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고구려와 중국의 관계-44(북위 때⑩)

상 상 2012. 12. 31. 18:29

 

4) 고구려, 북위 사신 국경 통과 거부.

 

북위의 사신이 고구려를 통해서 백제로 가려고 했는데 고구려가 거부하여 사신이 그대로 돌아갔다. 그런데 북위가 한 것이라고는

말과 붓장난 뿐이었다.

 

북위가 고구려의 국경도 통과 못하는데 종속이니 지방정권이니 하는 것을 운운할 수 있는가?

종속된 정권의 영토도 통과 못하는 경우가 있는가?

도대체 지방정권에 국경이라는 게 있는가?

웃기는 얘기다. 얼토당토않는 말이며 터무니없는 얘기다.

 

그리고 북위의 사신이 국경통과를 거절당하고 북위가 한 것이라고는 말뿐이었는데

조공책봉 관계라고 말할수 있는가?

더구나 종속이니 지방정부니 하는 말을 할 수 있는가?

개가 웃을 일이다...

 

※ 관련 사서 기록: 위서 열전 백제전

현조(顯祖: 북위 헌문제)는 (백제가) 멀고 궁벽진 곳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조공(朝貢)한 것을 생각하여

예우를 매우 정중히 하고, 사신 소안(邵安)을 파견하여 그 사신과 함께 돌아가게 하였다.

............(중략)..............

또 연(璉: 장수왕)에게 조서(詔書)를 내려 안(安) 등을 호송하라고 하였다. 안(安) 일행이 고구려(高句麗)에 이르니,

연(璉: 장수왕)은 옛날 여경(餘慶: 백제 21대 개로왕)과의 원수관계가 있음을 말하며 동쪽으로 통과시키지 않았다.

안(安) 일행이 이로 말미암아 모두 되돌아왔다. 이에 [연(璉)에게] 조서(詔書)를 내려 준절히 질책하였다.

 

 

5) 고구려의 외교관계

 

① 고구려, 남쪽으로 송 북쪽으로 연연과 외교관계 수립.

 

고구려는 이 무렵 송(남조 송나라), 연연(유연)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다.

(연연은 유연의 또 다른 이름임, 유연은 북위의 북쪽에 있는 나라)

남북으로 송, 유연과 외교관계를 맺는 것에 그치는 것뿐만이 아니라 외교관계를 맺고 서로 순치(脣齒)의 관계를 이루면서

북위의 국토를 짓밟으려 하고 있다.

따라서 고구려는 북위에 종속되기는 커녕 북위를 멸망시키려는 나라임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이들 나라와 내통을 하면 북위에서는 외반죄로 처벌, 사형에 처하였다.

 

예) 풍태후의 정인 이혁의 죄목을 헌문제에게 상주한 이흔은 477년 2월 적국인 송(宋)과 내통했다는 외반죄(外叛罪)로 주살됐다.

헌문제의 장인 이혜(李惠)도 478년 12월에 같은 죄목으로 처형됐다.(자치통감)

 

또하나 주목할 것은 유연(연연)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인데

이 유연은 북위에게 아주 골치 아프고 매우 적대적인 나라였다.

북위가 멸망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된 6진의 난도 유연이 일으키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도 버젓이 고구려는 유연(연연)과 외교 관계를 맺고 있다.

이러한데도 북위는 고구려가 유연과 외교관계를 맺은 것을 막지 못했고

그에 대해 어떠한 군사적 제재도 가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점을 보았을때

고구려에게 종속이니 지방정부니 하는 말을 거론할 수있는 상황 자체가 아니었다.

종속정부에 무슨 외교권이 있으며, 더구나 지방정부가 무슨 외교를 한다는 말인가?

 

종속이니 지방정부니 그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語不成說)이요, 망발이다.

(관련 사서 기록은 아래 ‘위서 열전 백제전’ 참조)

 

② 고구려가 남제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음

남송이 망하자 고구려는 그를 뒤이은 남제와 외교 관계를 맺었다.

고구려에서 남제로 보낸 사신을 북위가 체포했음에도

북위는 고구려를 제재하기는 커녕 체포한 사신마저 고구려로 돌려보내 주었다.

더구나 북위의 고종 스스로가 고구려를 보고 월경외교(越境外交)를 했다느니,

통호(通好)를 했다느니 하는 말을 직접하고 있다.

 

이렇게 남북으로 북위의 적대국가와 외교를 하는 고구려를 보고

북위의 종속정권이라고 말을 할수 있는가? 지방정권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말이다.

도대체 지방정권이 외교라는 것을 할 수 있는가?

말도 않되는 말이다....

 

따라서 고구려에게 하위정권이기 때문에 조공을 했다느니, 책봉을 받았으니 종속정권이니 하는 말은 언어도단이고

말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어불성설) 망발이다.

더구나 지방정권이라는 말을 도대체 어디에 쓸 수가 있는가?

(관련 사서 기록은 아래 ‘위서 열전 고구려전’ 참조)

 

※관련 사서: 위서 열전 백제전 및 고구려전

1) 위서 열전 백제전(고구려가 남으로 송, 북으로 유연과 외교수립)

 

『연흥(延興) 2년(472년)에 백제왕(百濟王) 여경(餘慶: 21대 개로왕)이 처음으로 사신을 보내어 표(表)를 올려 말하기를,

..........(중략).............

겉으로는 외효(隗囂)처럼 번병(藩屛)의 겸손한 말을 지껄이면서도 속으로는 흉악한 짐승의 저돌적인 행위를 품고

있습니다.

 

남쪽으로는 유씨(劉氏: 남조 송나라)와 통호(通好)하기도 하고, 북쪽으로는 연연(蠕蠕: 유연)과 맹약하기도 하여

서로 순치(脣齒)의 관계를 이루면서 왕략(王略: 북위의 국토)을 짓밟으려 하고 있습니다.』

 

 

2) 위서 열전 고구려전(남제와 외교)

 

『그 때 광주(光州)의 [관사(官司)가] 련(璉:장수왕)이 파견하여 소도성(蕭道成)에게 가던 사신 여노(餘奴) 등을

해상에서 체포하여 대궐로 압송하여 왔다. 고조(북위 효문제)가 조서로 련(璉)을 꾸짖기를,

“[소(蕭)]도성(道成)은 직접 자기의 군주를 죽이고 강좌(江左)에서 천자의 칭호를 참칭(僣稱)하므로, 짐이 바야흐로

망해버린 [송]나라를 옛 그 지역에 일으키어 끊어져 버린 유씨(劉氏)의 대(代)를 이으려고 하는데,

경은 월경외교(越境外交)하여 찬탈한 역적과 멀리서 통호(通好)하려 하니, 어찌 이것이 번신(藩臣)으로서 절의를 지키는 도리이겠느냐! 그러나 이제 한 가지의 허물을 가지고 옛날 정분을 묵살할 수 없어 잡혀온 사람들을 곧장 그대 나라에

돌려보내니,.....(하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