이라고 합니까? 임금과 신하가 바로 이것입니다. 무엇을 명칭이라고 합니까? 공, 후, 경, 대부가 바로 이것입니다.

(臣光曰:臣聞天子之職莫大於禮,禮莫大於分,分莫大於名。何謂禮?紀綱是也;何謂分?君臣是也;

何謂名?公、侯、卿、大夫是也)

......(중략)........

문왕이 주역을 서술할 때 건괘와 곤괘를 첫 머리로 삼았는데 공자가 말씀을 달기를“하늘은 높고

땅은 낮으니 건과 곤이 정해지고, 낮은 것과 높은 것이 진열되니 귀한 것과 천한 것의 자리가 정해졌다.”하셨으니 임금과 신하의 지위는 하늘과 땅처럼 뒤바뀔 수 없음과 같음을 말한 것입니다.

(文王序《易》,以乾坤為首。孔子系之曰:「天尊地卑,乾坤定矣,卑高以陳,貴賤位矣。」言君臣之位,猶天地之不可易也)

......(중략)........

예는 귀천을 분별하고, 친하고 소원함에 따라 순서를 두며, 온갖 재물을 재단하고,

여러가지 일을 제재하니, 명칭이 아니면 드러나지 못하고 기물이 아니면 나타나지 못합니다.

(그리하여) 명칭으로 명령하고, 기물로써 구별하니, 이렇게 한 뒤에야 상하가 찬란하게 차례가 있게 되니 이것이 예의 큰 법입니다.

명칭과 기물이 이미 없어지면 예가 어떻게 홀로 보존될 수 있겠습니까?

(夫禮,辨貴賤,序親疏,裁群物,制庶事。非名不著,非器不形。

名以命之,器以別之,然後上下粲然有倫,此禮之大經也。名器既亡,則禮安得獨在哉?)

 

옛날에 중숙우해(仲叔于奚)가 위나라에 큰 공이 있었는데 고을을 사양하고

제후가 사용하는 번영(繁纓)을 요청하자,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고을을 많이 주는 것만 못하다. 기물과 명칭은 남에게 빌려줄 수가 없으니 군주가 맡는 것이다.

(만약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는 것은 정사를 주는 것이고) 정사가 망하면 나라도 따라서 망한다.”고

하였으며, (昔仲叔于奚有功於衛,辭邑而請繁纓,孔子以為不如多與之邑。惟器與名,不可以假人,君之所司也。<생략된 부분: 名以出信,信以守器,器以藏禮,禮以行義,義以生利,利以平民,政之大節也。若以假人,與人政也。>政亡,則國家從之)

 

위나라 군주가 공자를 기다려 정사를 하려하자  공자는 먼저 명분을 바로잡고자 하시어 말씀하시기를

“명칭이 바르지 않으면 백성들이 수족을 둘 곳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衛君待孔子而為政,孔子欲先正名,以為名不正則民無所措手足)

 

번영은 작은 물건인데도 공자가 그에게 주는 것을 애석히 여기셨고

명분을 바로잡는 것은 하찮은 일인데도 공자가 이것을 우선하신 것은

진실로 명칭과 기물이 이미 혼란하면 상하가 서로 보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夫繁纓,小物也,而孔子惜之;正名,細務也,而孔子先之。誠以名器既亂,則上下無以相有故也)

 

☆ 번영(繁纓):

- 번(繁)은 말갈기 위의 장식이고 영(纓)은 말 가슴 앞의 장식이다.

- 번(繁)은 지금 말의 큰 띠이고 영(纓)은 가죽을 깎아 만드니 제후가 사용하는 복식이다.

 

☆ 중숙우해(仲叔于奚):

-춘추시대에 위후(衛侯)가 제(齊)나라를 공격하여 신축(新築)에서 싸웠는데 중숙우해(仲叔于奚)가

손환자(孫桓子)를 구원하여 살려주었다. 위후(衛侯)가 고을을 상으로 내렸으나

중숙우해(仲叔于奚)는 이것을 사양하고 제후라야 쓸수 있는 곡현(曲縣)과 번영(繁纓)을 갖추고

조회할 것을 청하니 이를 허락하였다. 공자는 이 말을 듣고 “애석하구나! 고을을 많이 주는 것만 못하다. 기물과 명칭은 아무에게나 줄수 없는 것이니 군주가 맡은 것이다.”하고 탄식하였다.

<이 내용은 춘추좌전 성공(成公) 전(傳) 2년조에 있음>

 

(※참고, 윗 내용에 대한 춘추좌전 원문:

新築人仲叔于奚救孫桓子,桓子是以免。既,人賞之以邑,辭,請曲縣、繁纓以朝。許之。仲尼聞之曰:「惜也,不如多與之邑。唯器與名,不可以假人,君之所司也)

 

※곡현(曲縣)은 삼면(三面)에 악기를 설치한 수레이고

  번영(繁纓)은 제후의 말에만 꾸밀수 있는 장식이다

 

위 내용을 보면 명칭과 기물은 오로지 군주만 가질수 있는 것이어서 남에게 빌려주어서도 않된다고 하는데

북위는 명칭(왕)과 기물(수레와 깃발)을 아예 주었다.

 

이렇게 북위가 토욕혼에게 왕이라는 명칭과 그에 해당하는 기물인 수레와 깃발을 준 것은

토욕혼은 북위와 똑같은 군주임을 표시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토욕혼)의 반열은 상국(북위)과 같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한 것이며

그 때문에 토욕혼을 상당히 대우 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북위와 토욕혼의 관계는 상하관계가 아니라 동등관계임을 북위 스스로 국내외에 선포한 것이기 때문에

국가적으로나 외교적으로 상당한 대우를 하였고 따라서 더 이상의 영토와 재물을 줄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북위의 주장인, 북위의 공경대신 279명이 조당(朝堂)에 모여 의논한 결과를 위서 토욕혼전에 있는 문장을 그대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옛날 멀고 먼 곳의 밖에 있는 군주는,비록 사람이 많고 영토가 넓어도,작위가 화하(중국)과 비길 수가(같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폐하께서 (그 나라의) 왕과 관리를 더욱 총애하여,정상적인 분수를 넘는,수레와 깃발 장식을 허용하셨으니,

그들의 반열은 상국(북위)과 같게 되었습니다.(古者要荒之君,雖人土眾廣,而爵不擬華夏。陛下加寵王官,及越常分,容飾車旗,班同上國)”

 

이와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토욕혼이 그에 더하여 영토와 재물을 더 달라고 하는 것을 가지고

“탐욕은 가히 끝이 없다 하겠습니다.”라고 북위의 공경대신 279명이 함께 말한 것이다.

 

여기서 또한번 반드시 확인해야 할 사항은

왕이라는 명칭과 그에 해당하는 기물인 수레와 깃발을 준 것,

즉, 토욕혼의 모괴에게 대장군 서진왕을 배(拜)한 행위(拜慕璝為大將軍、西秦王)는

“그들(토욕혼)의 반열이 상국(북위)과 같게 되었다.”는 북위의 자백이다.

 

왕을 배(拜)한 행위가 토욕혼이 북위의 하위국가임을 표시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 행위가 북위와 반열이 동등한 국가임을 북위 스스로 표방한 행위라는 점이다.

 

다시말해서 남북조의 여러나라가 고구려와 국교를 맺으면서

왕이라는 명칭과 그에 해당하는 기물인 수레와 깃발, 심지어 의관과 칼 및 패물(佩物), 복물(服物)까지 주고 있는데

그것은 중국 남북조 여러나라와 고구려의 반열이 동등함을 중국 남북조 여러나라가 스스로 표방한 것이라는 점을

반드시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왕을 배(拜)한 행위는 남북조 여러나라가 고구려를 자기들의 하위국가임로 선포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반드시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3. 토욕혼과 북위의 논쟁의 결과에서 알수 있는 점

 

토욕혼은 북위가 토욕혼을 자기들과 동등한 반열로 대우를 하였다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영토와 재물을 더 이상 주지않자 토욕혼은 북위와의 관계를 축소하고 유송과 외교관계를 확대하고 돈독히 하고 있다.

즉, 토욕혼이 왕이라는 명칭과 그에 해당하는 기물(수레 깃발)을 받은 후에도

토욕혼은 북위의 하위국가나 종속국이 아닌 자주 독립국가로써 자국의 이익에 따라 양다리 외교행위를 하고 있음을 볼수 있다.

 

이것으로 볼때

왕이라는 명칭과 그에 해당하는 기물(수레 깃발)을 받았다는 것이

그것을 준 나라의 하위국가나 종속국가가 되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있다.

 

 

결론적으로,

왕이라는 명칭과 그에 해당하는 기물인 수레와 깃발을 준 것(왕을 배-拜 한 것) 은 그것을 받은 국가와

그것을 준 국가의 반열이 동등한 국가임을 그것을 준 국가 스스로 표방한 행위이며

 

반대로

왕이라는 명칭과 그에 해당하는 기물(수레 깃발)을 받은 행위는

그것을 준 나라의 하위국가나 종속국가가 되었다는 것을 뜻하는 게 아니다.

 

이 점을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