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모와 위궁은 누구이며 어느 왕인가?’...이 글의 기초는 조선상고사 임을 밝혀둡니다)
※ 조선상고사를 볼수 있는 사이트:
http://ko.wikisource.org/wiki/%EC%A1%B0%EC%84%A0%EC%83%81%EA%B3%A0%EC%82%AC
삼국사기는 삼국지를 추려 재단하여 편집한 부분이 있는데
그 추려 재단한 삼국지의 기록이 틀려 삼국사기도 틀리는 오점을 남겼으니 삼국지가 틀린 부분을 말해야 하겠습니다.
삼국지 동이전 고구려전 중에서
『백고(伯固)가 죽고 두 아들이 있었는데, 큰 아들은 발기(拔奇), 작은 아들은 이이모(伊夷模)였다.
발기(拔奇)는 어질지 못하여, 국인(國人)들이 함께 이이모(伊夷模)를 옹립하여 왕(王)으로 삼았다.』라는 부분이 있는데,
이중에서 틀린 기록을 지적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 백고(伯固)가 죽고 두 아들이 있었다’는 기록이 틀렸습니다. 왜냐하면 백고(신대왕)의 아들은 둘이 아니고 넷이기 때문입니다.
(참조, 산상왕2편 해설 및 분석: http://blog.daum.net/cdh571/?t__nil_login=myblog)
② 큰 아들은 발기(拔奇), 작은 아들은 이이모(伊夷模)였다.’는 기록도 틀렸습니다.
왜냐하면 발기는 백고의 큰 아들이 아니고 둘째아들이며, 이이모(산상왕 연우)는 작은 아들이 아니고 셋째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참조, 산상왕2편 해설 및 분석: http://blog.daum.net/cdh571/?t__nil_login=myblog)
③ 이이모가 백고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는 것도 틀린 기록입니다.
왜냐하면 이이모(산상왕 연우)는 백고(신대왕)의 뒤를 이은 왕이 아니고 남무(고국천왕)의 뒤를 이은 왕이기 때문입니다.
(즉, 삼국지는 남무-고국천왕을 빠뜨렸음. 참조 : 산상왕2편 해설 및 분석: http://blog.daum.net/cdh571/?t__nil_login=myblog)
④ 연우(산상왕, 삼국지가 말하는 이이모)와 왕위 다툼을 한 사람은 발기(發歧)이니
삼국지에서 말하는 발기(拔奇)는 산상왕 본기에 나오는 발기(發歧)입니다.
그 다음 삼국지가 틀린 부분이 또 있는데 다음과 같은 부분입니다.
『발기(拔奇)는 형(兄)이면서도 왕이 되지 못한 것을 원망하여, 연노부(涓奴部)의 [대(大)]가(加)와 함께 각기 하호(下戶) 3만명을
이끌고 [공손(公孫)]강(康)에게 투항하였다가 돌아와서 비류수(沸流水) 유역에 옮겨 살았다.』
이중에서 발기(拔奇)가 공손강에게 투항 했다는 말은 허무맹랑한 말입니다.
왜냐하면, 발기(發歧=삼국지에서 말하는 발기-拔奇)가 연우와 다툼을 벌이다 죽은 것이 산상왕 원년인데 서기로 말하면 197년입니다.
그런데 공손도전에 의하면 공손도의 아들 공손강이 요동태수를 이어받은 때가 건안 9년(서기 204년)이니
197년에 죽은 사람이 어떻게 서기 204년에 투항 할수 있는가? 그러니 발기가 공손강에게 투항했다는 말은 엉터리입니다.
(※ 공손도전을 볼 수 있는 싸이트: http://blog.daum.net/krighty/11)
기왕 말이 나온 김에 삼국지의 틀린 부분을 또 하나 지적해야 하겠습니다.
삼국지 기록중에
『공손도(公孫度)의 세력이 요동(遼東)에 웅거하자, 백고(伯固)는 대가(大加) 우거(優居)와 주부(主簿) 연인(然人) 등을 파견하여
[공손(公孫)]도(度)를 도와 부산(富山)의 도적을 격파하였다.』이런 기록이 있는데 이 또한 허무맹랑한 소리입니다.
이제는 다 아시겠지만 백고는 신대왕(新大王)의 이름인데 신대왕은 서기 165년에 왕위에 올라 서기 179년에 죽은 왕입니다.
(근거: 신대왕 본기 http://blog.daum.net/cdh571/?t__nil_login=myblog와 http://blog.daum.net/cdh571/?t__nil_login=myblog)
그런데 공손도가 요동에 웅거한 때(요동태수가 된 때)가 중평 6년(서기 189년)이니
(근거 : 삼국지 공손도전, ※ 공손도전을 볼 수 있는 싸이트: http://blog.daum.net/krighty/11)
179년에 죽은 백고(신대왕)가 어떻게 189년에(또는 그 이후에) 다시 살아서 공손도를 도울 수 있는가?
한마디로 엉터리 기록입니다.
이러한 엉터리 기록인 삼국지의 기록을 믿고 그대로 삼국사기에 옮겨 썼기 때문에 삼국사기의 역사기록에 커다란 오점이 생겼습니다.
이것은 삼국지를 무조건 믿고 삼국사기에 옮겨 쓴 김부식의 잘못이며 중국 사서를 오려(재단하여) 편집만 한 삼국사기의 한계이며
김부식의 한계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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