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조공의 진실③(조공이란 자기는 올리고 상대방은 낮춘 춘추필법에 지나지 않는다)

상 상 2013. 2. 4. 17:55

 

 고구려와 중국의 관계-59(북위 때㉕: 조공의 진실③)

 

Ⅰ. 조공

가. 위서 본기의 조공 기록

A. 위서 전체

B. 모용수(후연) 부분(위서 본기 중 모용수가 북위에 조공했다는 기록)

C. 동진 부분(위서 본기 중 동진이 북위에 조공했다는 기록)

 

 

C. 동진 부분(위서 본기 중 동진이 북위에 조공했다는 기록)

 

이번에는,

동진의 안제가 북위에 조공했다는 기록에 대하여 알아보자.

동진의 안제가 북위에 조공했다는 기록은 다음과 같은 2개이다.

1) 396년(태조 도무제 황시원년)

이해에 사마창명(동진 제9대 황제)이 죽고 아들 덕종이 참람하게 제위에 올라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是歲,司馬昌明死,子德宗僭立,遣使朝貢)

 

2) 418년(태종 명원제 태상3년)

3월 사마덕종(동진 제10대 황제, 안제)이 사신을 보내 조공하여 왔다.(三月,司馬德宗遣使來貢)

 

이는 한쪽 당사자인 북위쪽의 기록에 이렇게 되어 있다는 말이고

상대편 기록인 진서 본기를 보자

 

그런데, 396년 말 기록에 대해서 상대편 기록인 진서 안제본기에 그에 관련된 기록이 없고

자치통감에도 그에 관련된 기록이 없어 뭐라고 언급할 수가 없다.

 

418년 3월 기록도 진서 안제본기에 없다.

그런데 자치통감에 418년 3월 기록이 다음과 같이있다.

 

3월에 사신을 위에 파견하여 방문하였다(遣使聘魏) 이렇게 되어 있다.

<진기40, 안제 의희 14년(418년), 3월조>

 

※참고

내빙(來聘): 그 나라의 예물을 가지고 특정한 나라를 찾아오다

빙(聘): 그 나라의 예물을 가지고 특정한 나라를 찾아가다.

 

즉, 빙(聘)이라는 단어는 외교행위를 말한다.

 

북위에서는 동진에서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고 하지만

동진에서는 사신을 보내 예물을 가지고 (북)위를 방문하였다고 한다.

 

즉, 북위에서는 사신이 복종 사절이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동진에서는 사신이 외교사절이라고 말하고 있다.

다시말해서 동진에서 외교사절을 보낼 때 그 당시의 관례대로 물건(예물)을 가져가 주었는데

북위에서는 자기들이 받은 물건을 공물로 표현한 것이다.

북위에서 제멋대로 물건을 바쳤다, 조공을 바쳤다, 이렇게 표현하고 기록한 것이다.

어떻게 된 것인가?

 

참고로, 그 당시 북위와 동진의 상황을 살펴보자.

 

북위는 제3대 세조 태무제 때인 422년에 10월에 가서야 황하를 넘어 활대(하남성 활현)로 남침을 시작하는데

그때는 동진은 이미 망하고 양자강 남쪽에는 남송(유송)이 존재하고 있던 때이다.

따라서 태조 도무제(396년)나 태종 명원제(418년) 때는 황하는 커녕 양자강 남쪽에 있는 동진을 위협하지 못하던 시대이다.

 

반면에 동진은 제10대 안제 때 비록 망해가고 있었지만 양자강 남쪽에 있었으므로

북위의 직접적 위협은 받지 않고 있었다.

따라서 북위의 무력에 굴복하지 않은 동진이 굴욕적으로 북위에 조공을 할 이유가 없었다.

다만 국가간 외교가 있었을 뿐이다.

외교사절을 북위에 보낸 것이고 외교사절을 보낼 때 그 당시의 관례대로 예물을 주어서 보낸 것이다.

그러니까 조공이라는 표현은 물건을 주고 받은 것인데

물건 받은 자기들은 높이고, 물건을 준 상대방을 낮추어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이런 것을 춘추필법이라고 한다.

 

즉, 조공했다는 것은 물건을 주었다는 것이고

그것을 자기 멋대로 물건을 받은 자기들은 높이고 물건을 준 상대방은 낮추어 표현 한 것이다.

이는 일방적 표현이고 자기중심적 표현이며 주관적인 표현에 불과하다.

다시말해서 객관적 사실을 말한 것이 아니다.

다시한번 강조하건데 조공이라는 표현과 기록은 객관적 사실이 아니다. 즉 사실이 아니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하다.

 

또한번 말 하건데 조공하였다는 기록으로 조공을 바쳤다고 하는 나라가 하위국가이라거나

약소국이라고 말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견해이며 잘못된 주장이다.

또한 조공을 받은 나라가 상위국이고 강대국이라고 말하는 것도 매우 잘못된 견해이며 잘못된 주장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주관적 표현이며 주관적 기록이기 때문이다.

국가간에 외교사절이 오고 가는데 서로 조공을 받았다라고 표현하고 기록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수 있는 사실은 조공의 기록으로는 어느 나라가 우위에 있었는지 알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번 말하건데 그것은 상대적이며 주관적인 기록이기 때문이다

 

또한 조공이란 표현과 조공이란 기록은 오로지 자기를 올리고 상대방을 낮춘 춘추필법에 지나지 않는다.

원래 조공이란 표현이 그런 것이고 조공이란 기록이 그런 것이다....

 

여기서도,

1) 조공이란 하위국가가 상위국가의 정치 군사적 압박에 못이겨 물건을 상납한 것이라든가,

2) 문화적 하위 국가가 문화적 요구 때문에 물건을 상납한 것이라든가,

3) 벼슬을 받기 위해서 물건을 상납한 것이라든가(소위 조공책봉 체계),

하는 것은 전부 거짓말임을 알 수 있다.

 

북위는 세조 태무제 때에 가서야 황하를 건넜으니 양자강 남쪽에 있었던 동진을 정치 군사적으로 압박하지 못하였으니

1)번에 해당하지 않고,

 

동진이 그 이전의 한족문화를 그대로 가져와 계승하고 있으니 황량한 몽골지방에서 자라난 북위보다 문화적으로 우위에 있었으므로 2)번에 해당하지 않으며,

 

동진의 안제도 황제이므로 3)번에 해당하지 않는다.

 

소위 조공책봉 체계를 떠드는 자들이 말하는 조공은 거짓임이 또한번 드러난 순간이다.

그 사람들이 말하는 조공은 거짓이라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