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말당초의 중국 상황(이밀, 왕세충, 두건덕, 이세민의 관계)-3
1. 상황 요약 2. 상황 분석 및 해설 3. 자치통감 기록
2. 상황 분석 및 해설-2)
한편 화북에서는 수양제가 죽었다는 소식에 하간(하북성 하간시)을 지키던 왕종이 상례를 선포하고 곡을 해서 두건덕이 사자를 보내 조문하니 왕종이 항복하였다. 이를 계기로 하북의 군현들이 다투어 두건덕에게 귀부한다. 이에 두건덕이 낙수에 도읍을 정하고 백관을 갖춘다.
9월 이밀은 낙구창을 열어 사람들이 쌀을 마음대로 가져가게 하였는데 창고가 있는 성에서 곽문까지 쌀이 몇 촌이나 두껍게 깔려 수레와 말이 밟고갔고 여러 도적들이 와서 밥을 먹는 사람은 그 가족과 어울러서 거의 1백만이나 이르렀다.
이밀은 동도의 군사가 자주 패하고 미약하며 장상(將相)들이 서로 죽이고 있어서 조석간에 평정될 것이라고 생각하였고 왕세충은 대권을 오로지 하고서 장사(將士)들에게 후하게 상을 내리고 무기를 잘 수리하고 관리하면서 역시 몰래 이밀을 빼앗으려고 기도하였다.
그때 식량이 부족하였던 왕세충은 이밀의 군사들이 의복이 부족한 것을 이용하여 의복과 식량을 교역하여 식량을 확보하였다.
이밀은 우문화급을 격파하고 돌아왔지만 그의 힘센 졸병들과 좋은 말들이 대부분 죽었고 사졸들은 피곤하고 병이 들었다.
식량을 확보한 왕세충은 이밀의 무리가 피폐한 틈을 타서 그들을 치고자 하였다. 왕세충이 언사(하남성 언사현)에 이르러 통제거의 남쪽에 군영을 설치하고 통제거 위에 세 개의 다리를 만들었다.
이밀은 왕백당을 남겨두어 금융을 지키게 하고 스스로 정예의 군사를 이끌고 언사를 나가서 망산(낙양 북쪽)에서 막으며 그들을 기다렸다. 정지절이 내마군을 거느리고 이밀과 북망산 위에서 함께 군영을 마련하였는데 선웅신이 외마군을 거느리고 언사성의 북쪽에 군영을 마련하였다.
왕세충이 수백의 기병을 파견하여 통제거를 건너서 선웅신의 군영을 공격하니 이밀이 배행엄과 정지절을 파견하여 이를 도왔다. 해가 저물어 각기 군사를 거두어 군영으로 돌아갔다. 이밀의 날랜 장수 손장락 등 10여 명이 모두 중상을 입었다.
왕세충은 밤에 200여 기병을 파견하여 북산으로 잠입시켜서 계곡 속에 숨겨두고 군사들에게 명령을 내려서 모두 말에게 먹이를 주고 욕식(아침 일찍 하는 식사)하게 하였다. 날이 밝아 올 무렵에 왕세충은 군사를 이끌고 이밀에게 가까이 갔다. 이밀이 군사를 내어 대응하였는데 아직 열도 제대로 갖추지 아니하여 왕세충이 군사를 풀어서 그들을 쳤다.
왕세충은 먼저 모양이 이밀 같은 사람을 하나 찾아서 묶어 숨겨 두었다가 싸움이 바야흐로 무르익었을 때 끌어다 진을 친 곳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북을 치게 하면서 말하였다. “이미 이밀을 붙잡았다” 사졸들이 모두 만세를 불렀다.
그리고 숨어있던 병사들이 나타나서 높은 곳에 올라갔다가 내려오며 말을 달려서 이밀의 진영을 짓누르며 불을 멋대로 놓아 그 여막을 태웠다.
이밀의 무리들은 크게 붕괴되었고 그 장수 장동인과 진지략이 모두 항복하였는데 이밀은 1만 여명과 더불어 말을 달려 낙구로 향하였다.
이밀이 장차 낙구성으로 들어가려 하니 병원진이 사람을 파견하여 몰래 왕세충을 끌여들였다. 이밀이 이를 알았으나 왕세충의 군사가 반쯤 낙수를 건너기를 기다려 그를 치기로 하였다.
왕세충의 군사가 도착하였는데 이밀의 척후 기병이 때를 맞추어 깨닫지 못하여 장차 출전할 때 쯤에는 왕세충의 군사들은 모두 이미 건넜다.
선웅신 등이 또 군사를 챙겨서 스스로 점거하고 이밀은 스스로 지탱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휘하에 있는 경무장한 기병을 거느리고 호뢰(하남성 형양현 서북쪽)로 달아났고 병원진은 드디어 성을 들어 항복하였다.
이밀이 자살하여 무리들에게 사과하고자 하였다. 왕백당이 이밀을 안고서 큰 소리로 울다가 기절하니 무리들도 모두 슬퍼서 울었는데 이밀이 다시 말하였다. “여러분이 다행히 서로 버리지 않는다면 마땅히 함께 관중(당나라)으로 귀부하여야 하고 나 이밀 자신은 비록 공로를 세운 것이 없지만 여러분은 반드시 부귀해짐을 보장 받을 것이오.“
이밀을 쫒아서 입관(함곡관 안으로 들어감-당나라로 들어감)한 사람이 무릇 2만명이었다.
같은 달(9월) 우문화급이 위현(하북성 대명현 서북쪽)에 도착하니 무리들은 대부분 도망하였고 우문화급도 실패할 것을 알고서 황제나 해보고 죽기로 결심하고 진왕 양호를 독살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며 국호를 허(許)라하고 백관을 두었다.
12월 당고조가 이밀을 파견하여 산동(낙양지역)으로 가서 그 나머지 무리 가운데 아직 항복하지 않은 사람들을 거둬들이게 하였다. 이 틍을 타고 이밀이 도림에서 반란을 일으켜,성언사가 추격하여 이밀의 목을 베었다.
3) 619년: 당고조 무덕 2년 1월 회안왕 이신통이 우문화급을 위현(하북성 대명현)에서 공격하니 우문화급이 요성(산동성 요성현)으로 달아났다. 2월 두건덕이 요성을 공격하여 우문화급의 목을 베었다.
4) 620년: 당고조 무덕 3년 7월 당고조 이연이 이세민에게 왕세충을 치도록 명하였다. 이세민이 신안(하남성 신안현)에 도착하니 왕세충은 3만명을 동원이 당에 대비하게 하였다. 이세민이 보병과 기병 5만을 인솔하고 자간(낙양성의 서쪽)으로 진군하니 왕세충은 자간의 수자리를 뽑아 낙양으로 돌아갔다. 이로부터 왕세충의 영토에서 이세민에게 연달아 항복을 하였다. 왕세충이 불리해지자 두건덕에게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였다. 두건덕이 이에 응하여 왕세충에게 군사적 지원을 하겠다고 약속하였다.
5) 621년: 당고조 무덕 4년 1월 이세민이 낙양을 포위하고 공격하였지만 실패하였다. 이에 당고조 이연이 돌아오라고 하였지만 이세민은 이길수 있다고 보고하고 낙양을 계속 포위하였다.
3월 낙양의 식량사정은 매우 악화되었다. 두건덕이 마침내 낙양을 구원하러 군사를 동원하여 남하한다. 10만 여명이 성고(하남성 형양현 서북쪽 사수진)의 동쪽 벌판에 진을 쳤다. 이에 이세민은 휘하의 군사를 반으로 나누어 반은 동도(낙양)를 포위하고 자신은 날래고 용감한 병사 3천5백명을 거느리고 동쪽에 있는 무뢰로 갔다.
5월 이세민이 무뢰에서 두건덕을 대파하고 생포하였다. 이렇게 되니 왕세충도 이세민에게 항복하였다. 이렇게 되어 마침내 당나라는 낙양마저 점령하여 중국을 재차 통일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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