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240,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84, 5. 토번의 침공-36)

상 상 2016. 6. 15. 21:12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240,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84, 5. 토번의 침공-36)

 

차례

 

.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

2. 구당서 토번전()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10. 구당서 발해전

11. 신당서 발해전

12. 구당서 숙종본기

13. 구당서 회홀전

14. 신당서 회골전

15. 구당서 남조전

16. 신당서 남조전

17. 구당서 신라전

18. 신당서 신라전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6. 토번의 침공 이후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8. 황소의 난

9. 절도사의 시대

10. 당의 멸망

 

. 통일신라와 당

1. 통일신라 이후의 당나라 약사

2. 신구당서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3.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4. 사료를 통합해서 본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

 

 

.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1) 연표

 

1) 연표- 36

기 사

851

이듬해(대중 5, 851) 사주(沙州)의 수령 장의조(張義潮)가 과주(), 사주(), 이주(), 숙주(), 감주() 11주의 지도를 바쳤다. 당초 장의조는 몰래 영웅호걸과 결탁하여 당에 귀부하였는데, 하루는 여러 무리가 무장하고 주성의 문 앞에서 함성을 지르고 [소란을 피우자], 한인(漢人)들이 모두 이들을 도왔는데, [성문을] 수비하던 토번의 군졸이 놀라 달아났고, 드디어 사주의 일을 [장의조가] 맡아 보게 되었다. [장의조는] 무기, 군수품 등을 잘 정비하였고, 한편으로 경작하고 한편으로 싸워, 그 나머지 주()들도 모두 회복하였다. [또한 장의조는] 매우 빼어나고 충성스러운 부장 열 명에게 표문을 몸에 지니고 동북으로 가서 천덕성(天德城: 오르도스 북쪽 황하 북안에 위치)에 이르도록 했는데, 방어사 이비가 [이 사실을 조정에] 알렸다. 황제는 그 충성심을 가상히 여겨, 사신에게 조서를 가지고 가서 접수하고 위로하도록 명하니, 장의조는 사주방어사에 발탁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귀의군(歸義軍)이라 칭하고, 곧 절도사로 삼았다. 그 후 하주(), 위주(渭州)의 토번 장군 상연심이 자국이 패망함에 따라 역시 와서 우호관계를 맺었다. 진주자사 고병이 상연심과 혼말부(渾末部) 만 장()을 꾀어서 항복시키니, 2(하주, 위주)를 수복하였고, 상연심은 무위장군에 임명하였다. 고병이 봉림관(鳳林關: 감숙성 임하현 서쪽)을 수복했고, 상연심을 하주, 위주 등지의 도유혁사(都游弈使)로 삼았다.<신당서 토번전>

847

~

859

대중(大中, 847~859, 唐 宣宗)연간에 이탁(李琢)이 안남경략사가 되었는데, [통치가] 가혹하고 부정이 심하였으니, 사욕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소금 1()를 소 한 마리와 바꾸어 주니, 이인(夷人)들이 감당하지 못하여 남조(南詔)의 장수 단추천(段酋遷)이 세를 결집하여 안남도호부를 함락시키고, ‘백의몰명군(白衣沒命軍)’이라 자칭하였다. 남조는 주노구저(朱弩佉苴) 3천 인을 출동시켜 [그곳의] 수비를 도왔다. 그러면서도 [남조는] 조공이 오히려 해마다 이르렀고, 사행(使行)에 따라오는 자도 많아졌다. 두종(杜悰)이 서천(西川)으로부터 입조하여 표하기를, 만의 시중들을 많이 들이지 말라 하였다. 풍우(豐祐)가 노하여, 바로 질자(質子)를 거두겠다고 거만하게 말하였다. 때마침 () 선종(宣宗)이 붕어하여, 사자가 가서 죽음을 알렸다. 이 때 풍우 또한 죽어서 탄작(坦綽) 추룡(酋龍)이 즉위하였다. 추룡은 조정이 문상하지 않은 것과 또 조서를 이전 왕에게 내린 것에 화가 나서, 거친 음식으로 사자를 대접하고 돌려보냈다. 마침내 황제를 참칭하고 건극(建極)이라는 연호를 세워 대예국(大禮國)을 자칭하였다. () 의종(懿宗)은 그 명칭이 현종(玄宗)의 휘()에 가깝다고 하여 조공관계를 끊었다. 이에 [남조는] 파주(播州: 귀주성 준의시)를 함락시켰다. 안남도호 이호가 무주(武州: 광서 장족자치구 의주시?)에 주둔하였는데, 함통(咸通, 당 의종) 원년(860)에 만의 공격을 받자 주를 버리고 달아났다.

천자는 이호를 해임하고 왕관(王寬)에게 대신하게 하였다. <신당서 남조전>

860

[의종(懿宗)] 함통(咸通) 연간(860~874), 그들(거란)의 왕인 습이지(習爾之)

두 차례 사자를 보내 들어와 알현하였고 부락은 점점 강성해졌다. 습이지가 죽자 족인(族人)인 흠덕(欽德)이 그의 뒤를 이었다.<신당서 거란전>

861

이듬해(861) 옹관(邕管: 광서 장족자치구 옹령?)을 공격하니 경략사 이홍원이 병사가 적어 막지 못하고 만주(巒州: 광서 장족자치구 횡현 서북 만성진 일대)로 달아났다. 남조 또한 군대를 이끌고 가버렸다. 조서를 내려 전중감 단문초를 경략사로 삼았는데, [단문초가] 자주 규정을 고치니 무리들이 좋아하지 않아, 호회옥(胡懷玉)으로 이를 대신하게 하였다. 남조는 변방 사람들이 심하게 곤궁하여 약탈하여도 얻을 것이 없음을 알고 침입하지 않았다. 두종(杜悰)이 국정을 담당하게 되어 황제를 위하여 계책을 내었는데, 사자를 보내 조문하여 은혜와 신의를 보이고 아울러 표신(驃信)에게 이름이 묘휘(廟諱)를 범했기 때문에 책명을 행할 수 없으니 반드시 이름을 바꾸어야 책봉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조를 내리자고 하였다. 황제가 이에 좌사랑중 맹목에게 명하여 절을 가지고 가게 하였으나, 마침 남조가 수주(雟州)를 함락시켰으므로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신당서 남조전>

 

함통 2(861), 장의조가 양주(涼州)를 봉헌하며 귀부했다. <신당서 토번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