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와 중국의 관계-84(북위때)
차례 Ⅰ. 조공 Ⅱ. 책봉 Ⅲ. 배(拜)와 삼았다(以~爲~) 1. 북량
1. 북량 1) 북량의 대외관계- 유송, 북위 2) 북량의 역사ⅰ(송서 권98 대저거몽손전) 3) 북량의 역사ⅱ(위서 권102 거사국전 등) 4) 북량 역사연표 5) 유연의 역사(위서 연연전 번역문) 6) 북량의 대외관계표 7) 북량의 대외관계 분석
7) 북량의 대외관계 분석
저거몽손이 먼저 동진에게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 양국관계가 성립하였는데(418년) 동진의 뒤를 이은 유송의 창업군주 유유는 즉위 한지 한 달만에 서량에게 먼저 작위를 부여하여 유송과 서량의 관계가 돈독함을 과시하고 있다.(420년) 그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서량의 이고, 이흠 부자가 한족(漢族)임에 있다.(저거몽손은 흉노족) 이고, 이흠이 한족이기 때문에 같은 한족인 유유가 서량과 먼저 손을 잡은 것이고, 바로 그 달에 저거몽손이 서량을 공격하여 이흠 등 3형제를 죽이는 힘의 우위를 보이자, 그 다음해부터 북량의 저거몽손에게 작위를 부여하고 있다.(421년)
계속해서 북량이 서량을 멸망시키자 작위를 또 올리고(422년) 외교관계를 트고 통상교역을 하자(조공) 작위를 더 올리며 왕으로 (책)봉한다고 하고 있으며 그해 연말에 가서 작위를 또 올리고 있다.(423년)
(여기에서 (책)봉한다고 하면 대외적으로 하위국가로 대하겠다는 뜻인데 북량은 왜 가만히 있었는가? 거기에는 이런 이유가 있다.
북량의 저거몽손은 흉노족이다. 즉, 지금 저거몽손이 차지하고 있는 북양주는 원래 그들의 땅이 아니다. 그런데 (책)봉한다고 하는 것은 ‘그 지역이 너의 땅이다’라고 공인한 것이므로 북량은 자기가 치지하고 있는 땅을 대외적으로 북량의 영토로 공인해 주고 있으니 좋고 유송은 어차피 북량이 차지하고 있는 땅을 그들의 영토로 인정해주면서 속으로는 유송의 하위국이라고 해서 좋았던 것이다. 그래서 저거몽손을 책봉한다고 했을때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3년 뒤에 벼슬을 또한번 더 올리고 옛날에는 귀했던 책을 요구하자 475권씩이나 보내주고 희귀본은 손으로 일일이 베껴서까지 보내준다.(426년)
421년, 422년, 423년, 426년의 이러한 모습들은 유송이 북량에게 많은 공을 들이는 모습이 역력한데 왜 그런 것이고,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당시는 이른바 남북조 시대로 남쪽의 유송과 북쪽의 북위가 서로 싸우던 시대이다. 그런데 남쪽의 유송이 힘이 약했다. 따라서 힘이 약한 유송은 주변의 나라들과 힘을 합해 북위와 싸우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송은 북위보다 주변국에게 많은 공을 들이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또한, 북량이 서량을 꺾는 힘의 우위를 과시하자 그때부터 작위를 주고, 북량이 외교관계를 트고 통상교역을 하자 작위를 올리고 왕으로 (책)봉한다고 하며 그해 연말에 가서 작위를 또 올리고, 그 다음 해에 작위를 또한번 더 올리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로 유송이 북량을 자기 세력으로 끌어들이는 모습이다. 즉, 동맹결성 및 동맹 강화를 의미하고 있다.
힘이 약했던 유송이 주변국들과 손을 잡고 북위에 대항하기 위해서 작위를 준다는 구실로 주변국들을 끌어들여 동맹을 맺고 동맹을 강화하는 모습이 아니고 무엇인가?
유송과 북위 양 강이 싸울 때 그 주변에 있는 국가들은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이익인가? 유송과 북위의 중립에서는 게 이익이다. 유송과 북위 모두에게 등거리 외교를 펼치는 게 이익이다. 유송과 북위 모두에게 양다리 외교를 펼치는 게 이익이다. 두 나라 모두와 관계를 가지는 것이 이익이다.
바로 426년에 북량은 그러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426년 12월 북량은 북위에게 양다리 외교를 펼치기 시작해서, 그 다음 2년 뒤인 428년에는 401년 개국하자마자 북위와 외교관계를 열고 통상교역을 한 이래 27년 동안 없었던 북위와의 외교 통상교역(조공)을 다시 하고 있으며, 그 다음 해인 429년에는 유송과 외교 통상교역을 하고 있다. 전형적인 양다리 외교를 펼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 다음, 430년에 유송이 북량의 (저거)흥국을 하서왕 세자로 삼는 모습을 보면 유송이 북량의 왕가에게 무슨 벼슬로 삼았다든지 무슨 벼슬로 올려주었다든지 심지어 왕으로 (책)봉하였다든지 하는 것이 얼마나 실질관계를 동반하지 않는 말장난에 불과하며 그것의 실질은 동맹(국가간 결속)관계의 표현인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미 소개한 송서 저호전 중 대저거몽손전(傳)에서 알수 있듯이, 북량의 저거몽손은 (저거)흥국을 420년 12월에 세자로 삼았었고 429년에 흥국은 서진의 걸불무반에게 사로잡혔으며 저거몽손은 이를 빼내려고 곡식 30만곡 이라는 어마어마한 양을 보냈으나 걸불무반이 끝내 돌려주지 않자 할수 없이 (저거)보리를 세자로 삼았었다.
이렇게 429년에 북량의 저거몽손이 이미 흥국을 넘어 보리를 세자로 삼은 상태에서, 그러한 사실도 까맣게 모르고 1년이나 지난 뒤인 430년에 유송이 흥국을 하서왕 세자로 삼는 모습을 보면 유송이 북량의 왕가에게 무엇으로 삼는 다는 것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말장난이고 그것이 동맹결속을 위한 형식적 절차인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아니, 북량에서 이미 10년 전에 세자로 삼은 사람에게 생색을 낸답시고 10년이나 지난 뒤에 그 나라 세자로 삼는다는 것은 무엇이고, 그나마 당사자가 있는지 없는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그 나라 세자로 삼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동맹강화를 위한 쌩쑈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것으로써 유송이 북량의 왕에게 무엇으로 삼았다든지 무슨 작위로 올려주었다든지 심지어 왕으로 (책)봉하였다든지 하는 것은 동맹을 맺고 동맹을 유지하기 위한 쌩쑈임이 그대로 드러난 것이다.
다시말해서 유송이 북량의 왕에게 무엇으로 삼았다든지 무슨 작위로 올려주었다든지 심지어 왕으로 (책)봉하였다든지 하는 것은 동맹을 맺고 동맹을 강화했다는 말일 뿐이다.
유송은 왜 이렇게 주변에 있는 국가에게 쌩쑈를 열심히 하는가? 힘이 약하기 때문이다. 유송 혼자서는 북위를 당해낼 수가 없자 주변에 있는 국가들 모두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 동맹을 맺음으로써 북위의 힘을 분산시키고 동맹국들과 힘을 합하여 북위에게 대항하고자 한 때문이다.
그 다음, 431년 북위가 하서왕 저거몽손에게 가절, 시중, 도독 양주 및 서역강융 제군사、임시 정서대장군、태부、양주목、양왕이라고 한 것은 무엇인가?
제 아무리 힘이 강한 북위라도 유송이 주변에 있는 나라들과 모조리 동맹을 맺고 동맹을 강화하는데야 별수 있겠는가? 자기도 동맹에 나서야지...
30년 전인 401년 저거몽손이 나라를 세우자마자 북위에게 외교관계를 트고 통상교역을 했는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고 다시 3년 전인 428년에 또 북량이 양다리 외교를 펼쳤는데도 반응이 없다가 그해(431년) 6월 혁련정이 북쪽으로 저거몽손을 습격하다가 토욕혼의 (모용)모귀에게 잡힌 사건을 게기로 저거몽손이 아들 저거안주를 북위에 입시케 하는 모습을 보이자 기다렸다는 듯이 왕의 작위를 준 것은 그런 구실을 통하여 북량을 자기의 동맹 세력으로 끌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것이 동맹이라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도 확인 할 수 있다.
자치통감을 보면, 『433년 4월, 이보다 앞서 (북)위의 주군이 이순을 파견하여 무선왕(저거몽손)의 딸을 맞이하여 부인으로 삼았는데 마침 사망하게 되자 거거목건은 선왕의 뜻이라고 하면서 그의 누이동생 흥평공주를 (북)위에 보내자 우소희로 삼았다.』 <자치통감 송기4 문제원가 10년(433년) 4월조> 즉, 결혼 동맹을 맺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 북위도 공주를 북량에 시집보내 결혼 동맹을 완성시키고 있다. 『437년 11월 북위의 세조가 그의 누이 동생 무위공주를 하서왕 저거목건에게 처로 삼게 하였다.』 <자치통감 송기5 문제 원가 14년(437년) 11월조>
그 다음, 432년 유송이 (저거)보리를 하서왕 세자로 삼았다고 하는것은 동맹강화를 위한 또한번의 노력임을 알 수 있다. 보리는 429년에 저거몽손이 이미 세자로 삼았는데 3년이 지난 432년에 와서 세자로 삼는 다는 것은 그러한 것을 구실로 동맹결속을 강화하겠다는 의지의 표현 밖에 무엇이 더 있는가?
그 다음, 433년 4월 저거몽손이 죽고 북량의 세자 (저거)보리 대신에 (저거)목건을 북량의 신하들이 추대하여 왕으로 세우자, 북위는 그 해(433년)에 (저거)목건을 거기장군으로 삼고 하서왕으로 고쳐 (책)봉하고 있다. 이것은 그동안 유송에 비해 동맹외교가 늦었던 것을 한꺼번에 만회한 것이다. (책)봉이라는 표현은 유송에 대응하여 맞춘 것이다.
그렇지만, 저거목건은 그 다음 해인 434년, 유송의 문제에게 저거몽손의 시호를 청하고 있으며 유송은 저거목건이 해달라는대로 시호를 주면서, 저거목건에게 북위에서 저거몽손에게 주었던 벼슬 명칭과 유사하게 벼슬을 주고 있다. 즉, 저거목건을 지절 산기상시 도독 양진하사 사주군사 정서대장군 겸 호흉노중랑장 서위교위 양주자사 하서왕으로 삼는다.
이것은 두가지다. 하나는 저거목건 역시 양다리 외교를 행하고 있다는 것이고 또한 유송이 준 작위는 북위에서 준 작위에 대응하여 준 것이다. 즉, 북량의 양다리 외교에 유송과 북위가 서로 동맹경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동맹경쟁을 하는 것은 북량이 양다리 외교를 한 까닭이다. 즉, 433년 북위가 저거목건에게 작위를 주며 왕으로 (책)봉하는데, 저거목건은 그와 상관없이 434년에 유송에게 시호를 청하면서 자기가 왕으로 등극했음을 알려 유송으로 하여금 자기에게 북위에서 준 만큼의 작위를 주게하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그 다음 북위가 그 전부터 북량을 치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다가 437년에 또 북량이 북위의 남쪽에 있는 적인 유송에게 양다리 외교를 펼치고, 또한 북위의 북쪽에 있는 적인 유연과 연계를 하고 있다는 사신의 보고를 받자 439년 북위는 북량을 친다. 북위가 북량을 친 것은 두 말할 것도 없이 북량이 양다리 외교를 한 때문이다. 강대국인 북위의 입장에서 볼때 북량이 국제적 관계를 이용하여 양쪽에서 이득을 취하는 것이 괘씸하고 또한편 위험하다. 언제 유송, 유연과 한패가 되어 북위를 칠 줄 모르기 때문이다. 이렇게 강대국이 약소국에게 농락당하고 자기들의 위험성을 제거하기 위하여 북위는 북량을 친다.
북량의 입장에서 보면 힘이 약한 양다리 외교는 매우 위험하며, 불가능 하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힘이 약한 중립국은 중립국이 될수 없다는 사실을 역사적으로 증명한 사례이기도 하다. 힘이 약한 등거리 외교는 양쪽 어디에서 공격할 줄 모르기 때문에 매우 위험하며 결국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역사적으로 보여준 사례라고 말할 수 있다.
그 다음, 441년 저거무휘가 유사(타클라마칸 사막)을 건너 선선국을 점거한 뒤 442년 유송이 저거무휘를 정서대장군 양주자사로 삼은 것은 동맹이지만 실질적 동맹의 의미는 없다. 양주는 이미 북위에 빼앗긴 것이고, 위서 서역전에 있는 선선국전에 의하면, 선선국은 평성(지금의 산서성 대동시)에서 7600리 떨어진 곳에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유송의 서울인 건업(현 남경시)에서는 만리이상 떨어진 곳이다. 옛날에는 가는데만 1년 정도 걸리는 거리다. 따라서 무슨 실질적 동맹 관계가 있겠는가?
또한 그해에 사신을 보내 통교를 하자 유송은 저거무휘를 하서왕으로 삼는데 이런 것이 바로 왕으로 삼았다는 기록의 진실이 무엇인지 말해준다. 북량이 하서지방을 빼앗기고 타클라마칸 사막까지 건너 이역만리 선선국으로 도망갔는데 무슨 하서왕인가? 아무런 실질적 의미가 없는 말장난뿐이다.
심지어 444년 무휘가 죽고 (무휘의 동생) 안주가 즉위하니 저거안주를 하서왕에 (책)봉까지 하는데 그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봉(封)’이란 말은 지역의 경계를 나타내는 말로써 자기 영토의 일부를 떼주며‘그 영역을 다스려라’그런 말인데 하서지방은 유송의 영토가 아닐뿐더러 저거안주도 하서지방에 있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하서왕에‘(책)봉’했다고 송서 본기는 버젓이 기록하고 있다. 이런 것은 명백한 사기이다. 그런데 이런 거짓말 기록이 중국정사에는 무수히 등장한다. 우리는 중국 사서를 볼때 이런 점을 특히 주의해서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하나 여기서 주목해 보아야 할 사항은 실질적 동맹관계가 없어지자 그때부터는 저거무휘가 사신을 보내 통교를 하면 그 자리에서 작위를 주고 왕으로 삼고 책봉하는 행동이 반복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조공을 하면 작위를 주고 조공을 하면 작위를 주는 행위는 실질적 동맹 관계가 없을때 벌어지는 행동임을 알수 있다.
다시말해서 조공을 하면 작위를 주고, 조공을 하면 왕으로 삼고, 조공을 하면 작위를 높여주는, 조공과 작위가 바로 연결되는 것은 두나라 사이에 실질적 동맹관계가 없다는 것을 뜻한다. 소위 조공책봉 체계에 해당하는 것은 그냥 말 장난에 불과한 동맹이며 허깨비 동맹이고 이름뿐인 가짜 동맹이라는 말이다. 그것의 대표적인 사례가 유송과 왜국의 관계이다.
어쨌거나, 여기서 다시한번 확인하고자 하는 것은, 배하였다든지, 삼았다든지, 심지어 (책)봉했다는 말은 ‘동맹을 맺었다, 또는 동맹을 강화하였다’는 말이라는 것이다.
즉, 그 말이 무슨 하위국가로 만들었다거나 무슨 자기 나라 관리로 임명하였다거나 종속국가로 만들었다는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반드시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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