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237,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81, 5. 토번의 침공-33)

상 상 2016. 6. 8. 18:20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237,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81, 5. 토번의 침공-33)

 

차례

 

.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

2. 구당서 토번전()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10. 구당서 발해전

11. 신당서 발해전

12. 구당서 숙종본기

13. 구당서 회홀전

14. 신당서 회골전

15. 구당서 남조전

16. 신당서 남조전

17. 구당서 신라전

18. 신당서 신라전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6. 토번의 침공 이후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8. 황소의 난

9. 절도사의 시대

10. 당의 멸망

 

. 통일신라와 당

1. 통일신라 이후의 당나라 약사

2. 신구당서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3.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4. 사료를 통합해서 본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

 

 

.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1) 연표

 

1) 연표- 33

기 사

831

태화(太和) 5(831)에서 8(834) 사이에 사신을 보내 조공함이 끊이지 않으니, 우리 쪽에서도 역시 때때로 사신을 보내 이에 답했다.

<구당서 토번전>

 

[대화] 5(831)에 유주(維州)를 지키던 장수 실달모가 유주성과 함께 항복해, 검남서천절도사 이덕유가 이를 받아, 부장(符章), 병기, 갑옷 등을 수거하였고, 장수 우장검을 보내 이를 지키게 했다. 유주의 남쪽은 강의 북쪽 민산(岷山)에 이르고, 서북은 농산(隴山)을 바라보며, 한면은 절벽이요, 삼면은 강에 면해 있어 토번이 이를 무우성(無憂城)이라고 불렀고, 서남의 요충지였다. 우승유(牛僧孺)가 집권하였을 때, 실달모를 돌려보내기로 하고, 유주성도 돌려주었다. 토번은 [실달모 및 일족을] 죽여 후손을 남기지 않았고, 이로써 모든 융적을 두려워하게 했다. 그로부터 5년 동안 매년 토번의 사자가 왔고, 그 때마다 답방하였다. 공물에는 옥대, 금명(金皿), 달갈(獺褐), 이우(犛牛)의 꼬리, 하첩(霞㲲), , , 낙타가 있었다.

 

젠뽀(찬보)가 등극한지 거의 30년이 되었는데, 병환으로 정사를 돌보지 않고, 대신들에게 위임하니 중국에 대항할 수 없어 변경의 사정이 안정되었다. [찬보가] 죽고, 동생 달마(達磨)가 계위했다. 달마는 술과 사냥, 여색을 즐기고,

심성이 흉악하고 은혜를 적게 베푸니 정국이 점차 혼란해져 갔다.<신당서 토번전>

833

[대화] 7(833) 3월 회흘의 [사자] 이의절 등이 낙타와 말을 갖고 와서 또한 가한이 327일에 죽어 이미 친동생 살특근(薩特勤)이 책립되었다고 보고했다. 사흘 동안 조정의 일을 보지 않고 바로 제사(諸司)의 문무 3품 이상과 상서성 4품 이상 관리에게 홍려시에 가서 그 사자에게 조문하라고 명령했다. 좌효위장군 황성유수(皇城留守) 당홍실을 금오장군 겸 어사대부로 하여 지절충입회골조제책립사(持節充入迴鶻弔祭冊立使)로 삼았다.<구당서 회홀전>

835

[대화] 9(835) 유월에 조정에 들어온 회골이 태화공주가 바친 말을 타고 활을 쏘는 여인 7명과 사타의 어린이 2명을 바쳤다. <구당서 회홀전>

836

개성 원년(836)2(837) 모두 사신이 왔다. <구당서 토번전>

839

개성 4(839), 태자첨사 이경유를 사신으로 보내니, 토번이 논집열을 보내 내조하고, 옥기와 양, 말을 바쳤다. 그로부터 토번에는 지진이 일어나 물이 솟아 오르고, 민산(岷山)이 붕괴되었다. 조수(洮水)가 역류하기를 3, 쥐가 곡식을 먹고, 사람들은 전염병과 기아에 허덕이니, 죽은 자를 종횡으로 쌓아 올렸다. 선주()와 곽주() 사이에서 밤이면 비고(鼙鼓) 치는 소리가 들려 사람들이 서로 놀랐다.

<신당서 토번전>

 

개성 초년(839)[회골] 재상 안윤합이 특근시혁과 살특근가한을 찬탈하려고 했으나 살특근가한이 [이를] 깨닫고 시혁과 안윤합을 죽여 버렸다. 또한 회골 상() 굴라물이 군대를 이끌고 밖에 있다가 시혁과 안윤합을 죽인 것에 원한을 품고 살특근가한을 죽이고 개삽특근을 가한으로 삼았다. 장군 구록말하가 굴라물에게 원한을 품고 도망가 힐알사가 이끄는 10만 기를 끌어들여 회골성(迴鶻城)을 격파한 다음 개삽[특근]을 죽이고 굴라물을 베며 [그 땅을] 태워 모두 없어지게 되니 회골이 여러 족속에게로 도망갔다. 회골의 ()상 삽직(馺職)이 외조카 방특근과 그의 아들 녹병갈분 등 형제 5명과 15부를 이끌고 서쪽의 갈라록에게 도망갔고, 한 갈래는 토번으로, 한 갈래는 안서로 투항했다. 또한 가한의 아장 가까이 있던 서른 개의 부락은 특근오개를 가한으로 삼고 남쪽으로 내려와 중국에 내부했다.

<구당서 회홀전>

 

이전에 힐알사가 회골을 격파하고 태화공주를 사로잡았다. 힐알사는 이릉(李陵)의 후예임을 자처하고 중국과 같은 성이라고 했으며 마침내 달간 열 명을 시켜 공주를 보내려고 장성 근처까지 왔다. 오개[가한]이 도중에 힐알사 사신과 마주쳐 달간 등이 모두 죽임을 당하고, 태화공주가 오히려 오개가한(烏介可汗)에게 되돌아오니 바로 [가한이 태화]공주를 인질로 삼아 [그녀와] 동행을 했고, 남쪽으로 고비[大磧]을 넘어 천덕[] 경계까지 와서 천덕성(天德城: 지금 내몽고 자치구 오납특전기 서남쪽에 위치)을 태화공주의 거주지로 줄 것을 주청했다.

[그런데] 회골에는 ()상 적심(赤心: 중국의 자사)이란 자가 있어 그와 지위가 같은 상()이었고, 복고라는 성을 가진 자와 특근나힐철이 부락 백성을 이끌면서 오개[가한]을 따르지 않았다. 적심이 장성을 범하려고 하자 오개[가한]이 그 예하의 온몰사를 먼저 보내 천덕군사(天德軍使) 전모에게 성의를 표한 다음에 적심 재상을 오개가한에게 알현하도록 유인해 적심과 복고 두 사람을 가한의 아장 아래에서 죽였다. [하지만 특근]나힐[]은 싸움에서 이겨 적심 예하의 7천 장()을 모두 점유하고 동쪽으로 진무[](振武軍: 지금 내몽고 자치구 탁극탁 남쪽), 대동[](大同軍: 치소, 지금 산서성 대동현)을 엿보며 실위(室韋), 흑사[](黑沙磧: 지금 내몽고 자치구 탁극탁현 북방에 위치한 사막), 유림(楡林: 지금 내몽고 자치구 준격이기 동북 황하 남안 12연성을 근거로 동남쪽으로 유주(幽州) 웅무군(雄武軍: 지금 산서성 영구와 하북성 울현, 래현 사이에 위치)의 서북쪽 경계까지 쳐들어왔다. 유주절도사 장중무가 동생 []중지를 보내 군사를 이끌고 [특근] 나힐[]의 무리를 격파하고 7천 장 모두를 거두어들인 다음에 잡힌 사람들 중에서 노약자 9만 명 가까이를 살육했다. [특근]나힐[]도 화살에 맞아 낙타 무리 속에 뛰어들어 잠시 [위기를] 벗어났으나 오개[가한]에게 잡혀 죽었다.

<구당서 회홀전>

842

오개[가한]의 여러 부락이 여전히 10만 명이라고 칭하며 아장을 대동군 북쪽의 여문산에 두었는데, 이때가 회창 2(842) 가을로 [그들이] 빈번히 동섬(東陝)의 이북을 위협하자 천덕[], 진무[], 운삭[](雲朔軍)이 늘 빈번하게 [포로로] 잡히고 죽임을 당하는 고통을 당했다. [황제가] 조칙을 내려 여러 도의 병사들 모두를 방어에 참가하게 하면서 하동절도사 유면을 남면초공회골사(南面招控迴鶻使)로 임명하고, 유주절도사 장중무를 동면초공회골사(東面招控迴鶻使)로 임명했다.

<구당서 회홀전>

 

회창 2(842)에 찬보가 죽었다. 12월에 논찬(論贊) 등이 와서 상을 알리니,

조서를 내려 장작소감 이경으로 하여 제사지내게 했다.

<구당서 토번전>

 

회창 2(842)에 찬보가 죽자, 논찬열 등이 와서 사실을 알렸고, 천자가 장작감 이경에게 조문하게 했다. 찬보에게 아들이 없어 찬보의 비() ()의 오라비 상연력의 아들 걸리호를 찬보로 삼았는데, 아직 그는 3세에 불과했으므로, 왕비가 함께 국정을 다스렸다. 대상(大相) 결도나는 걸리호가 배례하지 않는 것을 보고 말하기를, “젠뽀(찬보)의 친척은 많은데, 왜 하필 침씨의 아들인가?”하니, 걸리호가 울며 나갔고, 집정자들이 일제히 그를 죽였다.<신당서 토번전>

 

[무종] 회창 2(842) 9, ()를 내려 말하기를, “거란에서 새로 즉위한 왕 굴수에게 운마장군을 제수해 우무위장군원외치동정원을 담당하게 하라.”라고 하였다.

유주절도사 장중무가 상언(上言)하여 굴수 등이 전하기를, 거란은 옛부터 회흘(迴紇)의 인장을 사용했는데 지금 [황제께] 간청하여 아뢰기를 거란[國家][새로운] 인장을 하사해 줄 것을 청합니다.”라고 한다고 하자 [무종이] 이를 허락하고, [인장에] ‘봉국거란지인)’이라는 문구를 새기게 했다.(구당서 거란전 끝.)

<구당서 거란전>

 

[무종(武宗)] 회창(會昌) 2(842), 회골이 멸망하자 거란(契丹)의 우두머리인 굴수(屈戍)가 비로소 다시 들어와 의탁하니 [그에게] 운휘장군(雲麾將軍)에 제수하고 우무위장군(右武衛將軍)의 임무를 맡아보게 했다. 이에 유주절도사(幽州節度使) 장중무(張仲武)는 회골에게 주었던 과거의 인장을 바꾸어 당의 새로운 인장을 하사했는데, [거기에는] ‘봉국거란지인(奉國契丹之印)’이라고 적혀 있었다.

<신당서 거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