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고구려와 중국의 관계-46(북위 때⑫)

상 상 2013. 1. 4. 17:44

 

3. 북위의 역사(약사)

 

우리역사와 관련하여 북위의 역사를 좀 알아볼 필요가 있다.

북위의 역사를 간단히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북위를 세운 사람은 탁발규(도무제, 태조)이다.

도무제 탁발규는 전진왕 부견이 비수의 싸움에서 동진에게 패배한 틈을 타 북방 민족을 토벌하고,

강국(强國)으로 등장한 후연을 공격해 멸망시켜, 북중국(화북)의 강자가 된다.

이때 수도를 성락(내몽고 허린컬)에서 평성(산서성 대동시)으로 옮긴다.

 

그 사나운 북방 민족도 닥치는대로 쳐 죽였던 무시무시한 탁발규(도무제)도

아들(첩이 낳은 자식)의 칼에 맞아 죽는다.(409년)

 

그 다음 3대 태무제, 탁발도(세조:423~452) 때 북위는 최대 팽창기를 맞는다.

이때에 하(夏), 북연(北燕), 북량(北凉)을 차례로 멸망시켜 화북을 통일하였다.(439년)

 

※ 참고

 

이 시기에 고구려가 북위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마주쳤는데, 그것은 북연의 멸망 때문이고,

그때 북연왕 풍홍은 고구려에게 군사로 자기를 구원해줄 것을 요청,

고구려는 군사 2만을 동원 북연의 서울 용성에서 북위 군사 수만명이 대치했는데

고구려군이 군사행동을 개시, 용성에 들어가 적들을 소탕하고 북연왕 풍홍과 모든 관리 백성 등을 고구려로 데려왔다. 그러나 그때 북위는 아무런 군사행동도 못했다.

(사실은 고구려군과 싸워 패전하였기 때문에 고구려군과 북연왕과 북연 관리, 백성에게 손을 못 댄 것임): 436년

 

태무제도 아들인 황태자가 자기를 죽인다는 모함에 빠져 황태자를 죽인다.(451년)

모함을 한 자는 종애라는 자인데, 태무제가 황태자를 죽인 것을 후회하자 자기를 죽일까 두려워서 오히려 태무제를 죽인다.

그리고 탁발여(경수제)를 세운다.

 

탁발여가 황제에 오르자 종애는 권력을 멋대로 휘둘렀고 이에 탁발여는 종애의 권력을 빼앗으려 하였으며

이에 분노한 종애는 또 황제(탁발여)를 죽인다.

 

이렇게 되자 신하인 유니 원하 등이 황손(황태자의 아들)을 맞아들여 황제로 즉위시킨 다음, 종애 등을 체포하여 죽인다.

이때에 제위에 오른 사람이 문성제 탁발준(4대 고종: 452~465)인데 바로 풍태후의 남편이다.

 

태조 도무제(탁발규)부터 3대 세조 태무제(탁발규) 때 까지는 북위의 외적 팽창기였다면

4대 문성제 탁발준(고종:452~465) 때부터는 내치에 들어간 시기이다.

태무제 때까지 남정북벌하여 국고(國庫)가 텅텅비게 되어 더 이상 대외적 팽창에 돈을 쓸 여유가 없어진 것이다.

 

문성제가 죽고 태자 탁발홍(5대 헌문제, 현조)이 12살 나이에 황제의 자리에 올라서자

잠시 권력투쟁 후에 권력을 잡은 풍태후의 시대가 도래한다.

황제노릇을 하는 풍태후는 유능한 헌문제를 싫어하였다.

자기의 권력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풍태후는 원래 헌문제-현조를 5살때부터 키웠음)

 

그래서 헌문제를 강제로 몰아내고 5살짜리 효문제(6대 고조)를 세운다.(471년)

상황(上皇)이 된 헌문제는 여전히 군사를 이끌고 북방에 있는 유연 적륵 등을 물리친다.

게다가 풍태후의 음행 상대자인 이혁지를 죽이자 드디어 풍태후는 헌문제를 죽인다.(독살)

 

그 다음 효문제(6대 고조) 때에는 서울을 평성(산서성 대동시)에서 낙양으로 옮긴 것이 가장 컸다.(493년)

서울을 평성에서 낙양으로 옮긴 것은 북위가 망한 원인이 된다.

 

북방에 살고 있던 선비족들이 남쪽 낙양으로 옮기게 되자 우선 기후가 맞지않아 살기 어려웠다.(무더위)

그리고 결정적으로 북방을 지키던 6진이 허약해졌다. 너무 멀어 관심이 없어진 탓이다.

낙양으로 서울을 옮겼을 때 이미 북위는 북방에 대한 관심이 없어졌다.(493년)

이때의 관심은 남쪽에 있는 남제의 정벌이다.

 

그 다음은 선무제(7대 세종: 499년~515년) 때인데 이때는 솔직히 외척의 시대였다.

바로 고구려 사람들의 시대였다.

황제(선무제, 세종) 자체도 고구려 여인이 낳은 사람이고,

아내인 선무 황후도 고구려 여인이고

조정의 핵심 권력자도 고구려 사람 고조(高肇)였다.

이때의 관심사는 남쪽(양나라)과 서쪽(촉 지방)의 정벌이다.

 

이 무렵인 503년에 6진은 이미 낙양 천도로 황량해지고 멀었기 때문에 관심도 없어졌고 게다가 기근이 들어서

백성들은 곤궁에 빠져 피폐해진 상태였다.

 

그 다음이 8대 효명제(숙종)인데 이때는 영태후(호태후)의 시기였다.

영태후가 집권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기강이 무너졌다.

그러자 드디어 국가가 붕괴되는 사태가 벌어졌으니 6진의 난이 일어난 것이다.(523년)

6진의 난으로 수많은 엄청난 반란과 폭동이 일어나는데 여기서의 최강자가 이주영이다.

 

이주영은 효장제(9대 경종)를 멋대로 또하나의 허수아비 황제로 세운 다음

북위의 서울 낙양성으로 쳐들어가서 영태후와 어린 황제 사로잡아 하음에서 황하에 처넣어 죽이고

북위의 모든 관료 2천여 명을 몰살해 버린다.(하음의 변, 528년 4월)

그런 다음 이주영은 효장제로부터 선양을 받았다.

 

이주영은 진양(산서성 태원시)으로 돌아가 낙양에 있는 허수아비 효장제를 발 아래두고 지시, 명령, 통제하였다.

(6진의 난은 이주영이 진양에 돌아온 후 평정하였음.)

이로써 사실상, 실질적으로 북위는 멸망하였다.

 

그 다음부터는 북위의 멸망을 확인하는 과정에 불과하다.

530년, 효장제(9대 경종)는 비무장하고 낙양에 들어온 이주영을 죽이지만,

이주영의 뒤를 이은 이주조가 바로 낙양으로 달려가 효장제를 잡아서 영녕사(永寧寺) 누각 위에 잡아 매달았다가,

진양(태원)으로 끌고 와서 목을 매어 죽였다.(530년)

 

이후 고환이 이주조를 물리쳐서(결국 이주조는 자살함)

전권을 장악하고 역시 허수아비인 효무제(13대)를 세운다.

효문제는 고환을 제거하려다 실패하여 서쪽 장안에 있는 우문태에게 도망가고(서위)

고환은 효정제를 세운뒤 서울을 낙양에서 업(鄴)으로 옮긴다.(동위: 534년)

이로써 형식적으로나마 존재하던 북위는 완전히 멸망하였다.

 

※ 참고

 

북위 10대부터 13대까지의 제위 계승

이주영의 뒤를 이은 이주조가 효장제(9대 경종)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기 마음대로

또하나의 허수아비 황제를 세우니 이가 바로 10대 폐황제(전폐제) 원엽이다.

효장제는 이주조가 잡아서 진양(태원)으로 돌아가 죽였다.(530년)

 

낙양에서는 이주세륭이 벙어리 시늉을 하며 목숨을 이어가던

광릉왕 원공을 허수아비 황제로 세운다. 이 사람이 절민제(11대)이다.

절민제는 바로 원엽(10대 폐황제)을 폐위시켜 동해왕으로 삼는다.

 

이후 고환이 허수아비 황제를 또하나 제 마음대로 세우니 이 사람이

바로 12대 폐황제(후폐제) 안정왕 원랑이다.

 

원랑을 황제로 세우고 난 다음 이주조를 물리치고(결국 이주조는 자살함)

전권을 장악하여 또하나의 허수아비 황제를 세운다.

이 사람이 효무제(13대, 원수)이다.

 

고환은 효무제를 세운 다음 안정왕(원랑, 12대 폐황제)에게 선양을 강요하여

제위에서 내쫒고 효무제는 절민제(11대, 광릉왕 원공)를 죽인다.(532년)

 

효문제(13대)는 고환을 제거하려다 실패하여 서쪽 장안에 있는 우문태에게 도망갔으나

우문태에게 독살 당한다.(53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