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봉의 진실(12)
당나라가 왜 이렇게 했는가 하면 회홀이 북정도호부를 구원하다가 토번에게 패배하여 부도천까지 빼앗긴 뒤 북정도호부와 영주에서 일부 승리를 한 것을 당나라가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나라가 토번의 공격을 막으려고 염주성을 쌓고 남조왕 이모심까지 억지로 동맹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그런데 이 동맹은 운 좋게도 크게 성공하였다.
구당서 토번전을 보면,
라고 되어 있어 남조가 토번을 크게 격파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당나라의 11시 방향인 북정도호부를 토번이 공격하자 이를 구원하려고 나선 회홀이 토번에게 대패한 뒤 부분적으로 승리하였고,
당나라의 9시 방향인 염주에서는 당나라가 성을 재보수하며 쌓아 토번의 공격에 대비하였으며, 당나라의 7시 방향에서는 당나라가 남만 왕 이모심을 억지로 동맹으로 끌여들여 토번을 격파하였다. 이처럼 당나라는 토번과의 전쟁을 광대한 지역으로 펼쳐야 할 만큼 토번에게 수세에 몰려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795년 6월(혹은 5월)에 회흘의 회신가한을 책명한 것이다.
그러면 이때의 책명은 무엇인가? 이것은 동맹의 유지 또는 지속에 해당한다고 봐야한다. 또한, 이때에도 기본적으로 회홀과 당의 관계는 역시 회홀이 당을 구원해주는 관계였다.
당의 동맹 유지에 필요한 책봉, 회홀이 당을 구원(혹은 지원)하는 관계에서 나온 책명이니 회홀이 우위에 있는 관계이다. 그러므로 회홀이 당나라의 종속국이라거나 재배통치 하에 있었다는 말은 있을 수도 없고 있지도 않은 이야기이다.
즉『책명이란 종속국이거나 지배통치 하에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고 하는 말하는 것은 명백한 거짓말이며 사기이다.
6) 회홀의 9대 가한인 등리가한의 책명
그 다음, 회홀의 9대 가한 책봉에 대해 알아보자. 이에 대해서 구당서 회홀전에는 책봉했다는 기록이 없다.
그리나 신당서 회홀전에는
라고 함으로써 책명 기록이 있다
그리고 자치통감에는
라고 되어 있어 책명이 805년 11월임을 말하고 있다.
구당서 회홀전에는 회홀의 9대 가한을 책명했다는 기록이 왜 없고 신당서 회홀전과 자치통감에는 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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