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고구려와 중국의 관계-234, 당나라때-58 (14. 돌궐전 분석 및 해설②)

상 상 2014. 5. 9. 17:13

 

고구려와 중국의 관계-234, 당나라때-58 (14. 돌궐전 분석 및 해설)

 

차례

 

1. 구당서 돌궐전

2. 구당서 고조본기

3. 구당서 태종본기()

4. 구당서 태종본기()

5. 구당서 고종본기()

6. 구당서 고종본기()

7. 구당서 동이열전

8.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당과의 관련부분)

9. 신당서 돌궐전

10. 신당서 고조본기

11. 신당서 태종본기

12. 신당서 고종본기

13. 신당서 동이열전

14. 신구당서 돌궐전 분석 및 해설

15. 신구당서 고조본기 분석 및 해설

16. 신구당서 태종본기 분석 및 해설

17. 신구당서 고종본기 분석 및 해설

18. 신구당서 동이열전 분석 및 해설

19.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분석 및 해설

20. 고구려와 당나라의 관계

 

 

14. 신구당서 돌궐전 분석 및 해설

1) 돌궐과 당나라의 관계

2) 돌궐의 멸망

3) 돌궐전의 기록에 관하여

4) 돌궐전에 나오는 사실관계의 규명 및 해설

 

 

2) 돌궐의 멸망

 

우리가 중국 사서를 보는 이유는 우리 역사를 알기 위해서이다.(그까짓 짱개들의 역사를 알기 위해서가 아님)

그러한 측면에서 신구당서 돌궐전에서 우리가 가장 주목해 봐야 할 부분이 돌궐의 멸망과정이다.

바로 우리역사, 고구려의 역사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신구당서 돌궐전, 신구당서 고조본기, 신구당서 태종본기를 합쳐서 보면 돌궐의 멸망과정은 다음과 같다.

 

626(무덕 9) 6월 당태종이 형과 동생을 쳐 죽이고 아버지를 감금해서 정권을 잡자,

다음 달인 7월에 돌궐의 힐리가한이 당나라의 서울인 장안 가까이까지 쳐들어 온다.

이렇게 위급해지니 장안에 계엄령이 내려진다.

이때 당태종은 막대한 양의 옥과 비단을 바치고 그 위기를 벗어난다.

이것이 이른바 위수에 있는 편교 위에서 맺은 '위수지맹'이다.(편교는 위수에 있는 다리임)

 

억울하지만 힘이 약하니 강도들에게 값비싼 보물을 엄청나게 바치고 자기 권력과 목숨을 구걸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렇듯 당태종이 집권할 때까지 두려워할 만큼 강성했던 돌궐이 어떻게 멸망하게 되었는가?

 

운명은 이상하게 흘러 힐리가한은 돌리가한으로 하여금 동쪽지역을 관할하게 하였었는데 돌리가한이 세금을 제멋대로 거두어들여

위수지맹 1년 뒤인 627, 음산 이북의 설연타회흘발야고 등 여타 부족들이 모두 연달아 배반하여 돌궐의 욜곡설을 공격하여 패주시켰다. 이에 힐리 가한이 돌리 가한을 보내 토벌하였으나 돌리 가한의 군사가 또 패하여, 돌리 가한이 경무장한 말을 타고 달아나 돌아왔다.

이에 힐리 가한이 분노하여, 돌리 가한을 10여일 가두고 매질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로 인하여 돌리 가한이 원망하여 속으로 배신하고자 하였다. 이때부터 돌궐은 본격적인 틈이 생겨 내분에 들어간 것이다.

게다가 일이 안 될려고 그랬는지 그해에 돌궐에 큰 눈이 내려 양과 말이 모두 죽고 사람들이 크게 굶주렸다.

 

그런데도 힐리 가한은 다시 거듭 여러 부족에게서 세금을 걷고, 이런 이유로 부하들이 명령을 감당하지 못하고 안팎으로 대부분 반란을 일으켰다. 이렇게 되어 힐리가한이 쇠약해져돌리가한에게 병력을 급히 구하였으나돌리가한이 따르지 않자군사를 일으켜 서로 공격하였다. 결정적인 내분에 들어간 것이다.

 

이렇게 되니, 그 다음 해인 628, 돌리가한이 힐리가한의 공격을 당했다고 하면서당나라에 구원을 요구한다. 나아가 힐리가한을 쳐달라고 부탁한다. 내분사태가 외세를 불러들이는 사태로 번진 것이다.

이때 당태종은 진무통으로 하여금 병주의 군대로 상황에 따라 응접하라고 명한다.

 

사태가 이렇게 번지자

또 그 다음 해인 629년 돌궐진영에서 본격적인 이탈자가 생겨난다.

돌리 가한이 서신을 보내 당에 입조할 것을 청하더니, 얼마 있지 않아

돌리 가한이 힐리 가한에게 또 공격을 받아 군사를 달라고 간청한다. 사태가 긴박해졌다.

그러던 차에 8월 설연타가 스스로 가한을 칭하고, 사신을 보내와 지방물건을 바친다. 당에 붙겠다는 말이다.

 

이렇게 내분사태가 벌어지고 이탈자가 생긴 것을 보고나자 그때서야 당태종은 군대를 동원한다.

그만큼 당태종은 돌궐을 두려워한 것이다.

 

6298월 정해일이정을 정양도 행군대총관으로 삼아돌궐을 정벌하게 한다.

이때 마읍의 돌궐을 치라고 명했는데힐리가한이 달아나고9명의 돌궐 하급관리가 무리를 들어

항복하였으며발야고, 복골, 동라 () 여러 부족과 습(), ()의 우두머리가 다 당나라에 내조한다.

 

뜻밖에 이런 식으로 성과가 나자 당태종은 본격적으로 군대를 투입한다.

62911월 병주도독 이세적이정좌무위대장군 시소영주대도독 임성왕 ()도종

유주도독 위효절영주도독 설만숙 등 모두 6총관군사 10여만을 동원하여 돌궐을 친다.

 

이렇게 되니, 그해(629) 12, 돌리가한과 욱사설음내특근 등이 모두 소속 부락을 거느리고 당나라로 도망쳐 온다.

 

다시 그 다음 해인 6301, 이정이 진군하여 악양령에 주둔했다가, 밤에 정양을 습격하자,

힐리가한이 놀라 아장(궁정)을 적구에 옮겼다.

 

6302, 힐리가한이 철산에 숨었는데 병력이 아직 수만이었으나 집실사력으로 하여금 내조케하여 항복하겠다고 청한다.

이때 당태종은 홍려경 당검 및 장군 안수인을 보내 황제의 증표()를 가지고 가서 안심시키니, 힐리가한이 조금 안정하였다.

그러나 그때 이정이 그 틈을 타서 습격하여 힐리가한을 대파한다. 안심시킨 뒤 뒤통수를 후려 친 것이다.

힐리가한은 천리마를 타고, 홀로 사촌형제의 아들 사발라 부락으로 달아난다.

 

6303월 행군부총관 장보상이 무리를 거느리고 갑자기 사발라 군영에 도착해서,

힐리가한을 생포하여 당나라 서울인 장안으로 보낸다.

이렇게 하여 그렇게 강성했던 돌궐은 멸망하였다.

 

한마디로 돌궐은 내분으로 망한 것이다.

강성한 돌궐이 내분만 없었으면 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당나라의 움직임을 보면.

강성한 나라에 대해서는 내분이 일어나야 침략하고 있음을 볼수 있다.

그 전까지는 언감생신 꼼짝도 못하다가 상대방이 내분을 일으켜 힘이 없어진 것을 보고서야 군대를 동원하는 것이다.

평소에는 꼼짝 못하다가 상대방이 스스로 쓰러진 뒤에 때리는 비겁한 행동을 하는 것이다.

상대방이 힘이 있으면 비굴한 자세로 막대한 양의 보물과 물품을 계속 바쳐 종놈 노릇을 하다가

상대방이 스스로 넘어지면 그 위에 올라타 뺨을 때리고 칼을 꽂는 그런 짓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중국인들의 본성이다.

 

돌궐처럼 평소에는 두려워서 꼼짝 못하다가 내분이 일어나자 당태종이 군대를 동원해 침략한 나라가 또하나 있다.

바로 고구려이다.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 고구려의 강성함이다.

 

고구려도 돌궐과 마찬가지로 당태종이 평소에는 감히 찝쩍거리지를 못하였다.

그러다가 연개소문의 정변 사태가 벌어지자 이를 내분으로 생각하고 군대를 동원한다.

 

이것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당태종이 607년 북쪽의 강성대국 돌궐을 무너뜨리고 서쪽으로 강성한 토욕혼을 635년에 꺾어 속국으로 만든 뒤에도

하나 남은 동쪽의 강성대국 고구려를 약 10년 동안 감히 찝쩍거리지를 못하다가

돌궐 멸망 후 12년 뒤인 642년 연개소문에 의한 고구려 정변이 일어나자,

그것을 고구려 내분으로 생각하고 다시 2년 뒤인 64411월에 고구려 침략을 한다.

 

이렇듯 고구려도 돌궐과 마찬가지로 강성하였다.

고구려도 돌궐처럼 강성하여 당태종이 평소에는 감히 찝쩍거릴 생각도 못하였던 것이다.

고구려도 돌궐처럼 내분이 일어나자 당태종은 고구려를 돌궐처럼 이길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당태종

스스로 직접 군대를 끌고 고구려를 침략한다. 이른바 친정(親征)을 한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는 돌궐보다 더 강성하여 당태종은 요동성쪽에서 맴돌다가 안시성에서 쓰디쓴 패배를 맛보고 비참하게 쫒겨난다.

쫒겨나는 길에는 그 혹독한 만주벌판의 눈보라를 맨살로 맞아가며 황제라는 자가 일반 병사와 똑같이 힘든 일을 하면서

비참한 몰골로 겨우 빠져 나갔다.

 

이렇듯이 고구려는 당태종이 그렇게 두려워했던 돌궐보다도 훨씬 더 강성하였던 것이다.

(돌궐은 패했으나 고구려는 승리하였음)

 

내가 이렇게 고구려의 강성함을 발견한 것은 신구당서 돌궐전, 신구당서 고조본기, 신구당서 태종본기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 것이 고구려의 강성함을 또한번 확인할 수 있었던 힘이고, 그러한 것들을 번역한 보람이다.

이렇기 때문에 우리역사를 알려면 중국 25사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고 그래서 중국 25사 번역이 우리역사를 아는데 필수라는 것이다.

 

여태까지 우리역사를 가르친 사람 중에서 당태종이 고구려를 제외한 다른 나라들을 다 꺾어 놓고도

고구려에 약 10년 동안이나 찝쩍거리지 못했다는 사실을 말하는 사람을 못보았다.

그리고 왜 10년 동안이나 고구려에 찝쩍거리지 못했는지 그 이유를 말하는 사람도 못보았다.

그러한 사실을 몰랐거나 알고도 숨겼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사실을 몰랐다면 무식이고, 알고도 숨겼으면 사기이다.

 

고구려가 얼마만큼 강성했는지를 몰랐고, 식민사관의 개들처럼 그것을 숨겼다.

이렇게 해서 결국 우리나라 사람 대부분이 고구려가 얼마만큼이나 강성했는지 모르게 되었다.

.................

 

정작 고구려가 망한 것은 돌궐과 마찬가지로 내분 때문이었다.

당태종이 죽고 당고종때 연개소문의 맏아들 남생과 그 동생 남건· 남산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고

뒤이어 결국 남생이 쫒겨나 남생의 아들 헌성이 당에 들어가 구원을 요청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내분이 외세를 불러온 돌궐의 경우와 완전히 똑같아 진 것이다.

 

이래서 고구려가 망한 것이지 내분이 없었다면 당나라는 절대 고구려를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은 내분이 있기 전 당나라의 여러 차례에 걸친 침략이 다 실패하였음이 이를 증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