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와 당의 관계-83, 신당서 회홀전-3) 차례 가.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상) 2. 구당서 토번전(하)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10. 구당서 발해전 11. 신당서 발해전 12. 구당서 숙종본기 13. 구당서 회홀전 14. 신당서 회골전 15. 구당서 남조전 16. 신당서 남조전 17. 구당서 신라전 18. 신당서 신라전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나.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6. 토번의 침공 이후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8. 황소의 난 9. 절도사의 시대 10. 당의 멸망 다. 통일신라와 당 1. 통일신라 이후의 당나라 약사 2. 신구당서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3.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4. 사료를 통합해서 본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 가. 관련 사료 14. 신당서 회골전 ※ 14. 신당서 회홀전(권217) 출처: 1) 번역문: 동북아역사넷/ 도서/ 중국정사 외국전/ 新唐書 卷217/ 회골전(回鶻傳) 2) 원문: 新漢籍全文(http://hanchi.ihp.sinica.edu.tw/ihp/hanji.htm) /免費使用/史/正史/新唐書/ 列傳/ 卷二百一十七(上, 下) 번 역 문 | 원 문 | 10) 향적[사]에서 싸우는데 [회흘이] 풍[수](灃水)가에 진을 치고 있었고, 적의 군대는 황제 군대[王師]의 동쪽에서 기병을 매복시켰다가 우리를 습격하려고 했는데, 복고회은이 회흘을 지휘해 [빠른 기병을] 달려가게 해 그 매복을 모두 도륙하고 적의 배후에 나타나 진서(鎭西) 북정절도사 이사업과 적군을 협격해서 적을 크게 패배시키고 나아가 장안마저 수복했다. [복고]회은이 회흘, 남만(南蠻), 대식(大食)의 병사들을 이끌고 도성을 돌아 남쪽으로 가서 산[수](滻水)의 동쪽에 주둔한 다음에 다시 섬서(陝西)로 나아가 신점(新店: 지금 하남성 신현)에서 싸움을 벌였다. 이전에 회흘이 곡옥[현]에 도착했을 때 엽호가 장군 [차]비시토발배라를 시켜 남산(南山)의 동쪽으로 나가 계곡 안에 숨어 있는 적을 찾아 죽이고 산의 북쪽에 군영을 설치하게 했다. [곽]자의 등이 적과 싸울 때 전군을 동원해 [적을] 추적했는데, [적이] 어지러워져 물러나는 것을 회흘이 바라본 다음에 바로 서령(西嶺: 지금 섬서성 가현 서쪽)을 넘어 기치를 끌고 적을 추격하며 그 뒤로 나아가자 적은 오히려 되돌아오다가 결국 궤멸되었고, 도망간 것을 수십 리 쫓아가자 사람과 말이 서로를 짓밟아 죽은 사람이 셀 수가 없었으며 거두어들인 무기도 산과 같았다. 엄장(嚴莊)이 안경서를 모시고 동경(낙양)을 버린 다음 북쪽으로 [황]하를 건너가자 회흘이 동도(낙양)를 사흘 동안 크게 약탈을 했는데, 간악한 사람들이 [회흘을] 이끌고 창고를 약탈해 텅 비게 되자 광평왕이 [이를] 제지하고자 했으나 할 수 없었으며, 원로들이 비단 만 필을 회흘에 뇌물로 주자 비로소 멈추고 노략질을 하지 않았다. 엽호가 경사로 돌아오자 황제가 여러 신하들을 장락[역]까지 보내 위로하게 했고, 황제가 전전(前殿)에 앉아서 엽호를 불러 계단 위로 올라오게 한 다음에 추령(酋領)을 그 아래에 앉게 했으며 연회를 열어 또 다시 위로하면서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비단과 [금은]그릇을 내려주었다. 엽호가 머리를 숙여 말했다. “군대가 사원(沙苑: 지금 섬서성 대려현 동남쪽 40여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에 머무르고 있으니 소신이 돌아가 말을 먹인 다음에 범양(范陽)을 수복하고 남아 있는 도적 잔당마저 없애고자 합니다.” 황제가 말했다. “짐을 위해 의기와 용기를 다해 큰 성과를 거둔 것은 경 등의 힘에 의한 것이다.” [황제가] 조칙을 내려 [엽호를] 사공(司空)으로 진급시키고 충의왕이라고 작을 내려주며 해마다 비단 2만 필을 주기로 하자 사자가 삭방까지 와서 하사품을 받았다. | 香積之戰,陣灃上,賊詭伏騎於王師左,將襲我,僕固懷恩麾回紇馳之,盡翦其伏,乃出賊背,與鎮西、北庭節度使李嗣業夾之,賊大敗,進收長安。懷恩率回紇、南蠻、大食眾繚都而南,壁滻東,進次陝西,戰新店。初,回紇至曲沃,葉護使將軍鼻施吐撥裴羅旁南山東出,搜賊伏谷中,殲之,營山陰。子儀等與賊戰,傾軍逐北,亂而卻,回紇望見,即踰西嶺,曳旗趨賊,出其後,賊反顧,遂大潰,追奔數十里,人馬相騰蹂,死者不可計,收仗械如丘。嚴莊挾安慶緒棄東京北度河,回紇大掠東都三日,姦人導之,府庫窮殫,廣平王欲止不可,而耆老以繒錦萬匹賂回紇,止不剽。葉護還京師,帝遣羣臣勞之長樂,帝坐前殿,召葉護升階,席酋領於下,宴且勞之,人人賜錦繡繒器。葉護頓首言:「留兵沙苑,臣歸料馬,以收范陽,訖除殘盜。」帝曰:「為朕竭義勇,成大事,卿等力也。」詔進司空,爵忠義王,歲給絹二萬匹,使至朔方軍受賜。 | 11) 건원 원년(758) 회흘의 사자 다언아파와 흑의대식의 추[장] 각지가 같이 조공해 들어와 순위를 다투자 관리가 [동서의] 다른 문으로 동시에 들어오게 했다. [6월 무술일에 회흘 사신을 위해 자신전에서 연회를 베풀어주었다.] 또한 [회흘] 사자가 결혼을 청하자 허락을 해주었다. 황제가 어린 딸 영국공주를 주어 시집가게 하고, 바로 마연철을 영무위원비가가한으로 책봉하면서 [가을 7월 정해일에] 조칙을 내려 한중군왕 [이]우를 [특진 시태상경] 섭어사대부로 해 책명사(冊命使)로 삼고, 종실의 아들 우사랑중 [이]손을 [병부랑중 겸 섭]어사중승(攝御史中丞) [홍려경 영국공주]례회사(寧國公主禮會使)로 임명해 [이]우의 부사로 삼으며 [개부의동삼사 행]상서우복야(行尙書右僕射) [기국공] 배면에게는 변경까지 [그들을] 호송하게 했다. 황제가 공주를 환송하기 위해 함양 [자문역]까지 행행해 여러 번 [그녀를] 위로하고 격려하자 [영국]공주가 울면서 말했다. “나라에 바야흐로 [어려운] 일이 많으니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이]우가 회흘에 도착했는데, [비가궐]가한이 [머리에] 호모(胡帽)를 쓰고 붉은 겉옷을 입은 체 천막 안에 앉아 의장과 위사를 성대하고 위엄 있게 해놓고 [이]우를 데려다 아장 밖에 세워두고서 물었다. “왕은 천가한과 어떤 관계이신가?” [이]우가 “[황제의] 종형제(從昆弟)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이 때 중인(中人: 환관) 뇌영준)이 [이]우 앞에 서서 머리를 들었다. [그러자 갈륵가한이] 다시 물었다. “왕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이]우가 “중인(환관)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갈륵]가한이 물었다. “중인은 노복인데, 어찌 그대 앞에 서서 머리를 들 수 있는가?” 뇌영준이 바로 물러나 머리를 숙였다. 이에 [갈륵가한이] 이우를 데리고 [아장 안에] 들어오게 했는데, [이]우가 절을 하지 않자 가한이 물었다. “나라의 임금을 뵈면 예로서 절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우가 대답했다. “천자께서 가한이 공이 있다고 생각하셔서 사랑하는 딸로 우호관계를 맺고자 하셨습니다. 이전에 중국과 다른 족속의 결혼은 모두 종실의 자손이 했습니다. 지금 영국[공주]는 바로 황제의 딸로 덕과 용모를 갖추었는데, 만 리를 [멀다하지 않고] 와[서 결혼을 하]니 가한은 천자의 사위로서 마땅히 예로서 대접을 해야 하는데 어찌해 앉아 [황제의] 조칙문을 받으시려고 하는 것입니까?”[갈륵]가한이 부끄러워하며 바로 일어나 조칙문을 받들고 절하면서 책봉을 받았다. 다음 날 공주를 받들어 가돈으로 삼았다. [이]우가 가지고 간 예물을 주자 가한이 그 조정의 추령(酋領)들에게도 모두 나누어주었다. [이]우가 돌아와 말 5백 필, 모피와 가죽, 하얀 모포 등을 바쳤다. 그리고 사자로 [회흘의] 왕자 골철특륵과 재상 제덕(帝德)등이 기병 3천 명을 이끌고 적을 토벌하는 것을 도우러 오자 황제가 복고회은에게 [그들을] 통솔하게 했다. 또한 [회흘의 가한이] 대수령 개장군(蓋將軍)과 세 명의 여자를 혼인에 감사하다며 보냈고, 아울러 견곤을 격파한 공에 대해서 아뢰었다. 이듬해(759년) 골철[특륵]과 9명의 절도[사]가 상주[성](相州城)에서 싸움을 벌였는데 당나라 군대가 궤멸되어 제덕 등이 경사로 도망쳐 왔는데, 황제가 [재물을] 후하게 내려주며 그의 뜻을 위무하자 바로 돌아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름 4월에 갈륵]가한이 죽자 국인(國人)들이 [영국]공주를 따라서 죽게 하려고 했는데, [영국]공주가 말했다. “중국에서 남편이 죽으면 아침과 저녁으로 곡을 하고 3년 동안 상복을 입는 것, 이것이 탈상의 예법이다. 회흘로 만 리나 와서 결혼을 했어도 본래부터 중국[의 예법]을 따라야 하기 때문에 [가한을] 따라서 죽을 수는 없다.” 이에 멈췄으나 칼로 얼굴을 긋고 통곡을 하는 것은 또한 그의 습속에 따랐다. 이후에 [영국공주는]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본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 乾元元年,回紇使者多彥阿波與黑衣大食酋閣之等俱朝,爭長,有司使異門並進。又使請昏,許之。帝以幼女寧國公主下嫁,即冊磨延啜為英武威遠毗伽可汗,詔漢中郡王瑀攝御史大夫為冊命使,以宗子右司郎中巽兼御史中丞為禮會使,幷以副瑀,尚書右僕射裴冕送諸境。帝餞公主,因幸咸陽,數尉勉,主泣曰:「國方多事,死不恨。」瑀至虜,而可汗胡帽赭袍坐帳中,儀衞光嚴,引瑀立帳外,問曰:「王,天可汗何屬?」瑀曰:「從昆弟也。」時中人雷靈俊立瑀上,又問:「立王上者為誰?」瑀曰:「中人也。」可汗曰:「中人奴爾,顧立郎上乎?」靈俊趨下。於是引瑀入,瑀不拜,可汗曰:「見國君,禮無不拜。」瑀曰:「天子顧可汗有功,以愛女結好。比中國與夷狄婚,皆宗室子。今寧國乃帝玉女,有德容,萬里來降,可汗天子婿,當以禮見,安踞受詔邪?」可汗慚,乃起奉詔,拜受冊。翌日,尊主為可敦。瑀所齎賜物,可汗盡與其牙下酋領。瑀還,獻馬五百匹、貂裘、白等。乃使王子骨啜特勒、宰相帝德等率騎三千助討賊,帝因命僕固懷恩總之。又遣大首領蓋將軍與三女子謝婚,幷告破堅昆功。明年,骨啜與九節度戰相州,王師潰,帝德等奔京師,帝厚賜尉其意,乃還。俄而可汗死,國人欲以公主殉,主曰:「中國人婿死,朝夕臨,喪期三年,此終禮也。回紇萬里結昏,本慕中國,吾不可以殉。」乃止,然剺面哭,亦從其俗云。後以無子,得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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