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2 | [장경] 2년(822) 2월 회흘에 말 값으로 비단 5만 필을 내려주었다. 3월에 또 말 값으로 비단 7만 필을 내려주었다. 이달에 배도가 유[주](幽州)와 진[주](鎭州: 치소, 지금 하북성 정정현)의 반란을 진압하려고 했는데, 회골이 군대를 이끌고 [배]도와 함께 토벌하기를 청했다. 조정의 의론에서 보응 년간 초기에 회흘이 두 서울을 수복한 공을 믿고 교만하게 굴어 행동을 제지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모두가 불가하다고 하자 결국 사신에게 명령해 회흘에게 멈추고 돌아가라고 명령을 했다. [회흘이] 마침 이미 풍주 북쪽 경계에 와있어서 멈추라는 지시에 따르지 않았다. [황제가] 조칙을 내려 비단을 7만 필을 징발해 주라고 하자 비로소 돌아갔다. <구당서 회홀전> 장경 2년(822) 윤10월 [좌]금오[위]대장군 호증, 부사 광록경 이헌, 혼례사 위위경 이예, 부사 종정소경 이자홍, 판관우부랑중 장민, 태상박사 은유가 태화공주를 보내드리고 회흘에서 돌아와 모두 말했다. “이전에 공주가 회흘 아장에서 여전히 몇 일 더 가야할 만큼 떨어져 있을 때 가한이 수백 기를 보내 공주와 먼저 다른 길을 가겠다고 청했습니다. 호증이 ‘그렇게 할 수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회흘사신이 ‘이전에 함안공주가 왔을 때에도 화문(花門)에서 수백 리나 떨어진 곳에서 먼저 갔는데, 지금 어찌 홀로 나의 말에 거부하는가?’라고 했습니다. [호]증이 ‘우리 천자께서 조칙을 내려 공주를 가한에게 보내드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어찌 가한을 만나지도 않고 먼저 갈 수 있겠는가?’라고 했습니다. 이에 회흘 사자가 멈추었습니다. 이미 [공주가] 회흘의 아장에 도착하자 바로 좋은 날을 골라 공주를 회골 가돈으로 책봉했습니다. 가한이 먼저 누대의 동쪽에 올라 앉아 누대 아래에 펠트로 된 천막을 설치하고 공주를 살게 한 다음에 여러 호인의 추장[群胡主]을 시켜 공주에게 회골의 법도를 가르쳐주었습니다. 공주가 비로소 당나라 옷을 벗고 돌궐의 옷을 입고 한 명의 부인이 시봉을 받아 누대 앞으로 나아가 서쪽을 향해 절을 했습니다. 가한이 앉아서 보다가 공주가 다시 서쪽으로 향해 절을 한 다음에 다시 펠트 천막 안으로 들어가 이전의 옷을 벗고 가돈의 옷을 입었는데 넓은 소매와 큰 상의가 모두 붉은 색이고 금으로 장식한 관은 마치 뿔이 앞을 가리켰고, 그 다음에 펠트 천막에서 나와 가한을 향해 처음의 예처럼 절했습니다. 회흘이 먼저 큰 수레를 구부려 전면에 작은 자리를 마련하고, 돕는 사람이 공주를 끌어와서 수레에 태우고 회흘 구성이 서로 그 수레 끄는 것을 맡아 해를 따라 아장에서 오른쪽으로 아홉 바퀴를 돈 다음 공주가 바로 수레를 내려 누대에 올라 가한과 함께 동쪽을 보고 앉았습니다. 이로부터 신하들로부터 알현을 받고 또한 가돈에게 절을 했습니다. 가돈이 자기의 아장을 갖고 두 명의 상(相)을 아장 안으로 출입하게 했습니다. [호]증 등이 장차 돌아오려고 할 때 가돈이 아장 안에서 연회를 베풀어주니 머무르면서 하루도 넘게 울었는데, 때문에 가한이 당나라 사신에게 많은 예물을 주었습니다.” <구당서 회홀전> [장경 2년(822) 2월 회흘 말 값으로 비단 5만 필을 내려주었다. [3월] 이때에 배도가 바야흐로 유[주](幽州)와 진[주](鎭州: 치소, 지금 하북성 정정현)를 정벌하려고 했는데, 회골의 거장(渠將) 이의절이 이끄는 3천명의 군대가 천자를 도와 하북(河北: 황하가 만곡한 이북의 땅)을 평정하겠다고 하자 논자가 종전의 환란을 거울로 삼아 [회골의 출병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군대가 풍주(豐州: 치소, 지금 내몽고자치구 오랍전기 서북 소소향 토성촌의 옛 성?)에 오니 사자에게 후하게 재물을 내려주어 바로 가게 했다. <신당서 회홀전> [장경] 2년(822) 2월에 사신을 보내 경계를 정할 것을 청했다. 6월에 다시 사신이 입조했다. 염주에서 주를 올려 말하기를, “토번의 천여 명이 영무의 영내로 들어와서 병사를 보내 쫓아내고 진출을 저지했습니다.”라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당항에 국서를 보내려던 토번인 150명을 포로로 잡았습니다.”라고 하였다. 같은 달에 유원정이 토번에 사신으로 갔다 돌아와서 주를 올려 말하기를, “지난 4월 24일에 토번 [찬보의] 아장(牙帳)에 도착했으며, 5월 6일에 회맹을 마쳤습니다.”라고 하였다. 처음에 (유)원정이 토번에 왕래할 때는 하주(河州)를 경유하였는데, 그 도원수(都元帥) 상서령 상기심아가 말하기를, “회흘은 작은 나라이다. 우리가 병신년에 대막(大漠)을 건너 정벌하려고 추격하였는데, 성곽에서 이틀거리에 다다랐을 때, 바로 정벌해도 될 정도였으나, 본국의 찬보가 승하하셨음을 듣고 귀환했다. 회흘의 약함이 이와 같은데, 당(唐)의 대우가 우리에게 하는 것보다 후하니 그것은 왜인가?”라고 하여, (유)원정이 말하기를, “회흘은 우리에게 어려움이 있었을 때 구해준 공훈이 있으며, 또한 일찍이 우리 국토를 조금도 침범하지 않았으니 어찌 후하게 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그 때 (유)원정이 왕래할 때는 황하의 상류를 건넜는데, 홍제교에서 서남으로 2천여 리이며, 그 물이 매우 얕고 강폭이 좁아서 봄이면 옷을 걷어 걸어서 건넜고, 가을과 여름이면 배를 타고 건넜다. 그 남쪽 3백여 리에 산이 세 개 있는데, 산의 모양이 세 발 달린 평평한 냄비 같았고, 황하의 근원이 그 사이에 있어 물이 매우 맑고 차가왔다. [그러나] 여러 물길을 거치면서 물의 색이 붉게 되고, 계속해서 여러 물줄기가 흘러들어 점차 황탁해진 것이다. 또한 [황하의] 근원에서 서쪽으로 토번 열관(列館: 객관)과의 거리는 대략 4역(驛)에 해당되었는데, 매 역은 약 2백여 리에 해당된다. [황하의 근원에서] 동북으로 가면 막하연적미에 이르는데 폭이 50리이며, 남쪽으로 점차 협소해지고, 북쪽으로는 사주(沙州)의 서쪽에 이른다. 이윽고 남쪽으로 토(욕)혼국(吐渾國)으로 흘러들어가고, 이로부터 물줄기가 땅 밑으로 숨어들어, 예부터 이를 적미(磧尾)라고 했다. 이곳의 지리를 살펴보면, 대략 검남의 정서(正西)에 해당된다. 유원정이 처음 찬보를 민구로천에서 만났는데, [그곳은] 찬보의 하영지였고, 그 하천은 라사천(邏娑川:라싸천) 남쪽 백 리에서 장하(臧河)로 흘러들어갔다. 당시 토번이 사신 논실낙식 등을 보내 유원정을 따라 입조하여 사은하였는데, 태복소경 두재에게 명하여 토번에 사신으로 가서 답방하게 했다. <구당서 토번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