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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연은 동호의 먼 후손이고 성은 욱구려씨이다.
처음 신원(제) 말년에 약탈을 하던 기졸이 한명의 노예를 사로잡았는데 두발이 눈썹 언저리부터 나고 본래의 성명을 잊어 그 주인이 자를 목골려라고 하였다. 목골려라는 것은‘머리가 벗겨졌다’이다. 목골려와 욱구려는 소리가 서로 비슷하기 때문에 뒤에 자손은 이로 인해 씨로 삼았다. 목골려는 장성하자 노예를 면하고 기졸이 되었다. 목제 시기에 기일이 늦은 것에 연루되어 참수를 당하게 되었는데 도망하여 넓은 사막과 계곡 사이에 숨에 도망자 백여명을 모아 홀돌린부에 의지하였다. 목골려가 죽고 아들 거록회는 웅건하여 처음 부락무리를 가지게 되자 스스로 유연이라고 불렀는데 나라에 역속하였다. 뒤에 세조가 그들이 무지하고 모양이 벌레 같다고 하여 그 명칭을 연연이라고 고쳤다. |
蠕蠕,東胡之苗裔也,姓郁久閭氏。始神元之末,掠騎有得一奴,髮始齊眉,忘本姓名,其主字之曰木骨閭。「木骨閭」者,首禿也。木骨閭與郁久閭聲相近,故後子孫因以為氏。木骨閭既壯,免奴為騎卒。穆帝時,坐後期當斬,亡匿廣漠谿谷間,收合逋逃得百餘人,依紇突隣部。木骨閭死,子車鹿會雄健,始有部眾,自號柔然,而役屬於國。後世祖以其無知,狀類於蟲,故改其號為蠕蠕。 |
거록회는 부족장이 되자 해마다 말과 가축 담비와 원숭이 가죽을 바쳤고 겨울이면 막남으로 건너 이사왔다가 여름이면 막북으로 돌아가 살았다. 거록회가 죽고 아들 토노괴가 즉위하였고, 토노괴가 죽자, 아들 발제가 즉위하였으며, 발제가 죽자, 아들 지속원이 즉위하였다.
지속원이 죽자 그 부가 둘로 나뉘어 지속원의 큰 아들 필후발이 아버지를 이어 동쪽에 살았고, 둘째 아들 온홀제는 서쪽에 따로 살았다.
소성(제)가 죽었을 때 온홀제는 (유)위진에 붙어 우리를 배반하였다.
등국 연간에 토벌하니 연연은 부를 옮겨 달아나 추격하여 고비 사막의 남장산 아래에서 대파하고 그 부의 반을 포로로 잡았다. 필후발과 부족 수령 옥격이 각각 남은 부락을 수습하여 달아나니 장손고와 장손비를 보내 추격하여 사막을 건넜다. (장손)고가 평망천에 이르러 옥격을 대파하고 포로로 잡아 참수하고 널리 알렸다. (장손)비가 탁사산에 이르러 필후발을 따라잡자 (필후)발이 부락을 들어 항복을 청하였다. 온흘제 아들 갈다한과 갈다한의 형 힐귀지, 사륜, 곡률 등과 아울러 종당 수백명을 잡아 여러 부에 분배하였다. 온흘제가 서쪽으로 달아나 장차 (유)위진에게 돌아가려고 해서 태조가 추격하여 발나산에 이르자 온흘제가 다시 항복하니, 태조가 위무하여 예전과 같이 하였다. |
車鹿會既為部帥,歲貢馬畜、貂豽皮,冬則徙度漠南,夏則還居漠北。車鹿會死,子吐奴傀立。吐奴傀死,子跋提立。跋提死,子地粟袁立。地粟袁死,其部分為二,地粟袁長子匹候跋繼父居東邊,次子縕紇提別居西邊。及昭成崩,縕紇提附衞辰而貳於我。登國中討之,蠕蠕移部遁走,追之,及於大磧南牀山下,大破之,虜其半部。匹候跋及部帥屋擊各收餘落遁走,遣長孫嵩及長孫肥追之,渡磧。嵩至平望川,大破屋擊,禽之,斬以徇。肥至涿邪山,及匹候跋,跋舉落請降。獲縕紇提子曷多汗及曷多汗兄詰歸之、社崘、斛律等并宗黨數百人,分配諸部。縕紇提西遁,將歸衞辰,太祖追之,至跋那山,縕紇提復降,太祖撫慰如舊。 |
(등국) 9년(394년) 갈다한과 사륜이 부락민을 거느리고 그 아비는 버리며 서쪽으로 달아나서 장손비가 가볍게 무장한 기병으로 추격하여
상군의 발나산에 이르러 갈다한을 참수하고 그 무리를 전부 죽였다.
사륜과 수백명이 필후발에게 달아나니 필후발은 남쪽 변방에 거처하게 하였는데 그곳은 (필후발의) 궁정에서 오백리 떨어진 곳이나 그 아들 4명에게 감시하라고 명령하였다. 얼마뒤 사륜이 그 사속을 이끌고 필후발의 네 아들을 잡고 반란을 일으켜 필후발을 습격하였다. 여러 아들이 나머지 무리를 수습하여 도망가 고차 곡률부에 의존하였다. 사륜은 흉악 교활하고 권모술수가 있어서 한달여 만에 필후발을 석방하여 그의 여러 아들에게 돌아가게 하여 모아서 다 죽이려고 하였다. 몰래 거병하여 필후발을 습격하여 필후발을 죽였다. 아들 계발, 오힐 등 15명은 태조에게 귀부하였다. 사륜은 필후발을 죽이고 왕의 군대가 토벌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오원 이서의 여러 부를 노략질하고 북쪽으로 큰 사막을 건넜다. 태조는 (계)발과 (오)힐을 안원장군 평극후로 삼았다. 사륜은 요흥과 화친하였다. 태조가 재관장군 화돌을 보내 출불, 소고연 여러 부를 습격하니 사륜이 기병을 보내 소고연을 구원하였으나 (화)돌이 도리어 격파하였다. |
九年,曷多汗與社崘率部眾棄其父西走,長孫肥輕騎追之,至上郡跋那山,斬曷多汗,盡殪其眾。社崘與數百人奔匹候跋,匹候跋處之南鄙,去其庭五百里,令其子四人監之。既而社崘率其私屬執匹候跋四子而叛,襲匹候跋。諸子收餘眾,亡依高車斛律部。社崘兇狡有權變,月餘,乃釋匹候跋,歸其諸子,欲聚而殲之。密舉兵襲匹候跋,殺匹候跋。子啟拔、吳頡等十五人歸于太祖。社崘既殺匹候跋,懼王師討之,乃掠五原以西諸部,北度大漠。太祖以拔、頡為安遠將軍、平棘侯。社崘與姚興和親。太祖遣材官將軍和突襲黜弗、素古延諸部,社崘遣騎救素古延,突逆擊破之。 |
사륜이 멀리 막북으로 달아나 고차를 침략하여 그 땅에 깊이 들어가 드디어 여러 부를 병합하니 흉악한 세력이 더욱 떨쳤다. 북쪽 약락수로 이동하여 처음으로 군법을 세웠다. 천명을 1군으로 하고, 군에는 장 1명을 두며, 백명을 1당으로 하고, 당에는 수 1명을 두었다. 먼저 공격한 자는 노획물을 주고, 물러나는 나약자는 돌로 머리를 쳐서 죽였으며 때로는 채찍질을 하였다. 글로 기록하는 게 없어 장수는 양의 똥으로 병사 수를 대강 계산하였으나 나중에는 자못 나무에 새겨 기록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서북쪽에 흉노의 나머지 종족이 있어 나라가 매우 부강하고 부족장을 발야계라고 하는데 거병하여 사륜을 쳤으나 사륜이 알근하에서 맞받아 싸워 대파하고 뒤에 사륜이 다 병합하니 강성하게 되었다고 불렸다. 물과 풀을 따라 가축을 치니 그 서쪽은 언기의 땅이고 동쪽은 조선의 땅이며 북쪽은 사막을 건너한해에 이르고 남쪽은 고비사막에 이르렀다. 그 항상 모이는 곳은 돈황과 장액의 북쪽이었다. 작은 나라들은 다 그 약탈과 노략질에 고생했으며 고삐가 채워져 있어 이에 스스로 구두벌가한이라고 불렀다. 구두벌은 북위 말로 ‘임금의 수레를 이끌고 열어젖힌다’와 같고
가한은 북위 말로 황제와 같다. 연연의 풍속에 임금과 대신은 그 행위와 능력에 따라 칭호를 붙이는데 중국이 시호를 세움과 비슷하나 죽은 뒤에 다시 추칭하지는 않는다. 태조가 상서 최현백에게 일러 말하기를“연연 사람들은 예로부터 완고하고 어리석다고 불리워졌는데, 늘 강도질을 할때마다, 어미소를 타고 도망가면서 젊은 소를 몰아 그 뒤를 따르게 하였기 때문에 어미소는 엎어져 나아갈 수가 없었다. 다른 부락 사람들 가운데 그들에게 젊은 소와 교체하라고 가르친 자가 있었지만 연연은 그 어미소 조차 나아갈 수 없는데 하물며 그 새끼 소가 가능하겠는가? 하고는 끝내 바꾸지 않았고 마침내 적의 포로가 되었다. 지금 사륜은 중국을 배워서 법을 세우고 전진을 배치하여 마침내 변경의 해가 되었다. 도가에서 ‘성인이 태어나면 큰 도적이 일어난다’라고 했는데 옳은 말이다.” |
社崘遠遁漠北,侵高車,深入其地,遂并諸部,凶勢益振。北徙弱洛水,始立軍法:千人為軍,軍置將一人,百人為幢,幢置帥一人;先登者賜以虜獲,退懦者以石擊首殺之,或臨時捶撻。無文記,將帥以羊屎粗計兵數,後頗知刻木為記。其西北有匈奴餘種,國尤富強,部帥曰拔也稽,舉兵擊社崘,社崘逆戰於頞根河,大破之,後盡為社崘所并。號為強盛。隨水草畜牧,其西則焉耆之地,東則朝鮮之地,北則渡沙漠,窮瀚海,南則臨大磧。其常所會庭則敦煌、張掖之北。小國皆苦其寇抄,羈縻附之,於是自號丘豆伐可汗。「丘豆伐」猶魏言駕馭開張也,「可汗」猶魏言皇帝也。蠕蠕之俗,君及大臣因其行能即為稱號,若中國立諡,既死之後,不復追稱。太祖謂尚書崔玄伯曰:「蠕蠕之人,昔來號為頑嚚,每來抄掠,駕牸牛奔遁,驅犍牛隨之,牸牛伏不能前。異部人有教其以犍牛易之者,蠕蠕曰『其母尚不能行,而況其子』,終於不易,遂為敵所虜。今社崘學中國,立法置戰陳,卒成邊害。道家言聖人生,大盜起,信矣。」 |
천흥5년(402년) 사륜은 태조가 요흥을 정복한다고 하자 드디어 변경을 침범하여 참합피에 들어와 남쪽으로 시산과 선무의 북택에 이르렀다. 당시 상산왕 준을 보내 만여기로 추격하였으나 미치지 못하였다.
천사 연간(404~408)에 사륜의 사촌동생 열대 대나 등이 사륜을 살해하고 대나를 세우기로 모의 하였으나 발각되어서 대나 등이 도망왔다
대나를 관군장군 서평후로 삼고 열대를 월기교위, 역양자로 삼았다.
(천사)3년(406년) 여름 사륜이 변경을 침구했고 영흥 원년(409년) 겨울, 또 변경을 침범하였다. (영흥)2년(410년) 태종이 토벌하자 사륜이 도망하다 도중에 죽었다. 그 아들 도발이 나이가 어려 무리를 제어할수 없자 부락이 사륜의 아우 곡률을 세웠는데 애고개 가한이라고 불렀으며 (북)위 말로‘자질이 빼어나다’이다 |
天興五年,社崘聞太祖征姚興,遂犯塞,入參合陂,南至豺山及善無北澤。時遣常山王遵以萬騎追之,不及。天賜中,社崘從弟悅代、大那等謀殺社崘而立大那,發覺,大那等來奔。以大那為冠軍將軍、西平侯,悅代為越騎校尉、易陽子。三年夏,社崘寇邊,永興元年冬,又犯塞。二年,太宗討之,社崘遁走,道死。其子度拔年少,未能御眾,部落立社崘弟斛律,號藹苦蓋可汗,魏言姿質美好也。 |
곡률은 북쪽으로 하술야골국을 병합하고 동쪽으로 비력진 부락을 깨뜨렸다. (영흥) 3년 곡률의 종족 사람 열후돌저간 등 수백명이 투항하였다. 곡률은 (북위의)위엄을 두려워해 스스로 지킬뿐 감히 남침하지 않아 북쪽 변경이 안정되었다. 신서 원년(414년) 풍발과 화친하여 (풍)발은 곡률의 딸을 초빙하여 처로 삼아 장차 서로 혼인관계를 맺으려고 하였다. 곡률의 큰 형의 아들 보록진이 곡률에게 일러 말하기를 “딸이 어려 멀리가면 근심하여 병이 날 것 같으니 대신 수려, 물지연 등의 딸을 보내 시녀로 삼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였으나 곡률이 불허하였다. 보록진이 나가 수려 등에게 일러 말하기를 “곡률이 너희 딸을 시녀로 삼아 멀리 떨어진 타국으로 보내려고 한다.”라고 하였다. 수려가 마침내 공모하여 용사로 하여금 밤에 곡률의 천막에 가서 그가 나오는 것을 엿보다가 사로잡아서 시집가는 딸과 함께 화룡으로 보내고 이에 보록진을 세웠다. |
斛律北并賀術也骨國,東破譬曆辰部落。三年,斛律宗人悅侯咄觝干等數百人來降。斛律畏威自守,不敢南侵,北邊安靜。神瑞元年,與馮跋和親,跋聘斛律女為妻,將為交婚。斛律長兄子步鹿真謂斛律曰:「女小遠適,憂思生疾,可遣大臣樹黎、勿地延等女為媵。」斛律不許。步鹿真出,謂樹黎等曰:「斛律欲令汝女為媵,遠至他國。」黎遂共結謀,令勇士夜就斛律穹廬,候伺其出執之,與女俱嬪于和龍。乃立步鹿真。 |
보록진은 즉위하고 정치를 수려에게 맏겼다.
애초에 고차의 질락후라는 자가 그 우두머리를 배반하고 사륜을 끌어 들여 여러 부락을 깨뜨리니 사륜이 은덕으로 여기고 대인으로 삼았다
보록진과 사륜의 아들 사발이 함께 질락후 집에 이르러 그 어린 처를 간음했다. 처가 보록진에게 질락후가 대단을 세워 주군으로 삼으려고 대단에게 황금 말굴레를 보내 신표로 삼았다고 고자질하였다. 보록진이 듣고 돌아와 8천기를 보내 질락후를 포위하자, 질락후는 그 진귀한 보물을 불사르고 스스로 목베어 죽었다. 보록진은 드디어 대단을 엄습하였지만 대단이 군을 보내 보록진과 사발을 잡아 목매 죽이고 이에 스스로 즉위하였다. |
步鹿真立,委政樹黎。初,高車叱洛侯者叛其渠帥,導社崘破諸部落,社崘德之,以為大人。步鹿真與社崘子社拔共至叱洛侯家,淫其少妻。妻告步鹿真,叱洛侯欲舉大檀為主,遺大檀金馬勒為信。步鹿真聞之,歸發八千騎往圍叱洛侯,叱洛侯焚其珍寶,自刎而死。步鹿真遂掩大檀,大檀發軍執步鹿真及社拔,絞殺之,乃自立。 |
대단은 사륜의 작은 아버지 복혼의 아들로 먼저 별부를 통솔하여
서쪽 경계에서 주둔하면서 무리의 마음을 얻었다. 나라 사람들이
추대하여 모한흘승개 가한이라 부르니 북위 말로‘승리를 제압하였다’이다. 곡률 부자가 화룡에 도착하니 풍발이 상곡후에 봉하였다.
대단이 무리를 이끌고 남쪽으로 옮겨 변경을 침범하여 태종이 친히 토벌하니 대단이 두려워 달아났다. 산양후 해근 등을 보내 추격했으나 추위와 눈을 만나 장병들이 동사하고 손과 발가락을 잃은 자가 열에 둘셋이었다. 태종이 죽고 세조가 즉위하자 대단이 듣고 매우 기뻐하며 시광 원년(424년) 가을 이에 운중을 침구하였다. 세조가 친히 토벌하여 세 날 두 밤 만에 운중에 도착하였다. 대단의 기병들이 세조를 오십여겹으로 포위하여 기병이 말머리까지 가까이와 서로 이어지는 것이 담과 같았다. 장병들은 매우 두려워하였으나 태조의 안색이 태연자약하여 무리의 성정이 이에 안정되었다. 이보다 앞서 대단의 아우 대나와 사륜이 나라를 두고 싸워 패하여 (북위로) 달아났다. 대단이 대나의 아들 어척근을 부의 수령으로 삼았는데 (북위의) 군사들이 어척근을 쏘아 살해하니 대단이 두려워하여 이에 돌아갔다. (시광)2년(425년) 세조가 대군으로 정벌하여 동서 다섯 개의 길로 일제히 나아갔다. 평양왕 장손한 등은 흑사막을 따라, 여음공 장손도생은 백흑 양 사막 사이를 따라, 세조는 가운데 길을 따라, 동평공 아청은 그 서쪽 속원을 따라, 의성왕 해근과 장군 안원 등은 서쪽길을 따라
이한산으로 갔다. 모든 군대가 막남(고비사막 남쪽)에 이르러 군수품을 놓아두고 가볍게 무장한 기병이 15일 양식만 가지고 고비사막을 토벌하니 대단 부락이 매우 놀라 북쪽으로 달아났다.
신가 원년(428년) 8월 대단이 아들을 보내 기병 만여명으로 변경에 들어와 변경 사람을 죽이고 노략질한 뒤 달아났다. 나라(북위)에 부속하였던 고차가
추격하여 격파하였다. 광녕으로부터 돌아와 추격하였으나 따라잡지 못하였다. |
大檀者,社崘季父僕渾之子,先統別部,鎮於西界,能得眾心,國人推戴之,號牟汗紇升蓋可汗,魏言制勝也。斛律父子既至和龍,馮跋封為上谷侯。大檀率眾南徙犯塞,太宗親討之,大檀懼而遁走。遣山陽侯奚斤等追之,遇寒雪,士眾凍死墮指者十二三。及太宗崩,世祖即位,大檀聞而大喜,始光元年秋,乃寇雲中。世祖親討之,三日二夜至雲中。大檀騎圍世祖五十餘重,騎逼馬首,相次如堵焉。士卒大懼,世祖顏色自若,眾情乃安。先是,大檀弟大那與社崘爭國,敗而來奔。大檀以大那子於陟斤為部帥,軍士射於陟斤殺之,大檀恐,乃還。二年,世祖大舉征之,東西五道並進:平陽王長孫翰等從黑漠,汝陰公長孫道生從白黑兩漠間,車駕從中道,東平公娥清次西從粟園,宜城王奚斤、將軍安原等西道從爾寒山。諸軍至漠南,舍輜重,輕騎齎十五日糧,絕漠討之,大檀部落駭驚北走。神麚元年八月,大檀遣子將騎萬餘人入塞,殺掠邊人而走。附國高車追擊破之。自廣寧還,追之不及。 |
(신가) 2년(429년) 세조가 병사들을 남쪽 교외에서 병사들을 훈련시켜 장차
대단을 엄습하려고 하였다. 공경대신 모두 가기를 원치않았고 술사 장연, 서변은 천문으로 설득하며 세조를 말렸지만 세조는 최호의 계책에 따라 실행하였다. 마침 강남에 갔던 사신이 돌아와 유의륭이 강남을 침범하고자 행인에게 일러 말하기를 “너는 급히 돌아가 북위 군주에게 보고하라 우리 하남땅을 귀속시키면 전쟁을 않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우리 장병들의 힘을 다할 것이다.”라고하였다. 세조가 듣고 크게 웃으며 공경들에게 말하였다.“거북과 자라같은 하찮은 사람이 자기를 구할 겨를도 없는데 어찌 그렇게 할수 있겠는가? 설령 내침하더라도 만약 먼저 연연을 멸하지 않는다면 앉아서 도둑이 이르기를 기다리는 식이니 앞뒤로 적을 맞는 것은 상책이 아니다. 나는 행하기로 결정하였다.”이에 황제는 동쪽 길로 나가 흑산을 향하였고 평양왕 장손한은 서쪽 길을 따라 대아산을 향하여서 같이 적의 영역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5월 사막의 남쪽에 이르러 치중을 버리고 가볍게 하고 엄습하여 율수에 이르니 대단의 무리가 서쪽으로 달아났다. 아우 필려는 이전에 동쪽 부락을 관장하고 있었는데 대단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장손)한의 군대를 만나 (장손)한이 기병을 풀어 공격하여 그 대인 수백명을 죽였다. 대단이 듣고 떨었다. 그 종족의 무리를 거느리고 초막을 불사른 다음 서쪽으로 달아나 자취를 감추어 알지 못하는 곳에 다달았다. 이에 나라가 추락하여 사방으로 흩어져 산과 계곡으로 도망가 숨고 가축이 들에 널려도 거두어 지키는 사람이 없었다. 세조는 율수를 따라 서쪽으로 가서 한나라 장군 두헌의 옛 작은 성을 지났다. 6월 토원수에 이르렀는데 그곳은 평성에서 3700리 떨어진 곳이다. 군사를 나누어 수색 토벌하여 동으로는 한해에 이르고 서로는 장액수에 닿았으며 북으로 연연산을 건너니 동서 5천여리 남북 3천리였다. 고차 여러 부가 대단의 종족을 살해하니 전후로 투항 30여만, 사로잡은 것은 수괴와 융마 백여만필이었다. 8월, 세조가 동부 고차가 사니피에 주둔했는데 사람과 가축이 매우 많으며 관군과 천여리 떨어졌다는 것을 들었다. 드디어 조복야 안원 등을 보내 가서 토벌하게 하였다. 시파니에 다다르니 고차 여러부가 군을 보고 항복한 자가 수십만이었다. |
二年四月,世祖練兵于南郊,將襲大檀。公卿大臣皆不願行,術士張淵、徐辯以天文說止世祖,世祖從崔浩計而行。會江南使還,稱劉義隆欲犯河南,謂行人曰:「汝疾還告魏主,歸我河南地,即當罷兵,不然盡我將士之力。」世祖聞而大笑,告公卿曰:「龜鼈小竪,自救不暇,何能為也。就使能來,若不先滅蠕蠕,便是坐待寇至,腹背受敵,非上策也。吾行決矣。」於是車駕出東道向黑山,平陽王長孫翰從西道向大娥山,同會賊庭。五月,次于沙漠南,舍輜重輕襲之,至栗水,大檀眾西奔。弟匹黎先典東落,將赴大檀,遇翰軍,翰縱騎擊之,殺其大人數百。大檀聞之震怖,將其族黨,焚燒廬舍,絕跡西走,莫知所至。於是國落四散,竄伏山谷,畜產布野,無人收視。世祖緣栗水西行,過漢將竇憲故壘。六月,車駕次於兔園水,去平城三千七百里。分軍搜討,東至瀚海,西接張掖水,北渡燕然山,東西五千餘里,南北三千里。高車諸部殺大檀種類,前後歸降三十餘萬,俘獲首虜及戎馬百餘萬匹。八月,世祖聞東部高車屯巳尼陂,人畜甚眾,去官軍千餘里。遂遣左僕射安原等往討之。暨巳尼陂,高車諸部望軍降者數十萬。 |
대단은 부락이 쇠약해지자 이로인해 병이 발생하여 죽어 아들 오제가 즉위하여 칙련 가한이라고 불렀는데 (북)위의 말로‘신성’이다.
(신가) 4년(431년) 사신을 보내 조헌하였다. 이보다 앞서 북변의 정찰 기병이 오제의 남쪽 순라병 20여명을 사로잡았는데 세조가 옷을 주어 돌려보냈다. 오제의 상하가 덕에 감복하여 조공한 것이다. 세조가 그 사신을 후하게 대접하여 돌려 보냈다. 연화3년(434년) 2월 오제를 서해공주와 혼인케하고 또 사신을 보내 오제의 누이동생을 맞이하여 부인으로 삼았으며 또 지위를 올려 좌소의로 삼았다. 오제는 그 형 독록괴와 좌우 수백명을 보내 조정으로 와 말 2천필을 바쳤다. 세조가 대단히 기뻐하여 답례품을 매우 많이 주었다.
태연 2년(436년)에 이르러 화친을 끊고 변경을 침범하였다.
4년(438년) 태조가 오원에 행차하여 마침내 정벌하였다.
악평왕 비와 하동공 하다라가 15장수를 통솔하여 동쪽 길로 나아갔고,영창왕 건과 의도왕 목수가 열 다섯 장수를 통솔하여 서쪽 길로 나아갔으며,세조는 가운데 길로 나아갔다. 준계산에 이르러 가운데 길을 다시 두길로 하여 진류왕 숭은 대택을 따라 탁사산으로 향하고 세조는 준계산 북쪽을 따라 천산으로 항하였다. 서쪽 백부에 올라 행적을 돌에 새기고 연연을 발견하지 못하여 돌아왔다. 당시 고비사막 북쪽이 크게 가물어 물과 풀이 없어 군사와 말이 많이 죽었다. 5년(439년) 세조가 서쪽으로 저거목건을 정벌하는데, 의도왕 목수는 경목(태자)를 보좌하여 (서울을)지키고 장악왕 혜경과 건녕왕 (탁발)숭은 2만명으로 고비사막 남쪽을 지켜 연연에 대비하였다. 오제가 과연 변경을 침범하였는데 (목)수가 평소 방비를 못하여 적이 칠개산에 이르렀고 서울이 크게 놀라
다투어 중성으로 달아났다. 사공 장손도생이 토퇴산에서 막았다. 오제가 침구할 때 그 형 걸렬귀를 머물게 하여 북진의 여러 군대를 막도록 하였는데 (혜)경과 (탁발)숭 등이 걸렬귀를 음산 북족에서 깨뜨려 사로잡았다. 걸렬귀가 탄식하며 말하기를 “저거(목건)이 나를 함정에 빠뜨렸다.”라고 하였다. 그의 큰 아버지 타오무록호와 그의 장수 5백명을 사로잡고 목을 벤 것이 만여급이었다. 오제가 듣고 달아나 도생이 추격하였으나 고비사막 남쪽에 이르러 돌아왔다. (태평) 진군4년(443년) 세조가 고비사막 남쪽에 행차하여 네 길로 나누었다. 낙안왕 (탁발)범과 건녕왕 (탁발)숭은 각각 열다섯 장수를 통솔하여 동쪽 길로 나아가고 낙평왕은 열 다섯 장수를 거느리고 서쪽길로 나아가며 세조는 가운데 길로 나아가고 중산왕(탁발)진은 열 다섯 장수를 거느리고 중군의 뒤를 잇게 하였다. 세조가 녹혼곡에 이르러 적장과 만났으나 오제가 달아나 추격하여 알근하에 이르러 격파하였다. 세조는 석수에 이르러 돌아왔다.
5년(444년) 다시 막남에 행차하여 오제를 습격하려 하였지만 오제가 멀리 달아나 돌아왔다. |
大檀部落衰弱,因發疾而死,子吳提立,號敕連可汗,魏言神聖也。四年,遣使朝獻。先是,北鄙候騎獲吳提南偏邏者二十餘人,世祖賜之衣服,遣歸。吳提上下感德,故朝貢焉。世祖厚賓其使而遣之。延和三年二月,以吳提尚西海公主,又遣使人納吳提妹為夫人,又進為左昭儀。吳提遣其兄禿鹿傀及左右數百人來朝,獻馬二千匹,世祖大悅,班賜甚厚。至太延二年,乃絕和犯塞。四年,車駕幸五原,遂征之。樂平王丕、河東公賀多羅督十五將出東道,永昌王健、宜都王穆壽督十五將出西道,車駕出中道。至浚稽山,分中道復為二道,陳留王崇從大澤向涿邪山,車駕從浚稽北向天山。西登白阜,刻石記行,不見蠕蠕而還。時漠北大旱,無水草,軍馬多死。五年,車駕西伐沮渠牧犍,宜都王穆壽輔景穆居守,長樂王嵇敬、建寧王崇二萬人鎮漠南,以備蠕蠕。吳提果犯塞,壽素不設備,賊至七介山,京邑大駭,爭奔中城。司空長孫道生拒之於吐頹山。吳提之寇也,留其兄乞列歸與北鎮諸軍相守,敬、崇等破乞列歸于陰山之北,獲之。乞列歸歎曰:「沮渠陷我也。」獲其伯父他吾無鹿胡及其將帥五百人,斬首萬餘級。吳提聞而遁走,道生追之,至于漠南而還。真君四年,車駕幸漠南,分四道:樂安王範、建寧王崇各統十五將出東道,樂平王督十五將出西道,車駕出中道,中山王辰領十五將為中軍後繼。車駕至鹿渾谷,與賊將遇,吳提遁走,追至頞根河,擊破之。車駕至石水而還。五年,復幸漠南,欲襲吳提,吳提遠遁,乃還。 |
오제가 죽자 아들 토하진이 즉위하여 처가한이라고 불렀는데 북위 말로‘오직(오로지)’이다. (태평진군) 10년(449년) 정월 세조가 북벌하여 고량왕 (탁발)나는 동도로 나아가고,약양왕 (탁발)갈아는 서도로 나아가고,세조와 경목(태자)는 스스로 가운데 길로 나아가 탁사산으로 갔다. 토하진의 별부의 수장 이면타발 등이 천여가를 거느리고 투항하였다. 이때, (북위)군의 행렬이 수천리에 이르고 토하진이 새로 즉위하였기 때문에 매우 두려워서 멀리 달아났다. 9월 세조가 북벌하여 고량왕 (탁발)나는 동도로 나아가고,약양왕 (탁발)갈아는가운데 길로 나아가고,여러 군대와 지불지에서 만나기로 기약하였다. 토하진이 나라 안의 정예를 모두 동원하니 군사와 물자가 매우 성대하여 (탁발)나를 수십겹 포위하니 (탁발)나는 빙둘러 참호를 파고 단단히 지켜 서로 여러날 동안 지속하였다. 토하진은 여러번 도전하였지만 번번히 불리하고 (탁발)나의 무리가 적었지만 견고하였으므로 대군이 장차 이를 것이라고 의심하고 포위를 풀고 밤에 달아났다. (탁발) 나가 군사를 이끌고 추격한지 아홉날 아홉밤, 토하진은 더욱 두려워하여 보급물자를 버리고 궁륭령을 넘어 멀리 달아났다. (탁발) 나가 그 보급물자를 수습하고 군사를 이끌고 돌아와 세조와 광택에서 만났다. 약양왕 (탁발)갈아는 그 사람과 가축 백여만을 다 거두어 들였다. 이로부터 토하진은 드디어 외롭고 약해져 멀리 달아나 변경은 경계를 쉬게 되었다. 태안4년(458년) 황제가 북벌하여 기병 10만, 수레 15만 량, 정기 천리로 드디어 고비사막을 건넜다. 토하진이 멀리 달아나고 그의 막불 오주가퇴가 무리 수천 락을 인솔하고 투항하여 이에 돌을 깎아 공적을 새기고 돌아왔다. 세조 정벌이후 뜻은 휴식에 있었고 연연 역시 위엄을 두려워하여 북으로 달아나 감히 다시 남하 하지 못하였다. |
吳提死,子吐賀真立,號處可汗,魏言唯也。十年正月,車駕北伐,高涼王那出東道,略陽王羯兒出西道,車駕與景穆自中道出涿邪山。吐賀真別部帥尒綿他拔等率千餘家來降。是時,軍行數千里,吐賀真新立,恐懼遠遁。九月,車駕北伐,高涼王那出東道,略陽王羯兒出中道,與諸軍期會於地弗池。吐賀真悉國精銳,軍資甚盛,圍那數十重,那掘長圍堅守,相持數日。吐賀真數挑戰,輒不利,以那眾少而固,疑大軍將至,解圍夜遁。那引軍追之,九日九夜,吐賀真益懼,棄輜重,踰穹隆嶺遠遁。那收其輜重,引軍還,與車駕會於廣澤。略陽王羯兒盡收其人戶畜產百餘萬。自是吐賀真遂單弱,遠竄,邊疆息警矣。太安四年,車駕北征,騎十萬,車十五萬兩,旌旗千里,遂渡大漠。吐賀真遠遁,其莫弗烏朱駕頹率眾數千落來降,乃刊石記功而還。世祖征伐之後,意存休息,蠕蠕亦怖威北竄,不敢復南。 |
화평 5년(464년) 토하진이 죽고 아들 여성이 즉위하여 수라부진 가한이라 부르니 북위 말로‘은혜’이다. 자칭 영강 원년이라 하고 부락을 이끌고 변방을 침략하니 북진 유군이 그 무리를 대파하였다.
황흥 4년(470년) 여성이 변경을 침범하여 황제가 북방을 토벌하였다.
경조왕 (원)자추와 동양공 원비는 여러 군대를 통솔하여 서쪽 길로 나아가고 ,임성왕 (원)운 등은 군을 통솔하여 동쪽 길로 나아가고 여음왕 (원)사와 제남공 나오발은 군을 통솔하여 선봉이 되며, 농서왕 원하는 여러 군을 통솔하여 뒤를 이었다. 여러 장수는 황제와 여수의 물가에서 회합하였는데, 현조는 친히 병사와 맹서하고 조서로 여러 장수에게 이르기를 “병사의 운용은 기이한 계책에 있지 숫자에 있지 않다. 경 등은 짐을 위해 힘써 싸우라. 방법과 계략은 이미 짐의 마음에 있다.”라고 하였다. 이에 정예병사 5천명을 선발하여 싸움을 걸고 기습병을 많이 설치하여 현혹하니 오랑캐 무리가 달아나 무너져 북으로 30리를 쫓아 목을 벤 것이 5만급이고 항복한 자가 만여명이며 병마와 병기는 이루헤아릴수 없었다. 19일 동안 6천리를 왕복하여 여수를 무천으로 고치고 마침내 북정송을 지어 돌을 깎아 공을 기록하였다. |
和平五年,吐賀真死,子予成立,號受羅部真可汗,魏言惠也。自稱永康元年,率部侵塞,北鎮遊軍大破其眾。皇興四年,予成犯塞,車駕北討。京兆王子推、東陽公元丕督諸軍出西道,任城王雲等督軍出東道,汝陰王賜、濟南公羅烏拔督軍為前鋒,隴西王源賀督諸軍為後繼。諸將會車駕于女水之濱,顯祖親誓眾,詔諸將曰:「用兵在奇不在眾也,卿等為朕力戰,方略已在朕心。」乃選精兵五千人挑戰,多設奇兵以惑之。虜眾奔潰,逐北三十餘里,斬首五萬級,降者萬餘人,戎馬器械不可稱計。旬有九日,往返六千餘里,改女水曰武川,遂作北征頌,刊石紀功。 |
연흥5년(475년) 여성이 혼인 맺기를 요구하니 관리들은 여성이 여러차례 변경을 침범하였으니 그 사절을 끊고 군사를 발동하여 토벌하자고 청하였다. 현조가 말하기를 “연연은 예컨대 금수와 같아 탐내면 옳고 그름을 잊으나 짐은 마땅히 신의와 성실로써 저들을 대해야 하며 거절해서는 않된다. 여성이 지난 잘못을 알고 사신을 보내 화해를 청하며 혼인 맺으려고 매달리는데 어찌 저들의 정성스런 뜻을 저버릴수 있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조서로 회보하여 말하기를 “말한 혼사는 지금 한꺼번에 뒤집는 것인데 일의 도리를 살펴보건데 그것이 마땅하다고 할수 없다. 무릇 남자가 여자에게 낮추는 것은 점괘의 상이 명시하는 바이고 초혼의 길한 예에 예방을 특히 중시하는 것은 군자가 인륜의 근본을 중히 여기기 때문이다. 처음을 공경하지 않으면 끝도 어렵게 된다.”고 하였다. 여성은 늘 간사한 마음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현조시대가 끝날때까지 다시 청혼하지 않았다. 태화원년(477년) 4월 막하 거분비발 등을 보내 좋은 말과 담비 갖옷을 바치고 비발 등이 천조(북위의 조정)의 진귀한 보물들이 화려하고 많이 쌓여 있음을 칭송하고 감복하며 한번 보기를 청구하였다. 이에 칙서로 관리로 하여금 황제의 창고에 있는 진기한 노리개, 화려하게 수놓은 옷,
기물, 황제의 마굿간에 있는 털에 아름다운 무늬가 있는 말, 기이한 날짐승, 기이한 짐승과 민간에서 사용하는 물품을 내어 서울의 시장에 진열하여 그들로 하여금 두루 보게하였다. 비발이 보고 서로 일러 말하기를 “대국의 부유함과 화려함은 일생동안 보지 못하던 것이요.”라고 하였다. (태화) 2년(478년) 2월 또 비발 등을 보내 조공하고 이어서 다시 청혼하였다. 고조의 뜻이 불러서
받아들이는데 있었기 때문에 허락하였다. 여성이 비록 해마다 조공을 끊지
않았으나 친하게 지내자는 약조가 현저하지 않아 혼사 역시 정지되었다. |
延興五年,予成求通婚娉,有司以予成數犯邊塞,請絕其使,發兵討之。顯祖曰:「蠕蠕譬若禽獸,貪而亡義,朕要當以信誠待物,不可抑絕也。予成知悔前非,遣使請和,求結姻援,安可孤其款意?」乃詔報曰:「所論婚事,今始一反,尋覽事理,未允厥中。夫男而下女,爻象所明,初婚之吉,敦崇禮娉,君子所以重人倫之本。不敬其初,令終難矣。」予成每懷譎詐,終顯祖世,更不求婚。太和元年四月,遣莫何去汾比拔等來獻良馬、貂裘,比拔等稱伏承天朝珍寶華麗甚積,求一觀之。乃敕有司出御府珍玩金玉、文繡器物,御廐文馬、奇禽、異獸,及人間所宜用者列之京肆,令其歷觀焉。比拔見之,自相謂曰:「大國富麗,一生所未見也。」二年二月,又遣比拔等朝貢,尋復請婚焉。高祖志存招納,許之。予成雖歲貢不絕,而款約不著,婚事亦停。 |
(태화)9년(485년) 여성이 죽고 아들 두륜이 즉위하여 복고돈 가한이라고 불렀는데 (북)위 말로‘항상’이다. 자칭 태평원년이라 하였다.
두륜의 성격이 잔혹 포악하며 살해하기를 좋아하여 그의 신하 후의인과 석락후가 여러차례 충성스런 말로 간하였으며 또한 북위와 화친하여 중국을 침략하지 말 것을 권하였다. 두륜이 화를 내며 석락후가 모반하였다고 무고하여 죽이고 그의 삼족을 없애버렸다. (태화)16년(492년) 8월 고조는 양평왕 (원)이와 좌복야 육예병을 도독으로 삼아 영군 곡률환 등 12장군 7만 기병으로 두륜을 토벌하였다. 부락 내 고차족 아복지라가 무리 10여만 락을 인솔하고 서쪽으로 달아나 스스로 즉위하여 주군이 되었다. 두륜과 숙부 나개는 두 길로 추격하여
두륜은 준계산 북쪽에서부터 출발하여 서쪽으로 나아갔고, 나개는 금산에서부터 나아갔다. 두륜은 자주 아복지라에게 패배를 당하였으나
나개는 여러번 싸움에 이겼다. 나라 사람 모두 나개는 하늘이 돕는다고 하여 나개를 군주로 추대하려고 하였다. 나개가 따르지 않자 무리가 강요하자 나개가 말하기를 "나는 신하가 되어 불가하다. 어찌 군주가 될수 있는가”라고
말하였다. 무리가 이에 두륜 모자를 죽여 시신을 내개에게 보이자 나개가 이에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
九年,予成死,子豆崘立,號伏古敦可汗,魏言恒也。自稱太平元年。豆崘性殘暴好殺,其臣侯醫垔、石洛候數以忠言諫之,又勸與國通和,勿侵中國。豆崘怒,誣石洛候謀反,殺之,夷其三族。十六年八月,高祖遣陽平王頤、左僕射陸叡並為都督,領軍斛律桓等十二將七萬騎討豆崘。部內高車阿伏至羅率眾十餘萬落西走,自立為主。豆崘與叔父那蓋為二道追之,豆崘出自浚稽山北而西,那蓋出自金山。豆崘頻為阿伏至羅所敗,那蓋累有勝捷。國人咸以那蓋為天所助,欲推那蓋為主。那蓋不從,眾強之,那蓋曰:「我為臣不可,焉能為主!」眾乃殺豆崘母子,以屍示那蓋,那蓋乃襲位。 |
나개는 후기복대고자 가한이라고 불렀는데 북위 말로‘기뻐하고 즐거워함’이다. 자칭 태안원년이라고 하였다. 나개가 죽고 아들 복도가 즉위하여 타한 가한이라고 불렀는데 북위 말로 '실마리'이다. 자칭 시평원년이라 하였다.
정시3년(506년), 복도는 사신 흘해물륙발을 보내 조헌하고 화의를 청구하였다. 세종은 사자에게 회답하지 않고 조서로 관리로 하여금 (흘해)물륙발에게
“연연의 먼 조상 사륜이 북위를 모반한 신하이나 오는 자를 포용하여 잠시
사신이 왕래하였다. 지금 연연이 쇠퇴하고 미약해져 그전보다 감퇴하였으나
대위(북위_의 덕은 주나라, 한나라 만큼 넓고 크며 중원을 차지하여 팔방의
나라들을 지도, 평정하고 있다. 다만 강남이 평정되지 않아 임시로 북방정벌에 너그러운 것이니 화의는 아직 허용하지 않는다. 만약 반신의 예를 닦고 성심이 뚜렷해지면 마땅히 너희를 고립시키지 않는다.”라고 말하게 명하였다.
영평원년(508년) 복도가 또 사신 물륙발을 보내 함에 넣은 편지 1통을 바치고 아울러 담비 갖옷을 바쳤으나 세종이 받지 않고 예전처럼 깨우쳐 보냈다. |
那蓋號候其伏代庫者可汗,魏言悅樂也。自稱太安元年。那蓋死,子伏圖立,號他汗可汗,魏言緒也。自稱始平元年。正始三年,伏圖遣使紇奚勿六跋朝獻,請求通和。世宗不報其使,詔有司敕勿六跋曰:「蠕蠕遠祖社崘是大魏叛臣,往者包容,暫時通使。今蠕蠕衰微,有損疇日,大魏之德,方隆周漢,跨據中原,指清八表。正以江南未平,權寬北掠,通和之事,未容相許。若修藩禮,款誠昭著者,當不孤爾也。」永平元年,伏圖又遣勿六跋奉函書一封,并獻貂裘,世宗不納,依前喻遣。 |
복도가 서쪽으로 고차를 정벌하였으나 고차왕 미아돌에게 살해 당하고, 아들 추노가 즉위하여 두라복발두벌 가한이라고 불렀는데 북위 말로‘창제(밝음을 만든다)’이다. 자칭 건창 원년이라고 하였다.
영평4년(511년) 9월 추노가 승려 홍선봉을 보내 구슬로 만든 형상을 바쳤다. 연창3년(514년) 겨울 세종이 효기장군 마의서를 추노에게 사신으로 보내려
하였는데 출발하기 전에 세종이 죽어 일이 마침내 중도에서 그만두게 되었다. 추노는 건장하고 용병에 뛰어났다. (연창)4년 사신 사근위비건을 보내 조공하였다. 희평원년(16년) 서쪽으로 고차를 정벌하여 대파하고 그 왕 미아돌을
사로잡아 죽이고 반란자를 다 병합하니 나라(연연)가 마침내 강성하였다.
(희평)2년, 또 사근위비건、흘해물륙발、공고례 등을 보내 조공하였다.
신귀 원년(518년) 2월 숙종이 현양전에 임하여 (공)고례 등 20명을 현양전
아래에 오게하여 중서사인 서흘을 보내 조서로 연연이 번례(변방 신하로써의 예)를 갖추지 않은 뜻을 꾸짖게 명하였다. |
伏圖西征高車,為高車王彌俄突所殺,子醜奴立,號豆羅伏跋豆伐可汗,魏言彰制也。自稱建昌元年。永平四年九月,醜奴遣沙門洪宣奉獻珠像。延昌三年冬,世宗遣驍騎將軍馬義舒使於醜奴,未發而崩,事遂停寢。醜奴壯健,善用兵。四年,遣使俟斤尉比建朝貢。熙平元年,西征高車大破之,禽其王彌俄突,殺之,盡并叛者,國遂強盛。二年,又遣俟斤尉比建、紇奚勿六跋、鞏顧禮等朝貢。神龜元年二月,肅宗臨顯陽殿,引顧禮等二十人於殿下,遣中書舍人徐紇宣詔,讓以蠕蠕藩禮不備之意。 |
애초에 두륜이 죽고 나개가 군주가 되었을때 복도가 두륜의 처 후려릉씨를
바쳐 추노, 아나괴 등 6명을 낳았다. 추노가 즉위한 후 문득 자가 조혜인
한 아들을 잃어버렸는데 찾고 불렀으나 얻을수가 없었다
옥인부승모의 처 두혼지만은 나이는 20세쯤이고 의사 및 무당인데
신과 귀신에 의지하여 이전부터 늘 추노의 신임을 받아 출입하며
왕래하였는데, 이에 말하기를 이 아이는 지금 천상에 있는데 내가 불러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 추노 모자가 매우 기뻐하여 다음 해 추석에 큰 연못
안에 장막집을 설치하여 7일 동안 목욕재계하고 천상에 빌고 청원하였다.
하루밤이 지나 조혜가 홀연히 장막 안에 나타나서 “나는 항상 천상에 있었다”고 하였다. 추노 모자가 안고 슬퍼하고 또 기뻐하며 나라 사람들에게 크게 연회를 열어 (두혼)지만을 성녀라고 부르며 가하돈으로 받아들이고 남편
(옥인)부승모에게 작위를 주었으며 소 말 양 3천 두를 주었다. 지만은 이미
종교를 끼고 또한 미모가 있어 추노가 더욱 애지중지하여 그 말을 믿으니 그 국정이 문란해졌다. 이와같이 하여 여러 해가 지나 조혜가 성장하여 그 어머니가 물으니 조혜가 말하였다. “나는 항상 지만의 집에 있었지 천상을 겪은 것은 아닙니다. 천상이라는 것은 지만이 가르친 것입니다.”그 어머니가 구체적으로 상황을 추노에게 알리니 추노가 말하였다. “지만은 먼일을 볼수 있어
믿지 않을수 없으니 헐뜯지 마십시요.”이윽고 지만이 매우 두려워하여 조혜를 추노에게 헐뜯으니 추노가 은밀히 죽였다. |
初,豆崘之死也,那蓋為主,伏圖納豆崘之妻候呂陵氏,生醜奴、阿那瓌等六人。醜奴立後,忽亡一子,字祖惠,求募不能得。有屋引副升牟妻是豆渾地萬、年二十許,為醫巫,假託神鬼,先常為醜奴所信,出入去來,乃言此兒今在天上,我能呼得。醜奴母子欣悅,後歲仲秋,在大澤中施帳屋,齋潔七日,祈請天上。經一宿,祖惠忽在帳中,自云恒在天上。醜奴母子抱之悲喜,大會國人,號地萬為聖女,納為可賀敦,授夫副升牟爵位,賜牛馬羊三千頭。地萬既挾左道,亦有姿色,醜奴甚加重愛,信用其言,亂其國政。如是積歲,祖惠年長,其母問之,祖惠言:「我恒在地萬家,不嘗上天,上天者地萬教也。」其母具以狀告醜奴,醜奴言:「地萬懸鑒遠事,不可不信,勿用讒言也。」既而地萬恐懼,譖祖惠於醜奴,醜奴陰殺之。 |
정광초(520년) 추노 어머니가 막하거분, 이구열 등을 보내 지만을 목졸라 죽이니 추노가 분노하여 구열 등을 죽이려 하였다. 또 아지라가 추노를 침략하니 추노가 쳤으나 군대가 패하였다. 돌아 왔으나 어머니와 그 대신에게 살해되고 추노의 아우 아니괴가 즉위하였다. 즉위한지 10일이 지나 그 족형 사력발시발이 무리 수만을 이끌고 아나괴를 치니 아나괴가 전쟁에 져서 아우 을거벌과
가볍게 무장한 기병을 거느리고 남쪽으로 달아나 북위로 왔다. 아나괴의
어머니 후려릉씨와 그 두 아우는 얼마 안되어 시발에게 살해 되었으나
아나괴는 아직 알지 못하였다. |
正光初,醜奴母遣莫何去汾李具列等絞殺地萬,醜奴怒,欲誅具列等。又阿至羅侵醜奴,醜奴擊之,軍敗。還,為母與其大臣所殺,立醜奴弟阿那瓌。立經十日,其族兄俟力發示發率眾數萬以伐阿那瓌,阿那瓌戰敗,將弟乙居伐輕騎南走歸國。阿那瓌母候呂陵氏及其二弟尋為示發所殺,而阿那瓌未之知也。 |
9월, 아나괴가 장차 도착하려하자, 숙종이 겸 시중 육희도를 정사로 삼고,겸 산기상시 맹위를 부사로 삼아,서울 가까운 지방에서 맞이하여 위로하게 하고, 사공 (원)공과 경조왕 (원)계로 하여금 북중에서 맞이하게 하며,시중 최광、황문랑 원찬은 (서울) 근교에 있도록하여,모두 거듭 연회를 열어 위로하게
하여,대궐 문 아래에 인도하여 이르렀다. 10월 숙종이 현양전에 임하여
종오품 이상 청관과 황제의 종친、번국의 사신 등을 불러들여 궁전의 뜰에
열지어 있게 하고 왕공 이하와 아나괴 등은 들어와 궁전의 뜰 가운데로 나아가 북쪽을 향하게 하였다. 위치가 정해진 다음 알자가 왕공 이하를 인도하여 궁전에 오르게 하고 아나괴는 번왕의 아래에 자리하며, 또 명을 받을 관리와
아나괴의 아우와 두 숙부는 여러 관리 아래에 자리하였다. 중서사인 조도를
보내 조서로 노문(위문)하니 아나괴가 계로 말하기를 “폐하는 대접을 후하게 하여 신과 아우, 숙부에게 전각에 올라 연회에 참가하게 하였습니다. 다만
신에게 사촌형이 있는데 북쪽에 있을 때 벼슬이 두 숙부보다 높았습니다.
전각에 오르도록 명을 바랍니다. 조서로 청을 들어주어 이에 아나괴 아우의
아래, 두 숙부의 위에 자리하게 하였다. 연회가 끝날 무렵 아나괴는 계를 잡고 좌석 뒤에 서 있었으므로 조서로 사인 상경을 보내 하고 싶은 말을 묻게 하니 아니괴가 전각 앞에 나아가기를 요구하여 조서로 오게하였다
아나괴가 두 번 절하고 꿇어앉아 말하기를 “신의 선대 원류는 북위에서 나왔습니다.”하였다. 조서로 말하기를 “짐도 이미 잘 알고 있다.”하였다. 아나괴가 일어나 말하기를 “신의 선대는 풀을 쫓아 방목하여 마침내 막북에 거주하였습니다.”하였다. 조서로 말하기를 “경의 말이 미진하니 구체적으로 진술하라”하였다. 아나괴가 또 말하기를“신은 선조이래로 대대로 북토에 살아
비록 산천이 너무 멀리멀리 떨어졌어도 마음으로는 (북위의) 문화를 사모하였습니다. 때때로 밝힐수 없었던 것은 진실로 고차가 패역해서 신의 나라를 소란스럽게 하여 사신을 보내 멀리서 정성을 밝힐 겨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근년이전부터 점차 고차를 평정하였습니다. 신의 형이 군주가 됨에 이르러 공고례 등을 보내 사신으로 북위에 오게 한 까닭은 진실로 번례를 공경하게 익히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이 때문에 조도지가 북쪽에 사신으로 왔을 때 신과 주군인 형은 즉시 대신 5명을 보내 절하고 조명을 받았던 것입니다. 신 형제의 본심이 미처 위에 전달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고차가 제멋대로 침범하여 포악하게
굴고, 안에는 간신이 있어 난으로 인하여 반역을 일으켜 신의 형을 죽이고
신을 군주로 즉위시킨 것입니다. 겨우 10일이 지나 신이 폐하의 은혜와 자애로움이 하늘과 같으므로 이런 까닭에 재빨리 몸을 가볍게 하여 북위에 투신하여 폐하에게 귀순하였던 것입니다.”하였다. 조서로 말하기를 “경이 진술한 바는 구체적이나 이치는 오히려 미진하다. 다시 말하는 것이 좋겠다.”하였다. 아나괴가 두 번 절하고 조서를 받으며 일어나 말하기를 “신 잡안의 난으로 인하여 가볍게 대궐에 투신하였으나 늙으신 어머니는 저쪽에 있어 만리나 떨어져 있고 본국의 신하와 백성은 모두 이미 달아나 흩어졌습니다. 폐하의 큰 은혜가 천지에 두루미치니 병마를 구걸하여 본국으로 돌아가 반역자를 베어 죽이고 도망하고 흩어진 (백성을) 모으겠습니다. 폐하의 측은한 생각으로 병마를 빌려 주시면, 늙으신 어머니가 있다면 살아서 서로 만나 모자의 은의를 펼수 있고 돌아가셨다면 즉시 원수를 갚아 큰 치욕을 씻을 수 있습니다. 신은 마땅히 남은
사람을 통솔하여 폐하를 섬기고 시시때때 조공하여 감히 빠뜨리거나 끊지 않겠습니다. 폐하의 성스런 얼굴을 보기 어려워 감히 진술을 피력할 바 있어도
단지 말하고 싶은 것을 입으로 다 말할수 없어 별도의 계문이 있어 삼가
우러러 드리니 원컨대 밝게 보아주십시오.”하였다. 이에 계문을 사인 상경에게 주어 상주문으로 자세히 하였다. 이윽고 아나괴를 삭방군공 연연왕으로 봉하여, 옷과 면류관을 주고 수레와 덮개를 더하며 녹종과 의위는 친척을 맺은 번왕과 같이 하였다. |
九月,阿那瓌將至,肅宗遣兼侍中陸希道為使主,兼散騎常侍孟威為使副,迎勞近畿;使司空公、京兆王繼至北中,侍中崔光、黃門郎元纂在近郊,並申宴勞,引至門闕下。十月,肅宗臨顯陽殿,引從五品以上清官、皇宗、藩國使客等列於殿庭,王公以下及阿那瓌等入,就庭中北面。位定,謁者引王公以下升殿,阿那瓌位於藩王之下,又引將命之官及阿那瓌弟并二叔位於羣官之下。遣中書舍人曹道宣詔勞問,阿那瓌啟云:「陛下優隆,命臣弟叔等升殿預會,但臣有從兄,在北之日,官高於二叔,乞命升殿。」詔聽之,乃位於阿那瓌弟之下,二叔之上。宴將罷,阿那瓌執啟立於座後,詔遣舍人常景問所欲言,阿那瓌求詣殿前,詔引之。阿那瓌再拜跽曰:「臣先世源由,出於大魏。」詔曰:「朕已具之。」阿那瓌起而言曰:「臣之先,逐草放牧,遂居漠北。」詔曰:「卿言未盡,可具陳之。」阿那瓌又言曰:「臣先祖以來,世居北土,雖復隔越山津,而乃心慕化;未能時宣者,正以高車悖逆,臣國擾攘,不暇遣使以宣遠誠。自頃年以前,漸定高車。及臣兄為主,故遣鞏顧禮等使來大魏,實欲虔修藩禮,是以曹道芝北使之日,臣與主兄即遣大臣五人拜受詔命。臣兄弟本心未及上徹。但高車從而侵暴,中有姦臣,因亂作逆,殺臣兄,立臣為主。裁過旬日,臣以陛下恩慈如天,是故倉卒輕身投國,歸命陛下。」詔曰:「具卿所陳,理猶未盡,可更言之。」阿那瓌再拜受詔,起而言曰:「臣以家難,輕來投闕,老母在彼,萬里分張,本國臣民,皆已迸散。陛下隆恩,有過天地,求乞兵馬,還向本國,誅翦叛逆,收集亡散。陛下慈念,賜借兵馬。老母若在,得生相見,以申母子之恩;如其死也,即得報讎,以雪大耻。臣當統臨餘人,奉事陛下,四時之貢,不敢闕絕。陛下聖顏難覩,敢有披陳,但所欲言者口不能盡言,別有辭啟,謹以仰呈,願垂昭覽。」仍以啟付舍人常景,具以奏聞。尋封阿那瓌朔方郡公、蠕蠕王,賜以衣冕,加之軺蓋,祿從、儀衞,同于戚藩。 |
12월, 숙종은 아나괴가 (자기)나라에 정해진 군주가 없으므로 돌아가 모아
편안하게 하겠다는 생각으로 계문으로 매우 절실하게 주청하니 조서로 의논하도록 명하였다. 그때 조정의 신하들의 뜻은 같고 다름이 있어 혹은 청을 들어 돌려 보내자고 말하고, 혹은 불가하다고 말하였다. 영군 원차가 재상이 되었는데 아나괴가 은밀하게 금 백근을 뇌물로 주어 드디어 북으로 돌아갔다.
정광 2년(521년) 정월 아나괴 등 54명이 작별인사를 청하니 숙종이 서당에
임하여 아나괴와 그 작은 아버지, 형제 5명을 불러서 보고 계단에 오르게 하여 좌석을 주며 중서사인 목필을 보내 위로하였다. 아나괴가 절을 하고 떠나니
조서로 아니괴에게 가늘고 밝은 빛이 나는 사람과 말의 갑옷 두벌, 철로만든 사람과 말의 갑옷 6벌, 실과 은이 겉으로 얽힌 창 2개와 백모, 붉은 옷칠을 한 창 10개와 백모, 검은 옷칠을 한 창 10개와 깃발, 실을 드러낸 활 2개와 화살, 붉은 옷칠을 한 산뽕나무 활 6개와 화살 검은 옷칠을 한 활 10개와
화살, 붉은 옷칠을 한 방패 6개와 칼, 검은 옷칠을 한 방패 6개와 칼,
붉은 옷칠을 한 북과 나발 20벌 오색 비단 이불 2채와 누런 명주로 된 이불과 요 30채, 사사로운 집에서 입을 수놓은 평상복 1벌과 모자 그리고 안 사람의 붉은 빛 들인 웃옷 1벌, 붉은 빛 웃옷 20벌과 모자 그리고 안 사람의 섞인
비단 천필, 붉은 빛은 들인 작은 구멍의 말 탈때 입는 헐렁한 바지 1벌과 안쪽 가운데가 움푹 들어간 기구, 자주빛을 들인 큰 구멍의 말 탈 때 입는 헐렁한 바지 1벌과 안쪽 가운데가 움푹 들어간 기구, 백자 휘장 18개와 누런 천막 6개, 새로운 국없이 먹는 밥 1백석과 보리가루 8석과 개암가루 5석, 각각 20말이 들어가는 구리로 만든 까마귀 모양의 옹솥 4매와 부드러운 쇠로 만든 까마귀 모양의 옹솥 2매, 각각 2되가 들어가는 검은 칠을 한 대나무 합 4매, 여종 2명, 부초마 5백필과 낙타 120두와 소 1백두와 양 5천 마리, 붉은 그림을 그린 반상기 10합, 조 20만 석을 주도록 명하였다. 진에 이르자 지급하였다. 조서로 시중 최광과 황문 원찬으로 하여금 성곽 밖에서 위로하고 보내도록 명하였다. |
十二月,肅宗以阿那瓌國無定主,思還綏集,啟請切至,詔議之。時朝臣意有同異,或言聽還,或言不可。領軍元叉為宰相,阿那瓌私以金百斤貨之,遂歸北。二年正月,阿那瓌等五十四人請辭,肅宗臨西堂,引見阿那瓌及其伯叔兄弟五人,升階賜坐,遣中書舍人穆弼宣勞。阿那瓌等拜辭,詔賜阿那瓌細明光人馬鎧二具,鐵人馬鎧六具;露絲銀纏槊二張并白眊,赤漆槊十張并白眊,黑漆槊十張并幡;露絲弓二張并箭,朱漆柘弓六張并箭,黑漆弓十張并箭;赤漆盾六幡并刀,黑漆盾六幡并刀;赤漆鼓角二十具;五色錦被二領,黃紬被褥三十具;私府繡袍一領并帽,內者緋納襖一領;緋袍二十領并帽,內者雜綵千段;緋納小口袴褶一具,內中宛具;紫納大口袴褶一具,內中宛具;百子帳十八具,黃布幕六張;新乾飯一百石,麥麨八石,榛麨五石;銅烏錥四枚,柔鐵烏錥二枚,各受二斛;黑漆竹榼四枚,各受二升;婢二口;父草馬五百匹,駝百二十頭,牛一百頭,羊五千口;朱畫盤器十合;粟二十萬石。至鎮給之。詔侍中崔光、黃門元纂郭外勞遣。 |
아나괴가 도망온 뒤 그 사촌형 사력발파라문이 수만명을 이끌고 들어가 시발을 토벌하여 깼다. 시발은 지두우로 달아났는데 그들에게 살해되었다. 파라문을 추대하여 군주가 되고 미우가사구 가한이라고 불렀는데 북위 말로 안정이다. 그때 안북장군 회삭진장 양균이 표를 올려“전해 듣기로 저 사람들은 이미
주군을 세웠었는데 아나괴의 사촌형제입니다. 오랑캐들은 짐승의 마음을 가져 이미 군장으로 다스리는데 형을 죽인 사람으로서 그 아우를 교외에서 맞이하는데 즐겁지 않고 두려워할 것입니다. 경솔히 가게해서 헛되게 오게하는 것은
다만 국위를 손상시키는 것이니 스스로 군대를 증강시키지 않으면 그를 북으로 들어가도록 보낼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2월 숙종은 조서로 예전에 연연에 사자로 간 적이 있는 첩운구인으로 하여금 파라문에게 가서 아나괴가 귀국하려는 뜻을 맞이하도록 깨우치게 명하였다. 파라문은 특히 교만함으로 말미암아 겸손하게 물러날 마음이 없고 (첩운)구인에게 예의와 공경을 요구하였으나
(첩운)구인이 절을 잡고 굽히지 않았다. 파라문이 대관 막하거분과 사근
구승두 6명, 장병 2천을 보내 구인을 수행하고 아나괴를 맞이하게 하였다.
5월 (첩운)구인이 진으로 돌아와 저들의 사정을 말하였다. 아나괴가 염려하여 감히 들어가려 하지 않고 표를 올려 서울로 돌아갈 것을 청하였다. 때마침
파라문이 고차에게 쫓겨나 10부락을 인솔하고 양주에 이르러 투항하자, 이에 연연 수만명이 서로 인솔하여 아나괴를 맞이하였다. 7월 아나괴가 계문으로 말하기를 “항복한 연연의 원퇴사와 혼하전 등 2명이 이번 달 26일에 진에 도착하여 국토에 큰 혼란이 일어나 성씨마다 따로 살고 서로 번갈아 노략질하여
지금 북쪽 사람들은 목을 빼고 구원을 기다린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이전의
은혜에 의해 바라건데 정병 1만을 주어 다시 가령 통솔케 하여 신을 사막 북쪽에 보내어 거친 사람들을 위무 안정하게 해주십시오. 소청이 받아들여진다면 일은 반드시 이루어 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조서로 상서와 문하에 주어 널리 의논하도록 명하였다. 8월 조서로 겸산기상시 왕준업으로 하여금 역마로 달려가 황제의 뜻을 알리고 아나괴를 위문하며 거듭 하사품을 주었다. |
阿那瓌來奔之後,其從父兄俟力發婆羅門率數萬人入討示發,破之。示發走奔地豆于,為其所殺。推婆羅門為主,號彌偶可社句可汗,魏言安靜也。時安北將軍、懷朔鎮將楊鈞表:「傳聞彼人已立主,是阿那瓌同堂兄弟。夷人獸心,已相君長,恐未肯以殺兄之人,郊迎其弟。輕往虛反,徒損國威,自非廣加兵眾,無以送其入北。」二月,肅宗詔舊經蠕蠕使者牒云具仁,往喻婆羅門迎阿那瓌復藩之意。婆羅門殊自驕慢,無遜避之心,責具仁禮敬,具仁執節不屈。婆羅門遣大官莫何去汾、俟斤丘升頭六人將兵二千隨具仁迎阿那瓌。五月,具仁還鎮,論彼事勢。阿那瓌慮不敢入,表求還京。會婆羅門為高車所逐,率十部落詣涼州歸降,於是蠕蠕數萬相率迎阿那瓌。七月,阿那瓌啟云:「投化蠕蠕元退社、渾河旃等二人以今月二十六日到鎮,云國土大亂,姓姓別住,迭相抄掠,當今北人鵠望待拯。今乞依前恩,賜給精兵一萬,還令督率送臣磧北,撫定荒人,脫蒙所請,事必克濟。」詔付尚書、門下博議。八月,詔兼散騎常侍王遵業馳驛宣旨慰阿那瓌,并申賜賚。 |
9월, 연연 후주 사익벌이 회삭진으로 도망쳐왔는데 아나괴의 형이다
여러번 군사지원을 바란다고 간하며 아울러 아나괴를 원하였다.
10월, 녹상서사 고양왕 (원)옹、상서령 이숭、시중 후강、상서좌복야 원흠、
시중 원차、시중 안풍왕 (원)연명、이부상서 원수의、상서 이언、급사황문시랑 원찬、급사황문시랑 장렬、급사황문시랑 노동 등이 주청하여 말하기를 “예전 일을 들어보면 한은 남북 선우를 세우고, 진에는 동서의 칭함이 있었으니,
모두 서로 이어 재난을 막기 때문에 나라의 울타리로 삼은 것입니다. 지금
신 등이 함께 논의 한 바 회삭진 북쪽 땅 이름 무결산 토약해천과 돈황 북쪽 서해군은 곧 한나라와 진나라의 옛 방어진인데 두 곳은 넓고 평평하며 원래
들판이 두루 비옥합니다. 아나괴는 토약해천 서쪽에 두고 파라문은 서해군에 두어 각각 부락을 통솔하여 떠나고 흩어진 사람들을 모으게 하십시오. 그 벼슬 이름과 필요한 물자의 공급은 오직 은혜로 헤아려 처리 하십시오. 저들 신하의 벼슬은 그들의 옛 풍속에 맡기십시오. 아나괴가 살고 있는 곳은 이미 국경 밖이니 위엄과 형벌을 보여 우대를 줄여 보내야 합니다. 청컨대 옥야、회삭、
무천진에서 각각 2백명을 차출해서 해당 진의 군주로 하여금 감독 통솔케 하고 그 양식과 무기를 지급하여 앞서 말한 곳으로 보내 도착하게 하고 저들이 집을 짓게 해서 완료되면 귀환을 허락하십시오. 북쪽에서 온 자 가운데 파라문에
앞서 귀화한 자가 있으면 주와 진의 상좌에 명령하여 법 기준에 따라 양식을 지급하게 하여 회삭진에 있는 아나괴에게 보내고 (회삭)진은 사신과 의논하여 식량 곳간 단위로 주십시오. 서울 객관에 있는 자는 남을지 갈지를 그에게
맡기십시오. 아나괴는 초창기이기 때문에 이전에 저축한 것이 없으니 청컨대 삭주의 삼씨와 마른 밥 2천곡을 지급하고 관청의 낙타로 운송하십시오. 파라문은 서해(군)에 거주하니 즉 국경 안이므로 물자와 호위병이 같을수 없습니다. 아나괴 등은 새로 지은 변방의 울타리니 각각 사신을 보내 절을 가지고 역마로 달려 먼저 위로하고 깨우치게 하며 아울러 경략도 위임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숙종이 이에 따랐다. 12월, 조서로 안서장군、정위 원홍초를 겸 상서행대로 명하여,돈황에 가서 파라문을 안치하게 하였다. 파라문은 얼마 되지않아 부락 무리와 함께 배반하여 엽달에 투항하기로 모의 하였는데, 엽달(왕)의 세명의 처는 모두 파라문의 자매였다. 이에 주의 군대에게 토벌되어 사로잡혔다. |
九月,蠕蠕後主俟匿伐來奔懷朔鎮,阿那瓌兄也,列稱規望乞軍,并請阿那瓌。十月,錄尚書事高陽王雍、尚書令李崇、侍中侯剛、尚書左僕射元欽、侍中元叉、侍中安豐王延明、吏部尚書元脩義、尚書李彥、給事黃門侍郎元纂、給事黃門侍郎張烈、給事黃門侍郎盧同等奏曰:「竊聞漢立南、北單于,晉有東、西之稱,皆所以相維禦難,為國藩籬。今臣等參議以為懷朔鎮北土名無結山吐若奚泉,敦煌北西海郡即漢晉舊障,二處寬平,原野彌沃。阿那瓌宜置西吐若奚泉,婆羅門宜置西海郡,各令總率部落,收離聚散。其爵號及資給所須,唯恩裁處。彼臣下之官,任其舊俗。阿那瓌所居,既是境外,宜少優遣,以示威刑。請沃野、懷朔、武川鎮各差二百人,令當鎮軍主監率,給其糧仗,送至前所,仍於彼為其造構,功就聽還。諸於北來,在婆羅門前投化者,令州鎮上佐準程給糧,送詣懷朔阿那瓌,鎮與使人量給食廪。在京館者任其去留。阿那瓌草創,先無儲積,請給朔州麻子乾飯二千斛,官駝運送。婆羅門居於西海,既是境內,資衞不得同之。阿那瓌等新造藩屏,宜各遣使持節馳驛先詣慰喻,并委經略。」肅宗從之。十二月,詔安西將軍、廷尉元洪超兼尚書行臺,詣敦煌安置婆羅門。婆羅門尋與部眾謀叛投嚈噠,嚈噠三妻,皆婆羅門姊妹也。仍為州軍所討,禽之。 |
(정광) 3년(522년) 아나괴가 표를 올려 밭에 뿌릴 조를 달라고 하여 조서로
만석을 주도록 명하였다. (정광) 4년(523년) 아나괴 무리에게 큰 기근이 들어 변방에 들어와 노략질하니 숙종이 조서로 상서좌승 원부 겸 행대상서로 하여금 절을 가지고 가서 깨닫도록 명하였다. (원)부가 아나괴를 만나자 그는 잡혀서 (원)부로 하여금 자신을 따르게 하고 양민 2천명 그리고 관청과 백성의 역마, 소, 양, 수십만을 빼앗아 북쪽으로 달아나면서 원부에게 사례하고 석방해 돌려보냈다. 조서로 표기대장군、상서령 이숭 등으로 하여금 기병 10만을 거느리고 토벌하도록 명하였는데,변방을 3천리나 나가 한해에 이르렀으나 따라잡지 못하고 돌아왔다. 사익벌이 낙양에 이르니 숙종이 서당에 임하여 불러 보았다. (정광) 5년(524년) 파라문이 낙양 남쪽 객관에서 죽으니 조서로 사지절、
진서장군、진주자사、광목공을 추증하였다 |
三年十二月,阿那瓌上表乞粟以為田種,詔給萬石。四年,阿那瓌眾大飢,入塞寇抄,肅宗詔尚書左丞元孚兼行臺尚書持節喻之。孚見阿那瓌,為其所執,以孚自隨,驅掠良口二千,公私驛馬牛羊數十萬北遁,謝孚放還。詔驃騎大將軍、尚書令李崇等率騎十萬討之,出塞三千餘里,至瀚海,不及而還。俟匿伐至洛陽,肅宗臨西堂,引見之。五年,婆羅門死於洛南之館,詔贈使持節、鎮西將軍、秦州刺史、廣牧公。 |
이해에 옥야진 사람 파륙한발릉이 반란을 일으키자 여러 진에서 서로 호응하였다. 효창원년(525년) 봄 아나괴가 무리를 인솔하고 토벌하니 조서로 첩운구인으로 하여금 여러 가지 물건을 가져가서 아니괴를 위로하고 주도록 명하였다. 아나괴는 조서의 명을 절을 하고 받고는 무리 10만을 정돈하여 무천진 서쪽
옥야(진)을 향해 나아가 번번히 싸움에 이겼다. 4월, 숙종이 또 겸 통직산기상시、중서사인 풍(준)을 사신으로 아나괴에게 보내 위로하고 차등있게 나누어 주었다. 아나괴 부락이 (북위와) 화의하는 동안 국력이 점차 강성해지자 이에 칙련두병두벌 가한이라고 불렀는데 북위 말로‘붙잡다’이다. 10월, 아나괴가 다시 욱구려미아를 보내 조공하였다. 돌아갈 즈음 숙종이 조서로 말하기를
“북진의 여러 오랑캐가 반역을 하여 그치지 않는데 연연의 군주는 나라에
충성하며 주벌과 토벌을 더하여 돕고 말과 생각이 성심성의하여 침식을 잊었다. 지금 북변에 머물러 있으면서 이주영과 인접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부곡을 엄히 다스려 서로 난폭하게 노략질하지 말며, 또 근래의 연연 군주의 계문을 보면 다시 나라(북위)를 위해 동쪽을 토벌하려고 한다. 단지 연연 군주는 대대로 막북(고비사막 북쪽)에 살았으니, 무더운 여름은 맞지 않으므로 지금 잠시 정지하고 다음 칙령을 기다려라.”고 하였다. (이것은) 모두 조정이 그가 뒤집어 엎을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이후에도 빈번히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
是歲,沃野鎮人破六韓拔陵反,諸鎮相應。孝昌元年春,阿那瓌率眾討之,詔遣牒云具仁齎雜物勞賜阿那瓌,阿那瓌拜受詔命,勒眾十萬,從武川鎮西向沃野,頻戰克捷。四月,肅宗又遣兼通直散騎常侍、中書舍人馮使阿那瓌,宣勞班賜有差。阿那瓌部落既和,士馬稍盛,乃號敕連頭兵豆伐可汗,魏言把攬也。十月,阿那瓌復遣郁久閭彌娥朝貢。三年四月,阿那瓌遣使人鞏鳳景等朝貢,及還,肅宗詔之曰:「北鎮羣狄,為逆不息,蠕蠕主為國立忠,助加誅討,言念誠心,無忘寢食。今知停在朔垂,與尒朱榮隣接,其嚴勒部曲,勿相暴掠,又近得蠕蠕主啟,更欲為國東討。但蠕蠕主世居北漠,不宜炎夏,今可且停,聽待後敕。」蓋朝廷慮其反覆也。此後頻使朝貢。 |
건의 초(528년) 효장제가 조서로 말하기를“무릇 공훈이 높은 자는 상이 무겁고 덕이 후한 자는 이름이 높은데 연연의 군주 아나괴는 북번을 진압하고 호위하여 북쪽 변경 바깥의 침범을 막아 마침내 음산에서 경계를 멈추게 하였고
약수에서 전쟁의 티끌을 없게 하였으니 공적은 낭산에 새기고 공훈은 한해에 새겨야 한다. 지성은 이미 두텁고 공훈은 갚을수 없다. 따라서 특별한 예로
표창해야하며 어찌 보통의 격식을 따르겠는가! 지금 이후부터 찬배할 때 이름을 말하지 말며 글을 올릴 때 신이라고 칭하지 말라.”고 하였다.
태창원년(532년) 6월, 아나괴가 오구란수십벌 등을 보내 조공하고 아울러 큰 아들을 위해 공주에게 혼인하기를 청하였다.
영희 2년(533년) 4월 출제는 조서로 범양왕 (원)회의 큰딸 낭사공주를 허락하였는데 혼인에 이르기 전에 황제가 관(중)으로 들어갔다.
제 헌무왕(고환)이 사신을 보내 설득하니 아나괴는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구혼하였다. 헌무왕은 널리 사방 멀리 떨이진 곳을 불러들였으므로 상산왕의 누이 낙안공주를 허락하고 난릉공주로 고쳤다.
(아나)괴는 말 천필을 보내 혼인 예물로 바치고 공주를 맞이하였다. 조서로
종정 원수로 하여금 공주를 호송하여 북으로 가도록 명하였다. 이로부터 조공이 서로 잇달았다. (아나)괴는 제 헌무왕의 위엄과 덕이 날로 성대해지자 사랑하는 딸을 왕에게 바치기를 청하였고 정제는 조서로 왕(헌무왕)으로 하여금
받아들이라고 명하였다. 이로부터 변방밖에는 전쟁의 먼지가 없어졌다. |
建義初,孝莊詔曰:「夫勳高者賞重,德厚者名隆,蠕蠕主阿那瓌鎮衞北藩,禦侮朔表,遂使陰山息警,弱水無塵,刊跡狼山,銘功瀚海,至誠既篤,勳緒莫酬。故宜標以殊禮,何容格以常式。自今以後,讚拜不言名,上書不稱臣。」太昌元年六月,阿那瓌遣烏句蘭樹什伐等朝貢,并為長子請尚公主。永熙二年四月,出帝詔以范陽王誨之長女琅邪公主許之,未及婚,帝入關。齊獻武王遣使說之,阿那瓌遣使朝貢,求婚。獻武王方招四遠,以常山王妹樂安公主許之,改為蘭陵公主。瓌遣奉馬千匹為娉禮,迎公主,詔宗正元壽送公主往北。自是朝貢相尋。瓌以齊獻武王威德日盛,請致愛女於王,靜帝詔王納之。自此塞外無塵矣。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