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명이 15만 군대로 당나라 60만 대군과 싸워 대승을 거둠 (759년 3월) 회홀이 평주 석성현(하북성 난현-난하 서변)까지 쫓아가 사사명의 난을 평정함(763년 1월) 회홀 가한을 책봉하여 힐돌등밀시합구록영의건공비가가한(頡咄登蜜施合俱錄英義建功毗伽可汗:3대 가한)이라고 하였다. (763년 7월 1일) 홍려시(鴻臚寺)에 있었던 회흘[사람]이 마음대로 방(坊: 주택 구역)의 저자(시장)로 나가 백성의 자녀들을 잡아갔는데, 담당 관리가 [그를] 되찾아 돌아오려고 하자 [회흘이] 화를 내며 [관리를] 구타하고 3백 명의 기병을 이끌고 금광문(함광문)과 주작문을 범하기도 했다. 이날 황성의 여러 대문들은 모두 닫고 황제가 중사(中使: 환관) 유청담을 시켜 [회흘을] 위무하게 하자 멈추었다.(771년 1월) 회흘이 홍려시를 나아가 방의 저자에서 난동을 부려 장안령(長安令: 장안 시장) 소열을 함광문이 있는 거리에서 쫓아냈고, [소]열이 타던 말마저 빼앗아 가버렸다. [소]열은 몸만 빠져 도망 왔고 관리들도 제지할 수 없었다.(772년 7월) 회흘 140명이 자기 나라로 돌아가는데, 재물이 천여 대의 수레나 되었다. 회흘이 [자신들의] 공적을 믿고 건원 년간(758~759) 이후 여러 번 사신을 보내 말과 비단을 바꾸었고, 매년 와서 거래를 하는데 말 한 필에 비단 44필을 바꾸었고 거래되는 말이 수만 필에 이르렀다. 그 사자가 홍려시에 계속 머물면서 돌보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고, 회흘은 비단을 얻어도 만족하지 않았으며 우리도 산 말이 쓸모가 없어 조정에서 몹시 고통스러워했다. 이때 [황제가] 특별히 조칙을 내려 후사해 보내 넓은 은혜를 보여주면서 또한 [그들로 하여금] 부끄러워하게 하고자 했다. 이달에 회흘이 사자 적심(赤心)을 시켜 말 1만 필을 이끌고 와 거래하기를 원했는데, (당)대종이 말 값이 조부(租賦)에서 나오니 백성들에게 가중한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관리에게 수입을 따져 6천 필만 거래하게 했다. (773년 11월) 회흘이 대낮에 동시(東市)에서 사람을 죽이자 시장 사람들이 [그를] 잡아 만년현(萬年縣: 장안 동북)[의 옥사]에 잡아두었다. 그 수령 적심이 [이 소식을] 듣고 홍려시에서 말을 달려 [만년]현의 옥사로 들어가 죄인을 빼앗아 나가며 옥을 지키던 관리를 상하게 했다.(775년 9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