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의 논의를 바탕으로
무엇이 정확하고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삼국지 위서 동이전 고구려전
번호 |
삼국지 위서 동이전 고구려전 기록 |
바로잡기 |
1 |
희평(熹平) 연간(A.D.172~177; 고구려 신대왕-高句麗 新大王 8~13)에 백고(伯固)는 현도군(玄菟郡)에 속하기를 청하였다. |
? |
2 |
공손도(公孫度)의 세력이 요동(遼東)에 웅거하자, 백고(伯固)는 대가(大加) 우거(優居)와 주부(主簿) 연인(然人) 등을 파견하여 [공손(公孫)]도(度)를 도와 부산(富山)[註039]의 도적을 격파하였다. |
공손도의 요동 웅거(요동태수가 된 때)가 중평 6년(서기 189년)이고 백고(신대왕)이 죽은 해가 179년이니, 179년에 죽은 백고가 189년에(또는 그이후에) 다시 살아나 공손도를 도왔다는 말이니, 말도 안되는 엉터리 기록임. |
3 |
백고(伯固)가 죽고 두 아들이 있었는데, |
백고(신대왕)의 아들이 넷 이었음. |
큰 아들은 발기(拔奇), 작은 아들은 이이모(伊夷模)였다. |
큰 아들은 남무, 둘째가 발기(發歧=拔奇), 셋째가 연우(이이모), 넷째가 계수 | |
4 |
발기(拔奇)는 어질지 못하여, 국인(國人)들이 함께 이이모(伊夷模)를 옹립하여 왕(王)으로 삼았다. |
고국천왕의 왕후인 형수가 이이모(산상왕 연우)와 야합하여 선왕의 명령이라고 사칭하고, 여러 신하들에게 명령하여 연우(이이모)를 왕으로 세운 것임 |
5 |
백고(伯固) 때부터 [고구려는] 자주 요동(遼東)을 노략질하였고,또 유망(流亡)한 호(胡)[族] 5백여 호(戶)를 받아들였다. |
? |
6 |
건안(建安) 연간(A.D.196~219)에 공손강(公孫康)이 군대를 보내어 고구려를 공격하여 격파하고 읍락을 불태웠다. |
공손강이 건안 9년(서기 204년)에 요동태수가 됐으니 그럴수 있겠음. |
7 |
발기(拔奇)는 형(兄)이면서도 왕이 되지 못한 것을 원망하여, 연노부(涓奴部)의 [대(大)]가(加)와 함께 각기 하호(下戶) 3만명을 이끌고 [공손(公孫)]강(康)에게 투항하였다가 돌아와서 비류수(沸流水) 유역에 옮겨 살았다. |
발기(拔奇=發歧)가 197년 죽었는데, 204년에 요동태수가 된 공손강에게 투항했다는 것은 허무맹랑한 말이니 엉터리 기록임 |
8 |
[지난 날] 항복했던 호(胡)[족(族)]도 이이모(伊夷模)를 배반하므로 이이모(伊夷模)는 새로 나라를 세웠는데 오늘날 [고구려가] 있는 곳이 이곳이다. |
이이모(산상왕 연우)가 천도(遷都)한 것을 나라를 새로 세웠다고 했으니 틀린 기록임. |
9 |
발기(拔奇)는 드디어 요동(遼東)으로 건너가고,그 아들은 [고(高)]구려(句麗)에 계속 머물렀는데, 지금 고추가 교위거(古雛加 駮位居)가 바로 그 사람이다. |
발기(拔奇=發歧)가 모국, 고구려를 쳐들어 왔으니 사실임. 동천왕(11대)의 이름이 우위거(憂位居)이니, 혹시 동천왕의 이름을 잘못 알고 교위거(駮位居)라고 기록한 것 같은데 , 그렇다면 동천왕은 산상왕(중국에서 말한 이이모)의 아들이지 발기의 아들이 아니니 이 또한 틀린 기록임. |
2. 삼국사기
번호 |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기록 |
바로잡기 |
1 |
고국천왕 원년 『0 년 (AD 179) : 고국천왕이 왕위에 올랐다. [번역문] 고국천왕(故國川王)의 이름은 남무(男武)이다.<혹은 이이모(伊夷謨)라고도 하였다.> 신대왕 백고의 둘째 아들이다. 백고가 죽자, 나라 사람들은 맏아들 발기(拔奇)가 불초하였으므로 함께 이이모를 세워 왕으로 삼았다. 한나라 헌제(獻帝) 건안(建安) 초에 발기가 형으로서 왕이 되지 못한 것을 원망하여 소노가(消奴加)와 함께 각각 하호(下戶) 3만여 명을 거느리고 공손강(公孫康)에게 가서 항복하고, 돌아와 비류수 가에 머물렀다. 왕은 키가 아홉 척이고 자태와 겉모습이 크고 위엄이 있었으며 힘이 능히 솥을 들 만하였고, 일에 임하여는 남의 말을 듣고 결단하였으며 관대하고 엄함에 있어 중용을 지켰다.』 |
<혹은 이이모(伊夷謨)라고도 하였다.>에서부터 ~돌아와 비류수 가에 머물렀다.’ 까지를 여기서 삭제하여야 함.(틀린 부분이므로) |
2 |
산상왕 원년 『0 년 (AD 197) : 산상왕이 왕위에 올랐다. [번역문] 산상왕(山上王)은 이름이 연우(延優)<또는 위궁(位宮)이라고도 이름하였다.>이고 고국천왕의 아우이다. 위서에 이렇게 쓰여있다. 『주몽의 후손 궁(宮)은 나면서부터 눈을 뜨고 볼 수 있었는데 이 사람이 태조이다. 지금의 왕은 태조의 증손인데 역시 나면서부터 사람을 보는 것이 증조 궁과 비슷하였다. 고구려에서 서로 비슷한 것을 불러 위(位)라고 하므로 이름을 위궁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고국천왕은 아들이 없었으므로 연우가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
<또는 위궁(位宮)이라고도 이름하였다.>와 ‘위서에 이렇게 쓰여있다.’ 에서부터 ‘위궁이라고 하였다고 한다.’까지를 삭제하여 함. |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사서 삼국사기는
1) 고국천왕의 이름을 ‘남무’라고만 하면 되는 것을 ‘혹은 이이모라고도 한다.’라고 사족(蛇足-삼국지 기록)을 붙여 틀렸으며
그것과 관련한 기록을 잘못인지도 모르고 덧붙였습니다.
2) 전해오는 우리기록 발기(發歧)와 중국기록(삼국지) 발기(拔奇)를 다른 사람으로 오인(誤認)하였습니다.
그에 따라 거기에 관련된 잘못된 기록도 덧붙였습니다.
3) 산상왕(이름: 연우)이 중국사서 삼국지에 나오는 ‘이이모’ 임을 몰랐습니다.
그에따라 이이모 관련기록 일부를 고국천왕(남무) 본기에 기록하였습니다.(산상왕-연우, 본기에 기록해야할 것을)
4) 산상왕의 이름을 ‘연우’라고 하면 정확한 것을 삼국지에 나오는 ‘위궁’ 으로 착각하여
‘또는 위궁(位宮)이라고도 이름하였다.’ 라고 사족을 붙여 틀렸습니다. 그에따라 거기에 관련된 기록을 덧붙이는 잘못을 범하였습니다.
그러면 삼국사기는
고국천왕 남무를 왜 이이모라고도 했는가? 왜 틀렸는가?
산상왕 연우를 왜 위궁이라고도 했는가? 왜 틀렸는가?
왜 중국사서에 나오는 이름이 하나씩 밑으로 내려가야 할것을 올려 붙여 틀렸는가?
(삼국사기는 첫째로 제시한 이름이 맞았는데, 왜 멀쩡하게 정답을 써놓고 사족을 달아 틀렸을까?)
이 모든 잘못은 중국의 사서를 그대로 믿고 우리 사서에 사족(蛇足)으로 덧붙여 썼기 때문에 이 같은 오류(誤謬)가 생긴 것입니다.
그러면 중국사서 삼국지는 왜 틀렸는가?
첫째, 관심이 없는 탓입니다.
상내략외(詳內略外)라고 외국일에 관심이 없어, 처삼촌 산소 벌초하듯 대강대강하니 이와같이 듬성듬성 빠뜨리는 것이 있고,
관심도 없으니 빠뜨린 것도 모르고 남의 역사를 제 마음대로, 틀리게 쓴 것입니다.
둘째, 삼국지 서문에서 고백했듯이 여러번 통역을 거치니 통역상 오류가 있게 되고,
한번 교류에 몇 년이 걸리는 관계로 시간상의 오류가 있어서 틀린 것이고,
셋째, 삼국지를 쓴 작자가 중국 서쪽 끝에 있는 서촉 지방의 ‘진수’라,
그 옛날 중국 동쪽 끝에 있는 우리민족의 일을 제대로 알턱이 있겠습니까?
이른바 부정확한 정보와 적은 정보를 바탕으로 써서 틀린 것입니다.
맞는지 안맞는지도 모르면서, 정보의 정확성을 판단 할수 없는 가운데 사서를 써서 틀린 것입니다.
이것은 먼 거리에서 오는 이른바 정보의 희소성, 정보량의 희박성, 먼 거리에서 오는 정보의 왜곡현상이 어우러져 일어난 현상입니다.
(여러 사람을 통하면 원래의 뜻과 다른 말로 변질됨)
사정이 이러하니 잘못된 기록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중국 정사(正史)에서도 사료적 가치가 높다는 삼국지도 이 모양으로 엉터리이니,다른 중국 사서(史書)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문제는 이런 엉터리 중국 정사(正史)를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삼고, 이것을 진실이라고 여겨
중국 정사(正史)라는 것에 나온 우리역사 기록을 가지고 우리역사를 말하는 사람들이 더 문제라고 하겠습니다.
덧붙여, 이상의 논의는 단재선생의 ‘조선 상고사’가 가르쳐 준 것이니
단재선생의 조선 상고사야말로 우리역사의 진수이며 참모습이라 하겠습니다.
단재선생의 조선 상고사를 읽으면 읽을수록, 내용을 알면 알수록 그 내용이 진실이며 우리역사의 진수임을 다시한번 느끼게 됩니다.
단재역사 즉, 단재 신채호 선생께서 쓰신 조선상고사 등이 진짜 우리역사임을 다시한번 느끼는 바입니다.
☆ 1) 조선상고사를 볼 수 있는 곳:
http://ko.wikisource.org/wiki/%EC%A1%B0%EC%84%A0%EC%83%81%EA%B3%A0%EC%82%AC
※ 「이이모와 위궁은 누구이며 어느 왕인가?」...이 글은 조선상고사,
제5편 고구려 전성시대 제6장 을파소의 업적 2. 을파소의 등용, 아래 부분이 기초가 되었습니다.
2) 삼국지를 볼 수 있는 곳: http://db.history.go.kr/url.jsp?ID=jo
3) 삼국사기를 볼 수 있는 곳:http://koreandb.nate.com/history/sa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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