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고구려와 중국의 관계-56(북위 때㉒: 고구려 북위 관계사)

상 상 2013. 1. 28. 17:28

 

4. 고구려, 북위 관계사

 

고구려와 북위가 국경을 마주한 것은 북연이 망한 이후이다.

이를 전후한 때부터 고구려는 북위와 본격적인 외교관계를 갖는다.

 

북연이 망한 것이 436년이고 북위가 북연의 서울 화룡(용성: 지금의 요녕성 조양시)에 군대를 주둔시킨 것이 437년이다.

이후 용성에 용성진(龍城鎭: 지금의 요녕성 조양시)을 설치한다.

이로써 고구려와 북위가 국경을 맞대게 되었다.

이때가 고구려의 장수왕때이고 북위에서는 태무제(3대 세조)때이다.

그 이전에는 북연이 고구려와 북위 사이에 있었으므로 직접 국경을 맞댄 일은 없었으니

무슨 관계라는 것도 없다시피하였다.

이 무렵이 북위로서는 국력이 가장 왕성한, 팽창기이다.

 

431년 혁련발발의 하나라를 완전히 정복하고

436년 북연을 멸망시킨데 이어서

439년 저거목건이 왕으로 있던 북량을 멸망시킨다

 

이러한 시기에 고구려와 북위 사이에 일어난 사건이 북연왕 풍홍이 고구려로 도망 온 사건인데,

사실은 그냥 데려온 게 아니고 고구려가 북위와 전투를 벌려 승리한 후 데리고 온 것이다.

즉, 북연의 상서령 곽생이 성문을 열어서 위의 군사를 받아들여 연왕을 공격하고

이에 대응하여 북연왕이 고구려의 군대를 이끌고 동문으로 들어와서 곽생과 궁궐 아래에서 싸워

북연왕이 인도한 고구려 군이 승리하고 곽생이 인도한 북위군이 패배한 것이다.

그래서 북연의 태무제(세조)는 대노하여 북위 군을 이끌었던 패장 고필과 아청을 함거로 소환하여 문졸(門卒)로 강등한 것이다.

 

이렇게 북위의 최대 강성기에 고구려와 충돌하였으나 고구려의 승리로 끝났다.

(자치통감의 표현대로, 고구려 군대가 북연왕등을 데리고 오는데 북위군대가 아무런 저항도 못했다 하더라도 결과는 마찬가지이다. 북위는 고구려의 군사력에 굴복한 것이다.)

 

북위의 최대 팽창기인 태무제(3대 세조) 시절이 지나면 북위는 이제 내치(內治)에 들어간다.

바로 풍태후 시절로 들어간다.

풍태후는 자기 권력유지에만 관심이 있지 군사적 팽창, 더구나 북방에는 관심이 없었다.

더구나 풍태후 아래에 있었던 효문제(6대 고조)는 북위의 서울을 평성(산서성 대동시)에서 낙양으로 옮김에 따라

북방을 지키기 위한 6진은 관심이 더 멀어졌다. 황폐화 되기 시작했다.

따라서 6진보다 더 멀리있는 고구려에 대한 영향력은 그야말로 미미하였다고 볼수 있다.

 

491년, 장수왕이 세상을 떠나자 고구려 여인을 부인으로 두었던 효문제는 장인께 행하는 예절로써

흰 위모관(委貌冠)과 베 심의(深衣)를 지어 입고 동쪽 교외에서 애도를 표한다.

(또다른 장인인 풍희가 죽었을때에도 똑같은 애도를 표하였음)

 

장인께 행하는 장례 예절을 행하였다는 것은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아마 풍태후가 문소황태후를 데려올 때, 고구려 왕가의 딸이라고 말한 때문으로 생각된다.

 

풍태후는 처음, 장수왕에게 딸을 보내달라고 하였는데,

딸이 시집갔다고 하면서 아우의 딸을 보내겠다고 하자 기뻐서 정성을 다해 폐백을 머나먼 고구려 국경까지 보냈다.

 

장수왕이 의심하여 아우의 딸이 죽었다고 하자 이번에는 종실의 딸이라도 보내달라고 하였다.

그런데 고구려는 그 마저 보내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풍태후는 마침 고구려에서 북위로 온 용모와 자태가 뛰어난 13살 먹은 문소황태후를 직접 보고 뽑아서

북위 서울로 데리고 왔는데 이때 아마 고구려 왕가의 딸이라고 말 한 것 같다.

 

그래서 문소황태후를 아내로 둔 효문제는 장인이 세상을 떠났으므로 장례 예복을 차려입고 애도의 예절을 표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일은 북위 역사상 한번도 없었던 일이다.

※참고: 위서 고조본기

 

488년(고조 태화15년) 12월 계사일에 황제가 고려왕 연에 대하여 성 동쪽 행궁에서 거애(애도)하였다.

(十有二月癸巳, 帝為高麗王璉舉哀於城東行宮)

 

492년(고조 태화19년) 3월 무자일, 태사 풍희가 죽었다(戊子,太師馮熙薨)

여름 4월 신축일 황제가 태사 풍희를 행재소에서 거애(애도)하였다.

(夏四月辛丑,帝為太師馮熙舉哀於行在所)

 

※풍희는 태후의 아버지 즉 장인임

고조는 두명의 풍씨 아내를 두었는데

풍청, 풍윤 두명의 풍씨 황후를 두었다.- 풍태후가 자기의 여조카를 황후로 들인 것임.

 

즉, 효문제(6대 고조)때 이미 고구려는 북위에 대하여 윗사람의 대접을 받았다.

 

그 다음 선무제(7대 세종) 때에는 그야말로 고구려 사람들의 시대였으니

고구려에 대한 북위의 대접은 더 이상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선무제 자체가 고구려 여인 문소황태후의 아들이고

선무제의 아내는 선무황후로 역시 고구려 여인이고.

선무제 때 선무제의 첫 번째 황후, 우황우를 죽이고 우황후가 낳은 황태자도 죽이면서

선무황후를 선무제의 황후로 세운 사람이 바로 고구려 사람 고조이다.

이정도 권력을 가졌으니 황제의 삼촌 정도는 몇 사람 가볍게 죽였을 정도로

엄청난 권력을 가졌다.

이렇게 선무제때에는 고구려 사람들의 세상이었으니 고구려에 대한 대접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선무제의 아들 효명제(8대 숙종)은 고구려 여인 선무황후 아래서 황태자가 되었다.

북위의 관습으로는 어머니이다.

그래서 519년 문자명왕이 세상을 떠나자 영태후가 동당(東堂)에서 애도의 의식을 거행하였는데

이것은 어린 효명제를 대신하여 장례의 예절을 다한 것이다. 이때 고구려 왕가는 북위 황제에게 외할아버지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황제를 대신하고 있었던 영태후가 황제의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에 해당하는 예의를 표한 것이다.

 

그 후 북위에서는 6진의 난이 일어났다. 이에 따라 6진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였다.

아니 북방에 대한 통제력을 완전히 상실하였다.

그 정도가 아니라 6진 세력의 공격을 받아 북위가 사실상 멸망하였다.

이주영이 영태후와 어린 황제를 황하에 처넣어 죽이고 모든 대신 2천여명을 몰살한 하음의 변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6진보다 더 멀리 떨어진 고구려에 대해서는 영향력이 아주 없었다.

 

하음의 변(528년 4월) 이후 내란에 휩싸여 멸망과정에 들어간 북위는 고구려에 대하여 신경을 쓸 여력 자체가 없었다.

즉, 하음의 변 이후에는 고구려와 북위의 관계는 거의 단절되어 형식적인 관계만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