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봉의 진실(35)
위 자료를 보면 회골의 멸망은 크게 다음 두가지 단계를 밟아 멸망하고 있다.
① 15대 오개가한의 죽음과 16대 알념가한의 즉위
846년 7월 임인일(3일)-이후, 회골의 오개가한(15대 가한) 무리가 조금씩 항복하여 흩어지며 얼고 굶주려 죽게 되자 그 나머지는 3천명에 이르지 아니하였는데 국상 일은철이 오개가한을 금산에서 죽이고 그의 동생 특륵 알념을 세워서 가한으로 삼았다. (당은 끝까지 오개가한을 책봉하지 않았다.)
847년 알념가한(遏捻可汗)의 남은 부락이 5천 명이었는데, 해(奚)의 대추(大酋) 석사랑에게 의지해 살고 있었다. 대중(大中) 초기에 [장]중무가 해를 토벌해 격파하자 회골이 점차 줄어 없어졌다.
② 회골(회홀)의 멸망
848년 정월 을축일(28일) 이후, 회골의 알념가한(16대 가한)은 해왕 석사량에게 공급되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장중무가 해족 무리를 대파하게 되자 회골은 먹을 것을 얻을 곳이 없어 날마다 더욱 줄어들고 흩어져서 이에 이르러서는 남아있는 귀인이하는 500명이 되지 않았고 실위부락에 의탁하고 있었다. 사자가 들어와서 새해를 축하하고 나서 유주를 지나가는데 장중무는 돌아가 알념 등을 잡도록 시켰고 알념은 그 소식을 듣고 밤에 처 알록과 아들 특륵 독사 등 9명의 기병과 더불어 서쪽으로 달아났고, 나머지 무리는 그 뒤를 좆았으나 미치지 못하자 서로 크게 통곡하였다.
실위는 남은 회골의 무리를 나누어 일곱으로 하고, 일곱 성(姓)의 부락이 공동으로 이들을 나누었으며 사흘을 머문후 할힐사가 그 재상인 아번을 파견하여 여러 호족의 병사들을 7만이라고 하면서 인솔하고 가서 회골을 빼앗도록 하니 실위를 대파하고 회골의 나머지 무리를 다 거두어 사막 북쪽으로 돌아갔다.
아직 있던 몇 개의 장은 몰래 산림속에 숨어서 여러 호족을 노략질하고 훔치고 있었으며 그 별부인 방륵(17대 가한)은 예전에 안서에 있었는데 역시 스스로 가한으로 칭하며 감주에 살면서 사막의 서쪽에 있는 여러 성을 총괄하였으나 종족과 부락이 작고 허약하여 때때로 들어와 물건을 바치고 알현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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