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95, 구당서 남조전- 3(끝)

상 상 2015. 6. 15. 17:49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95, 구당서 남조전- 3()

 

차례

 

.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

2. 구당서 토번전()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10. 구당서 발해전

11. 신당서 발해전

12. 구당서 숙종본기

13. 구당서 회홀전

14. 신당서 회골전

15. 구당서 남조전

16. 신당서 남조전

17. 구당서 신라전

18. 신당서 신라전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6. 토번의 침공 이후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8. 황소의 난

9. 절도사의 시대

10. 당의 멸망

 

. 통일신라와 당

1. 통일신라 이후의 당나라 약사

2. 신구당서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3.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4. 사료를 통합해서 본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

 

 

. 관련 사료

15. 구당서 남조전

15. 구당서 남조전의 출처:

1) 번역문: 동북아역사넷/ 도서/ 중국정사 외국전/ 舊唐書 197/ 남만 서남만열전(南蠻· 西南蠻 列傳) 147

2) 원문: 新漢籍全文(http://hanchi.ihp.sinica.edu.tw/ihp/hanji.htm) /免費使用//正史/舊唐書/ 列傳/ 卷一百九十七/ 남만 서남만(南蠻· 西南蠻)/ 남조만(南詔蠻)

 

15.구당서 남조전(197 남만, 서남만열전 중 남조전)

번 역 문

원 문

7) 당초 토번이 북정(北庭)과의 분쟁으로 인해 회골과 크게 싸웠는데, 죽고 다친 이가 자못 많았다. 이에 []모심에게 징병(徵兵)을 요청하였는데, 본디 만명이었다. ()모심 이미 당()에 귀의하기로 계책을 정하였기 때문에, 징병을 기화로 토번을 습격하고자 하였다. 이에 [병력이] 적고 약하게 보이고자, 토번에 말하기를, “()의 군대는 본디 적어서, 겨우 3천 명을 징발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토번이 적다 여기고, 5천까지 늘리라고 하니 허락하였다. ()모심에 재빨리 병사 5천을 보내 토번에 둔수(屯守)하게 하고, 자신은 수만의 병력을 이끌고 그 뒤를 밟았다. 밤낮으로 행군하여 그 무방비를 틈타 토번을 신천(神川)에서 크게 격파하였다. 마침내 철교를 끊고 사자를 보내 승리를 고하였다. 또 위고(韋皋)에게 그 노획물 및 성보(城堡)를 검열해보라고 청하여 신임을 얻었다. 이 때에 위고가 상언(上言)하여, “()모심이 철교로부터 성루(城壘) 열여섯을 거두었고, 그 왕 5인을 사로잡았으며, 그 무리 10여 만을 항복시켰습니다.”라고 하였다. 사부랑중 겸 어사중승 원자에게 절()을 가지고 남조(南詔)를 책봉하게 하면서, ()모심에게 인()을 하사하였는데, 황금으로 주조하였으며 은으로 각자[]하였다. 글자는 정원책남조인(貞元冊南詔印)’이라고 새겼다. 이에 앞서 위고가 상주하기를, 남조가 청평관(淸平官) 윤구관을 보내 토번으로부터 받은 인() 5점을 바쳤는데, 두 개는 황금으로 만든 것이었으니, 지금 하사하는 것을 황금으로 만들어 만이(蠻夷)가 중히 여기는 바를 좇도록 하고, [대대로] 전하는 데 무궁함을 보이게 하자고 하였다. []고의 요청을 따른 것이다.

吐蕃因爭北庭與迴鶻大戰死傷頗眾乃徵兵於牟尋須萬人牟尋既定計歸我欲因徵兵以襲之乃示寡弱謂吐蕃曰:「蠻軍素少僅可發三千人。」吐蕃少之請益至五千乃許牟尋遽遣兵五千人戍吐蕃乃自將數萬踵其後晝夜兼行乘其無備大破吐蕃於神川遂斷鐵橋遣使告捷且請韋皋使閱其所虜獲及城堡以取信焉時韋皋上言:「牟尋收鐵橋已來城壘一十六擒其王五人降其眾十餘萬。」以祠部郎中兼御史中丞袁滋持節冊南詔仍賜牟尋印鑄用黃金以銀為窠文曰:「貞元冊南詔印。」先是韋皋奏南詔遣清平官尹仇寬獻所受吐蕃印五二用黃金今賜請以黃金從蠻夷所重傳示無窮從皋之請也

8) [덕종 정원] 10(794) 8월에 사자 몽주라동 및 윤구관(尹仇寬)을 보내 탁삭(鐸槊: 창의 일종?)과 낭인검(浪人劒)및 토번인(吐蕃印) 8점을 바쳤다. []주라동은 []모심의 동생이라, 하사하는 것이 매우 두터웠다. 윤구관을 검교좌산기상시로 삼고, 나머지는 각기 차등을 두어 관직을 제수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윤구관을 책봉하여 고계군왕(高溪郡王)으로 삼았다. (정원)11(795) 3월에 청평관 윤보추(尹輔酋)를 보내 원자(袁滋)를 수행하여 내조하게 하였다. 또 앞서 죽은 번장(蕃將) 위경승과 한연 등과 아울러 남조가 노획한 토번의 장수와 포로의 수급 100인을 얻어 경사에 이르게 하였다. []주라동이 귀국하다가 길에서 죽어, 우산기상시에 추증하였다. 윤보추를 검교태자첨사 겸 어사중승에 제수하고, 나머지도 차서에 따라 관직을 제수하였다. 또 칙서를 내려, 이모심(異牟尋) 및 그 아들 각권(閣勸)에게 하사하고, 청평관(淸平官) 정회와 윤구관 등에게도 각기 일서(一書)를 내렸다. 칙서의 좌측에는 중서성 3(: 중서령과 시랑 및 사인-舍人)의 선봉행(宣奉行)이 나열되어 있었는데, 구제(舊制)를 회복한 것이다. [11(795)] 9월에 이모심이 사자를 보내 말 60필을 바쳤다.

十年八月遣使蒙湊羅棟及尹仇寬來獻鐸槊浪人劍及吐蕃印八紐湊羅棟牟尋之弟也錫賚甚厚以尹仇寬為檢校左散騎常侍餘各授官有差俄又封尹仇寬為高溪郡王十一年三月遣清平官尹輔酋隨袁滋來朝又得先沒蕃將衞景昇韓演等并南詔所獲吐蕃將帥俘馘百人至京師湊羅棟歸國在道而卒贈右散騎常侍授尹輔酋檢校太子詹事兼御史中丞餘亦差次授官又降敕書賜異牟尋及子閣勸清平官鄭回尹仇寬等各一書書左列中書三官宣奉行復舊制也九月異牟尋遣使獻馬六十匹

9) [정원] 12(796), 위고가 아주(雅州)의 회야로(會野路)에서 투항한 만() 수령 고만당 등 69인과 호() 7천을 초유하여 거두었는데, 아울러 []만당 등이 앞서 토번으로부터 받은 금자고신(金字告身) 50()도 얻었다. (정원)14(798)에 이모심(異牟尋)이 추망(酋望) 대장군 왕구각 등을 보내 정월을 축하하고, 아울러 방물을 공헌하였다. (정원)19(803) 정월 아침에, ()이 친히 함원전에서 남조(南詔)의 조하(朝賀)를 받았는데, 그 사신 양막룡무(楊鏌龍武)를 시태복소경으로 삼고, 여주(黎州: 사천성 한원현 동북부) 곽청도(廓淸道)의 만() 수령(首領)이자 공화군왕의 습왕(襲王)인 유지녕을 시태상경에 제수하였다. (정원)20(804)에 남조(南詔)가 사자를 보내 조공하였다.

十二年韋皋於雅州會野路招收得投降蠻首領高萬唐等六十九人戶約七千兼萬唐等先受吐蕃金字告身五十片十四年異牟尋遣酋望大將軍王丘各等賀正兼獻方物十九年正月旦上御含元殿受南詔朝賀以其使楊鏌龍武為試太僕少卿授黎州廓清道蠻首領襲恭化郡王劉志寧試太常卿二十年南詔遣使朝貢

10) [헌종] 원화(元和) 2(807) 8월에 사자 등방전을 보내 내조하여, [그 사자를] 시전중감에 제수하였다. (원화)3(808) 12월에 이모심(異牟尋)이 죽자, 조정을 3일간 닫았다. (원화)4(809) 정월에 태상소경 무소의를 조제사에 충임하여, []모심의 아들 표신(驃信: 남조왕이 자칭한 군주의 칭호) 저몽각권을 남조왕으로 삼고이에 원화책남조인주조를 명하였다. (원화)7(812) 10모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원화)11(816) 5용몽성이 죽어조정을 3일 폐하였다사신을 보내 와서 그 군장을 책립해 줄 것을 청하여 소부소감 이선(李銑)을 책립조제사(冊立弔祭使)에 임명하고, 좌찬선대부 허요좌를 부사로 삼았다. (원화)12(817)부터 15(820)까지 매년 사신을 보내 내조하였으며, 어떤 때는 연중에 두세 차례 온 적도 있었다.

元和二年八月遣使鄧傍傳來朝授試殿中監三年十二月以異牟尋卒廢朝三日四年正月以太常少卿武少儀充弔祭使仍冊牟尋之子驃信苴蒙閣勸為南詔王仍命鑄元和冊南詔印」。七年十月皆遣使朝貢十一年五月以龍蒙盛卒廢朝三日遣使來請冊立其君長以少府少監李銑充冊立弔祭使左贊善大夫許堯佐副之十二年至十五年比年遣使來朝或年內二三至者

11) [문종(文宗)] 보력 3(827) 즉 대화 원년(827)에도 사자를 보내 왔다. (대화) 3(829)에 두원경이 서천(西川)에 진수(鎭守)하였는데, 문유(文儒)로서 자긍심이 높아서 융사(戎事)는 익히지 않았다. 남만(南蠻)이 당()의 무방비를 틈타 대거 제부(諸部)를 이끌고 입구(入寇)하였다. 목수(牧守)들이 누차 진언하였으나, 또한 [두원경이] 믿지 않았다. 11월에 촉천(蜀川)에서 군대를 내어 더불어 싸웠으나, 불리하였다. [남만이] 당의 공주(邛州: 치소, 사천성 공래시 동남쪽 27.5km)를 함락하고, 성도부(成都府)를 압박하였다. [그리고] 재주(梓州: 치소는 사천성 삼태현) 서곽(西郭)으로 진입하여 옥백(玉帛)과 자녀(子女)를 약탈하여 갔다. ()이 그것을 듣고 크게 노하였으며, ()원경을 두 번 좌천시켜 순주(循州)의 사마로 삼았다. 다음해 정월에 그 왕 몽차전(蒙嵯顚)이 표()를 올려 스스로 진술하여 죄를 청하고, 아울러 두원경의 과실을 열거하였다. 국가(國家)가 바야흐로 원방(遠方)을 회유하는 데 전념하였으므로, 머지않아 그 죄를 사면하였더니, 다시 사자를 보내 조공하였다. 5(831)8(834) 또한 사자를 보내 와서 방물을 바쳤다. 개성(開成) 4(839)5(840), [무종] 회창(會昌) 2(842)에도 모두 사자를 보내 내조하였다.()

寶曆三年大和元年亦遣使來三年杜元穎鎮西川以文儒自高不練戎事南蠻乘我無備大舉諸部入寇牧守屢陳亦不之信十一月蜀川出軍與戰不利陷我邛州逼成都府入梓州西郭驅劫玉帛子女而去上聞之大怒再貶元穎為循州司馬明年正月其王蒙嵯顛以表自陳請罪兼疏元穎過失國家方事柔遠尋釋其罪復遣使來朝

五年八年亦遣使來貢方物開成四年五年會昌二年皆遣使來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