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高肇) 열전(번역본)
순서 1. 고조열전 번역본 2. 해설
※ 번역문 출처: 한국고전 종합 DB/ 고전번역 총서/ 해동역사/ 제67권/ 인물고1/ 고고(高顧) 볼 수 있는 곳: http://db.itkc.or.kr/index.jsp?bizName=MK 에서 ‘하’/ 해동역사 / 제67권/ 인물고1 / 고고(高顧)
○ 고조(高肇)는 자가 수문(首文)이며, 문소황후(文昭皇后)의 오빠이다. 스스로 이르기를 발해(渤海)의 수(蓚) 사람이라고 하였다. 5대조인 고고(高顧)가 진(晉)나라 영가(永嘉) 연간에 난리를 피하여 고구려로 들어갔다. 아버지인 고양(高颺)은 자가 법수(法修)인데, 고조(高祖) 초에 동생인 고승신(高乘信) 및 마을 사람 한내(韓內)ㆍ기부(冀富) 등과 입국하여 여위장군(厲威將軍)에 제수되었고, 하간자(河間子)와 고승신은 명위장군(明威將軍)에 제수되었다. 모두 객례(客禮)로써 대우를 받아 노비(奴婢), 우마(牛馬), 채백(綵帛)을 하사받았다. 이에 드디어 고양의 딸을 황실(皇室)로 들였는데, 이 사람이 바로 문소황후로, 세종(世宗)을 낳았다. 고양이 졸하였다.
경명(景明) 초에 세종(世宗)이 외할아버지를 추모하여 고조(高肇)의 형제들을 징소(徵召)해 상서사(尙書事)로 녹용(錄用)하였다. 그러자 북해왕(北海王) 상(詳) 등이 상주하기를, “고양에게는 좌광록대부(左光祿大夫)를 추증하고 발해공(渤海公)의 작위를 하사하며, 경(敬)이란 시호(諡號)를 내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그의 처인 개씨(蓋氏)에게는 청하군군(淸河郡君)을 추봉(追封)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조서를 내려 그러라고 하였다. 또 조서를 내려서 고양의 적손(嫡孫)인 고맹(高猛)으로 하여금 발해공의 작위를 승습(承襲)하도록 하고, 고조를 평원군공(平原郡公)에 봉하고, 고조의 동생인 고현(高顯)을 징성군공(澄城郡公)에 봉하였는데, 세 사람이 같은 날에 봉작을 받았다.
처음에 세종이 외할아버지와 서로 접하지 못하였다가 관작을 제수하고 의책(衣幘)을 하사한 다음, 화림(華林)의 도정(都亭)에서 고조(高肇)와 고현(高顯)을 인견하였는데, 두 사람이 모두 너무나 두려운 나머지 거동할 적에 예법을 잃었으나, 며칠 사이에 부귀가 혁연히 빛났다. 이해에 함양왕(咸陽王) 희(禧)가 주살되었는데, 그의 재물(財物)과 진보(珍寶), 노비(奴婢)와 전택(田宅)이 대부분 고씨(高氏)들에게로 들어갔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고조가 상서우복야 영이부 기주대중정(尙書右僕射領吏部冀州大中正)이 되어 세종의 고모인 고평공주(高平公主)에게 장가들었으며, 다시 상서령(尙書令)으로 옮겨졌다.
고조는 오랑캐 땅 출신이라서 당시에 명망이 가벼웠는데, 요직에 있으면서 업무를 처리하는 데 마음을 두어 부지런히 힘쓰면서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에 세상 사람들이 모두들 능력이 있다고 칭찬하였다. 세종 초에 육보(六輔)가 정권을 전단(專斷)하였다. 그 뒤에 함양왕 희가 이유도 없이 역모를 꾸몄다. 이로부터 세종이 드디어 고조에게 정사를 믿고 맡겼다. 고조는 자신의 친족(親族)이 없었으므로 자못 붕당을 결성하여 자신에게 붙좇는 자는 한 달도 못 되는 사이에 승진시키고, 자신을 거역하는 자는 대죄(大罪)에 빠뜨렸다. 이로부터 조야에서 눈을 흘기고 보아 모두들 두려워하면서 미워하였다. 고조는 이로 인해서 더욱더 권력을 전횡하여 관직을 주고 빼앗기를 자기 마음대로 하였다. 고후(高后)가 황후가 되고부터는 더욱더 황제의 총애를 받았다.
연창(延昌) 초에 사도(司徒)로 옮겨졌는데, 비록 태정(台鼎)의 귀한 자리에 올랐으나, 요직에서 떠났다는 이유로 불만스러운 기색을 말투와 얼굴빛에 드러내었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들 침을 뱉으면서 비웃었다. 그해에 촉(蜀)을 정벌하면서 고조를 대장군(大將軍)으로 삼아 제군(諸軍)을 도독(都督)하면서 통솔하게 하였다.
4년(515)에 세종이 붕어(崩御)하였다. 고조가 변을 만나서는 슬프고 놀라 대궐 아래에 이르러 호곡(號哭)하였다. 이때 태위(太尉)로 있던 고양왕(高陽王)이 사인성(舍人省) 아래에다가 장사(壯士)들을 몰래 숨겨 놓았다. 고조가 사인성 안으로 들어오자 장사들이 길을 가로막고 납치해서 죽였다. 명제(明帝)가 조서를 내려 그의 죄악을 폭로하였다.
그 뒤 영태후(靈太后)가 조정에 임어하여 특별히 영주 자사(營州刺史)를 추증하였다. 영희(永煕) 2년(533)에 이르러 출제(出帝)가 사지절 시중 중외제군사 태사 태승상 태위공 녹상서사 기주자사(使持節侍中中外諸軍事太師太丞相太尉公錄尙書事冀州刺史)를 추증하였으며, 고조의 아들인 고식(高植)을 중서 시랑(中書侍郞)에서 승진시켜 제주 자사(濟州刺史)로 삼았다. 《후위서(後魏書)》
○ 고조의 큰형인 고곤(高琨)은 일찍 죽었는데, 아버지인 고양의 발해군공(渤海郡公)의 작위를 승습(承襲)하였고, 도독오주제군사 진동대장군 기주자사(都督五州諸軍事鎭東大將軍冀州刺史)를 추증받았다. 조서를 내려서 그의 아들 고맹(高猛)으로 하여금 작위를 잇게 하였다. 고맹은 장락공주(長樂公主)에게 장가들었는데, 장락공주는 바로 세종의 동모매(同母妹)이다. 부마도위(駙馬都尉)에 제수되었다. 《상동》
○ 고곤의 동생인 고언(高偃)은 자가 중유(仲游)이며, 태화(太和) 10년(486)에 졸하였다. 정시(正始) 연간에 안동장군 도독청주자사(安東將軍都督靑州刺史)를 추증하였으며, 시호를 장후(莊侯)라고 하였다. 경명(景明) 4년(503)에 세종이 그의 딸을 황실로 들여 귀빈(貴嬪)으로 삼았으며, 영평(永平) 원년(508)에 황후로 삼았다. 《상동》
○ 고언의 동생인 고수(高壽)는 일찍 죽었다. 고수의 동생이 바로 고조이다. 《상동》 ○ 고조의 동생인 고현(高顯)은 시중 고려국대중정(侍中高麗國大中正)이 되었으며, 일찍 죽었다. 《상동》
2. 해설
1) 여기에 나와있는 고조 열전 번역본을 원문과 대조해 보면 군데군데 내용이 빠져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그것은 번역자가 번역을 빠뜨린 것이 아닙니다. 이 번역문은 조선 정조 때의 실학자 유득공(柳得恭: 1749~?)이 쓴 해동역사(海東繹史) 중에 있는 고조 열전을 번역한 것인데 유득공이 쓴 고조 열전 원문 자체가 고조에게 좋지 않은 내용은 빼버리고 쓴 것입니다.
2) 그러나 여기에 나온 것만 해도 우리에게 매우 유익한 정보를 많이 주고 있습니다.
① 고조(高肇)는 문소황후(文昭皇后)의 오빠라는 점 ② 고조(高肇)의 아버지는 고양(高颺)이라는 점 ③ 고조(高肇)의 형제를 순세대로 나열하면... 고곤(高琨), 고언(高偃), 고조(高肇), 고현(高顯)이라는 점 ④ 큰형인 고곤(高琨)의 아들이 고맹(高猛)이라는 점 ⑤ 둘째 형 고언(高偃)의 딸이 위나라 세종의 황후라는 점 ⑥ 고조의 동생인 고현(高顯)은 시중 고려국대중정(侍中高麗國大中正)이 되었다는 점 ⑦ 고맹(高猛)은 북위 세종의 친 여동생에게 장가를 들어 부마도위(駙馬都尉)가 되었다는 점 ⑧ 고식(高植)은 고조의 아들인데 (선무제-세종이) 중서 시랑(中書侍郞)에서 승진시켜 제주 자사(濟州刺史)로 삼았다는 점.
⑨ ⑩ 고조(高肇)의 아버지인 고양(高颺)이 위나라 고조(高祖) 초에 동생인 고승신(高乘信) 및 마을 사람 한내(韓內)ㆍ기부(冀富) 등과 함께 북위에 입국하였다는 점 ⑪ 북위에 입국하자 고조의 아버지 고양은 여위장군(厲威將軍)에 제수되었다는 점 ⑫ 하간자(河間子)와 고양의 동생 고승신은 명위장군(明威將軍)에 제수되었다는 점 ⑬ 고조(高肇)는 최고 직위인 3공(사도, 사공, 태위 - 우리나라로 말하면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중이 하나인 사도(司徒)까지 올랐으나 오히려 요직을 떠나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할만큼 3공보다 더 중요한 핵심적인 요직, 상서령에 있었다는 점. ⑭ 고조(高肇)가 북위 세종의 명령으로 서쪽 촉(蜀)을 정벌하는 대장군(大將軍)이 되어 촉을 정벌하였다는 점 등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3) 고조 열전의 번역문 전체와 원문은 빠른 시일내에 싣도록 하겠습니다
[주D-001]수(蓚) : 원문에는 ‘脩’로 되어 있는데, 《후위서(後魏書)》 권83 고조열전(高肇列傳)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2]노비(奴婢) : 원문에는 ‘奴俾’로 되어 있는데, 《후위서》 권83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3]경명(景明) : 북위(北魏) 선무제(宣武帝)의 연호로, 존속 기간은 500년에서 503년까지이다. [주D-004]화림(華林)의 도정(都亭)에서 : 원문에는 ‘華林亭’으로 되어 있는데, 《후위서》 권83에 의거하여 ‘華林都亭’으로 바로잡았다. 도정은 도읍 안에 있는 전사(傳舍)로, 진(秦)나라 때 10리마다 한 개의 정(亭)을 세우고 군현의 치소(治所)에는 도정을 두었다. [주D-005]며칠 사이에 : 원문에는 ‘殺日之間’으로 되어 있는데, 《후위서》 권83에 의거하여 ‘數日之間’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6]상서우복야 영이부 기주대중정(尙書右僕射領吏部冀州大中正) : 원문에는 ‘尙書左僕射領吏部冀州大中正’으로 되어 있는데, 《후위서》 권83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7]연창(延昌) : 북위 선무제의 연호로, 존속 기간은 512년에서 515년까지이다. [주D-008]불만스러운 …… 드러내었다 : 원문에는 ‘快快形乎辭色’으로 되어 있는데, 《후위서》 권83에 의거하여 ‘怏怏形乎辭色’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9]정시(正始) : 북위 선무제의 연호로, 존속 기간은 504년에서 507년까지이다. [주D-010]시중 고려국대중정(侍中高麗國大中正) : 원문에는 ‘侍中高麗國大中’으로 되어 있는데, 《후위서》 권83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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