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고구려와 북위의 관계(2)

상 상 2012. 4. 21. 18:35

 

북위는 수나라에 비해 영토가 약 반밖에 되지 않았으므로 국력이 약 반정도인 나라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북위는 남북조시대의 최대 강국이다. 또한 북위를 이은 나라가 중국을 통일하였다.

사실상 북위가 중국통일의 기초를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북위와 고구려는 어떠한 관계에 있었는지 알아보자.

 

고구려와 북위의 관계를 알수 있는 것은 다음 4가지이다.

 

1. 남제서 동남이열전 고구려전의 기록.

2. 고구려와 북위 사이에 있었던 북연왕 인도 요청 거부와 혼담 거절 사건.

3. 고구려가 북위의 적대국가와 외교관계 수립.

4. 고구려, 북위 사신의 고구려 국경 통과 거부.

 

 

1. 남제서 동남이열전 고구려전의 기록.

 

『 [고구려는] 위(魏) 오랑캐에게도 사신을 보냈지만 세력이 강성하여 제어를 받지 않았다』(원문:亦使魏虜, 然彊盛不受制)

여기서 고구려의 강성(彊盛)함과 그것으로 인하여 고구려는 북위의 제어를 받지 않았음을 남제서의 기록은 분명히 증명하고 있다.

 

이 이상 무엇이 더 필요한가?

강성해서 제어를 받지 않았는데 종속은 무슨 말이며, 지방정부는 무슨 말이고, 책봉이라는 것은 또 무슨 말인가?

그것은 한갓 춘추사관과 식민지 사관의 개들이 짓어대는 말일뿐임을 알 수 있다.

 

굳이 못박아 말한다면 고구려는 북위의 종속국가도 아니고 지방정부는 더욱 아니다. 

 

 

 

2. 고구려와 북위 사이의 사건.

 

고구려가 강성해서 북위의 제어를 받지 않았다는 기록은 고구려와 북위 사이에 일어난 일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1) 북연왕, 고구려로 도망(북연의 멸망 모습)

 

북위가 여러차례 깊숙이 공격하자 북연왕 풍홍은 번국이라고 자칭하고 딸을 후궁으로 바치겠다고 빌었다.

북위는 이를 허락하고 북연의 태자를 인질로 보내라고 하였다.

그러나 북연왕은 태자를 인질로 보내지 않았다. 이에따라 북위는 공격을 계속하였고,

견디다 못한 북연은 이번에는 거꾸로 태자를 인질로 바치겠다고 간청하였으나

북위가 태도를 바꾸어 이를 거절하고 군사를 동원하여 멸망시키기로 하였다.

 

이때 고구려에 사신을 파견하여 돕지 말 것을 미리 경고하였다.

북연은 급해지면 고구려로 도망가기로 하고 사자를 보내 고구려에게 군사적 도움울 요청했다.

 

이에따라 고구려와 북연 군대 각각 수만명이 다같이 북연의 서울, 용성에 도착했으나

고구려가 북위의 왕과 대신, 백성을 호위해서 고구려로 데려가는데 북위 군대는 아무런 공격도 못하였다.

고구려에 도착하고 나서야 북위 군주는 북연왕을 보내 달라고 하였지만 고구려는 끝내 들어주지않았다.

 

북연왕이 사태가 급해지면 고구려로 도망하겠다고 한 것은 고구려와 친밀하다는 것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도 안전하게 생각했기 때문임이 틀림없다.

 

즉, 고구려가 북위보다 강했거나 적어도 대등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고구려로 도망가 봐야 고구려와 함께 북연왕도 죽을 수 있을테니까...

(이러한 일이 벌어졌을 당시는 북위의 세력이 한창 왕성했던 태무제때임)

 

논점을 간추리면,

① 고구려는 북위의 사전 경고를 무시하고 군대 수만명을 동원하였고

② 고구려가 군대로 북연 백성을 고구려로 데리고 오는데도 수만명의 북위 군사는 바라만 보았으며,

③ 나중에 북연왕을 보내 달라고 요청 하였으나 그것마저 끝내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나 북위는 어떠한 경우에도 어느 경우에도 아무런 군사행동을 못하였다.

이것으로 고구려가 군사적 우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말해서 고구려가 세력이 강성하여 북위의 제어를 받지 않았다는 기록이 사실임을 다시한번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고구려에게 종속이니 지방정권이니 하는 용어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자세한 기록은 아래 ‘자치통감 번역 원문’ 과 ‘위서 열전 고구려전’ 참조)

 

 

2) 고구려, 북위 혼담 거절.

 

북위가 혼담을 요청하여 고구려가 응하니 북위는 예를 다해 폐백을 국경까지 보냈다.

그러나 고구려가 북위를 의심하여 혼담을 깨버렸다. 그래도 고구려를 공격 못하였다.

 

여기서 살펴봐야 할 사항은 이 혼담을 주관한 사람이 문명태후(풍태후)인데

풍태후는 아래 사람이 말을 안들으면 황제도 죽이는 사람이며, 성격이 잔인한 사람이다.(근거: 자치통감)

 

즉, 고구려가 북위의 하위 국가였으면 장수왕을 죽이고 고구려도 멸망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가 강성하였기 때문에 그게 가능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또한, 북연이 북위에게 딸을 후궁으로 바치겠다고 빌었던 것과 비교할 때

고구려의 지위가 어느 정도였는지 알수 있다.

 

이 사건을 봐도 고구려가 세력이 강성하여 북위의 제어를 받지 않았다는 기록이 사실임을 알 수 있고

따라서, 고구려에게 종속이니 지방정권이니 하는 것은 끼어들 여지조차 없는 상황임을 알 수 있다.

(자세한 기록은 아래 ‘위서 열전 고구려전’ 참조)

 

 

 

4. 고구려가 북위의 적대국가와 외교관계 수립.

 

1) 고구려가 남쪽으로 송, 북쪽으로 연연과 외교관계 수립.

 

고구려는 이 무렵 송(남조 송나라), 연연(유연)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다.(연연은 유연의 또 다른 이름임)

남북으로 송, 유연과 외교관계를 맺는 것에 그치는 것뿐만이 아니라 외교관계를 맺고 서로 순치(脣齒)의 관계를 이루면서 

북위의 국토를 짓밟으려 하고 있다.

 

따라서 고구려는 북위에 종속되기는 커녕 북위를 멸망시키려는 나라임을 알 수 있다.

 

또하나 주목할 것은 유연(연연)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인데

이 유연은 북위에게 아주 골치 아프며 적대적인 나라였다.

그런데도 버젓이 고구려는 유연(연연)과 외교 관계를 맺고 있다.

 

이러한 점을 보았을때

고구려에게 종속이니 지방정부니 하는 말을 거론할 수있는 상황 자체가 아니었다.

그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語不成說)이요, 망발이다.

(자세한 사항은 아래 ‘위서 열전 백제전’ 참조)

 

(유연이 북위의 얼마나 두통거리였는지, 많이 침략하였는지는 자치통감에 너무 많이 나오므로 여기에 다 실을 수 없어 생략함)

 

 

2) 고구려가 남제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음

(자세한 사항은 아래 ‘위서 열전 고구려전’ 참조)

 

 

5. 북위의 사신이 고구려를 통과하려고 하자 고구려가 거부.

 

북위의 사신이 고구려를 통해서 백제로 가려고 했는데 고구려가 거부하여 사신이 그대로 돌아갔다.

그런데 북위가 한 것이라고는 말과 붓장난 뿐이었다.

 

북위가 고구려의 국경도 통과 못하는데 종속이니 지방정권이니 하는 것을 운운할 수 있는가? 얼토당토않는 말이며 터무니없는 얘기다.

그리고 북위의 사신이 국경통과를 거절당하고 북위가 한 것이라고는 말뿐이었는데 종속이니 지방정부니 하는 말을 할 수 있는가?

개가 웃을 일이다... (자세한 기록은 아래 ‘위서 열전 백제전’ 참조)

 

결론적으로,

 

고구려가 강성하여 북위의 제어를 받지 않았다는 남제서의 기록이나

고구려와 북위 사이에 북연왕 인도 요구 거절과 혼담 파경 사건,

고구려가 북위의 적대국가들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는 것,

고구려가 북위의 사신이 고구려를 통과하려고 하자 거부하여 되돌아 갈 수 밖에 없었던  사건등을 보았을때

 

고구려와 북위가 주종관계에 있다거나

중앙과 지방정부 관계를 운운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語不成說)이고 터무니없는 망발이다.

 

굳이 못박아 말하면 종속이니 지방정부니 하는 것은 있을 수도 없었고, 있지도 않았으며, 상상도 할수 없는 상황이었다.

즉,  전혀 사실이 아니다.

따라서 책봉이라는 말도 전혀 사실이 아니다.

 

또한, 위서 열전 고구려전을 봐도 책봉이라는 기록 자체가 없다.

위서 열전 고구려전을 보면, 배수(拜授)나 배(拜)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데 이는 책봉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배수(拜授)나 배(拜)라는 표현이 책봉의 완곡한 표현이라는 주장은 배수를 잘못 안 것이다.

배수가 책봉이라는 것은 터무니없는 말이며 전혀 사실이 아니다.

 

이러한 소극적인 논의는 여기서 끝내고 적극적인 논의를 해보자.

 

1) 문명태후(풍태후)가 주관한 혼담을 고구려가  깨버린 사건(위서 열전 고구려전)

2) 장수왕이 죽자 북위의 효문제가 애도를 표했으며, 조문사절을 보낸 것.(위서 열전 고구려전)

3) 문자명왕이 죽자 북위 영태후(靈太后)가 애도의 의식을 거행하고, 조문사절을 보낸 것.(위서 열전 고구려전)

 

이 세가지 기사가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이러한 단서를 가지고 고구려가 북위와 어떤 적극적인 관계에 있었는지 알아보면 된다.

 

이미 논의가 길어졌으므로 이것은 다음 기회로 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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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 사서 기록 >

 

 

1. 자치통감(북연의 멸망과정)

 

◎ 남북조 송기 문제 원가 9년(432년)

 

8월

신사일(9일)에 위의 주군이 고소(高紹)를 공격하여 그의 목을 베었다.

평동장군 하다라(賀多羅)가 대방(帶方: 요녕성 소재)을 공격하고

무군 대장군인 영창왕 탁발건이 건덕(요녕성 소재)을 공격하고

표기대장군인 낙평왕 탁발비가 가양을 공격하여 모두 뽑았다.

 

9월

을묘일(14일) 위의 주군이 군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돌아가 영구(요녕성 소재)

성주(요녕성 소재), 요동 낙랑(요녕성 소재), 대방(요녕성 소재), 현도(요녕성 소재)

여섯군의 백성 3만 가호를 유주로 이주시켰다.

 

연의 상서인 곽연이 연왕에게 위에 정성껏 딸을 바쳐 보내고 부용국이 될 것을 요청하라고 권하였다. 연왕이 말하였다.

“전에 틈새가 벌어져 있었고 분노를 맺게 된 것이 이미 깊은데 항복하여 귀부하는 것은 죽음을 가지러 가는 것이니

지킬 뜻으로 다시 도모하는 것만 못하다.”

 

위의 주군이 화룡(북연의 서울)을 포위하였을때 숙위하는 병사들은 대부분 전선에 있어서 행궁하는(주군을 따라온) 사람이 적었다.

운중의 진장 주수지가 남방 사람과 더불어 위의 주군을 기습 살해하고 그 기회에 화룡으로 들어갔다가

배를 타고 남으로 돌아갈 것을 도모하였는데 이를 곤군장수 모수지에게 알렸으나 모수지가 따르지 않아 마침내 중지 하였다.

이미 이렇게 하고나서 일이 발각되어 주수지는 연으로 달아났다.

위인(위나라 사람)이 자주 연을 정벌하자 연왕은 주수지를 파견하여 남쪽으로 가서 구원을 요청하게 하였다.

주수지는 바다를 통하여 동래에 이르러 마침내 건강으로 돌아왔고 (남조 송나라의) 황문시랑을 제수 받았다.

 

겨울 11월

임자일(11일) 두번째 기사

 

애초에 (북)연왕의 적비 왕씨가 장락공(長樂公) 풍숭(馮崇)을 낳았는데 풍숭이 형제 중에서 나이가 가장 많았다.

즉위하게 되자, 모용씨를 세워 왕후로 삼으니 왕씨는 책립 받지 못하였고 또한 풍숭은 축출되어 비여(하북성 노룡현)를 진수하게

하였다. 풍숭과 같은 어머니를 둔 동생, 광평공 (廣平公) 풍랑(馮朗)과 낙릉공(落陵公) 풍막(馮邈)이 서로 말하였다.

 

“ 지금 국가가 장차 망하려고 한다는 것을 사람들이 우매하던 지혜롭던 간에 상관없이 모두 알고 있다.

왕이 다시 모용후의 참소를 받아들이면 우리 형제의 죽는 날이 얼마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마침내 서로 더불어 요서로 도망쳐 달아나 풍숭에게 유세하여 위에 항복하게 하니, 풍숭이 이를 따랐다.

마침 위의 주군은 급사랑 왕덕으로 하여금 풍숭을 부르게 하자

12월 기축일(19일)에 풍숭이 풍막으로 하여금 위에 가서 군(郡)을 들어가지고 항복하게 해달라고 청하였다.

연왕(북연왕 풍홍)이 이 소식을 듣고 그 장수 봉우로 하여금 요서에서 풍숭을 포위하게 하였다.

 

 

◎ 남북조 송기 문제 원가 10년(433년)

 

봄 정월

을묘일(15일)에 위의 주군이 영창왕 탁발건을 파견하여 여러 군대를 감독하여 요서(하북성 천안현)를 구원하게 하였다.

 

2월

경오일(1일)에 위의 주군이 풍숭을 도독유평동이제군사(유주 평주 동이의 모든 군사권자)

거기대장군 유평이주목(유주와 평주의 목사)으로 삼고 요서왕에 책봉하여 그 나라의 상서의 사무를 관장하게 하고

요서의 10개 군을 식읍으로 하고 승제(承制)하여 상서, 자사, 정로장군 이하 관원을 임시로 임명하게 하였다.

 

6월

위의 영창왕 탁발건, 좌복야 안원이 모든 군사를 감독하여 화룡(북연의 수도)을 공격하였고

장군 누발이 별도로 5천 기병을 거느리고 범성(하북성 평천현)을 포위하였다.

연(북연)의 수장 봉우가 범성(하북성 평천현)을 바쳐 항복하자 그곳의 3천여 집을 거두어가지고 돌아왔다.

 

8월(가을)에

풍숭이 표문을 올려서 그의 아버지에게 항복하라고 설득하게 해줄 것을 요청하였으니 위의 주군이 허락하지 않았다.

 

 

◎ 남북조 송기 문제 원가 11년(434년)

 

봄 정월

무술일(4일)에 연왕(북연왕)이 사신을 파견하여 위에 화의를 요청하였다. 위의 주군은 허락하지 않았다.

 

3월

신사일(18일)에 연왕(북연왕)이 상서 고옹을 파견하여 표문을 올리면서 번국이라고 자칭하고 위에 죄를 받겠다고 하고

막내딸로 액정을 채우게 해 달라고 빌었는데 위의 주군이 마침내 이를 허락하고 그의 태자 풍왕인을 불러 들어와서 조현하게 하였다.

 

6월

갑진일(13일) 두번째 기사

연왕이 태자를 파견하여 위에 인질로 보내지 않으니 산기상시 유자가 간하였다.

(태자를 보내야 사직을 보존할 수 있다고 말함. 자세한 내용은 생략)

연왕이 화가 나서 그를 죽였다.

신해일(20일)에 위의 주군이 무군대장군인 영창왕 탁발건 등을 파견하여 연을 치고 그들의 벼와 곡식을 거두어 들이고

백성을 옮겨놓고 돌아왔다.

 

 

◎ 남북조 송기 문제 원가 12년(435년)

 

봄 정월

신미일(13일) 두번째 기사

연왕이 자주 위에게 공격을 받자 사자를 파견하여 건강(남경)에 가서 번국임을 자칭하고 공물을 받들어 올렸다.

계유일(15일)에 (남조 송나라에서) 조서를 내려서 연왕에 책봉하고 강남에서는 그들을 황룡국이라고 불렀다.

 

3월

계해일(6일)에 (북)연왕이 대장 탕촉을 파견하여 위에 들어가 공물을 바치고 태자 풍왕인에게 병이 있으므로 아직 보내지 못하였다고

말하였다.

 

여름 4월

기사일(4월에는 기사일이 없다고 함. 을사-19일의 잘못이라고 함), 두번째 기사

(북)연왕이 우위장군 손덕을 (남조 송나라에) 파견하여 와서 군사를 보내달라고 빌었다.

 

6월

무신일(22일)에 (북)위의 주군이 표기대장군 낙평왕 탁발비, 진동대장군인 도하(요녕성)사람 굴원 등에게 명령하여

기병 4만명을 인솔하고 (북)연을 치게 하였다.

 

7월(가을)

기묘일(24일)에 (북)위의 낙평왕 탁발비 등이 화룡(연의 수도)에 도착하였고 연왕은 소고기와 술을 가지고 군사들을 위로하고

갑옷 3천벌을 바쳤다. 굴원은 그들이 시자(인질)를 보내지 않은 것을 책망하고 남녀 6천명을 약탈하여 돌아갔다.

 

8월

갑진일(20일) 두번째 기사

위인들이(북위 사람들이) 자주 (북)연을 치니 (북)연은 매일 위태롭고 오그라들어서 위아래 사람들이 걱정하고 두려워 하였다.

태상 양민이 다시 (북)연왕에게 속히 태자를 파견하여 입시하게 하라고 권고하였다.

연왕이 말하였다.

“ 내가 차마 아직 이런 짓을 못하겠다. 만약에 사태가 급해지면 또한 고려에 의지하여 훗날에 일어날 것을 도모할 것이다.”

 

양민이 말하였다.

“(북)위는 천하를 들어서 한 귀퉁이를 치는데 이기지 못할 까닭이 없습니다.

고려(고구려)는 신의가 없으니 처음에는 비록 서로 친하다고 하나 끝내는 변할까 두렵습니다.”

(북)연왕이 듣지 아니하고 비밀리에 상서 양이(陽伊)를 파견하여 고려(고구려)에 영접해 주기를 청하였다.

 

 

◎ 남북조 송기5 문제 원가 13년(436년)

 

2월

무자일(6일)에 (북)연왕이 사신을 파견하여 (북)위에 들여보내 공물을 바치면서 시자(인질)를 보내게 해달라고 청하였다.

위의 주군은 허락하지 않고 장차 군대를 동원하여 그들을 토벌하려고 하였는데 임진일(10일)에 사자 10명을 파견하여 동쪽에 있는

고려(고구려) 등 여러 나라에 가도록 하여 이를 널리 알리고 깨우쳤다.

 

※ 북위가 북연을 공격할 때 북연을 돕지 말 것을 경고한 것이다.

 

3월

신미일(20일)에 위(북위)의 평동장군 아청, 안서장군 고필이 정예의 기병 1만명을 거느리고 연(북연)을 정벌하는 데

평주(하북성 노룡현)자사 탁발영이 요서(하북성의 동북부)의 여러 군대를 거느리고 그들과 회합하였다.

 

4월(여름, 날짜는 없음)

여름 4월에 위(북위)의 아청(娥淸), 고필(高弼)이 연(북연)의 백랑성(요녕성 객랄심좌익현의 서남쪽)을 공격하여 그곳에서 승리하였다.

 

고려(고구려)가 장군 갈로 맹광을 파견하여 무리 수만명을 거느리고 양이(陽伊)를 따라와서 화룡(북연의 수도로서 요녕성 조양시)에

도착하여 연왕을 영접하였다. 고려는 임천(화룡의 동쪽)에 주둔하였다. 연의 상서령 곽생이 백성들이 옮겨가기를 꺼리는 것을 이용하여

성문을 열어서 위의 군사를 받아들이려 하였지만, 위인(魏人)들이 그것을 의심하여 들어가지 않았다.

곽생이 마침내 군대를 챙겨서 연왕을 공격하였으나, 왕이 고려의 군대를 이끌고 동문으로 들어와서 곽생과 궁궐 아래에서 싸웠는데,

곽생이 떠도는 화살에 맞아서 죽었다. 갈로 맹광이 성에 들어오자, 군사들에게 해진 군복을 벗도록 명령하고, 연의 무기고에 있는 날카로운 병장기를 가져다가 주고 성안에서 크게 약탈하였다.

 

5월

을묘일(5일)에 연왕이 용성(수도 화룡의 도성으로 요녕성 조양시)에 있는 현재의 백성들을 거느리고 동쪽으로 옮기면서 궁전을 불태우니, 불이 10일 동안이나 꺼지지 않았다.

부인들도 갑옷을 입고 안에서 거주하게 하고, 양이(陽伊) 등이 정예의 병사들을 거느리고 행영 밖에 있었고, 갈로 맹광이 기병을 거느리고 뒤쪽에 있었는데, 방궤(방진)로 나아가니 앞과 뒤 사이의 거리가 80여리나 되었다.

고필의 부장인 고구자가 기병을 거느리고 그들을 추격하려고 하였지만, 고필이 술에 취하여 칼을 뽑아서 그를 제지하니, 그러므로 연왕은

 도망칠수 있었다. 위의 주군이 소식을 듣고 화가나서 함거로 고필(高弼)과 아청을 불러들였고, 평성(북위의 수도로서 산서성 대동시)에

도착하자 모두 내쳐져서 문졸(門卒)로 삼았다.

 

(그러나 이후 기록을 보면 고필은 3공,公에 이르는 높은 지위를 누리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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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위서 열전 고구려전(북연왕 인도요청 거절 사건)

 

『그 때 풍문통(馮文通: 풍홍, 북연의 마지막 왕)이 무리를 거느리고 고구려로 도망하였다.

세조(世祖:태무제))가 산기상시(散騎常侍) 봉발(封撥)을 파견하여 련(璉: 장수왕)에게 조서를 내려 문통(文通)을 보내라고 명령하자,

련(璉)은 상서(上書)하여 문통과 함께 왕화(王化)를 받들겠다고 하면서도 끝내 보내지 아니하였다. 세조가 화를 내어 그들을

토죄(討罪)하려 하였으나, 낙평왕(樂平王) 비(丕) 등이 훗날을 기다려 거병(擧兵)하자는 의견을 제시하므로, 세조는 그만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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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위서 열전 고구려전(혼담 거절 사건)

 

뒤에 문명태후(文明太后)가 현조(顯祖)의 육궁(六宮)이 채워지지 못하였다 하여, 조칙으로 련(璉:장수왕)에게 그의 딸을 보내라고

하였다. 공(公)이 표를 올려, “딸은 이미 출가하였으므로 아우의 딸 중에서 구하여 조칙에 응하겠습니다.”라고 말하자, 조정에서 허락하였다. 이에 안락왕(安樂王) 진(眞)과 상서(尙書) 이부(李敷) 등을 보내 국경까지 가서 예물을 보내게 하였다.

그러나 련(璉: 장수왕)은,“위(魏:북위)나라는 지난 날 풍씨(馮氏)와 혼인을 맺었다가 얼마 안되어 그 나라를 멸망시켰습니다.

은감(殷鑑)이 멀지 아니하니 당연히 핑계를 대고 거절하여야 할 것입니다.” 라는 좌우 신하들의 말에 현혹되어, 마침내 글을 올려 그의 조카딸이 죽었다고 거짓말하였다. 조정에서는 속이는 것이라 의심하여 다시 가산기상시(假散騎常侍) 정준(程駿)을 보내 엄중히 문책하고, “조카딸이 참으로 죽었다면 종친(宗親) 중의 어진 딸을 뽑아 줄 것을 허락한다.” 고 하였다. 련(璉)은“천자께서 이전의 허물을 용서하여 주신다면 삼가 조칙을 받들겠습니다.” 하였다. 그 무렵 현조(懸祖: 헌문제)가 붕(崩)하여 그 일은 중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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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위서 열전 백제전(고구려가 남으로 송, 북으로 유연과 외교수립)

 

연흥(延興) 2년(472년)에 백제왕(百濟王) 여경(餘慶: 21대 개로왕)이 처음으로 사신을 보내어 표(表)를 올려 말하기를,

..........(중략).............

겉으로는 외효(隗囂)처럼 번병(藩屛)의 겸손한 말을 지껄이면서도 속으로는 흉악한 짐승의 저돌적인 행위를 품고 있습니다.

남쪽으로는 유씨(劉氏: 남조 송나라)와 통호(通好)하기도 하고, 북쪽으로는 연연(蠕蠕: 유연)과 맹약하기도 하여 서로 순치(脣齒)의 관계를 이루면서 왕략(王略: 북위의 국토)을 짓밟으려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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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위서 열전 고구려전(남제와 외교)

 

그 때 광주(光州)의 [관사(官司)가] 련(璉:장수왕)이 파견하여 소도성(蕭道成)[註053]에게 가던 사신 여노(餘奴) 등을 해상에서

체포하여 대궐로 압송하여 왔다. 고조(북위 효문제)가 조서로 련(璉)을 꾸짖기를,

“[소(蕭)]도성(道成)은 직접 자기의 군주를 죽이고 강좌(江左)에서 천자의 칭호를 참칭(僣稱)하므로, 짐이 바야흐로 망해버린 [송]나라를 옛 그 지역에 일으키어 끊어져 버린 유씨(劉氏)의 대(代)를 이으려고 하는데, 경은 월경외교(越境外交)하여 찬탈한 역적과 멀리서

통호(通好)하려 하니, 어찌 이것이 번신(藩臣)으로서 절의를 지키는 도리이겠느냐! 그러나 이제 한 가지의 허물을 가지고 옛날 정분을 묵살할 수 없어 잡혀온 사람들을 곧장 그대 나라에 돌려보내니,......(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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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위서 열전 백제전(북위 사신의 국경통과 거부)

 

『현조(顯祖: 북위 헌문제)는 (백제가) 멀고 궁벽진 곳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조공(朝貢)한 것을 생각하여 예우를 매우 정중히 하고, 사신 소안(邵安)을 파견하여 그 사신과 함께 돌아가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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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연(璉: 장수왕)에게 조서(詔書)를 내려 안(安) 등을 호송하라고 하였다. 안(安) 일행이 고구려(高句麗)에 이르니,

연(璉: 장수왕)은 옛날 여경(餘慶: 백제 21대 개로왕)과의 원수관계가 있음을 말하며 동쪽으로 통과시키지 않았다.

안(安) 일행이 이로 말미암아 모두 되돌아왔다. 이에 [연(璉)에게] 조서(詔書)를 내려 준절히 질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