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사연구초

삼한고(前後 三韓考: 단재 신채호) - 26

상 상 2011. 8. 15. 12:02

3.6. 후 삼한과 낙랑 대방의 관계

 

낙랑(樂浪), 낙랑(樂良), 평나(平那), 평양(平壤), 백아(百牙) 등을 모두 “펴라”로 읽는 것이 옳음은

이두문 해석법, 평양 패수고, 동서 양 낙랑고 등 편에 상세히 견해를 밝혔거니와,

 

낙랑국이 당시 열국중 후삼한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가졌음은

신라본기의 신라 초기시대와 백제본기의 백제 초기시대에

낙랑의 침략이 빈번한 사실에 의거하면 명백하거늘

 

선배유학자들이 중화 역대 사가의 붓에 속아

평안도를 떼어내 한나라(漢)의 낙랑군을 만드는 동시에

낙랑국을 이동하여 강원도 춘천군에 특설한 것이다.

 

무엇에 의하여 춘천을 낙랑이라 하느냐 하면,

백제본기 온조 30년의 ‘동쪽에 낙랑이 있다(東有樂浪)’라고한 구가 그 유일한 증거라 하나,

‘동서 양자 상환고’에 보임과 같이 삼국사기에는 동서 양자가 많이 바뀌어 있다.

 

낙랑국의 왕의 성은 최씨니 그 기원을 확증할 수 없으나

대개 기준(箕準), 위만(衛滿)의 무렵에(際) 평안도를 나누어 차지하고, 일시 강성하여

그 뒤에 자주 남방의 신라 백제를 침략 핍박하더니 그 말기의 왕(末王) 최리(崔理)가

고구려 왕자 호동을 낭림산(狼林山)의 삼림(森林-沃沮:옥저) 같은 곳에서 만나

그 용모의 아름답고 수려함에 빠져서 사위를 삼았다가 고구려에게 망하였으나

그에 소속한 수십 소국이 그 종주국(宗國) 최씨의 멸망에 원한(恨)을 품어

고구려에게 불복하고 서쪽(西方)으로 한(漢)을 통하여 이에 한의 세력이 낙랑에 침입되었다.

 

그러나 한나라(漢)와 낙랑국의 관계는 명나라(明)의 해삼위(海蔘威: 블라디보스톡),

송황영(松篁營) 등 여러 수비 주둔지(諸南衛)처럼

한나라(漢) 관리의 발길(足跡)이 이곳에 오지 아니하며

한나라 황제의 조칙과 명령(詔令)이 이곳에 미치지 못하였다.

 

낙랑군은 낙랑국에서도 천여 리를 더 간 요동에 있는 군명이니,

 

한 무제가 위만을 멸하고 이상적 군현으로 진번 현도 임둔 낙랑 사 군을 만들려 하였으나

조선의 저항이 강경하여 동북에서 졸본부여(卒本扶餘-후일,後來의 고구려)가 일어나매

진번 현도 2군(郡)이 공상이 되고 말았고,

 

압록강 동쪽에서 낙랑국 최씨가 일어나매 낙랑 임둔 2군도 공상이 되고 말았거늘,

 

요동경내(遼東 界內)에 낙랑 현도 등 4군을 허위로 설치(虛設)하여 사책(史冊)을 장식하고

 

최씨 멸망후(고구려 대무신왕과 한 무제의 무렵) 낙랑국에 소속되었던

낙랑 소국 여러나라(列國)와의 교류로 인하여 그 여러나라(列國)의 이름을 가져다가

그 허위로 설치(虛設)한 낙랑군 가운데

허위로 설치(虛設)한 낙랑 여러 현(諸縣)의 이름을 만들고,

 

고구려와 고구려 속국인 개마(蓋馬), 은대(殷臺) 등의 이름을 가져다가

허위로 설치(虛設)한 현도 3현의 이름을 만들었다.

 

그뿐 아니라 최씨 멸망후 수십년만에 대방국이 장단(長湍) 등지에서 일어나

6, 7 소국의 맹주가 되었다.

비록 그 주권자의 성명과 나라의 지속기간이 얼마였는지 역사책(史冊)에 보이지 않았으나,

 

백제본기 책계왕 원년에 백제왕의 처 보과(寶菓)의 아버지 대방왕이 보였으며,

기림 니사금 3년에 낙랑 대방 양국이 항복(服)한 사실이 기록되어있으니,

(대방국이) 그 일시의 소왕국 됨이 명백하다.

한가제왕(漢家帝王)들은 이를 따라 또 요동에 대방군을 허위로 설치(虛設)하였다.

 

여태까지 우리의 조선 사가들이 매번 조선 고기(古記)와 중국사의 충돌되는 사실을

억지로 조화시키느라고 고기(古記)를 삭제하고 고치고 칠해서 지워버린(刪改塗抹) 것이 적지 아니한 중

 

낙랑의 사실은 피차 모순이 더욱 심하므로, 조화에 더욱 고심하여

삼국사기에 백제 온조왕과 교섭한 낙랑왕을 낙랑태수로 고쳤으며,

 

삼국유사에는, 한나라(漢)에 없는 주 이름(州名)인 평주(平州)와

한나라에 없는 관명, 도독(都督)을 내어 사군 이부설(四郡二府說)을 날조하는 등

이같은 등등의 망령된 글(妄筆)이 많으므로

그 일반화된 와전과 오류(訛誤-와오)를 발견키에 더 곤란케 되었다.

여하간 중국사 중 조선 일을 가장 자세히 적은 삼국지에 낙랑 대방이 빠지므로

전후의 맥락이 끊기어 큰 결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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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본출처: 조선사연구초(인터넷 판 - 위키문헌)

http://ko.wikisource.org/wiki/%EC%A1%B0%EC%84%A0%EC%82%AC_%EC%97%B0%EA%B5%AC_%EC%B4%88

 

2) 참고문헌: 조선상고문화사(외), 비봉출판사, 2008년판

3) 지금 올리는 ‘전후 삼한고’는 ‘조선사연구초’ 안에 있는 글임

 

* 조선사 연구 초(朝鮮史硏究草), <저자: 신채호>

 

가. 고사상(古史上) 이두문 명사 해석법

나. 삼국사기(三國史記) 중 동서(東西) 양자(兩字)의 상환(相換) 고증(考證)

다. 삼국지 동이열전 교정

라. 평양 패수고

마. 전후 삼한고(前後 三韓考)

바. 조선역사상 일(一)천년래 제일 대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