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건봉 3년(668년 12월에 (당)고종이 함원전에 앉아서 이적 등을 인현(引見)하고 조정에서 포로를 헌상받았다. 고장은 평소에 [개소문(蓋蘇文)의] 위협을 받았기 때문에 죄를 용서하여 사평태상백으로 삼고, 남산은 사재소경으로 삼았다. 남건은 검주로 귀양을 보내고, 백제왕 부여융은 영외로 귀양을 보냈다. 헌성은 사위경으로 삼고, 신성은 은청광록대부로 삼았다. 남생은 우위대장군으로 삼고, [계필(契苾)]하력은 행좌위대장군으로 삼았다. 이적은 겸태자태사로 삼고, 설인귀는 위위대장군으로 삼았다. 그 나라의 땅을 9도독부(都督府)· 42주(州)· 1백현(縣)으로 분할하였다. 다시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고, 추호(酋豪) 가운데 공(功)이 있는 자를 뽑아서 도독(都督)· 자사(刺史)· 영(令)에 각각 제수(除授)하여, 화관(華官)과 더불어 [백성을] 참치(參治)하게 하였다. [설(薜)]인귀(仁貴)를 [안동(安東)]도호(都護)로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진무(鎭撫)케 하였다. 이 해에 교제(郊祭)를 지냈는데, 고(高)[구(句)]려(麗)를 평정한 것에 대해 하늘에 성사(成事)를 사례하였다. 44) ○ 총장(總章) 2년(A.D.669)에 고(高)[구(句)]려민(麗民) 3만명을 강회(江淮)와 산남(山南)으로 옮겼다. 고(高)[구(句)]려(麗)의 대장(大長) 겸모잠(鉗牟岑)이 무리를 거느리고 반란을 일으켜 [고(高)]장(藏)의 외손(外孫) 안순(安舜)을 세워 왕(王)으로 삼았다. 고간(高偘)을 동주도행군총관(東州道行軍總管)으로 삼고, 이근행(李謹行)을 연산도행군총관(燕山道行軍總管)으로 삼아 토벌케 하였다. 사평태상백(司平太常伯) 양방(楊昉)을 보내어 도망치고 남은 무리를 불러들이게 하였다. [안(安)]순(舜)이 겸모잠(鉗牟岑)을 죽이고 신라(新羅)로 달아 났다. [고(高)]간(偘)은 도호부(都護府)의 치소(治所)를 요동주(遼東州)로 옮기고, 반란군을 안시(安市)[성(城)]에서 격파하고, 또 천산(泉山)에서 쳐부수고 신라(新羅)의 원병(援兵) 2천명을 사로잡았다. 이근행(李謹行)은 그들을 발로하(發盧河)에서 쳐부수고, 다시 싸워서 포로와 참수(斬首)한 수가 1만(萬)에 이르렀다. 이에 평양(平壤)[성(城)]의 패잔병(敗殘兵)들은 다시 군열(軍列)을 정비할 수 없게 되자, 함께 어울려 신라(新羅)로 망명하였다. 그리하여 무려 4년만에 평정되었다. 지난날 [이(李)]근행(謹行)이 아내 유씨(劉氏)를 시켜 벌노성(伐奴城)을 수비케 하였는데, 고구려가 공격해 오자, 유씨(劉氏)는 갑옷을 입고 대오(隊伍)를 정렬하여 수비하였다. 그리하여 적(賊)들이 물러났다. 고종(高宗)은 이를 가상히 여겨 연군부인(燕郡夫人)에 봉(封)하였다. 45) ○ 의봉(儀鳳) 2년(A.D.677)에 [고(高)]장(藏)에게 요동도독(遼東都督)을 제수(除授)하고, 조선군왕(朝鮮郡王)에 봉하여 요동(遼東)에 돌아가 남은 백성을 안무(安撫)케 하였다. 이에 앞서 내주(內州)에 편입되어 있던 교민(僑民)을 모두 용서하여 돌려 보내고,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신성(新城)으로 옮겼다. [고(高)]장(藏)이 말갈(靺鞨)과 반란을 꾀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었다. 소환하여 공주(邛州)로 추방하고, 나머지 교민(僑民)들은 하남(河南)과 농우(隴右)로 옮겼다. 노약(老弱)하고 빈곤(貧困)한 자는 안동(安東)에 머물러 두었다. [고(高)]장(藏)이 영순(永淳)(A.D.682)초년에 죽으니, 위위경(衛尉卿)을 추증하여 힐리(頡利)[가간(可汗)]의 묘 왼쪽에 장사하고 비석을 세워 주었다. 예전의 성(城)들은 왕왕 신라(新羅)에 편입되었다. 유민(遺民)들은 흩어져 돌궐(突厥)과 말갈(靺鞨)로 달아났다. 이로 말미암아 고씨(高氏)의 군장(君長)은 모두 끊겼다. 46) ○ 수공(垂拱) 연간(A.D.685~688)에 [고(高)]장(藏)의 손자 보원(寶元)을 조선군왕(朝鮮郡王)으로 삼았다. 성력(聖曆)(A.D.698~699)초에 좌응양위대장군(左鷹揚衛大將軍)에 진수(進授)시키고, 다시 충성국왕(忠誠國王)에 봉(封)하여 안동구부(安東舊部)를 통섭(統攝)시키려 하였으나, 실행하지 못했다. 이듬해에 [고(高)]장(藏)의 아들 덕무(德武)를 안동도독(安東都督)으로 삼으니, 이뒤로 조금씩 나라의 틀이 잡혀갔다. 원화(元和)(A.D.806~820) 말(末)에 이르러 사자(使者)를 보내어 악공(樂工)을 헌상(獻上)하였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