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대북 더 큰 결단이 필요하다

상 상 2014. 8. 22. 17:57

[중앙일보] 입력 2014.08.22 00:37 / 수정 2014.08.22 09:28

 

날마다 가는 곳마다 용서·화해·평화를 설파하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서울 체류 중 맞은 8·15라 박근혜 대통령의 경축사에 대한 기대가 컸다. 남북관계를 최악의 상황에 빠트린 이명박 정부의 남북관계 잃어버린 5에 대한 반성, 미국과 중국만 바라보고 있다간 남북관계는 당분간 돌아오지 못할 다리를 건너고 말겠다는 위기감에서 박 대통령이 북한에 접근하는 큰 걸음의 첫발을 내디딜 것으로 기대되었던 것이다. 1월의 통일 대박론과 3월의 드레스덴 선언 이후 군데군데에서 감지된 대북정책의 의미 있는 변화의 조짐, 동해쪽으로 로켓을 계속 발사하는 한편으로 인천 아시안 게임에 대규모 선수단과 응원단을 파견하기로 결정한 북한의 결정도 우리의 기대 수준을 높이는 데 일조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의 경축사에는 긴 터널 속에 갇힌 남북관계를 터널 밖으로 유도할 만한 내용은 들어있지 않았다. 북한이 사실상 대화 재개의 조건으로 주장하는 5·24 조치의 해제와 금강산 관광 재개, 그리고 한·미 합동군사연습의 중단에 대해서는 한마디의 언급도 없었다. 우리의 대북억지력 핵심의 하나인 군사연습은 북한의 위협이 고조되는 지금의 단계에서는 규모를 줄일 수도 없고 중단할 수는 더더욱 없다. 그러나 5·24와 금강산 관광은 효용가치를 잃은 지 오래고 북한 못지않게 우리 기업들이 엄청난 피해를 보고 있다. 우리는 천안함 폭침과 금강산 관광객 피살에 대한 북한의 사과와 재발방지 조치가 선행돼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해 왔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 말기에 만든 이 두 가지 문제의 해법이 있는데도 그것을 계승해서 원용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남북한 어느 쪽도 완승을 바라서는 남북관계는 계속 악화의 내리막길을 구르고 그 사이에 북한은 핵과 미사일 능력의 업그레이드에 박차를 가할 것이다. 북한이 덜컥 4차 핵실험을 해버리면 게임의 양상은 전혀 달라진다. 시간이 많지 않다.

 

 2014 경축사는 2013 경축사보다 내용이 풍부하고 남북관계 부분의 길이도 거의 세 배나 된다. 하천과 산림을 공동 관리하는 환경 통로, 문화유산을 함께 발굴·보존하는 문화 통로, 남북한 주민들이 작은 것부터 소통하면서 동질성을 회복하는 민생 통로가 새로 등장한 구상들이다. 지난해 경축사가 비무장지대(DMZ) 평화공원 조성 하나만 제안했던 것과 대조적이다. 그러나 문제는 환경과 문화가 북한에 절박한 관심사인가다. 우리 스스로 1970년대까지 경험한 것이지만 배고픈 사람에게 환경이나 문화유산 발굴은 사치다. 민생 통로 부문은 북한 주민들의 생활을 개선해줄 구체적인 방도가 나와 있지 않다.

 

 환경 통로, 문화 통로는 20071116일 한국 총리 한덕수와 북한 총리 김영일이 서울에서 서명한 합의문의 일부를 슬쩍 끌어다 쓴 것이다. 남북한 총리들의 합의문은 같은 해 10월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이 정상회담 끝에 발표한 10·4 선언의 구체적인 실천계획이고 10·4 선언은 2000년 김대중·김정일의 6·15 공동선언을 계승해 진일보시킨 것이다. 총리들의 합의문에는 잘 알려진 서해평화협력지대 설치에 관한 구체적인 추진계획과 개성~평양 고속도로와 개성~신의주 철도 개보수, 그리고 안변 지역 조선협력단지 조성 같은 큰 합의들이 포함됐다. 남북한 총리들은 환경 오염 방지를 위한 협력사업(환경 통로)과 역사유적 및 사료 발굴과 겨레말 큰 사전 공동편찬(문화 통로)에도 합의했다. 병원, 의료기구, 제약공장 건설과 현대화 같은 주민생활과 직결된 분야도 망라됐다.

 

 2007 남북 총리 합의문은 크고 작은 공동사업들이 거의 빠짐없이 들어있는 잘된 로드맵이다. 그걸 이명박 정부가 폐기해버렸다. 그래서 잃어버린 5이라는 것이다. 박근혜 정부가 이명박 정부를 건너 뛰어 노무현 정부 말기에 성사된 남북한 합의에 주목한 것은 환영할 일이다. 더 과감하게 기왕의 합의를 활용하지 않고 북한에는 우선순위가 떨어지는 정책 몇 개만 채택한 것이 아쉽다.

 

 통일준비위원회 출범으로 통일 논의가 무성할 분위기다. 통일은 평화 다음에 온다. 평화를 위해서는 동면 상태의 신뢰 프로세스를 깨워 가동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신뢰를 쌓자면 대화를 해야 하고 대화를 하려면 5·24를 풀고 금강산을 열어야 한다. 민간인들의 대북 지원사업 참여의 길을 활짝 열고 지자체들이 각자의 크기에 맞는 북한의 지방행정단위를 골라 도시 간 교류협력을 풀가동해야 한다. 문화 통로의 스포츠와 문화 교류에서는 할 수 있는 것이 많다. 남북이 화해하고 협력해야 한반도 문제 해결의 주도권을 행사하고 동북아 질서 개편에서 한국 몫을 지킬 수 있다.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