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316,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161, 7. 남조의 침공-28)

상 상 2017. 4. 21. 17:54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316,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161, 7. 남조의 침공-28)

 

차례

 

.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

2. 구당서 토번전()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10. 구당서 발해전

11. 신당서 발해전

12. 구당서 숙종본기

13. 구당서 회홀전

14. 신당서 회골전

15. 구당서 남조전

16. 신당서 남조전

17. 구당서 신라전

18. 신당서 신라전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6. 토번의 침공 이후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8. 황소의 난

9. 절도사의 시대

10. 당의 멸망

 

. 통일신라와 당

1. 통일신라 이후의 당나라 약사

2. 신구당서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3.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4. 사료를 통합해서 본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

 

 

.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1) 연표

 

연표3: 비교연표- 10

남조

(신구당서 남만전 중 남조전)

(자치통감 등)

870

이듬해(870) 정월 (남조가) 두재영을 공격하자, 두방이 스스로 군대를 독려하여 싸움에 나섰다. 추룡이 사자 십여 명을 보내 강화를 청하니, 두방이 그것을 믿었다.

 

그러나 회담이 반도 진행되기 전에 남조의 뗏목들이 이쪽 강기슭으로 다투어 몰려와 소리를 지르며 진격하니, 두방이 어찌 할 바를 모르다가 자살하려 하였다.

무령장(武寧將) 묘전서(苗全緖)가 그를 말리고, 죽을 힘을 다해 싸우니, 남조가 조금씩 물러났다. 이 틈을 타서 두방이 도망쳤고, 전서는 나중에서야 뒤따라갔다.

 

여주(黎州)가 함락되자, 사람들은 산과 골짜기로 달아나 숨었으며 남조가 약탈한 금과 비단은 지고 가지 못할 정도였다.

 

남조의 군대가 또 공래관(邛崍關)으로부터 들어와 아주(雅州)를 에워싸고, 마침내 공주(邛州)를 공격하였다. 이해 겨울 두방은 공주성을 버리고 도강(導江)에 방벽을 쳤는데, 쌓아 두었던 물자와 병장기는 모두 잃고 말았다.

 

추룡이 성도로 공격을 진행하여, 미주(眉州)에 이르렀다. 탄작(坦綽) 두원충이 밤낮으로 추룡에게 촉 전체를 취하게 했다.

 

이때 서천절도사 노탐이 그 부관 왕언과 환관 장사광을 보내 강화를 요구하였다.

 

남조가 강제로 사자들에게 남면하여 절하게 하였을 뿐, 끝내 추룡은 만나지도 못하고 돌아 왔다.

 

남조가 신진(新津)에 이르자, 노탐은 다시 부관 담봉사(譚奉祀)를 보내 좋은 말로 거듭 화약을 맺고자하였으나, 남조는 그를 억류하였다.

 

노탐은 원군이 아직 모이지 않은 것을 두려워하여 즉시 천자에게 급히 청하기를, 대사(大使)를 내려보내 저들과 우호를 통하게 하여 적이 깊이 침입하는 것을 늦추자고 하였다. 이에 당 의종(懿宗)이 태복경 지상(支詳)을 화만사(和蠻使)로 삼아 급파하였다.

 

전 노주자사(瀘州刺史) 양경복은 노탐(盧耽)을 위하여 공격용 기구와 투석용 돌을 만들고 성의 병장기를 견고하게 설치하였으며, 여덟 명의 장수가 각각 이를 담당하게 하였다. 또 참빗처럼 촘촘한 울타리를 세우고, 밤에는 횃불을 늘어놓아 성을 비추니 수비를 위한 설비들이 웅장하고 새로웠다. 또 날랜 병사 3천을 가려서 돌장(突將)이라 이름 붙이고, 장도(長刀)와 거과부(巨檛斧)를 사용하게 하였다. 좌우로 나누어 번갈아 쉬게 하면서 날마다 군대에 예속시키니, 병사들의 마음에 투지가 넘쳐흘렀다.

 

추룡은 쌍류(雙流)로부터 천천히 행군하였는데, 속으로는 동성(董成)의 치욕을 갚고자 하여, 상개(上介)를 자신의 군영에 보내와 일을 의논했으면 한다라고 노탐을 속였다.

 

[이에] 노탐이 절도부사(節度副使) 유반을 보내 두원충과 만나 강화를 의논하게 하였으나 결렬 되었다.

 

남조가 조금씩 전진하여 (성도의) 외성에 이르렀다. 이때에 유혁사(游弈使) 왕주(王晝)가 원병 3천을 거느리고 비교(毗橋)에 진을 쳤다. 두방 또한 그 군대를 거느리고 도강(導江)으로부터 와서 장차 대군과 팽팽히 맞서려 하였다. 그러나 싸우는데 힘을 다하지 않았으며 조금 이기지 못할 듯 싶자 즉시 후퇴하여 광한(廣漢)을 지켰다. 두방은 자기가 정변을 잃은 것 때문에 성도가 함락되기를 바랐는데, 자신의 죄를 가볍게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노탐의 부장 이자효(李自孝)란 자는 자사 유사진(喩士珍)과 친하였다. 유사진이 남조에 신속하자, 이자효가 몰래 적과 내통하여 성 아래에 갈대와 벼를 심자고 노탐을 설득하였다. 이는 물을 고이게 하여 성을 무너뜨리려는 것이었는데, 부내의 아무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남조가 성을 공격하자, 이자효가 성의 한쪽 담장을 지키고 있었는데, 대장기를 세워 스스로를 표시하였다. 대장기가 서있는 곳마다 남조가 번번이 공격하니, 결국 부하들에게 발각되었으며 노탐은 이자효를 죽여 군중에 널리 알렸다.

 

성의 왼쪽에는 누각으로 된 민간의 상가건물이 있었는데, 남조가 그 위에 올라가

성안을 굽어보며 활을 쏘아댔다. 노탐이 용사를 모집하여 불태우니 병장기도 함께 타버렸다.

서천절도사 노탐. 성도(成都) 농성전 준비, 모집 정병 3천 뽑아 '돌장(突將)'이라 칭함(8701)

남조이 미주(眉州)에 이르렀다(15)

남조군이 신진(新津)으로 진군 서천절도사 노탐이 조정에 급한 사정을 알렸다. 이에 당 조정은

태복경 지상을 선유통화사로 삼았다

남조군이 쌍류(雙流)를 함락함(111)

수주(巂州)의 정변절도를 해체하고 일곱 주를 서천에 돌려주었다.

이날 남조군이 성도(成都)성 아래 도착(120)

 

그 전날 노탐은 선봉유혁사 왕주를 파견하여 한주(사천성 광한시)로 가서 원군을 찾아 재촉하였다. 이때 흥원의 6천명과 봉상의 4천명은 이미 한주에 도착하였다.

그때에 마침 정변절도사였다가 도망한 두방은 충무, 의성, 서숙의 4천명을 가지고 한주로 도망왔다.

선봉유혁사 왕주는 흥원, , 간의 구원군 3천으로 비교(毗橋)에서 남조와 싸웠으나, 남조군 선봉에 패하여 한주(漢州)로 후퇴(124)

남조군()이 성도(成都)를 맹공격함(21) 이때에 돌장이 방어에 많은 공을 세웠다.

당 조정에서 파견한 전권대사 지상은 남조군과 화의를 하기로 약속하였다(23)

남조군이 군사를 거두고 화의를 청하였다(25)

남조군이 사신을 파견하여 지상을 영접하였다. 이때 지상은 원군이 곧 도착할 것으로 생각하고 거짓말을 하며 때를 넘겼다.

남만군은 화의하는 사자가 오지 않는 것을 보고 다시 나아가 성을 공격하였다(28)

성도성에서 군사를내 보내 남조군을 쳤다(29)

 

정변절도사 두방의 벼슬을 깎아 강주사호로 삼고

안경복을 동천절도사로 삼아 촉을 원조한 여러 군대는 모두 안경복의 통제를 받게 하였다.

 

 

동천절도사 안경복이 신도(新都)에 도착하니 남조군이 그를 막았다.(211)

남조군이 안경복과 다시 만났는데 안경복이 남조군을 대파하여 2천여 명을 죽였다(212)

만족의 군사 수만이 다시 도착하였는데 우무위상장군 송위가 충무의 2천여 명을 데리고 도착하여 같이 싸워 남조군을 대파, 죽은 사람이 5천여 명이 되니 성숙산(星宿山)으로 물러나 지켰다(213)

송위는 타강역으로 진군하였는데 성도와 30리였다.

남조가 양정보를 파견하여 지상에게 화의를 청하니 지상이 먼저 포위를 풀고 군사를 물리라고 하였으나 양정보가 돌아갔는데도 남조가 성을 포위하는 것은 예전과 같았다.

남조가 다시 화의를 청하였지만 성도에서는 어그러진 대답만하니 남조군은 성도를 더욱 급하게 공격하였다.(216)

 

당의 원조군이 성 아래 도착하여 남조군과 싸워 승천교(陞遷橋)를 빼앗자,

남조군은 공격도구 불태우고 후퇴(218)

성도에 먼저 도착하여 남조군을 깬 송위를 시기하여 안경복은 첩지를 보내 그의 군대를 빼앗고 한주로 돌아가게 하였다. 남조군은 쌍류(雙流)에 이르렀지만 신천수(新穿水)에 막혀 3일만에 다리 만들어 건넌 뒤 다리를 부수고 갔다. 남조군이 공주(邛州)를 포위하였으나 이틀이 지나도 이기지 못하자 버리고 떠났다.

안경복은 옹문성(壅門城)을 쌓게 하고 해자와 녹각을 세우고 정사를 담당하는 기구를 만들어 나누니 남조는 이로부터 다시는 성도를 침범하지 않았다.

공로를 세운 자에게 전()3백민을 내게 하고 관직을 주니, 당의 기강이 크게 붕괴된 것

좌복야 조확을 진해절도사에 충임하였다.(3)

 

방훈의 잔여무리가 연(), (), (), () 사이에 흩어져 살았는데, 서주관찰사 하후동에게 그들을 불러 타이르게 하였다.(4)

공주자사 오행로를 서천유후로 삼았다.(520)

광주(光州)의 백성들이 자사 이약옹을 쫓아내니 이양옹은 신식으로 달아났다.(5)

 

태자소부 이교의 건의에 따라 서주(徐州)에 계속 관찰사 두어,

(), (), (宿) 3개주()를 통괄하게 하고,

사주(泗州)를 잘라내 회남절도에 예속시킴(625)

위박(魏博)절도사 하전호는 교만, 포학하여 군사들이 난을 일으켜 죽이고, 대장 한군웅을

추대하여 유후로 삼자, 당이 한군웅을 위박유후로 삼았다.(91)

유첨을 형남절도사에 충임하고 온장을 진주사마로 깎아내리니 온장이 한탄하며 죽었다(97)

유첨을 강주자사로 깎아내렸다(927)

서천유후 오행로를 서천절도사로 삼았다.(1025)

다시 서주(徐州)를 감화군(感化軍)으로 하고 절도사를 두었다(1119)

 

좌금오상장군 이국창(주야적심)을 진무절도사로 삼았다(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