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와 당의 관계-239,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83, 5. 토번의 침공-35)
차례
가.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상)
2. 구당서 토번전(하)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10. 구당서 발해전
11. 신당서 발해전
12. 구당서 숙종본기
13. 구당서 회홀전
14. 신당서 회골전
15. 구당서 남조전
16. 신당서 남조전
17. 구당서 신라전
18. 신당서 신라전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나.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6. 토번의 침공 이후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8. 황소의 난
9. 절도사의 시대
10. 당의 멸망
다. 통일신라와 당
1. 통일신라 이후의 당나라 약사
2. 신구당서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3.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4. 사료를 통합해서 본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
나.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1) 연표
1) 연표- 35
년 |
기 사 |
848 |
[대중] 2년(848) 봄에 남아 있던 명왕(名王), 귀신(貴臣) 5백 명 이하만이 실위에 의지했다. 장중무가 정월을 쇠기 위해 실위가 유주를 통과하려고 할 때 오히려 [그들에게] 본국으로 돌아갈 것으로 명령해 [특근]알념 등을 유주로 오게 했다. [특근]알념 등이 두려워하며 그 밤에 아내 갈록(葛祿), 아들 특근독사(特勤毒斯) 등 아홉 기와 함께 서쪽으로 도망갔는데, 나머지 백성들도 도망하다 따라가지 못하게 되자 회골 여러 명의 상과 달관, 그리고 노약자들이 크게 울었다. [이에] 실위가 회골의 나머지 백성을 일곱으로 나누어 일곱 개의 실위 부락으로 하여금 각각 하나씩 나누어 갖게 했다. 사흘 밤이 지나 힐알사 상(相) 아파(阿播)가 여러 종족의 병사 7만을 이끌고 서남쪽으로 천덕[군]의 북쪽 경계까지 와서 [특근]알념과 여러 회골의 [백성들을] 거두고 실위를 크게 격파했다. 회골 중에서 실위에 있었던 사람들을 아파가 모두 잡아 고비 북쪽으로 돌아 가버렸다.
그 밖에도 아직 여러 장이 남아서 여러 산 깊은 숲 속에 흩어져 숨어 다른 종족들을 도둑질하고 있다가 모두 서쪽으로 안서[에 있는] 방[특]륵(龐特勒)에게 가고자 했다. [이 때] 방[특]륵은 이미 가한을 자칭하고 고비 서쪽의 여러 오아시스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의 후사는 임금이 약하고 신하들이 강하게 되어 감주(甘州: 치소, 지금 감숙성 장액에 살았지만 다시 옛날과 같은 번성함을 되찾지 못했다.
지금에 이르러서도 [그들이] 사신을 보내 조정에 들어와 옥과 말과 같은 두 가지 종류와 그 땅에서 생산된 물품을 바치고 교역을 하고 돌아갔다.
<구당서 회홀전 끝.> |
849 |
대중 3년(849) 봄에 재상 상공열이 동도절도사(검남동도절도사)를 죽이고, 진(秦), 원(原), 안락(安樂) 등 3개 주(州)와 석문(石門), 목협(木硤) 등 7개 관(關)으로 통호하기를 청하니, 경원절도사 강계영이 이를 듣고, 태복경 육탐에게 명하여 가서 일을 처리하게 했다. 그 해 7월에 하(河), 농(隴)의 장로들이 나이 많고 적은 사람 천여 명을 데리고 경사(장안)에 이르니, 황상이 직접 연희루(延喜樓)에 납시어 그들을 보았다. 이에 환호하고 춤추지 않는 자가 없었으며, 또한 머리를 풀어헤치고, 거리에서 모자와 허리띠를 서로 잡아당기니, 그 후에 황상이 명하여 좋은 곳을 선정하여 [이들을] 그곳에 살도록 했다. 보는 자들이 모두 기뻐하며 만세를 외쳤다.
<구당서 토번전 끝.> |
849 |
대중 3년(849) (상)비비(婢婢)가 하원에 주둔하였는데, 상공열이 하(河)를 건너고자 한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그를 공격하였으나 상공열에게 패했다. (상)비비는 정예부대를 이끌고 교량을 지켰으나 역시 이기지 못하여 다리를 불태우고 돌아왔다. 상공열은 좁은 길을 통해 계정령관(雞頂嶺關)으로 나와 협곡에 다리를 만들어 (상)비비를 공격하였다. 백토령(白土嶺: 청해성 서녕 남쪽)에 이르러 [상비비의] 장수 상탁라탑장을 패퇴시키고 이우협(犛牛硤)으로 들어가 싸웠다. (상)비비의 장수 촉로공력이 산협을 끼고 진지를 고수하여 상공열을 곤궁하게 만들고자 하였는데, 대장 마리비자가 따르지 않자 병이 있다고 사직하고 먼저 돌아갔다. 마리비자가 급히 상공열을 공격하였으나 그 일전으로 전사하였다. (상)비비는 군량이 다해 무리를 이끌고 감주(甘州) 서쪽 변경으로 향했고, 탁발회광에게 지키게 했는데 상공열 휘하의 다수가 그에 귀부하였다.<신당서 토번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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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공열이 선주(鄯), 곽주(廓), 과주(瓜), 숙주(肅), 이주(伊), 서주(西) 등지를 크게 노략질하였는데, 지나가는 곳마다 포로를 삼거나 살륙하니, 시신이 어지러이 쌓여 있었고, 휘하 병사들은 안으로 원망하면서 모두 그를 제거하고자 하였다. 이 때 [상공열은] 거짓으로 장차 당의 병사 50만을 청하여 이 난을 수습할 것이라고 하고, 위주(渭州)를 점거하여 찬보에 책립되기를 원하여, 표문(表)을 받들어 당에 귀부하였다. 선종(宣宗)은 조서를 내려 태복경 육탐에게 부절을 가지고 가서 [상공열을] 위로하도록 하고, 경원(涇原), 영무, 봉상, 빈녕, 진무(振武) 등의 병사로 하여금 [상공열을] 도와 영접하도록 했다. 상공열이 이미 도착하자 상서좌승 이경양에게 조서를 내려 그가 원하는 것을 묻게 했다. 상공열은 매우 오만하여 하위절도사가 되고자 하였으나 황제는 허락하지 않았다. 귀환하는 길에 함양교를 지나며 탄식하며 말하기를, “내가 거사를 일으키고 오직 바란 것은 이 강을 건너 당과 경역을 나누고자 했을 뿐이다.” 이에 다시 낙문천(落門川)으로 향해 흩어진 병졸을 거두어 장차 변경을 침범하려고 하였는데, 마침 오랜 비를 만나 양식이 끊겨 상공열은 곽주(廓州)로 도주하였다.<신당서 토번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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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봉상절도사 이빈이 청수(淸水)를 회복했다. 경원절도사 강계영이 원주(原州)를 회복하고, 석문 등 6개의 관(關)을 얻었으며, 사람과 가축 수만을 얻었다. 영무절도사 이흠이 안락주(安樂州: 영하성 중위현)를 얻으니 조서를 내려 이를 위주(威州)라고 했다. 빈녕절도사 장흠서가 소관을 회복했다. 봉상(鳳翔)이 진주(秦州)를 아울렀다. 산남서도절도사 정애가 부주(扶州)를 얻었다.<신당서 토번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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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초에 태종이 설인고를 토벌하여 농(隴) 위쪽의 땅(농서-隴西를 뜻한다)을 얻었고, 이궤를 포로로 삼아 양주(涼州)를 얻었으며, 토욕혼, 고창을 격파하여 4진(四鎭)을 개척했다. 이어서 현종은 황하의 적석, 완수 등의 군(軍)을 아울렀으니, 중국은 40년 동안 척후나 경비를 두지 않았다. 윤대와 이오에 둔전을 개간하니 벼와 콩의 경작지가 넓게 펼쳐졌다. 개원문 위에 쓰기를 “서쪽 끝까지 길은 9천 9백 리”라고 하여, 변경을 지키는 자들에게 만 리 까지 행할 일이 없음을 보였다. 건원(乾元) 이후, 농우, 검남, 서산 3주(三州) 7관(七關)의 군진(軍鎭) 감목(監牧) 3백 곳을 모두 잃었다. 헌종이 항상 천하도(天下圖)를 열람하곤 했는데, 하황(河湟) 일대의 옛 영역을 보고, 성난 모양으로 이들을 경략하고자 하였으나 이를 돌볼 겨를이 없었다. 이 때 여러 신하들이 상주하여 말하기를, “왕이 된 자는 공을 세우고 업을 이뤄야 세상에 드러내 현양할 일이 있는 것입니다. 지금 한 명의 병사도 내지 않고, 피 흘리지 않으면서, 하(河), 황(湟)이 스스로 귀속된다면, 천자께 존호를 바치도록 청하겠습니다.”하자, 황제가 말하기를, “헌종은 일찍이 하(河), 황(湟)을 걱정하셨으나 대업을 이루지 못하시고 승하하셨다. 지금 조종의 업적을 좇아 술회하는데, 그 의논이 순종과 헌종의 시호(謚號)를 논하는 데에 이르렀으니, 자랑하여 후세에 드러내게 하라”하고, 또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짐은 잠시 백성을 쉬게 할 것이니, 산외(山外: 사천성 성도 서부에 연접한 산악지대, 현재 사천성 송반현 첩계영의 서쪽) 여러 주는 후에 경영할 것을 기다려라.”<신당서 토번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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