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책봉의 진실(36)

상 상 2017. 1. 18. 18:28

책봉의 진실(36)

 

이하의 기록은 위에 있는 848년 각 사료 끝부분에 나오는 이른바 감주회골(하서회골)에 대한 기록이다.

참고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내 용

856

선종(宣宗: 16대 군주)이 힘써 멀리 떨어져 있는 땅을 위무하기 위해 사자를 보내 영주(靈州)에 가서 [회골의] 추장을 살피자 회골이 이로 인해 사자를 따라 사람을 보내 경사에 왔고, 황제가 이에 올록등리라골몰밀시합구록비가회건가한(嗢祿登里邏汨沒蜜施合俱錄毗伽懷建可汗)이라고 책봉했다. 이후 10여 년이 지나 다시 한 번 토산품을 바쳤다.

<신당서 회홀전>

 

당 선종 대중 10(856)

3월 신해일(8), 조서를 내렸다. “회골은 나라에 공로를 세웠고 대대로 혼인하여 신하라고 칭하고 공물을 바쳐서 북쪽의 변경에 경계하는 일이 없게 하였다. 회창(당무종의 연호) 연간에 오랑캐의 조정이 없어지고 어지러워서 가한이 달아났는데 간신(이덕유)에게 위촉하여 일을 담당하게 하였더니 급히 죽여서 없앴다. 근래 항복한 사람이 말하기를 이방력(방륵)이 지금 가한이 되었고 아직 안서에 더부살이를 하고 있다.’고 하니, 그가 다시 아장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려 응당 책명을 덧붙여 주도록 하라.”

 

10월 을유일(15)-이후, 황상이 사신을 파견하여 안서에 가서 회골을 누르고 어루만지도록 하니 사자가 영무에 도착하였는데 마침 회골가한이 사자를 파견하여 입공하였으며

 

11월 신해일(12)에 올록등리라골몰밀시합구록비가회건가한으로 책배하고 위위소경 왕단장을 사신에 충임하였다.(十一月辛亥冊拜為嗢祿登裡羅汩沒密施合俱錄毘伽懷建可汗以衛尉少卿王端章充使)

<이상 자치통감>

857

당 선종 대중 11(857)

10월 임신일(8)-이후, 왕단장은 회골가한을 책립하려고 하였으나 길이 흑거자(黑車子)에게 막혀 도착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신묘일(27)에 왕단장을 깎아내려 하주사마로 삼았다.(王端章冊立回鶻可汗道為黑車子所塞不至而還辛卯貶端章賀州司馬)

<자치통감>

858

(기록없음)

859

(기록없음)

860

(기록없음)

866

의종(懿宗: 17대 군주) 시기에 대추(大酋) 복고준이 북정(北庭)에서 토번을 격파해 논상열을 죽이고 서주(西州)와 윤대(輪臺) 등의 성을 모두 얻게 되자 달간 미회옥(達干米懷玉)을 시켜 조정에 와 포로를 바치며 책봉을 청했고 [황제가] 조칙을 내려 허가해주었다. 그 이후에 왕실이 어지럽게 되자 특산물을 바치며 조회에 참석하지 않게 되면서 사서에 그에 대한 기록에 없게 되었다.

<신당서 회홀전>

 

당 의종 함통 7(866) 2, 귀의(치소는 사주-沙州)절도사 장의조가 주문을 올려서 북정에 속한 회골의 ()고준(固俊)이 서주, 북정, 윤대, 청진 등의 성에서 승리하였다고 하였다.

<자치통감>

 

(당 의종 함통 7-866) 10사주 (절도사) 장의조가 주문을 올려서회골 수령 복고준과 토번 대장 상공열이 교전하여번구(토번)가 대패하고상공열이 참수되어머리를 경사(서울)에 전하였다고 하였다.

원문): 十月沙州張義潮奏差迴鶻首領僕固俊與吐蕃大將尚恐熱交戰大敗蕃寇斬尚恐熱傳首京師<구당서 의종본기>

867

(기록없음)

902

소종(昭宗:19대 군주)이 봉상[](鳳翔縣: 치소, 지금 섬서성 봉상현)에 행행했는데, 영주절도사(靈州節度使) 한손이 표를 올려 [감주]회골이 어려움을 구하러 군대를 이끌고 오기를 청한다고 하자 한림학사 한악이 말했다. “회골은 나라의 원수가 된 지 오래되었습니다. 회창 이래로 변경을 엿보자 새들이 부화를 하지 못했고 수확도 하지도 못했습니다. 지금 저희가 어려운 것을 틈타 엿보고 있으니 열어주시면 안됩니다.” 결국 막고 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나라는 [군대를] 일으키지 않고 때때로 옥과 말을 변경에 있는 주[邊州]의 시장에 [와서] 거래를 했다고 한다.<신당서 회홀전. >

 

당 소종 천복 2(902) 4월 신축일(25), 회골에서 사신을 파견하여 들어와서 공물을 바치고 군사를 발동하여 환난을 당한 곳으로 가게 해 달라고 요청하자, 황상은 한림학사승지 한악에게 명령하여 대답하는 서신을 쓰게 하여 그것을 허락하게 하였다.

을사일(29)에 한악이 말씀을 올렸다.“융적의 짐승같은 마음은 의탁하거나 믿을 수 없습니다. 저들은 국가의 사람과 물자의 화려함이 쓰러지고 성읍이 황폐하여 손상됐고 갑병은 노쇠하고 낡아진 것을 보고서 반드시 중국을 경시하는 마음이 있게 되어 그들의 탐욕을 일으키게 될 것입니다. 또 회창(당 무종 시기) 이래로 회골은 중국에 의해 격파되었는데 그들이 위기를 타고서 원한을 보복할까 두렵습니다. 가한에게 내린 서신에서는 의당 작고 작은 도적이므로 환난을 당한 곳으로 갈 필요가 없다고 유시하시고 겉으로는 그들의 뜻에 부끄럽다 하며 실제로는 그들의 음모를 저지하십시오그의 말에 따랐다.<자치통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