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책봉의 진실(37)

상 상 2017. 1. 20. 18:46

책봉의 진실(37)

 

이상의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책봉이 있었던 회홀의 가한> - 1

가한

있었던 일

2

갈륵가한=

영무위원비가궐가한

안록산의 난에 당이 장안과 낙양을 빼앗기자 회홀이 군사를 동원하여 장안과 낙양을 되찾아 주었다.(7579월과 10).

 

회흘이 동경(낙양)에 와서 적을 평정했다고 마음대로 행동하며 잔인하게 굴자 백성들이 두려워하며 모두 성선사와 백마사의 두 전각에 올라가 대피했다. 회흘이 마음대로 두 전각에 불을 질러 다치고 죽은 사람이 만을 헤아렸고, 열흘이 지나도록 불이 꺼지지 않았다.(75710)

 

회흘 영무위원비가가한(2대 가한)을 책립하기 위해 황제가 선정전에서 한중왕 이우에게 책명을 주었다.(7587)

 

() 숙종이 친딸 영국공주를 시집 보내기 위해 함양 자문역(礠門驛)에 도착하자 영국공주가 울면서 말했다. “나라의 일이 중요하니 죽어도 또한 아무런 한이 없습니다.” 황제도 울면서 돌아왔다.(7587)

 

책봉과 영국공주의 혼례가 동시에 있었음.

3

모우가한=

등리(登利)가한=영의건공가한

사사명이 15만 군대로 당나라 60만 대군과 싸워 대승을 거둠

(7593)

 

회홀이 평주 석성현(하북성 난현-난하 서변)까지 쫓아가 사사명의 난을 평정함(7631)

 

회홀 가한을 책봉하여 힐돌등밀시합구록영의건공비가가한(頡咄登蜜施合俱錄英義建功毗伽可汗:3대 가한)이라고 하였다.

(76371)

 

홍려시(鴻臚寺)에 있었던 회흘[사람]이 마음대로 방(: 주택 구역)의 저자(시장)로 나가 백성의 자녀들을 잡아갔는데, 담당 관리가 [그를] 되찾아 돌아오려고 하자 [회흘이] 화를 내며 [관리를] 구타하고 3백 명의 기병을 이끌고 금광문(함광문)과 주작문을 범하기도 했다. 이날 황성의 여러 대문들은 모두 닫고 황제가 중사(中使: 환관) 유청담을 시켜 [회흘을] 위무하게 하자 멈추었다.(7711)

 

회흘이 홍려시를 나아가 방의 저자에서 난동을 부려 장안령(長安令: 장안 시장) 소열을 함광문이 있는 거리에서 쫓아냈고, []열이 타던 말마저 빼앗아 가버렸다. []열은 몸만 빠져 도망 왔고 관리들도 제지할 수 없었다.(7727)

 

회흘 140명이 자기 나라로 돌아가는데, 재물이 천여 대의 수레나 되었다. 회흘이 [자신들의] 공적을 믿고 건원 년간(758~759) 이후 여러 번 사신을 보내 말과 비단을 바꾸었고, 매년 와서 거래를 하는데 말 한 필에 비단 44필을 바꾸었고 거래되는 말이 수만 필에 이르렀다. 그 사자가 홍려시에 계속 머물면서 돌보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고, 회흘은 비단을 얻어도 만족하지 않았으며 우리도 산 말이 쓸모가 없어 조정에서 몹시 고통스러워했다. 이때 [황제가] 특별히 조칙을 내려 후사해 보내 넓은 은혜를 보여주면서 또한 [그들로 하여금] 부끄러워하게 하고자 했다. 이달에 회흘이 사자 적심(赤心)을 시켜 말 1만 필을 이끌고 와 거래하기를 원했는데, ()대종이 말 값이 조부(租賦)에서 나오니 백성들에게 가중한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관리에게 수입을 따져 6천 필만 거래하게 했다.

(77311)

 

회흘이 대낮에 동시(東市)에서 사람을 죽이자 시장 사람들이

[그를] 잡아 만년현(萬年縣: 장안 동북)[의 옥사]에 잡아두었다. 그 수령 적심이 [이 소식을] 듣고 홍려시에서 말을 달려 [만년]현의 옥사로 들어가 죄인을 빼앗아 나가며 옥을 지키던 관리를 상하게 했다.(77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