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본기

고구려 제11대 동천왕 본기- 2

상 상 2011. 12. 16. 18:37

12 년 (AD 238) : 위나라 태부 사마선왕이 공손연을 치니,

[번역문]

12년(238)에 위나라 태부(太傅) 사마선왕(司馬宣王)이 무리를 이끌고 공손연(公孫淵)을 치니,

왕은 주부(主簿), 대가(大加)를 보내 군사 천 명을 이끌고 그것을 돕게 하였다.

 

16 년 (AD 242) : 장수를 보내 요동 서안평을 쳐서 깨뜨렸다.

[번역문]

16년(242)에 왕은 장수를 보내 요동 서안평(西安平)을 쳐서 깨뜨렸다.

 

17 년 (AD 243) : 왕자 연불 왕태자로 삼고, 사면을 베풀었다.

[번역문]

17년(243) 봄 정월에 왕자 연불(然弗)을 세워 왕태자로 삼고, 나라 안에 사면을 베풀었다.

 

19 년 (AD 245) : 봄 3월에 동해 사람이 미녀를 바치니

[번역문]

19년(245) 봄 3월에 동해 사람이 미녀를 바치니 왕은 그 여자를 후궁으로 맞아들였다.

겨울 10월에 군사를 내어 신라의 북쪽 변경을 침략하였다.

==========================================================

1. 삼국사기 원본 출처: http://koreandb.nate.com/history/saki/

 

2. 해설 및 분석:

 

1) 동천왕 12년(238)조의 기록은 삼국지 동이전 고구려전 기록

『경초(景初) 2년(A.D.238)에 태위(太尉) 사마선왕(司馬宣王)이 군대를 거느리고 공손연(公孫淵)을 토벌하니,

[위(位)]궁(宮)이 주부(主簿)와 대가(大加)를 파견하여 군사 수천명을 거느리고 [사마선왕(司馬宣王)의] 군대를 도왔다.』을

옮겨 쓴 것인데, (※ 사마선왕: 사마의)

 

삼국지에는 수천명으로 되어있으나 삼국사기는 천명으로 기록했다고 단재선생이 지적하면서

삼국사기가 우리역사를 축소하였다는 작은 증거로 드셨습니다.

또한 사마선왕(사마의)가 공손연을 토벌함으로써 공손씨 3대가 요동에서 할거하던 시대를 마감합니다

 

2) 동천왕 16년(242) 기록 서안평을 쳐서 깨드렸다는 기록은 앞으로도 몇 번 나옵니다.

이때에는 사마의가 공손연을 토벌하는 틈을 타서 서안평을 쳐서 깨뜨린 것입니다.

서안평은 태조대왕(太祖大王) 94년(서기 146년) 가을 8월에 한나라 요동의 서안평을 쳤다는 기록에 이어서

이번이 두 번째 서안평을 친 기록입니다.(서안평의 위치는 요동)

 

3) 동천왕 19년(245) 기록에 동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것을 보면 우리민족은 한반도 동쪽에 있는 바다를 동해라고 이름 붙인지가 매우 오래 되었음(약 2천년)을 알 수 있습니다.

저번 태조대왕 4년(AD 56)조에는 ‘동옥저(東沃沮)를 정벌하고...영토를 개척하여 동쪽으로 창해(滄海)까지 이르렀고’라고 하여

동해를 ‘창해’라고 부른 적이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