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고구려와 수나라의 관계

상 상 2012. 4. 17. 18:43

 

고구려와 수나라의 관계는 수평적이며 대등한 관계에서 출발하여 수나라가 4차례에 걸쳐 고구려를 침략하자

고구려가 이를 쳐부심으로써 결국 고구려는 승전국, 수나라는 패전국의 관계에 있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고구려가 우위에 수나라가 하위에 있었다.

이것은 여태까지 살펴본 본 수많은 증거가 이를 명명백백하게 증명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민사관의 개들은 고구려가 수나라의 조공 책봉체계 하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고구려가 수나라의 하위국가내지 종속국가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근거랍시고 들이대는 게 수서 고려전 개황17년(597년) 조에 있는

「고조(수문제)는 원(영양왕)을 우선 책봉하여 왕으로 삼았다.」의 단 한 줄이다.

 

그러면 식민사관의 개들이 주장하는 것과 그 근거라는 것을 알아보자.

 

(1) 우선 그 주장과 근거를 알아보기 전에...

일반적으로 고구려가 우위에 있고 수나라가 하위에 있다는 증거가 무수히 많고

그 반대의 증거가 한 줄 있다면 어떻게 결론 내려야 하는가?

 

당연히 고구려가 우위에 있고 수나라가 하위에 있었다고 결론을 내려야 한다.

 

그런데도 식민사관의 개들은 완전히 반대로 결론을 내린다.

고구려가 수나라의 조공책봉 체계 하에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단 한줄의 문구로 고구려가 우위에 있었다는 수많은 증거를 묻을 수 있는가?

그게 옳은가?

 

말도 않되는 짓을 식민사관의 개들이 한 것이다.

진실을 뒤집어도 그 정도가 있는 것이고 거짓말을 해도 한도가 있는 법이다.

단 한줄의 문구로 어떻게 수많은 증거를 가릴수 있는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려고 하는 가소로운 짓을 한 것이다.

 

똥을 비단으로 아무리 싸고 싸도 그 더러운 냄새는 나기 마련이다.

식민지 사관의 개들이 아무리 거짓말을 하려고 해도 진실은 밝혀지기 마련이다.

잠시 소수의 사람들은 속일수 있을지 몰라도 영원히 전부를 속일 수는 없는 법이다.

 

식민지 사관의 개들이 고구려가 수나라의 조공책봉 체계 하에 들어왔다고 주장하며 그 증거로 들이민 단 하나의 증거는

그것보다 수많은 반대 증거가 있다는 것을 몰랐거나, 숨기고 대한민국 사람들을 속인 것이다.

그러나 이제 대한민국 국민들은 중국 25사 원문을 보기 시작하였고

거기서 진실을 알았다.

 

이제는 더 이상 식민사관의 개들이 대한민국 국민 모두를 속일 수 없는 시대가 온 것이다.

이제 대한민국 국민은 식민사관의 개들이 주장한 것이 거짓임을 알았으며

그들이 사기꾼임을 알았다.

 

식민사관의 개들이 주장하는 것은 거짓이고 그것과 반대되는 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았다.

즉, 고구려가 수나라의 하위국가 내지 종속국가였다는 것은 거짓이고

고구려가 우위에 있었고 수나라가 하위에 있었다는 것이 진실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러한 것은 수서 본기와 수서 고려전, 자치통감의 수많은 증거들이 명명백백하게 증명하고 있다.

 

 

(2) 식민사관의 개들의 주장 검토

 

이제 식민지 사관의 개들이 고구려가 수나라의 조공책봉 체계 하에 들어왔다는 주장이 왜 거짓인지 낱낱이 밝혀보자.

고구려가 수나라의 하위국가 내지 종속국가라는 주장이 왜 거짓인지 하나하나 명백히 밝혀보자

 

첫째,

개황17년(597년)에 고구려 임금을 왕으로 책봉하여 고구려가 수나라의 하위국가 내지 종속국가가 되었다고 하는데 개황18년(598년)이 시작되자마자 고구려가 말갈(靺鞨)의 기병 만여명을 거느리고 수나라를 공격하고 있다.

 

597년에 하위국가 내지 종속국가가 된 고구려가 어떻게 598년이 시작되자마자 수나라를 공격할수 있는가?

이러한 군사행동은 고구려가 수나라의 하위국가 내지 종속국가가 아님을 명백하게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공격은 고구려가 수나라의 조공 책봉 체계 하에 있지 않음을 명명백백하게 증명하고 있다.

 

말(글)과 행동 중 어느 것이 진실인가?

모두 다 알겠지만 행동이 진실이다.

 

둘째,

개황18년(598년) 고구려가 공격하자 수나라는 30만 대군으로 고구려를 침략하였으나 80~90%가 몰살당하는 대참패를 당하였다.

고구려와 수나라가 전쟁을 하여 고구려가 이기고 수나라 군대는 몰살을 당하였는데

어떻게 고구려가 수나라의 하위국가(종속국가)라고 말할 수 있는가?

어떻게 조공 책봉체계 하에 있었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어떻게 승리한 국가가 80~90% 몰살당한 나라에게 종속되는가?

그런 어거지가 어떻게 성립할 수 있는가?

 

그런 주장은 말 자체가 안되는 것이다.

즉, 고구려가 수나라의 하위국가(종속국가)라고 주장은 거짓말이다

고구려가 수나라의 조공 책봉체계 하에 있었다는 것은 명백히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셋째,

대업8년(612년) 수양제는 340만의 대병력으로 고구려를 침략하였으나 대참패를 당하여 요수에서 탁군(북경)까지 1840리를

하루에 460리씩 4일동안 미친듯이 도망쳐서 겨우 살았다.

이래도 고구려가 수나라의 조공 책봉 체계 하에 있었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이래도 고구려가 수나라의 하위국가 내지 종속국가라고 말할 수 있는가 말이다.

 

넷째,

대업9년(613년) 수양제가 또다시 고구려를 침략하였지만 양현감의 반란 소식과 양현감과 친했던 곡사정이 고구려로 망명하자 수양제는 황급히 도주하였다.

이때에도 얼마나 급했는지 군수품과 기계와 공격용 도구를 산처럼 그대로 쌓아놓은 채 밤에 몰래 야반도주하였다.

고구려는 곡사정에게 수나라 군대의 정보를 알아내 도주하는 수양제의 군대를 쳐서 괴멸적 타격을 가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그런데도 고구려가 수나라의 조공 책봉 체계 하에 있었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이래도 고구려가 수나라의 하위국가 내지 종속국가라고 말할 수 있는가 말이다.

 

다섯째,

대업10년(614년) 수양제가 또 고구려를 꺾어보겠다고 조정의 모든 대신들에게 의논케 하니 감히 어느 누구하나 입을 여는 자가 없다. 죽음의 공포와 불가능을 떠올렸기 때문일 것이다.

사태가 이지경에 이르니 수양제가 직접 전쟁을 독려하는 말을 하는데 고구려와 전쟁을 하겠다는 이유가

고구려가 수나라를‘오만하게 깔보고, 노략질하며, 수나라의 성(城)과 진(鎭)을 침공’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수양제가 직접 고구려가 수나라를 깔봤다고 말하는데도 고구려가 수나라의 조공 책봉 체계 하에 있었다고 말할수 있는가?

이래도 고구려가 수나라의 하위국가 내지 종속국가라고 말할 수 있는가 말이다.

 

고구려가 수나라를 노략질하고 수나라의 성(城)과 진(鎭)을 침공하였다고 수양제가 직접 증언했는데도

고구려가 수나라의 조공 책봉 체계 하에 있었다고 말할수 있는가?

이래도 고구려가 수나라의 하위국가 내지 종속국가라고 말할 수 있는가 말이다.

그런 것을 막기 위해 수양제가 전쟁에 나서겠다고 말하는데도

고구려가 수나라의 조공 책봉 체계 하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래도 고구려가 수나라의 하위국가 내지 종속국가라고 말할 수 있는가 말이다.

 

일곱째,

개황 17년(597년) 수문제가 고구려 임금에게 한 말을 보면...

 

① 말갈을 못견디게 괴롭히고 거란을 견고하게 가두었소. 여러 번국이 머리를 조아려 나에게 신첩 노릇을 하는게 [무엇이 나쁘다고 그처럼] 착한 사람이 의리를 사모하는 것을 분개하여 어찌 해치는 뜻이 (그렇게)심하오?

② 왕은 사자를 빈 객관에 앉혀 놓고 엄하게 막아 지키며, 눈과 귀를 막아 영영 듣고 보지도 못하게 하였소.

③ 기마병을 보내어 변경 사람을 살해하고, 여러 차례 간계를 부려 그릇되고 바르지 않은 말을 지어 내었으니, 마음에는 따르는 바가 없었소

 

이런 말들을 하고 있다.

 

이런 말들을 보면서도 고구려가 수나라의 조공 책봉 체계 하에 있었다고 말할수 있는가?

이래도 고구려가 수나라의 하위국가 내지 종속국가라고 말할 수 있는가 말이다.

 

여덟째,

대업8년(612년) 수양제가 고구려를 침략할 때 소위 조서라는 것을 통하여 한 말을 보면...

 

“그런데 저 고구려의 보잘것없는 무리들이 미욱스럽고 공손치 못하여 발해(渤海)와 갈석(碣石) 사이에 모이고, 요수(遼)와 예수(穢)의 경계를 거듭 잠식하였다.”

“조서(詔書)를 보내 엄하게 알린 것도 일찍이 면대하여 받지 않았으며”

“ 조정에 알현하는 예도 몸소 하려고 하지 않았다.”

“도망친 반도(叛徒)들을 꾀어 받아들임이 끝닿은 데를 모르고, 변방 지역에 가득 차서,

자주 봉후(烽候)를 번거롭게 올리게 하고, 문빗장과 딱다기가 이로써 조용하지 못하여,

백성이 그로 말미암아 생업을 폐하게 되었다.

“거란의 무리들과 연합하여 바닷가의 수자리 군사들을 죽이고,

말갈의 습관을 익혀 요서(遼西) 지방을 침범하였다.“

“청구(靑丘)의 바깥에서까지 모두 직공(職貢)을 닦고 벽해(碧海)의 가에서조차도 함께 정삭(正朔)을 받드는데, 드디어는 그들이 가지고 오는 보물을 다시 빼앗고 그들이 왕래하는 길을 막았다. 이에 죄 없는 사람들에게 잔학함이 미치고, 정성을 바치는 자들이 화를 당하게 되었다.”

“수레를 탄 봉명(奉命)한 사신이 해동(海東)에 가고 정절(旌節)을 든 사신이 거기로 가려면

번국(藩國)의 경계를 지나가야 하는데 도로를 막고 왕의 사신을 거절하여 황제를 섬기는 마음이 없으니,

이것이 어찌 신하로서의 도리이겠는가. 이런데도 참는다면 무엇을 참고 용납하지 못하겠는가.”

 

이런 말들을 하고 있다.

이런 말들을 보건데 고구려가 수나라의 조공 책봉 체계 하에 있었다고 말할수 있는가?

이래도 고구려가 수나라의 하위국가 내지 종속국가라고 말할 수 있는가 말이다.

 

아홉째,

자치통감 수기7 양제 대업 12년(616년) 여름 4월 정사일조를 보면...

『대업전의 서원(西院)에서 불이 났는데, 황제는 도둑이 일어난 것으로 여기고, 놀라 달아나, 서쪽 정원으로 들어가, 풀 사이에 숨었다가, 불이 진정되자 비로소 돌아왔다. 황제는 대업8년(612년: 고구려에게 괴멸적 대패를 당한 해) 이후부터, 잠을 잘 때마다 항상 놀라서 두근거리며, ‘적이야’라고 말하여, 몇 명의 부인으로 하여금 흔들고 쓰다듬도록 하고서야, 마침내 잠을 잘 수 있었다.』라고 되어 있어 수양제가 612년에 고구려에게 패한 것이 얼마나 놀라고 공포스러웠는지를 그대로 전하고 있다.

그런데도 고구려가 수나라의 조공 책봉 체계 하에 있었다고 말할수 있는가?

이래도 고구려가 수나라의 하위국가 내지 종속국가라고 말할 수 있는가 말이다.

....................(이하 증거 생략)...........

이러한 증거들을 보았을때 식민사관의 개들이 주장하는

고구려가 수나라의 조공 책봉 체계 하에 있었다는 것은 완전히 거짓말임을 알 수 있다.

즉, 고구려가 수나라의 하위국가 내지 종속국가라는 주장은 명명백백한 거짓이라는 말이다.

 

(3) 수서 고려전 개황17년(597년) 조에 있는

「원(영양왕)이 표문을 올려 사례함과 아울러 상서(祥瑞)를 축하하면서 왕으로 봉하여 줄 것을 청하였다. 고조(수문제)는 원을 우선 책봉하여 왕으로 삼았다.」

 

이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수서 고조 본기 개황18년(598년) 조에 있는

조서를 내려 고려왕 고원의 관작을 없애도록 하였다.」는 무엇인가?

 

그 정체를 밝혀보자

식민사관의 개들이 주장하는 이른바 근거를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첫 번째 문장은 전형적인 가필(加筆)로써 나중에 거짓을 꾸며넣은 것이다.

두 번째 문장은 고구려 임금의 왕위를 삭탈했다는 말이 아니며,

오히려 첫 번째 문장이 가필(加筆)로써 거짓이라는 증거가 된다.

 

하나씩 살펴보자.

첫 번째 문장이 전형적인 가필(加筆)로써 나중에 거짓을 꾸며넣은 것이라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① 영양왕(원)은 왕으로 봉해달라고 청할 이유도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첫번째 문장을 보면 다음과 같다.

「원이 표문을 올려 사례함과 아울러 상서(祥瑞)를 축하하면서 왕으로 봉하여 줄 것을 청하였다. 고조는 원을 우선 책봉하여 왕으로 삼았다.」이 문장의 뒷부분을 보면,

원(26대 영양왕)이 왕으로 봉해달라고 청하여 수나라 고조(문제)가 왕으로 책봉하였다고 되어있고

그 때문에 원(영양왕)은 고구려 왕이 된 것처럼 되어 있다. 그리고 이 일은 수서 고려전 개황17년(597년) 조에 있다.

 

그런데,

원(영양왕)은 고구려의 왕위 계승 법도에 따라 590년(년도 근거: 삼국사기)에 이미 왕이 되었는데

597년에 또다시 왕이 되겠다고 수나라에게 왕으로 봉해달라고 청할 이유가 없다.

즉, 원(영양왕)은 그의 아버지 고양은 수서 고조 본기에 있는대로 개황10년(590년) 가을 7월 신해일에 죽었기 때문에

그날 바로 태자로 있었던 원이 왕위에 올랐다.(삼국사기 영양왕 본기)

따라서 597년에 또다시 왕이 되겠다고 수문제에게 왕으로 봉해달라고 청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원이 왕으로 봉하여 줄 것을 청하였다. 고조는 원을 우선 책봉하여 왕으로 삼았다.」는 것은 거짓이며,

그 문장은 전형적인 가필(加筆)로써 나중에 거짓을 꾸며넣은 것이다.

이는 고구려왕은 고구려 자체의 왕위 계승 방법에 따라 왕이 되는 것이지

수나라의 책봉에 의해 고구려의 왕이 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고구려 왕이 고구려 자체의 왕위 계승 방법에 따라 왕이 되었다는 증거는 삼국사기에 무수히 나오지만

수서 본기에서도 그 증거가 나온다.

 

수서 본기 개황원년(581년) 12월 임인일 조를 보면

「고려왕 고양이 사신을 보내 조공하여,(고)양에게 대장군、요동군공을 주었다.」고 되어 있다.

여기서도 보면 고양은 이미 고려왕 즉, 고구려 왕이다.

고구려 왕의 자격으로 수나라에 사신을 보낸 것이다.

다시말해서 고구려 임금은 수나라와 관계없이 이미 왕이다.

즉, 고구려 임금은 고구려의 자체 왕위계승 방법에 따라 왕이 된 것이지

수나라가 왕으로 책봉해서 왕이 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또한, 수문제는 고양에게 대장군 요동군 공을 주었다고만 되어있고 왕으로 책봉했다고 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나중에 수나라는 고구려 임금을 왕으로 부르고 있는데 이를보면 고구려 왕은 타국의 왕으로서

그 나라에서 정해진 것을 그대로 부른 것이지 수나라에서 봉했기 때문에 왕이라고 부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구체적으로 말해서「(고)양에게 대장군、요동군공을 주었다.」는 것이 개황원년(581년) 12월 임인일인데

수서 고려전 개황 17년(597년) 조를 보면 고구려 임금을 왕이라고 수없이 부르고 있다.

(이것은 가필된「고조는 원을 우선 책봉하여 왕으로 삼았다.」는 문장 이전에 있는 것임)

이러한 것을 보았을때 영양왕(원)은 왕으로 봉해달라고 청할 이유도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따라서,

원이 왕으로 봉하여 줄 것을 청하였다. 고조는 원을 우선 책봉하여 왕으로 삼았다.」는 것은 거짓이며,

그 문장은 전형적인 가필(加筆)로써 나중에 거짓을 꾸며넣은 것이다.

 

② 원(영양왕)이 표문을 올려 사례함과 아울러 상서(祥瑞)를 축하했다는 것도 거짓이다.

 

수서 고조본기 개황원년(581년) 12월 임인일 조에는,

원(영양왕)의 아버지인 고려왕 고양에게 대장군、요동군공을 주었다고 하는데

수서 고려전 개황17년(597년) 조에는 (가필된 것을 제거하면)

영양왕에게는 그보다 못한 상개부 의동삼사를 배(拜:부여)하고 있다.

 

수서 백관지에 의하면 대장군은 정3품이고, 상개부 의동삼사는 그보다 한단계 낮은 종3품이다.

자기에게 아버지보다 높은 품계를 주지는 못할 망정 더 낮은 품계를 주어 자기를 모욕했는데

표문까지 올려 사례 할 사람이 누가 있는가? 이는 명백한 거짓말이다

따라서 원이 표문을 올려 사례했다는 것 역시 거짓이다.

 

또한, 「상서(祥瑞)를 축하했다.」고 하는 것 역시 근거가 없다.

이 일이 개황17년(597년)에 있었던 일이라고 수서 고려전에 있지만,

같은 수서 고조본기 개황17년(597년) 조는 물론 수서 고려전 개황17년(597년) 조에도 상서(祥瑞)라고 할만한 일이 없다.

 

다시말해서, 「원이 표문을 올려 사례함과 아울러 상서(祥瑞)를 축하하면서 왕으로 봉하여 줄 것을 청하였다. 고조는 원을 우선 책봉하여 왕으로 삼았다.」는 문장 전체가 거짓이며, 전형적인 가필(加筆)로써 나중에 거짓을 꾸며넣은 것이다.

 

 

영양왕(원)이 개황18년(598년)에 말갈(靺鞨)의 기병 만여명을 거느리고 요서(遼西)에 침구하고 있다.

 

이것은 고구려의 왕이 수나라의 책봉을 받지 않았다는 명백한 증거이며 고구려와 수나라의 관계가 원활하지 못함을 말하고 있다.

고구려가 수나라의 책봉을 받아 수나라에게 눌려 있었다면 고구려는 수나라를 먼저 공격할 수 없다.

고구려 임금이 수나라에게 왕으로 봉해줄 것을 요청하고 수나라가 왕으로 책봉해 주는 원만한 관계라면

고구려가 수나라를 칠 이유가 없다.

 

고구려가 수나라의 책봉을 받지 않았고, 따라서 수나라에게 눌려 있지 않았기 때문에

고구려가 수나라를 먼저 침구할 수 있었던 것이고,

고구려 임금이 왕을 봉해 달라고 요청하지도 않았고,

수나라가 고구려 임금을 왕으로 책봉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영양왕이 수나라의 요서를 공격하는 것이다.

즉, 고구려와 수나라는 상하관계도 원만한 관계도 아니었기 때문에 고구려가 수나라를 공격하였다는 말이다.

 

두나라 간의 좋지않은 관계가 고구려의 공격 원인일 것이고

급박하지도 않은데 먼저 공격하는 것은 상대방을 만만하게 보았기 때문이다.

즉, 고구려가 수나라를 먼저 공격한 것은 고구려와 수나라가 좋지 않은 관계에 있었고

게다가 고구려가 수나라를 만만하게 보았기 때문이다.

고구려가 만만하게 보는 수나라가 어떻게 고구려의 왕을 책봉해 주는 힘쎈 상국(上國) 될 수 있는가?

 

따라서,

원이 왕으로 봉하여 줄 것을 청하였다. 고조는 원을 우선 책봉하여 왕으로 삼았다.」는 것은 거짓이며,

그 문장은 전형적인 가필(加筆)로써 나중에 거짓을 꾸며넣은 것이라는 말이다.

 

④「원이 표문을 올려 사례함과 아울러 상서(祥瑞)를 축하하면서 왕으로 봉하여 줄 것을 청하였다. 고조는 원을 우선 책봉하여 왕으로 삼았다.」는 문장이 거짓말을 만들어 나중에 끼워넣은 가필이라는 것은

이 문장을 제거하면 앞뒤 문장이 자연스럽게 통하는 것을 봐도 알수 있다

반대로 이 문장이 있음으로써 이 문장과 뒷 문장이 서로 모순된다는 점에서도 알수 있다.

 

윗 문장을 제거하고 그의 앞뒤 문장을 나열해 보면,

「아들 원(元)이 이어서 즉위하니, 고조는 사신으로 하여금 원에게 상개부 의동삼사를 배(拜:부여)하고 요동군공의 작위를 이어받게 하며 옷 한벌을 주었다.」와 「이듬해 원이 말갈의 무리 만여 기병을 거느리고 요서에 침구하였는데 영주총관 위충이 치니 달아났다.」이다.

 

위의 문장을 풀이해 보면,

 

원(영양왕)이 볼때 자기(영양왕)의 아버지인 고려왕 고양에게 대장군、요동군공을 주었는데

자기(영양왕)에게는 그보다 못한 상개부 의동삼사를 배(拜)하고 있다.

자기에게 아버지와 같거나 높은 품계를 주지는 못할 망정 더 낮은 품계를 주어 자기를 모욕한 것이다.

따라서 모욕을 느낀 원(영양왕)이 수나라를 쳤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는다.

 

그러나 위 문장이 있으면서 그 뒤 문장을 나열해 보면,

「원이 표문을 올려 사례함과 아울러 상서(祥瑞)를 축하하면서 왕으로 봉하여 줄 것을 청하였다. 고조는 원을 우선 책봉하여 왕으로 삼았다.」와 「이듬해 원이 말갈의 무리 만여 기병을 거느리고 요서에 침구하였는데 영주총관 위충이 치니 달아났다.」이다.

 

위의 상황을 보면,

원(영양왕)이 사례하고 왕으로 봉해줄 것을 청하니 고조(수문제)가 원을 왕으로 책봉해 주고있다.

그런데 이듬해 원(영양왕)이 요서를 쳤다. 두나라가 원만한 관계인데 고구려가 수나라를 쳤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이것은 위의 문장이 처음에는 없었던 문장이라는 말이며

나중에 거짓말을 만들어 끼워넣다 보니 앞뒤가 모순되는 이상한 글이 되어버린 것이다.

 

따라서,

「원이 왕으로 봉하여 줄 것을 청하였다. 고조는 원을 우선 책봉하여 왕으로 삼았다.」는 것은 거짓이며,

그 문장은 전형적인 가필(加筆)로써 나중에 거짓을 꾸며넣은 것이다.

 

⑤「조서를 내려 고려왕 고원의 관작을 없애도록 하였다(下詔黜高麗王高元官爵)」고 하는 것은

고구려가 수나라의 책봉을 받은 나라라는 증거가 아니며 오히려 책봉을 받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왕으로 책봉하였다는 증거로 제시되는

「고조(수문제)는 원을 우선 책봉하여 왕으로 삼았다.(高祖優冊元為王)」을 기준으로 보면,

조서를 내려 고원의 관작을 없애도록 하였다(下詔黜高元官爵)」로 해야 맞다.

 

만약에 수나라가 원(영양왕)의 왕위를 제멋대로 주거나 빼앗았다면

고려왕(高麗王)이라는 말을 할 필요가 없다.

원(고원)을 왕으로 책봉하였다면 원(고원)의 관작을 없애버리면 그만이라는 말이다.

 

「고려왕 고원의 관작을 없애도록 하였다.」는 것은 그 위에 있는

자기들이 멋대로 배(拜:부여)한‘상개부 의동삼사’라는 관(벼슬)과‘요동군 공’이라는 작위를 없앴다는 것이지

자기들과는 아무 상관없는 고구려의 왕위를 없애도록 한 것이 아니다.

다시말해서 고려 왕이라고 말한 것은 관작을 없앤 대상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것은 고구려의 왕위는 수나라로부터 책봉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증거이다.

 

혹시 원을 왕으로 책봉하여 고려왕이라는 말을 쓴 것이라고 우긴다면

수서 본기 개황원년(581년) 12월 임인일 조에 「(고)양에게 대장군、요동군공을 주었다.」고 되어있어 왕으로 책봉한 것이 아닌데,

수서 고려전 개황 17년(597년) 조를 보면 고구려 임금을 왕이라고 수없이 부르고 있다.

(이것은 가필된「고조는 원을 우선 책봉하여 왕으로 삼았다.」는 문장 이전에 있는 것임)

따라서 수나라가 고구려 임금을 왕으로 책봉했기 때문에 고려왕이라고 부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또한, 수서 양제본기 대업3년(607년) 8월 을유일 기록을 보면,

『황상(수양제)이 고려 사자에게 이르러 말하기를「돌아가 너의 왕에게 말하라(上謂高麗使者曰:「歸語爾王)」』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 역시 수나라가 고구려 왕을 책봉했기 때문에 고려왕이라고 부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이렇다.

조서를 내려 고려왕 고원의 관작을 없애도록 하였다(下詔黜高麗王高元官爵)」는 것이 개황18년(598년)이다.

만약 이것이 왕위도 없애도록 한 것이라면 598년 이후에는 고구려의 임금을 왕이라고 부르지 말아야한다.

 

그런데 대업3년(607년) 8월에‘너의 왕’이라고 말함으로써 고구려의 왕은 수나라에서 봉한 것이 아님을 알수 있다는 말이다.

사자에게 말한 것이기 때문에‘너의 왕’이라고 했다고 우긴다면 다른 기록에는 전부 이름인‘원’이라고 말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수양제가 고구려에게 대패하여서 원한에 사무쳐 고구려의 왕을 가르킬 때는 전부 악의에 차서 ‘원’이라고 이름만 부르고 있다.

그렇다면 사신에게도 「돌아가 원에게 가서 말하라」라고 했어야 한다.

 

그러나 감히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은 남의 나라 왕에게 그렇게 함부로 이름을 부르지 못한 것이고,

고구려 왕위는 자기가 삭탈한 관직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서를 내려 고려왕 고원의 관작을 없애도록 하였다(下詔黜高麗王高元官爵)」는 것은

고구려가 수나라의 책봉을 받은 나라라는 증거가 아니며 오히려 책봉을 받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이와같은 것을 보았을때

「원(영양왕)이 표문을 올려 사례함과 아울러 상서(祥瑞)를 축하하면서 왕으로 봉하여 줄 것을 청하였다. 고조(수문제)는 원(영양왕)을 우선 책봉하여 왕으로 삼았다.」는 것은 거짓으로서, 그 문장은 전형적인 가필(加筆)로써 나중에 거짓을 꾸며넣은 것이며,

조서를 내려 고려왕 고원의 관작을 없애도록 하였다(下詔黜高麗王高元官爵)」는 것은

고구려가 수나라의 책봉을 받은 나라라는 증거가 아니라 오히려 책봉을 받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같이

고구려가 수나라의 조공 책봉 체계 하에 있었다는 주장은 완전히 거짓말이며

그러한 주장을 한 근거인 「고조(수문제)는 원을 우선 책봉하여 왕으로 삼았다.」는 가필한 것으로 사기이다.

 

따라서,

마치 수나라가 마음대로 고구려 임금을 왕으로 책봉하고, 고구려 임금의 왕위를 빼앗은 것처럼 말하고

따라서 고구려는 수나라의 조공 책봉체계 하에 있는 나라라고 선전하는 것은

제대로 된 수많은 증거를 감추고 무슨 소리인지도 잘 모르는 애매한 단 두 문장을 적당히 엮어서

역사를 모르는 사람들을 속이려는 수작이었다.

그것은 식민사관의 개들이 우리역사에 재를 뿌리고 모욕한 개수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결국,

고구려가 수나라의 조공책봉체계 하에 있었다는 주장은 거짓과 무식의 소산이었던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식민사관의 개들은 되지도 않는 헛소리로 우리역사에 재나 뿌리자는 왜놈들의 수작을

그대로 본받아 우리역사에 먹칠을 하며 히히덕거리는 못된 패륜아들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