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움 글: 1) 고조선의 도읍과 영역
출처 ⇒ http://blog.naver.com/eurasiad/50030683141
...........(상략)
고조선의 도읍은 왕검성(王檢城)이며 평양이라고도 한다.
평양은 언어학적 연구에서 고대(古代) 한국어로‘대읍(大邑)’또는 ‘장성(長城)’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평양은 오늘날의 한반도 서북지방의 평양을 지칭하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정치적·종교적 중심을 이루는 큰 취락 또는 대읍을 뜻하는 보통명사이고
평양의 위치도 한 군데가 아닌 여러 곳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고조선의 도읍인 평양을 기록한 중국문헌은 당(唐)시대 이후라는 것이다.
『사기(史記)』「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의 조선(朝鮮)에 대해 『사기정의(史記正義)』에 주석하기를,
“『괄지지(括地志)』에 이르기를 고(구)려-高(句)麗가 통치하는 평양성은 본래
한(漢)의 낙랑군 왕검성(樂浪郡 王險城)인데 바로 옛 조선(朝鮮)이다.” 라고 하였고,
『통전(通典)』에서도 고구려 도읍인 평양성은 바로 옛 조선국 왕검성(王險城)이라 하였다.
『신당서(舊唐書)』「고려전(高(句)麗傳)」에서도
“고구려는 평양성에 도읍하였는데 바로 한(漢)의 낙랑군의 옛 땅”이라 하였다.
『사기정의(史記正義)』가 인용하고 있는 『괄지지(括地志)』는 당(唐) 태종의 네째아들
위왕 태(魏王泰) 등이 편찬한 것이며,
『사기정의(史記正義)』는 장수절(張守節), 『통전(通典)』은 두우(杜佑)에 의해 모두
당(唐)시대에 편찬되었다.
이는 모두 고구려가 대동강유역의 평양에 도읍한 이후의 기록이기 때문에 고구려 이전의
고조선에 대한 검증에는 신뢰성에 의문이 제기된다.
실제로 한대(漢代)이후의 『사기(史記)』와 『한서(漢書)』의 「조선전(朝鮮傳)」에는
위만조선(衛滿朝鮮)의 도읍이 ‘왕검성(王險城)’이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그 주석으로 실린 『사기집해(史記集解)』와 『사기색은(史記索隱)』은
고조선의 도읍지가 요동군 험독현(遼東郡 險瀆縣)에 있다고 전하고 있어
평양성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왕검성(王險城)이 고구려의 평양성이라는 데는 어떤 착오가 있거나 평양지역에
또 하나의 왕검성(王檢城)이 있었다는 것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그런데 고조선의 도읍이 왕검성(王檢城)인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는 왕검성(王檢城)이 낙랑군 패수(浿水)의 동쪽에 있다고 하여
왕검성(王檢城)의 위치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패수(浿水)의 위치에 대해서는 대동강설에서부터 차츰 요서지역 대능하설(大凌河說)로
옮겨지고 있는데, 『한서(漢書)』「지리지(地理志)」‘번한현(番汗縣)’에 대한
반고(班固)의 주석에는 번한현(番汗縣)에 패수-沛(浿)水가 있다고 하였으며
응소(應昭)의 주석에는 한수(汗水)가 있다고 하였다.
즉‘번한(番汗)(韓)’이 있었던 위치가 패수(浿水)인데, 번한현(番汗縣)은 대릉하(大凌河)부근에 있었고
‘발조선(發朝鮮)’곧‘번조선(番朝鮮)’도 대능하 부근에 있었던 것으로 된다.
이는 앞에서 본 것과 같이 진(秦)의 장성(長城)이 요동까지 뻗쳐있고
동(東)으로 패수(沛水)를 넘어 조선(朝鮮)을 멸(滅)하였다는 『염철론(鹽鐵論)』
「주진(誅秦)」편의 기사에서도 확인된다.
진(秦)이 패수를 건너 조선을 멸망시켰다면 대능하를 건너 비파형동검기 다뉴기하문동경이
출토된 조양(朝陽)일대의 한(韓)의 하나였던 부(否)의 조선(朝鮮)을 멸망시켰다고 볼 수 있다.
이미 앞에서 본 것과 같이 기자(箕子)의 후손으로서 번한-番汗(番韓)에 임명되었던
기준왕(箕準王)이 위만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바다를 건너기 전의 근거지였던 조양(朝陽)
일대의 은주(殷周) 교장갱유적(청동제기를 묻어놓은 곳) 분포지와 일치하는 곳이다.
따라서 발조선-發朝鮮(番朝鮮)의 대읍인 왕검성(王檢城)의 위치는 대능하유역의 조양부근이 된다.
하가점상층문화의 조양 십이대영자유형(朝陽 十二臺營子類型)의 주체세력은 바로 발조선인-發朝鮮(番朝鮮)人들이었고
요서지역에서 연(燕)의 위만이 왕위를 찬탈하면서 사실상 비파형동검문화는 쇠퇴하게 된다.
이러한 정황은 비파형동검 4식의 시기에 요서지역에 4식 동검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과도 일치한다.
조선(朝鮮)에 관한 기록들은 모두 중국사서를 중심으로 했기 때문에
대능하유역의 발조선(番朝鮮)에 대한 역사적 기록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요서지역의 발조선(번조선)과 요동지역의 또다른 조선이 병행하여
상호연계되어 발전한 문화가 고조선이었다.
그런데 고조선의 대군장으로서의 한(韓)과 번조선의 군장인‘번한(番韓)’에 대해서는
비파형동검이 요동지역에서 요서지역으로 전파된 점과
다뉴기하문동경 또한 요동지역에서 요서지역으로 전파된 점으로 보아
요동지역의 한(韓)이 서열상으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이 한(韓)이 소군장들을 거느린 대군장이었을 것인데 요서의 번한(番韓)과
한반도 서북부지역의 마한(馬韓)과 함께 또한 진한(眞韓)이 대표적이었다.
요동지역에는 대군장인 한(韓)이 거주하는 대읍이 심양부근에 위치하여
소군장들이 거주하는 소읍의 요동반도지역과 길림장춘지역을 연계하여 진한조선(眞韓朝鮮)을 형성하고 있었고,
요서지역에는 역시 대군장인 번한이 거주하는 대읍이 조양부근에 위치하여
맥의 남산근유형과 금서(錦西)지역 등을 연계하여 번한조선(番韓朝鮮)으로 결속되어 있었다.
요동지역과 요서지역은 특징적 청동기인 비파형동검·다뉴기하문동경을 상징적 기물로 삼아
대군장과 소군장의 형태로 정치적으로 연계되어 있었으며,
이러한 체제가 바로 문헌상에 나타나는 고조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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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인용한 글은 단재선생께서 쓰신 '조선 상고사'를 읽어봐야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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