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조공의 진실②(조공은 상위국과 하위국을 뒤집어 거꾸로 쓴 것이다)

상 상 2013. 2. 1. 17:38

 

고구려와 중국의 관계-58(북위 때㉔: 조공의 진실②)

 

차례

Ⅰ. 조공

가. 위서 본기의 조공 기록

A. 위서 전체

B. 모용수(후연) 부분(위서 본기 중 모용수가 북위에 조공했다는 기록)

 

 

B. 모용수(후연) 부분(위서 본기 중 모용수가 북위에 조공했다는 기록)

 

위서 본기에 모용수가 탁발규에게 조공을 했다는 기록은 아래와 같이 4개이다.

1) 386년(태조 등국원년)

가을 7월 이달에 (모용)수가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秋七月 是月, 垂遣使朝貢)

 

2) 12월, 모용수가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황제에게 서선우의 인수를 바치고 상곡왕에 봉하였다.

황제가 받지 않았다.(十二月,慕容垂遣使朝貢,奉帝西單于印綬,封上谷王。帝不納。)

 

3) 388년(태조 등국3년)

겨울 10월에 모용수가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冬十月,慕容垂遣使朝貢)

 

4) 389년(태조 등국4년)

겨울 10월에 (모용)수가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冬十月,垂遣使朝貢)

 

이 기록이 어떻게 된 것인지 알아보자.

 

진짜 모용수가 탁발규에게 물건을 상납했는지(조공), 아닌지 알아보려면

그 당시 후연과 북위의 국력을 알아보면 되겠다.

 

1. 모용수는

383년 11월 비수의 전투에서 패배한 전진왕 부견을 호위하여 돌아오던 모용수는 전진과 결별,

384년 1월 업(鄴: 하북성 임장현)을 공격하였지만 지리한 공방이 이어졌다.

385년 윤 5월 모용수가 대방왕 모용좌에게 용성(龍城: 요녕성 조양시)에서 진수하도록 하였다.

6월에 고구려가 요동을 공격하였으며 고구려는 마침내 요동과 현도를 함락시켰다.

8월 부비가 업(鄴)에서 물러나 진양으로 가자 연왕 모용수가 업(鄴: 하북성 임장현)을 점령한다.

11월 모용농이 용성에 이르러서 고구려를 치고 요동과 현도 두 군을 다시 차지하였다.

12월 모용수가 비로소 중산(中山: 하북성 정주시)을 도읍으로 정하고

386년 1월 무용수가 후연의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이로써 후연의 모용수는 북으로 지금의 요하(랴오허)에서부터 남으로 하북성의 남쪽 끝까지 북중국에서

가장 큰 나라를 건설하였으며 밑으로 여러명의 왕을 둔 황제로, 이때 모용수의 나이 61세였다.

 

2. 탁발규는

여러번의 죽을 고비를 넘긴 끝에

385년 12월 어머니의 고향인 하란부(내몽고 음산산맥 북부)에서

탁발규의 친척과 외삼촌이 탁발규를 주군으로 삼자고 결의한 뒤

386년 1월 6일 탁발규가 우천(내몽골 흥화현 서부)에서 대왕(代王)의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그후 거주지를 성락(내몽골 화림격이현)으로 옮기고

3월 대왕(代王) 탁발규가 처음으로 위왕이라고 고쳐 부른다.

 

이로써 북위가 탄생한 것이고 탁발규는 황량한 성락이라는 곳의 작은 지역에 터전을 둔 자칭 왕이었으며 이때 나이 15살이었다.

그러니까 탁발규는 황량한 곳에 갓 태어난 작은 신생국의 15살짜리 어린 왕이었다.

 

그런데 강대국의 61살 먹은 후연 황제, 모용수가 작은 신생국의 15살짜리 어린 왕에게 조공을 하였다?

참...해도 너무한 얘기아닌가!... 거꾸로 써도 분수가 있지 이건 너무 심한 거짓말이지 않은가 말이다.... 

 

3. 또한, 후연의 황제 모용수가 처음으로 북위의 어린 왕 탁발규에게 조공을 했다는

386년 7월과 12월의 전후 사정은 다음과 같다.

 

386년 3월, 탁발규가 동쪽으로 능석에 갔는데 호불후부의 우두머리 후진과

을불부의 우두머리 대제(代題)가 모두 반란을 일으키고 달아났다.

 

8월, 탁발규는 내란이 생길 것을 두려워하여 다시 하란부(내몽고 음산산맥 북부)에 의지하면서 요동사람

안동을 파견하여 후연에 구원해주기를 청하자 후연 황제 모용수가 조왕 모용린을 보내주었다.

 

9월, 모용린의 군대가 아직 위에 도착하지 않았는데

탁발굴돌이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 위왕 탁발규를 압박하고

하염간은 위의 북부를 침략하여 그에게 호응 하였다.

위의 무리는 놀라서 소란스러워 졌으며 북부대인 손숙보락이 도망하여서 유위진에게 달려갔다.

 

모용린은 그 소식을 듣고 급히 안동 등을 파견하여 돌아가도록하였다.

위나라 사람들은 연의 군대가 근처에 있음을 알고 무리들의 마음이 다소 안정되었다.

 

탁발굴돌은 나아가서 고류(산서성 양고현)에 주둔하였는데 탁발규가 군사를 이끌고 모용린과 만나서

이를 공격하였더니 탁발굴돌이 대패하여 유위진에게 달아났는데 유위진이 그를 죽였다.

 

탁발규가 그의 무리를 다 거두고 대의 사람 고적간을 북부대인으로 삼았다.

모용린이 군사를 이끌고서 중산(하북성 정주시)로 돌아왔다.

 

유위진은 삭방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병사와 말이 아주 많았다.

그래서 후진의 주군 요장은 유위진을 대장군 대선우 하서왕 유주목으로 삼았고,

서연의 주군 모용영은 유위진을 대장군 삭방목으로 삼았다.

 

이렇게 후연 황제 모용수는 신생 독립한 작은 나라가 소멸될 절대적인 위험에서 구출해주었고,

후진과 서연에서 유위진을 자기들 하위왕으로 삼았기 때문에 탁발규를 서선우로 삼고 상곡왕에 책봉하였던 것이다.

(탁발규가 받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 당시 국가간의 역학관계상 그것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모용수가 탁발규에게 조공을 하였다?

참...해도 너무한 이야기 아닌가!(너무 심한 위 아래 뒤바꾸기)

 

4. 따라서 386년 7월 기록은 거짓말이다.

조공이라는 것이 작고 힘없는 나라가, 크고 힘있는 나라에게 물건을 바치는 것이라는 말을 기준으로 보면

386년 7월 조공 기록은 완전히 거짓말이다.

그때는 모용수는 크고 힘이 강력한 나라의 황제였고, 탁발규는 작고 힘없는 나라의 어린 왕이었다.

상위국과 하위국을 완전히 뒤바꾼 것이다.

 

그것은 두말 할 것없이 강대국 황제 모용수가 작은 나라의 어린 왕 탁발규에게 물건을 하사한 것이다.

그런데도 그것을 북위에게 조공했다고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조공하였다는 기록을 가지고

조공을 바쳤다고 하는 나라가 하위국가이라거나 약소국이라고 말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견해이며

매우 잘못된 주장이라는 것을 알수 있다.

 

반대로 조공을 받은 나라가 상위국이고 강대국이라고 말하는 것도 매우 잘못된 견해이며 잘못된 주장이라는 것을 알수 있다.

 

그것은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자기 입장에서 말한 일방적인 이야기이며 주관적인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즉, 조공이라는 기록은 객관적인 이야기가 아니며 객관적 사실이 아니다.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위 아래를 완전히 뒤집은 거짓 기록이기 때문이다.

 

5. 386년 12월 기록에 대하여...

7월에 강대국의 황제가 작은 나라의 어린 왕에게 물건을 바쳤다는 것은 있지도 않는 거짓말임에 이어서

12월에 목숨이 위험한 약소국을 구해준 강대국 황제가 그 약소국에게 물건을 바쳤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거짓말이며

더구나 망할뻔한 나라를 구해준 황제가 그것 때문에 자기의 하위국가 왕으로 책봉하면서

그 증명으로 도장(서선우의 인수)을 바쳤다는 것도 허무맹랑한 거짓말이다.

 

정확히 말하면 모두 하사(下賜)한 것이다.

다시말해서 완전히 위 아래를 거꾸로 뒤바꾼 거짓말이다.

 

물건을 받은 것도, 도장을 받은 것도 무조건 자기를 높이고 상대방을 낮추어 완전히 거꾸로 표현한 것 뿐이다.

그것이 조공이란 표현이고 조공이라는 기록이다.

(도대체 황제라는 사람이 자기가 목숨을 구해준 아랫사람을 왕으로 봉하면서 왕이라고 인정하는 도장을 바치는 경우가 어디 있는가?)

 

6. 388년 10월 기록에 대하여...

 

자치통감 388년 8월조를 보면,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위왕 탁발규가 몰래 연을 도모할 뜻을 가지고 있으면서 구원공 (탁발)의를 보내 사신이 되어

중산(후연의 서울)에 이르게 하였는데 연의 주군 (모용)수가 그를 힐난하였다.

“위왕이 어째서 손수 오지 않았느냐?”』

(원문: 魏王珪密有圖燕之志,遣九原公儀奉使至中山,燕主垂詰之曰:「魏王何以不自來?」) <진기29 효무제 태원13년(388년) 8월조 >

 

여기서 詰之曰은‘꾸짖어 말하기를’이라는 뜻이니

위왕 탁발규가 직접 오지 않은 것을 꾸짖은 것이다.

 

다시말해서 “어디서 건방지게 직접오지 못하고 사신 나부랭이를 보내는가?” 하는 꾸짖음이다

즉. 후연에 올때는 사신 정도가 아니라 왕이 직접와야 되는 정도였음을 말하고 있다.

후연과 북위의 관계가 그 정도로 현격한 차이였던 것이다.

 

이 정도로 국력의 차이가 현격했는데 모용수가 탁발규에게 조공을 했다?

한마디로 웃기는 얘기다.

거꾸로 뒤집어 쓴 것도 분수가 있지, 거짓말을 해도 이렇게 심하게 할 수 있는가?

 

여기에서 또한번 우리가 알수 있는 사실은

조공의 기록이 있다고해서 그것으로 어느 나라가 우위에 있었는지 알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번 말하건데 그것은 상대적이며 주관적인 기록이기 때문이다.

조공이라는 기록은 객관적 사실이 아니란 말이다.

 

7. 389년 10월 기록에 대하여...

 

자치통감 391년 7월 조를 보면

『탁발규가 그의 동생 탁발고를 보내서 연에 물건을 바치고 알현하니...』이런 말이 나온다.

(원문: 魏王珪遣其弟觚獻見於燕)<진기29 효무제 태원16년(391년) 가을 7월조>

 

여기서 바쳤다(獻:헌)는 말과 알현했다(見:현)는 말 모두 윗사람에게 쓰는 말이다.

 

또한 후연에 대한 외교사절로 직접 탁발규 자기의 동생을 보낸 것도 북위가 하위의 위치에 있음을 말하고 있다.

후연에서는 그냥 ‘사신을 보냈지(遣使:견사)’후연 황제의 동생을 보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사이였는데 모용수가 탁발규에게 조공을 했다?

이 역시 명백한 거짓말이다.

 

8. 여기서 우리가 또하나 확인 하고자 하는 것은,

1) 조공이란 하위국가가 상위국가의 정치 군사적 압박에 못이겨 물건을 상납한 것이라든지,

2) 문화적 하위 국가가 문화적 요구 때문에 물건을 상납한 것이라든지,

3) 벼슬을 받기 위해서 물건을 상납한 것이라든지(소위 조공책봉 체계), 하는 것은 전부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후연 황제 모용수가 북위왕 탁발규에게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는 기록이 위의 세가지 중에

어느것에 해당되는가? 하나도 해당되는 것이 없지 않은가....

 

이때는, 후연이 군사적 우위 국가였으니 1)번에 해당하지 않고

후연이 황량한 내몽골 지방에 있는 북위보다 문화적으로 우위에 있었으니 2)번에 해당하지 않으며

후연 황제가 북위의 왕보다 벼슬이 위에 있었으니 3)번에도 해당하지 않는다.

 

소위 조공책봉 체계를 떠드는 자들이 말하는 조공은 거짓임이 그대로 드러나는 순간이다.

그 사람들이 말하는 조공은 거짓이라는 말이다.

 

9. 결론적으로

여기에서 우리가 알수 있는 사실은

 

1) 조공의 기록은 자기 입장에서 말한 일방적인 이야기이며 주관적인 기록이지, 객관적인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즉,‘조공이라는 기록은 객관적 사실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2) 조공의 기록은 위 아래를 완전히 뒤집은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3) 따라서 조공하였다는 기록을 가지고

조공을 바쳤다고 하는 나라가 하위국가이라거나 약소국이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견해이며 잘못된 주장이다.

반대로 조공을 받았다는 나라가 상위국이고 강대국이라고 말하는 것도 매우 잘못된 견해이며 잘못된 주장이라는 것이다.

 

※관련 근거사서 기록: 자치통감(일부요약)

376년 11월

....(상략)

이때 진의 병사들이 아직도 군자진(내몽고 탁극탁현 동남 황하를 건너는 입구)에 있어서 여러 아들이 매일 밤마다 무기를들고 경계하며 호위하였다.

 

탁발근(탁발고의 아들)이 이 기회에 탁발십익건의 서장자 탁발식군에게 유세하였다.

“왕께서 장차 모용비의 소생인 아들을 세우면 우선 너부터 살해 하려 할 것이니 그러므로 근자에 여러 아들들이 매일 밤 융복(戎服-군복)을 하고 무기를 가지고 여장(천막)을 둘러싸고 있는 것은 몰래 틈을 엿보다가 즉시 일어나려고 하는 것 뿐이다.”

탁발식군이 이 말을 믿고 마침내 여러 동생들을 죽이고 아울러 탁발십익건(57세)도 시해 하였다.

 

그날 밤, 여러 아들들의 부인과 부족 사람들이 도망가서 진군(전진)에게 알렸으며 진(전진)의 이유와 장자가 군대를 챙겨서 운중(내몽고 탁극탁현)으로 달려가자 각부에 사는 무리들이 도망하고 무너져서 나라 안에 커다란 난리가 일어났다.

 

탁발규의 어머니 하씨는 탁발규를 데리고 도망하여 하눌(賀訥)에게 의지하였다.

하눌은 하야간(賀野干)의 아들이다.

 

진왕 부견이 태의 장사 연봉을 불러서 그곳에서 난이 일어난 까닭을 물었고 연봉은 모든 상황을 갖추어서 대답하였다.

부견이 말하였다. “천하의 죄악 가운데 하나이다.”

마침내 탁발식군과 탁발근을 잡아서 장안에 가서 차열(車裂)하였다.

.......(중략)......... 

대의 백성을 나누어 두 부로 만들고 황하에서부터 동쪽은 유고인에게 속하도록 하며,

서쪽은 철불위진에게 속하도록하여 각각에게 관직과 직위를 내리고 그 무리들을 다스리도록 하였다.

 

하씨는 탁발규를 데리고 독고부로 돌아왔으며 남부대인 장손숭과 원타등과 더불어 모두 유고인에게 의지하였다.

 

........(중략)......

 

유고인은 헤어지고 흩어진 사람들을 불러서 어루만지니 은혜를 베푸는 것과 신임이 매우 드러나고

탁발규를 받들어 모시는 것이 은혜를 베풀고 부지런한 것이 두루 갖추고 있어서 그의 지위를 없애거나 생각을 바꿀 뜻을 갖지않고 항상 여러 아들들에게 말하였다.

“이 아이는 천하 사람들보다 높은 뜻을 갖고 있어서 반드시 조상의 공업을 회복하고 융성하게 할 것이니 너희 무리는 마땅히 그를 삼가며 대우하라.”

......................(하략) 

 

383년

11월

전진이 비수의 전투에서 패배한 후 전진에 투항했던 모용수는 부견을 호위하여 낙양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부견의 곁을 떠나 업(鄴)으로 갔다.(비수대전에서 패배한 것도, 업으로 간 것도 모두 11월임)

 

부견이 이를 허락하였다. 권익이 간하였다.“(요약: 가게 해서는 않됩니다)”

부견의 말하였다.

“경의 말이 옳다. 그러나 짐이 이미 허락을 하였으니 필부도 식언을 하지 않거늘 하물며 만승인 경우에야!....(하략)”

 

권익이 말하였다.

“폐하는 사소한 신용을 중히 여기시고 사직을 가벼이 여기시니......(하략)”

 

 

12월

경오일(15일)

부비는 묘용수가 북쪽으로 왔다는 소식을 듣고 그가 난을 일으킬까 의심하였으나 오히려 자신이 스스로 그를 맞이 하였다. 조추가 모용수에게 앉은 자리에서 부비를 잡고 그 기회에 업을 점거해서 군사를 일으킬 것을 권유하였으나 모용수가 따르지 않았다.부비도 모용수를 습격하려고 도모하였으나 (신하가 반대하여 그만둠:요약)

부비는 모용수를 업의 서쪽에 머물게 하였다.

모용수는 은밀히 연의 옛 신하들과 더불어 연의 복록을 회복시키려는 모의를 하는데

때마침 정령족 적빈(翟斌)이 낙양을 공격하려고 모의하자, 부견이 역참을 통하여 모용수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그를 토벌하게 하였다. 부비가 나약한 병사 2천명과 부비룡에게 저족 기병 1천명을 인솔하게 하여 모용수의 부장으로 삼았다.

 

석월이 물러나 사람들에게 고하였다.

“공의 부자는 사소한 인(仁)을 좋아하고 대계(大計)를 돌보지 않으니 결국에는 남에게 사로잡히게 될 것이다.”

 

모용수는 모용농 모용해 모용소를 업에 머물게 하고 가다가 안양(하남성 안양시)의 탕지에 이르렀는데 민량과 이비가

업에 와서 부비와 부비룡의 모의를 모용수에게 알렸다.

 

 

임오일(27일)

모용수는 세자 모용보를 앞서게 하고 어린 아들 모용륭에게 군사를 통솔해 자신을 따르게 하며 ...

은밀히 약속하여 북소리가 들리자 앞과 뒤에서 저족 병사와 부비룡을 협공하여 모두 죽이고

부견에게 편지를 보내 부비룡을 죽인 연유를 말하였다.

 

계미일(28일)

모용수는 황하를 건너고 나서 다리를 불태웠는데 무리 3만명을 보유하게 되자

 

갑신일(29일)

모용농과 모용해는 수십 기병을 거느리고 평복을 하고 업을 나와 마침내 함께 열인(하북성 비향현 동북쪽)으로 달아났다.

 

진기27 효무제 태원 9년(384년)

 

정월

병술일(2일) 모용수는 낙양을 접수함(요약)

모용수는 낙양은 사면에서 적의 공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업(鄴)을 빼앗아 점거하고자 하여 마침내 군사를 인솔해

동쪽으로 갔다.

예전에 부여왕이었던 여울(餘蔚)을 형양(하남성 형양현) 태수로 삼자 창려에 사는 선비족 위구와 함께 각각의 무리를

거느리고 모용수에게 투항하기에 이르렀다.

모용수가 형양에 이르자 ...

모용수는 마침내 대장군 대도독 연왕이라고 칭하고

......(중략)....

무리 20여만 명을 거느리고 석분(형양현 북쪽)에서 황하를 건너서 멀리까지 말을 몰아 업(鄴)으로 향하였다.

 

 

진기27 효무제 태원 9년(384년)

 

봄 정월

경술일(26일)

연왕 모용수가 업(鄴)에 이르러 진의 건원 20년을 바꾸어 연의 원년으로 하고

........(중략).......

세자 모용보를 세워서 태자로 삼고

 

임자일(28일)

연왕 모용수가 업(鄴)을 공격하여 그 외곽을 뽑아버리자 장락공 부비가 물러나 중성(中城)을 지켰다.

 

2월

신사일(27일)

연왕 모용수가 정령과 오환의 무리 20여만 명을 거느리고 높은 사다리와 땅굴을 이용하면서 업을 공격하였으나 뽑아버리지 못했다.

 

12월

초규(전진 부비의 사절)가 사현을 찾아보자 사현은 부비를 불러 아들을 인질로 삼고 그런 후에 병사를 보내려고 하였다.

초규가 굳게 부비의 정성을 진술하고 아울러 양옹의 뜻을 진술하자 사현이 마침내 유뢰지와 등명지 등을 파견하여 무리 2만 명을 인솔하고 업을 구원하게 하였다.

부비가 굶주리고 있다는 것을 알리자 사현은 수로와 육로로 쌀 2천곡을 운반하여 그들을 먹였다.

 

 

< 자치통감 >

진기28, 효무제 태원 10년(385년)

 

3월

연왕 모용수가 업을 공격하는데 오래되어도 떨어뜨리지 못하자 장차 북쪽 기주(하북성 중남부)로 가려고 하여......

낙랑왕 모용온을 중산(하북성 정주시)에 주둔 시키고....

.....(중략)......

낙랑왕 모용온이 중산(하북성 정주시)에 있는데 병력이 아주 미약하여 정려우족이 사방에 퍼져서 여러 성을 나누어 점거하자 모용온이 제장들에게 말하였다.

“공격하기엔 충분치 않으나 수비하기에는 여유가 있다....(중략)”

 

4월

유뢰지가 군사를 전지시켜서 업에 도착하니 연의 모용수가 맞아 싸우다 패하자 마침내 포위를 풀고 퇴각하여

신성(하북성 비향현)에 주둔하고 을묘일(8일)에 신성으로부터 북쪽으로 가서 숨었다.

유뢰지가 진의 장락공 부비에게 말리지 않고 즉시 병사를 이끌고 그를 추격하였다.

부비가 그 소식을 듣고 군사를 발동하여 뒤를 이어서 나갔다.

경신일(13일)에 유뢰지가 모용수를 쫓아가다가 동당연에서 따라잡았다.

모용수가 말하였다. “.....급히 공격해야만 한다.”

유뢰지의 군대가 급히 200리를 달려서 오교택에 도착하여 연의 치중을 두고 다투니 모용수가 이들을 맞이하여 쳐서 대파하고 참수한 것이 수천 급이 되자 유뢰지가 말 한필을 타고 달아나는데 마침 진의 구원군이 도착하여 벗어날 수 있었다.

.......(중략).......

업(鄴) 안에서는 기근이 심하여 장락공 부비가 무리를 인솔하고 방두(하남성 기현 동남 기문진)의 진(晋)의 곡식이 있는 곳으로 갔다.

 

유뢰지가 업성에 들어가서 도망하여 흩어진 병사들을 거두고 모으니 병사가 다시 약간 떨쳤으나 전쟁에 패했다는 문제에 연루되어 불려 돌아갔다.

 

윤 5월 경술일(4일)

(모용수가) 대방왕 모용좌에게 명령하여 용성(龍城: 요녕성 조양시)에서 진수하도록 하였다.

 

6월에

고구려가 요동을 침공하였으며 모용좌가 사마 학경을 파견하여서 군사를 거느리고 이들을 구원하도록하였으나

고구려에게 패하였으며 고구려는 마침내 요동과 현도를 함락시켰다.

 

8월

신축일(26일)

요장이 사람을 보내어 부견을 신평(섬서성 빈현)에 있는 불교의 절에서 목을 졸라매어서 죽였다.

 

장락공 부비가 업에 있다가 장차 서족으로 가서 장안으로 가려고 하니 유주자사 왕영이 호관(산서성 장치시)에 있다가 사자를 파견하여 부비를 초빙하자 부비는 마침내 업에 있는 남녀 6만여 명을 인솔하고 서쪽으로 가서 노천(산서성 여성현 남부)에 갔고 표기장군 장자와 병주자사 왕등이 그를 영접하여 진양(산서성 태원시, 병주의 치소)으로 들어갔다.

부비가 비로소 장안이 수비되지 못하고 부견이 이미 사망하였다는 것을 알고 마침내 발상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며 부견의 시호를 추증하여 신소황제라고 하고 묘호를 세조라고

하며 대사면령을 내리고 연호를 대안(大安)으로 고쳤다.

 

연왕 모용수가 노왕 모용화를 남 중랑장에 임명하고 업에 진수하게 하였다.

 

(연왕 모용수가) 모용농을 파견하여 열옹새(거용관에 속한 요새)를 나와서 범성(하북성 평천현 남부)을 거쳐 용성(龍城)으로 가도록 하고, 또 군사를 모아서 여암을 치고, 모용린과 모용륭은 신도(하북성 기현)에서 발해(하북성 남피현)와 청하(산동성 임청시)를 순시하게 하였다.

 

385년 8월?(9월전)

유고인의 아들 유현은 작은 아버지 유두권을 죽이고 자립(요약)

장차 탁발규를 죽이려고 하였는데 유현의 동생 유항니의 처가 탁발규의 고모여서 이 소식을 탁발규의 어머니 하씨에게 알렸다.

유현의 모사 양육권이 대왕 탁발십익건의 생질인데 그 부락사람인 목숭과 해목에게 몰래 탁발규에게 알리도록하고 또 자기의 사랑하는 처와 준마를 목숭에게 부탁하며 말했다.

“일이 누설되면 마땅히 이것을 스스로 밝혀야 하오.”

하고는 밤에 유현과 술을 마셔서 유현을 취하도록 하고, 탁발규에게 몰래 옛 신하인 장손건 원타 나결과 함께 경무장 한 채로 달아나게 하였다.

 

새벽이 되자 하씨는 고의로 마구간에 있는 말들을 놀라게 하여 유현을 일어나게 하였다.

하씨는 고하며 말하였다.

“내 아들이 마침 여기에 있었는데 지금 모두 보이지 않으니 너희들중 누가 그를 죽였는가?”

유현이 이 때문에 급히 쫓아가지 않았다.

 

탁발규가 마침내 하란부로 달아나서 그의 외삼촌 하눌에게 의지하였다.

하눌이 놀라고 또 기뻐하며 말하였다.

“나라를 회복시킨 후에는 당연히 나이먹은 신하를 생각해야 할 것이오!”

탁발규가 웃으며 말하였다.

“진실로 외삼촌의 말처럼 감히 잊지 않을 것입니다.”

하씨의 사촌동생인 외조대인 하열이 자기가 거느리는 부락을 들어서 탁발규를 받들었다.

 

유현이 화가나서 장차 하씨를 죽이려고 하니 하씨가 유항니의 집으로 달아나서 신거속에 3일간 숨었고

유항니가 온 집안을 들어서 그를 위하여 청원하자 마침내 죽음을 면할수있었다.(일부 요약)

 

옛 남부대인 장손숭이 자기가 거느리는 부락의 700여 가구를 인솔하고서 유현을 배반하고 오원(내몽골 포두시)으로 달아났다.

이때 탁발식군의 아들 탁발악도 역시 무리를 모아서 자립하였는데 장손숭이 그를 좆으려고 하였다

오악이 장손숭에게 말하였다.

“아버지를 거역한 아들은 추종할만 하지 못합니다. 탁발규에게 귀부하는 것만 못합니다.”

장손숭이 그의 말을 따랐다.

오래 지나서 유현이 거느리는 부락에 변란이 생기자 옛날에 중부대인이었던 유화진이 하씨를 받들고서 탁발규에게로 달아났다.

 

하눌의 동생 하염간은 탁발규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얻자 이를 시기하여서 그의 무리 후인칠동에게 탁발규를 죽이게 하였는데 대(하북성 울현) 사람 울고진이 그 사실을 알고서 탁발규에게 알리니 후인돌이 감히 발동하지 못하였다.

하염간은 울고진이 그이 음모를 누설했다고 의심하여 그를 잡아서 심문하였는데 두개의

수레바퀴를 그의 머리위에 끼우고 한쪽의 눈을 손상시켰으나 굴복하지 않자 마침내 그를 놓아주었다.

 

하염간은 마침내 군사를 일으켜서 탁발규를 포위하였는데 하씨가 나와서 하염간에게 말하였다.

“너희들이 나를 어디에다 처치하려고 내 아들을 죽이는가!”

하염간은 부끄러워하며 달아났다.

 

11월

모용농이 용성에 이르러서 병사와 말을 10여일간 쉬게 하였다.

제장들에게 말하였다.

“전하께서 오실때에는 길을 아주 바르게 왔는데 지금 여기에 도착하여 오래도록 머무르고 나아가지 않으니 어쩐 일입니까?”

모용농이 말하였다.

“내가 올 때 속히 온 것은 여암이 산을 넘어가 노략질하며 훔치면서 백성들을 시끄럽게 만들 것을 걱정했을 뿐이다. 여암의 재주가 사람들을 뛰어넘지 못하고 굶주린 아이를 속여 꾀며 까마귀를 모아서 무리를 만든 것 같아서 기강이 없으니 나는 이미 그들의 목구멍을 눌러놓고 있어서 오래되면 떨어지고 흩어질 테니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지금 여기 밭에는 곡식이 잘 익었는데 거두지 않고 가면 다만 스스로 소모하여 줄어들 것이니 마땅히 수확이 끝나기까지 기다렸다가 가서 그들을 효수하는데 또 10일을 넘기지 않을 뿐이다.”

 

잠시 후 모용농이 보병과 기병 3만 명을 거느리고서 영지(하북성 천안현)에 도착하니 여암의 무리가 떨리고 놀라서 차츰차츰 성을 넘어 모용농에게 돌아왔다. 여암이 계책이 궁하게 되자 나와서 항복하니 모용농이 그의 머리를 베고, 더 나아가서 고구려를 쳐서 요동과 현도 두 군을 회복하였다. 돌아와 용성에 이르러서 상소를 올려 능묘를 수리하게 해달라고 청하였다.

연왕 모용수가 모용농을 사지절 도독유평이주제군사 유주목으로 삼아서 용성에서 진수하게 하였다. 평주자사 대방왕 모용좌를 옮겨서 평곽에서 진수하게 하였다.

모용농은 이에 법률과 제도를 새로 만들고 일은 관대하고 간편하게 하도록 하였으며, 형옥을 깨끗이 하며 부역을 줄이고 농업과 잠업을 권장하여 주민이 부유하고 넉넉하게 하자 사방으로 흩어져 다니던 백성들이 앞뒤로 도착하는 사람이 수만명이었다.

이보다 앞서 유주와 기주의 유민들이 많이 고구려로 들어갔는데 모용농이 표기장군부의

사마인 범양 사람 방연을 요동태수로 삼아서 그들을 부르고 어루만졌다.

 

12월

병신일(23일)에 모용수가 비로소 중산을 도읍으로 정하였다.

 

탁발규의 종증조 탁발흘라와 그의 동생 탁발건과 여러부락의 대인들과 함께 하눌에게

탁발규를 추천하여 주군으로 삼자고 청하였다.

 

진기 28, 효무제 태원 11년(386년)

 

봄 정월

무신일(6일)에 탁발규가 우천(내몽골 흥화현 서부)에서 크게 모아놓고 대왕(代王)의 자리에 오르고 연호를 고쳐서 등국이라고 하였다.

 

연왕 무용수가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모용황의 다섯째 아들로 이때 61세였다)

 

2월

대왕 탁발규가 거주지를 정양(내몽골 화림격이현)의 성락(정양군의 치소가 있었던 성락성을 말한다)으로 옮기고 농업에 힘쓰고 백성들을 쉬게 하자 그 나라 사람들이 이를 좋아하였다.

 

3월

계사일(22일)

연의 주군 모용수가 그의 아들 모용농을 책봉하여 요서왕으로 삼고 모용린을 조왕으로 삼았으며 모용륭을 고양왕으로 삼았다.

 

대왕 탁발규가 처음으로 위왕(魏王)이라고 고쳐 불렸다.

 

8월

탁발규는 안에서 어려움이 생길것을 두려워 하여 부쪽으로 음산을 넘어 다시 하란부(내몽고 음산산맥 북부)에 의지하면서 외조대인인 요동사람 안동을 파견하여 연(후연)에 구원해주기를 청하자 연의 주군 모용수가 조왕 모용린을 보내어 그를 구원하였다.

 

9월(10월?-11월 바로 전)

모용린의 군대가 아직 위에 도착하지 않았는데 탁발굴돌이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

위왕 탁발규를 압박하고 하염간은 위의 북부를 침략하여 그에게 호응 하였다.

위의 무리는 놀라서 소란스러워 졌으며 북부대인 손숙보락이 도망하여서

유위진에게 달려갔다.

모용린은 그 소식을 듣고 급히 안동 등을 파견하여 돌아가도록하였다.

위나라 사람들은 연의 군대가 근처에 있음을 알고 무리들의 마음이 다소 안정되었다.

 

탁발굴돌은 나아가서 고류(산서성 양고현)에 주둔하였는데

탁발규가 군사를 이끌고 모용린과 만나서 이를 공격하였더니

탁발굴돌이 대패하여 유위진에게 달아났는데 유위진이 그를 죽였다.

탁발규가 그의 무리를 다 거두고 대의 사람 고적간을 북부대인으로 삼았다.

모용린이 군사를 이끌고서 중산(하북성 정주시)로 돌아왔다.

 

유위진이 삭방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병사와 말이 아주 많았다.

후진의 주군 요장이 유위진을 대장군 대선우 하서왕 유주목으로 삼았고,

서연의 주군 모용영이 유위진을 대장군 삭방목으로 삼았다.

 

12월

연(후연)의 주군모용수가 위왕이었던 탁발규를 서선우로 삼고 상곡왕에 책봉하였으나

탁발규가 받지 않았다.

 

387년

5월

유현은 땅이 넓고 군대가 강성하여 북방의 영웅이었다.

마침 그의 형제들이 뜻이 어긋나 싸우게 되니 위의 장사 장곤이 위왕 탁발규에게 말하였다.

“유현의 뜻은 우리를 아우르고 삼키는데 있으니 지금 그들이 안으로 무너지는 것을 틈타 이를 빼앗지 않는 다면 반드시 훗날의 근심거리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혼자 이길수 없으니 청컨대 연(후연)과 더불어 그들을 공격하십시오.”

탁발규가 그의 의견을 좆아 또다시 안동을 보내어 연에게 군대를 빌었다.

............(중략).............

유위진이 연(후연)에 말을 바쳤는데 유현이 이를 약탈하였다.

연의 주군 모용수가 화가나서 태원왕 모용해를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조왕 모용린을

도와서 유현을 공격하여 대파하였다.

유현이 마읍(산서성 삭주시)의 서쪽에 있는 산으로 달아났다.

 

위왕 탁발규가 군대를 이끌고서 모용린과 회동하여 미택(산서성 삭주시 서남지역)에서

유현을 공격하여 또 그를 깨뜨렸다.

유현이 서연으로 달아나자 모용린이 그가 거느리던 무리들을 모두 거두니 말과 소

그리고 양을 획득한 것이 천만 마리를 헤아렸다.

 

연의 주군 모용수가 유현의 동생 유가니를 세워 오환왕으로 삼고서 그가 거느리는 무리들을 위로하게 하였으며 8천여 락(유목족의 가구 단위)을 중산으로 옮기게 하였다.

 

388년

8월

탁발규 연을 도모할 뜻을 가지고 탁발의를 사신으로 중산에 보냄(요약)

모용수 그를 힐난

“왜 탁발규가 직접 오지않았는가?”

...(중략)...

탁발의 돌아와서 탁발규에게

“연의 주군은 쇠약하고 늙었으며 태자는 어리석고 나약하며...

연의 주군이 죽으면 내부에서 어려움이 반드시 일어날 것이니

그때 마침내 도모할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아직 할수 없습니다”

탁발규는 그의 말이 훌륭하다고 여겼다.

탁발의는 탁발규의 어머니의 동생 탁발한의 아들이다.

 

390년

5월 25일

탁발규 연의 조왕 모용린과 의신산(내몽고 스즈왕치 서북쪽의 중국과 몽골의 변경)에서

회동하고 하란 흘돌린 흘해의 세부락을 공격하여 이를 깨드리니 흘돌린 흘해는 모두

위(북위)에 항복하였다.

 

가을 7월

유위진이 아들 유직력제를 파견하여 하란부락을 공격하니 하눌이 곤궁하고 급박하여지자 위에 항복하게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391년

봄 1월(정월)

하염간이 그의 형 하눌을 살해하기로 모의

하눌이 알고 서로 공격 탁발규가 연에 알리고 향도가 되어 그들을 토벌해 달라고 요청

 

2월 갑술일(1일)

모용수가 조왕 모용린을 파견군대를 거느리고 하눌을 공격 진복장군 난한에게는 용성에

있던 군대를 인솔 하염간을 공격하게 하였다.

 

여름 4월

연의 난한이 하염간을 우도(산서성 대동시 서북지역)에서 격파하였다.

 

6월

갑진일(3일)에 연의 조왕 모용린이 하눌을 적성(하북성 적성현)에서 깨드리고 사로잡았으며 그의 부락 수만명을 항복시켰다.

모용수는 모용린에게 명령하여 하눌의 부락사람들을 돌려보내고 하염간을

중산(하북성 정주시)으로 옮기게 하였다.

 

모용린이 모용수에게 돌아와서 말하였다“ 신이 보건데 탁발규가 일어나 움직이면 끝내

나라의 근심거리가 될것이니 그를 거두어 조정으로 돌아오게 하고

그의 동생에게 나라일을 감독(감국사를 말함)하게 하는 것만이 없습니다 ”

모용수가 따르지 않았다.

 

가을 7월

탁발규가 그이 동생 탁발고를 보내서 연에 물건을 바치고 알현하니

연의 주군 모용수가 쇠약하고 늙어서 아들과 동생이 권세를 부렸는데

탁발고를 머무르게 하고서 좋은 말을 요구하였다.

 

위왕 탁발규는 주지않고 마침내 연과 더불어 관계를 끊고서

장사(長史) 장연으로 하여금 서연에게 우호관계를 맺자고 요구하였다.

탁발고가 달아나 돌아오니 연의 태자 모용보가 추격하여 그를 잡았는데

모용수가 그를 대우하는 것이 처음과 같았다.

 

10월 (유연 정복)

유연 부락사람들은 대대로 대(代)에 복종하였는데 그들의 대인 욱구려지속원이 죽자

부락이 나뉘어 큰아들 욱구려필후발은 아버지를 계승하여 동쪽편에 거주하고

둘째아들 욱구려온흘제는 서쪽편에 따로 거주하였다.

 

진왕 부견이 대를 멸망시키니 유연사람들이 유위진에게 귀부하였다

위왕 탁발규가 즉위하고 나서 고차등을 공격하니 여러부락들이 모두 굴복하고 따랐으나

유독 유연만이 위를 섬기지 않았다.

 

무술일(29일)에

탁발규가 군대를 이끌고 그들을 치니 유연이 부락사람들을 다 일으켜서 달아났는데

탁발규는 뒤를 쫒아 600리를 달렸다.

제장들이 장곤을 통하여 탁발규에게 말했다.

“ 도적은 멀리있고 양식은 다 떨어졌으니 일찍 돌아가는 것만한 것이 없습니다.”

 

탁발규가 제장들에게

“만약 여벌의 말을 잡는다면 3일의 양식이 될텐데 충분하겠느냐?”

모두가 “충분합니다.”

 

이에 다시 배나 빨리 추격하여 대사막에 있는 남상산(몽골 공화국 남부의 고비알타이산)

아래에 이르러 그들을 대파하고 그 절반의 부락 사람들을 포로로 잡았는데

욱구려필후발과 갈래가 되는 부락의 수장 옥격이 각기 남은 무리를 거두어 달아났다.

 

탁발규는 장손숭과 장손비 를 파견하여 그들을 추격하게 하였다.

탁발규가 장수와 참모들에게 말하였다.

“경들은 내가 전에 3일의 양식에 대하여 물은 뜻을 아는가?”

말하였다

“알지못합니다”

 

탁발규가 말하였다.

“유연이 가축을 몰면서 여러날 달아났는데 물가에 이르면 반드시 머물렀을 것이고 내가

경무장한 기병으로 그들을 쫒는다면 그 거리는 3일을 넘기지 않고 그들이 있는곳에 닿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모두 말하였다.

“생각이 미치질 못하였습니다.”

장순손이 추격하여 평망천에서 옥격의 머리를 베었다.

 

장손비가 욱구려필후발을 추격하여 탁야산(몽골공화국 남부의 구얼반차간산)에 이르자

욱구려필후발은 무리를 들어서 항복하고

욱구려흘제의 아들 욱구려갈다한과 형의 아들 욱구려사륜과 욱구려곡률 등

종실의 무리 수백명을 잡았다.

욱구려온흘제는 장차 유위진에게 달아나려고 하는데 탁발규가 추격하여 그를 따라 잡으니 욱구려흘제 역시 항복하고 탁발규가 그 부락 사람들을 운중(내몽곡 탁극탁현)으로 모두 옮겼다.

 

11월 10일(유위진 꺾음)

유위진이 아들 유직력제를 보내서 무리 8~9만명을 거느리고 위의 남부를 공격해 왔다.

위왕 탁발규가 군사 5~6천명을 이끌고 와서 그를 막고

임오일(13일)에 유직력제를 철기산의 남쪽에서 크게 깨뜨리니

유직력제가 혼자서 말을 타고 달아났다. 이긴 기세를 타고 그를 추격하여

 

무자일(19일)에 오원(내몽골 포두시)의 금진(내몽골 포두시 서남족의 황하입구)에서

남쪽으로 가 황하를 건너 곧바로 유위진의 나라로 들어가니 유위진의 부락 사람들이 놀라고 혼란에 빠졌다.

 

신묘일(22일)에 탁발규가 곧장 그가 살고있는 열반성(내몽골 이진궈러치의 서북)으로 들이닥치니 유위진의 부자가 나와서 달아났다.

 

임진일(23일)에 제장들을 나누어 보내서 경무장한 기병으로 그들을 추격하게 하는데 장군 이위가 유직력제를 목근산(내몽골 악탁극전기의 서북)에서 사로잡고 유위진은 그의 부하에게 살해되었다.

 

12월에

탁발규가 염지(내몽골 악탁극전기 동남지역)에 진을 치고서 유위진의 종실 무리 5천여 명을 베고 시체를 황하에 모두 던져 버리니 황하 이남의 여러부락이 모두 항복하고 말 30여만 필과 소와 양 4백여만 두를 획득하게 되어 나라의 씀씀이가 이로 말미암아 마침내 풍요로워졌다.

 

유위진의 막내아들 유발발이 도망하여 설간 부락으로 달아나니 탁발규가 사람을 시켜서 그를 찾았다.

설간부락의 우두머리 태실장이 유발발을 밖으로 나오게 하고서 사자에게 보이며 말했다.

“유발발이 나라가 파괴되고 집안이 망하자 곤궁해져서 나에게 귀의 하였으니 내가 차라리 그와 더불어 같이 망할지언정 어찌 차마 붙잡아서 위에 주겠는가?”

마침내 유발발을 몰혁간에게 몰혁간이 그의 딸을 그의 아내로 삼게 하였다.

 

395년

5월 위왕 탁발규가 연을 배반하고 변경지역에 사는 여러부를 침입하여 압박하였다.

5월 갑술일(28일) 연의 주군 모용수가 태자 모용보 요서왕 모용농 조왕 모용린을 파견하여 무리 8만명을 거느리고 오원(내몽골 자치구 포두시)에서부터 위를 치도록 하고 범양왕 모용덕과 진류왕 모용소는 따로 보병과 기병 1만 8천명을 거느리게 하여 그 뒤를 잇게 하였다.

 

겨울 10월 신미일(25일)에 배를 불태우고 밤에 달아났다.

당시 황하가 얼음이 아직 얼지 않았기 때문에 모용보는 위의 군사가 반드시 강을 건너올 수없다고 생각하여 척후병을 두지 않았다.

 

11월

기묘일(3일: 참합피 대전)

폭풍이 불어서 얼음이 합쳐지자 위왕 탁발규가 군사를 이끌고 황하를 건너는데 치중은 남겨두고 정예의 기병 2만여 명을 선발하여 급히 그들을 추격하였다.

연의 군사가 참합피(산서성 양고현 동북)에 도착했을 때

큰바람이 불어서 검은 기운이 제방과 같이 되어 군사들의 후면에서부터 와서 군대를 덮었다.

사문(중) 지맹담이

“바람의 기세가 사납고 빠르니 위의 군사가 장차 도착한다는 징후이고 의당 군사를 보내어 그들을 막아야 합니다”

모용보는 위의 군사와의 거리가 아직 멀리있다고 생각하여 웃기만 할뿐 응답을하지 않았다.

 

지맹담이 굳게 요청하기를 그치지 않자 모용린이 화가나서 말하였다.

“전하의 귀신같은 무력과 군사들의 강성함은 족히 사막도 가로질러 갈만도 한데

색로(북위)가 어찌 감히 멀리 올 것인가? 지담맹이 망언을 하여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니 마땅히 목을 베어 돌려 보아야 하겠다.”

지담맹이 눈물을 흘리면서말하였다

“부씨가 백만의 군사를 가지고 회남에서 패한 것은 무리가 많음을 믿고 적을 가볍게 여겼기 때문이며 천도를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

 

사도 모용덕이 모용보에게 지담맹의 말을 따를 것을 권유하자 모용보가 모용린을 파견하여 기병 3만을 거느리고 군사의 후방에 주둔시키면서 비상사태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모용린은 지맹담의 말이 망령스럽다고 생각하여 기병들을 풀어놓고 돌아다니며 사냥이나

하도록하며 대비하려 하지 않았다.

기병들이 10여리 간 다음에 바로 안장을 풀고 잠들었다.

 

위의 군사가 새벽부터 밤까지 두배로 빨리 행군하여

을유일(9일)의 해질 무렵에는 삼합피의 서쪽에 도착하였다.

 

당시 연의 군사는 참합피의 동쪽에 있었는데 반양산(내몽고자치구 흥화현의 서남)

남쪽에 있는 강변에 군영을 설치하였다.

위왕 탁발규가 밤에 제장들을 나누어서 각각 연의 군사를 습격하려고 사졸들을 함매하고 말의 입을 묶어가지고서 몰래 나아갔다.

 

병술일(10일)에 해가 뜨자 위의 군사가 산으로 올라가 있고 아래로는 연의 군사의 군영에 닿아있었는데 연의 군사가 장차 군사를 거느리고 동쪽으로 가려고하여 그들을 바라보고는 사졸들이 크게 놀라서 동요하고 어지러웠다.

 

탁발규가 병사들을 풀어놓아 그들을 공격하니

연의 병사들이 달아나서 물로 들어가는데 사람과 말이 서로 밟고 오르고 하여 눌리거나

물에 빠져죽은 사람이 1만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약양공 탁발준이 병사들을 데리고 그 전면에서 맞이 하자

연의 병사 4~5만 명이 일시에 무기를 놓고 손을 거두고서 나아가 잡히니

그 나머지 살아 도망친 사람은 불과 수천명이고

태자 모용보등은 모두 홀로 말을 타고 달아나서 겨우 죽음은 모면하였다.

 

연의 우복야 진류도왕 모용소를 죽였고 노양왕 모용왜노 계림왕 모용도성 제음공 모용윤국 등 문무의 장군과 관리 수천명을 산채로 붙잡았으며

무기와 갑옷 식량과 물품만도 거만을 헤아렸다.

위왕 탁발규는 재주가 있는사람들은 가려서 남게 하고 나머지는 의복과 식량을 주어 돌려보내 중주(중원) 사람들을 회유하였다.(간추린 내용)

중부의 대인 왕건이 말하였다.

“...그들 모두를 죽여서 그 나라를 텅 비게하고 그들을 쉽게 빼앗는 것만 못합니다.

또한 도둑을 잡아서 그들을 풀어 준다고 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겠습니까?”

이에 그들을 모두 구덩이에 묻어서 죽였다.

 

12월에

탁발규가 운중(내몽골 탁극탁현)에 있는 성락(내몰골 화림격이현)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