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85, 신당서 회홀전-5)

상 상 2015. 5. 18. 17:24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85, 신당서 회홀전-5)

 

차례

 

.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

2. 구당서 토번전()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10. 구당서 발해전

11. 신당서 발해전

12. 구당서 숙종본기

13. 구당서 회홀전

14. 신당서 회골전

15. 구당서 남조전

16. 신당서 남조전

17. 구당서 신라전

18. 신당서 신라전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6. 토번의 침공 이후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8. 황소의 난

9. 절도사의 시대

10. 당의 멸망

 

. 통일신라와 당

1. 통일신라 이후의 당나라 약사

2. 신구당서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3.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4. 사료를 통합해서 본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

 

 

. 관련 사료

14. 신당서 회골전

 

14. 신당서 회홀전(217) 출처:

1) 번역문: 동북아역사넷/ 도서/ 중국정사 외국전/ 新唐書 卷217/ 회골전(回鶻)

2) 원문: 新漢籍全文(http://hanchi.ihp.sinica.edu.tw/ihp/hanji.htm) /免費使用//正史/新唐書/ 列傳/ 二百一十七(, )

번 역 문

원 문

15) 이에 [복고]회은회흘의 좌살(左殺)을 선봉으로 삼았다. []조의[당나라회흘] 이간시키려고 했으나 좌살이 [사조의의 사신을] 잡아서 바치고 여러 장군들과 함께 적군을 공격해 횡수[](橫水鎭: 하남성 맹진현 서쪽 30리 떨어져 있는 군진)에서 싸워 [적을] 도망하고 나아가 동도를 회복했다. [모우]가한발하나를 사신으로 보내 천자에게 축하를 드리며 []조의의 기치와 재물을 바쳤다. 옹왕영보[](靈寶縣: 하남성 영보시 동북쪽으로 38리 떨어진 곳)으로 돌아가고 가한이 하양[](河陽縣)에 주둔해 3개월을 머무르자 주둔지 주변의 백성들이 약탈에 고통스러워했다. 복고창(僕固瑒: 복고회은의 아들)이 회흘 군대를 이끌고 []조의와 전투를 벌이며 흘린 피가 2천 리에 이르렀고, [결국 평주(平州: 치소, 지금 하북성 노룡현 북쪽 반장진 침장 일대) 석성현(石城縣: 임유현, 하북성 난현 서북쪽에 있는 봉자진)에서 사조의의 목을 잘라] 그 머리를 매달고 하북이 모두 평정되었다. [복고]회은상주(相州)의 서쪽 산 곽구(崞口: 지금 하남성 안양시)를 거쳐 주둔지로 돌아오자 [모우]가한[](澤州: 치소, 지금 산서성 진성시 동북 30리 떨어진 고도진), [](潞州: 치소, 지금 산서성 양원현 북쪽)로 나아가 [복고]회은과 만났다가 태원을 거쳐 갔다.

於是懷恩與虜左殺為先驅朝義使反間左殺執以獻與諸將同擊賊戰橫水走之進收東都可汗使拔賀那賀天子獻朝義旗物雍王還靈寶可汗屯河陽留三月屯旁人 困於剽辱僕固瑒率回紇兵與朝義挐戰蹀血二千里梟其首河北悉平懷恩道相州西山崞口還屯可汗出澤與懷恩會道太原去

 

16) 이전에 회흘이 동경(낙양)에 왔을 때 군사를 풀어 약탈을 하자 사람들이 성선[](聖善寺)백마[]로 도망가 두 절의 부도(浮屠)에 숨었는데, 회흘이 화를 내며 부도에 불을 질러 만여 명이 죽었고, 이에 더욱 못되게 굴면서 관리들을 욕보였으며 심지어 군대가 밤에 함광문(含光門: 장안 황성 남면 편서문)에서 [사람들을] 죽이고 홍려시까지 들어갔다. 바야흐로 그때 섬주절도사 곽영예동도(낙양)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어조은(魚朝恩)과 삭방군(朔方軍)이 함께 교만하게 회흘이 포악하게 구는 것을 기화로 또한 여주(汝州: 치소, 지금 하남성 여주시)정주(鄭州: 치소, 지금 하남성 형양시 서남 범수진) 사이를 약탈하자 동네에 온전한 집이 없게 되었고, 모두 종이로 옷을 해 입으니 적보다도 더욱 포악했다.

回紇至東京放兵攘剽人皆遁保聖善白馬二祠浮屠避之回紇怒火浮屠殺萬餘人及是益橫詬折官吏至以兵夜斫含光門入鴻臚寺方其時陝州節度使郭英乂留守東都與魚朝恩及朔方軍驕肆因回紇為暴亦掠汝鄭間鄉不完廬皆蔽紙為裳虐于賊矣

17) 황제가 []소화 등이 죽었기 때문에 []소화를 좌산기상시로 추증하고, []거를 양주대도독으로 삼았으며 [그의] 한 아들에게 6품관의 벼슬을 내려주었다. 이에 [모우]가한힐돌등리골철밀시합구록영의건공비가가한으로, 가돈을 사묵광친려화비가가돈으로 책봉하며, 좌산기상시 [겸 어사대부] 왕익을 사신으로 바로 그 아장에 가게 하라고 명령을 전하고, 가한 이하 재상에게 모두 실봉 2만호를 내려주었다. 또한 좌살(左殺)을 웅삭왕으로 삼고, 우살(右殺)을 영삭왕, 호록도독(胡祿都督)을 금하왕, 발람장군을 정막왕, 10명의 도독을 모두 국공(國公)으로 삼았다.

帝念少華等死故贈少華左散騎常侍琚揚州大都督賜一子六品官於是冊可汗曰頡咄登里骨啜蜜施合俱錄英義建功毗伽可汗可敦曰娑墨光親麗華毗伽可敦以左散騎常侍王翊使即其牙命之自可汗至宰相共賜實封二萬戶又以左殺為雄朔王右殺寧朔王胡祿都督金河王拔覽將軍靜漠王十都督皆國公

18) 영태 초기 [765년 가을][복고]회은이 반란을 일으키고 회흘토번을 끌어들여 쳐들어왔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복고]회은이 죽고(7659월 초8: 자치통감) 다른 두 족속이 우선권을 다투게 되자 회흘 수령이 몰래 경양에 가서 곽자의를 만나 일을 고칠 것을 청했다. []자의가 예하를 이끌고 회흘의 영지로 갔다. 회흘이 말했다. “영공(令公)을 뵙고자 했습니다.” []자의가 기문에서 나오자 회흘이 말했다. “갑옷을 벗으시지요.” []자의가 옷을 갈아입었다. 추장들이 서로 돌아보면서 말했다. “정말로 []공이시군요!” 이 때 이광진과 겸어사대부 노사공(路嗣恭)이 무장하고 갑주를 단 말을 타고 옆에 있었는데, []자의가 추장들을 보면서 말했다. “이 사람이 위북절도사 모씨고, 삭방절도사 모씨요추장들이 말을 내려 절을 하자 []자의 역시 내려서 인사했다. 회흘 수백 명이 주위에서 쳐다보자 []자의의 수하들 역시 달려왔는데, []자의가 예하의 좌우 부대를 물러나게 하고, 다시 명령해 [회흘에게] 술을 주어 마시게 하며 머리 묶는 비단 3천개를 주었고, 가한의 동생 합호록[도독 약라갈(藥羅葛)]을 불러 악수를 하며 책망해 말했다. “황제께서 회흘의 공을 생각해 너희들에게 정말로 후하게 보상을 해주었는데 어찌해 배신을 하고 쳐들어왔느냐? 지금 바로 너희와 싸우려고 하는데, 어찌 항복을 하려고 하느냐? 내가 장차 홀로 너희의 군영에 들어왔는데, 비록 [너희가] 나를 죽일 수 있다고 해도 나의 장졸들이 너희를 능히 깨버릴 수 있을 것이다.”추장들이 맹세를 하며 [복고]회은이 우리를 속이기 위해 [다음과 같이] ‘당나라 천자는 남쪽으로 도망가고 []공은 쫓겨났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로 인해 지금 오게 된 것입니다. 천가한께서도 계시고 공께서도 무탈하시니 저희들은 돌아가 토번을 공격해 두터운 은혜를 보답하고자 합니다만 [복고]회은의 아들은 가돈의 오라비이니 [그의] 죽을죄를 면해주셨으면 합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자의가 술을 갖고 []호록[도독]에게 맹서를 청하고 [술을] 마시면서 []자의당나라 천자 만세! 회흘 가한 역시 만세! 두 나라 장상(將相)도 마찬가지다. 만약 약속을 저버리면 몸을 죽여 늘어놓고 가족들 역시 도륙을 내버릴 것이다.”라고 말했다. 바야흐로 이때 회흘 재상 마돌막하달간돈막하달간 등이 말을 듣고 기운이 빠져 술을 그들 앞에 갖다놓으며 바로 말했다. “공과의 약속을 바꾸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이전에 회흘에 두 명의 무당이 이번에 가면 분명히 싸우지 않게 될 것이고, 대인을 만나서 돌아올 것입니다.”라고 했는데, 그래서 서로 웃으면서 무당이 우리를 속인 것은 아니었군요.” 라고 말했다.

永泰初懷恩反誘回紇吐蕃入寇俄而懷恩死二虜爭長回紇首領潛詣涇陽見郭子儀請改事子儀率麾下叩回紇營回紇曰:「願見令公。」子儀出旗門回紇曰:「請釋甲。」子儀易服酋長相顧曰:「真是公矣!」時李光進路嗣恭介馬在側子儀示酋長曰:「此渭北節度使某朔方軍糧使某。」酋長下馬拜子儀亦下見之虜數百環視子儀麾下亦至子儀麾左右使却且命酒與飲遺以纏頭綵三千召可汗弟合胡祿等持手因讓曰:「上念回紇功報爾固厚何負而來今即與汝戰何遽降也我將獨入爾營雖殺我吾將士能擊汝。」酋長讋服曰:「懷恩詭我曰唐天子南走公見廢』,是以來今天可汗在公無恙吾等願還擊吐蕃以報厚恩然懷恩子可敦弟也願赦死。」於是子儀持酒胡祿請盟而飲子儀曰:「唐天子萬歲回紇可汗亦萬歲二國將相如之有如負約身死行陣家屠戮。」方時虜宰相磨咄莫賀達干頓莫賀達干等聞言皆奪氣酒至其所輒曰:「無易公誓。」虜有二巫此行必不戰當見大人而還」;及是相顧笑曰:「巫不吾紿也。」

19) [5일이 지나] 삭방선봉병마사 [개부(開府) 남양군왕] 백원광이 회흘 군대를 [경주(涇州)] 영대[현 서쪽 50 리 떨어진 적산령(赤山嶺)] 에서 만났고, 마침 눈이 내리고 [하늘이] 아주 캄캄해져서 토번이 군영의 문을 닫고 장비를 거두자 바로 쫓아가 공격해 5만이 넘게 머리를 베었고 만 명을 사로잡았으며 말, 낙타, , 양 등을 노획하고 사로 잡혀 있었던 당나라 5천 호를 거둘 수 있었다. 복고명신(僕固名臣)이 항복해서(765년 윤10: 구당서 복고회은전) 합호록도독 등과 조정에 오자 [재물을] 셀 수 없이 내려주었다. []자의[복고]명신을 황제에게 배알하게 했다. [복고]명신[복고]회은 형의 아들로 뛰어난 장수였다.

朔方先鋒兵馬使白元光合回紇兵於靈臺會雪雰嚴晦吐蕃閉營撤備乃縱擊之斬首五萬級生禽萬人獲馬橐它收所俘唐戶五千僕固名臣降合胡祿都督等二百人皆來朝賜與不可計子儀以名臣見名臣懷恩兄子銳將也

20) 대력 3(768) 광친가돈이 죽자 황제가 우산기상시 소흔에게 부절을 갖고 가서 장례에 조문하게 했다. 이듬해(769)[복고]회은의 어린 딸을 숭휘공주(崇徽公主)의 계실(繼室)로 삼아 병부시랑 이함에게 부절을 갖고 가 가돈으로 책봉하고 비단 2[]을 주었다. 이 때 재정이 고갈되자 공경(公卿)의 노새와 낙타마저 징수해 주면서 재상이 [회흘의 사신을] 중위교(中渭橋: 장안 위수-渭水에 부설된 다리)까지 배웅을 했다

大曆三年光親可敦卒帝遣右散騎常侍蕭昕持節弔祠明年以懷恩幼女為崇徽公主繼室兵部侍郎李涵持節冊拜可敦賜繒綵二萬是時財用屈稅公卿騾橐它給行宰相餞中渭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