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고구려와 중국의 관계-232, 당나라때-56 (13. 신당서 동이열전⑨끝.)

상 상 2014. 5. 2. 21:31

 

고구려와 중국의 관계-232, 당나라때-56 (13. 신당서 동이열전.)

 

차례

 

1. 구당서 돌궐전

2. 구당서 고조본기

3. 구당서 태종본기()

4. 구당서 태종본기()

5. 구당서 고종본기()

6. 구당서 고종본기()

7. 구당서 동이열전

8.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당과의 관련부분)

9. 신당서 돌궐전

10. 신당서 고조본기

11. 신당서 태종본기

12. 신당서 고종본기

13. 신당서 동이열전

14. 신구당서 돌궐전 분석 및 해설

15. 신구당서 고조본기 분석 및 해설

16. 신구당서 태종본기 분석 및 해설

17. 신구당서 고종본기 분석 및 해설

18. 신구당서 동이열전 분석 및 해설

19.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분석 및 해설

20. 고구려와 당나라의 관계

 

13. 신당서 동이열전(고구려와 당나라의 관련부분)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http://db.history.go.kr/url.jsp?ID=jo)

 

건봉 3(66812월에 ()고종이 함원전에 앉아서 이적 등을 인현(引見)하고 조정에서 포로를 헌상받았다. 고장은 평소에 [개소문(蓋蘇文)] 위협을 받았기 때문에 죄를 용서하여 사평태상백으로 삼고, 남산은 사재소경으로 삼았다. 남건은 검주로 귀양을 보내고, 백제왕 부여융은 영외로 귀양을 보냈다. 헌성은 사위경으로 삼고, 신성은 은청광록대부로 삼았다. 남생은 우위대장군으로 삼고, [계필(契苾)]하력은 행좌위대장군으로 삼았다. 이적은 겸태자태사로 삼고, 설인귀는 위위대장군으로 삼았다.

그 나라의 땅을 9도독부(都督府)· 42()· 1백현()으로 분할하였다. 다시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고, 추호(酋豪) 가운데 공()이 있는 자를 뽑아서 도독(都督자사(刺史()에 각각 제수(除授)하여, 화관(華官)과 더불어 [백성을] 참치(參治)하게 하였다. [()]인귀(仁貴)[안동(安東)]도호(都護)로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진무(鎭撫)케 하였다. 이 해에 교제(郊祭)를 지냈는데, ()[()]()를 평정한 것에 대해 하늘에 성사(成事)를 사례하였다.

 

 

44) 총장(總章) 2(A.D.669)에 고()[()]려민(麗民) 3만명을 강회(江淮)와 산남(山南)으로 옮겼다. ()[()]()의 대장(大長) 겸모잠(鉗牟岑)이 무리를 거느리고 반란을 일으켜 [()]()의 외손(外孫) 안순(安舜)을 세워 왕()으로 삼았다. 고간(高偘)을 동주도행군총관(東州道行軍總管)으로 삼고, 이근행(李謹行)을 연산도행군총관(燕山道行軍總管)으로 삼아 토벌케 하였다.

사평태상백(司平太常伯) 양방(楊昉)을 보내어 도망치고 남은 무리를 불러들이게 하였다. [()]()이 겸모잠(鉗牟岑)을 죽이고 신라(新羅)로 달아 났다. [()]()은 도호부(都護府)의 치소(治所)를 요동주(遼東州)로 옮기고, 반란군을 안시(安市)[()]에서 격파하고, 또 천산(泉山)에서 쳐부수고 신라(新羅)의 원병(援兵) 2천명을 사로잡았다. 이근행(李謹行)은 그들을 발로하(發盧河)에서 쳐부수고, 다시 싸워서 포로와 참수(斬首)한 수가 1()에 이르렀다. 이에 평양(平壤)[()]의 패잔병(敗殘兵)들은 다시 군열(軍列)을 정비할 수 없게 되자, 함께 어울려 신라(新羅)로 망명하였다. 그리하여 무려 4년만에 평정되었다지난날 [()]근행(謹行)이 아내 유씨(劉氏)를 시켜 벌노성(伐奴城)을 수비케 하였는데, 고구려가 공격해 오자, 유씨(劉氏)는 갑옷을 입고 대오(隊伍)를 정렬하여 수비하였다. 그리하여 적()들이 물러났다. 고종(高宗)은 이를 가상히 여겨 연군부인(燕郡夫人)에 봉()하였다.

 

45) 의봉(儀鳳) 2(A.D.677)[()]()에게 요동도독(遼東都督)을 제수(除授)하고, 조선군왕(朝鮮郡王)에 봉하여 요동(遼東)에 돌아가 남은 백성을 안무(安撫)케 하였다. 이에 앞서 내주(內州)에 편입되어 있던 교민(僑民)을 모두 용서하여 돌려 보내고,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신성(新城)으로 옮겼다. [()]()이 말갈(靺鞨)과 반란을 꾀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었다. 소환하여 공주(邛州)로 추방하고, 나머지 교민(僑民)들은 하남(河南)과 농우(隴右)로 옮겼다. 노약(老弱)하고 빈곤(貧困)한 자는 안동(安東)에 머물러 두었다. [()]()이 영순(永淳)(A.D.682)초년에 죽으니, 위위경(衛尉卿)을 추증하여 힐리(頡利)[가간(可汗)]의 묘 왼쪽에 장사하고 비석을 세워 주었다. 예전의 성()들은 왕왕 신라(新羅)에 편입되었다. 유민(遺民)들은 흩어져 돌궐(突厥)과 말갈(靺鞨)로 달아났다. 이로 말미암아 고씨(高氏)의 군장(君長)은 모두 끊겼다.

 

46) 수공(垂拱) 연간(A.D.685~688)[()]()의 손자 보원(寶元)을 조선군왕(朝鮮郡王)으로 삼았다. 성력(聖曆)(A.D.698~699)초에 좌응양위대장군(左鷹揚衛大將軍)에 진수(進授)시키고, 다시 충성국왕(忠誠國王)에 봉()하여 안동구부(安東舊部)를 통섭(統攝)시키려 하였으나, 실행하지 못했다. 이듬해에 [()]()의 아들 덕무(德武)를 안동도독(安東都督)으로 삼으니, 이뒤로 조금씩 나라의 틀이 잡혀갔다. 원화(元和)(A.D.806~820) ()에 이르러 사자(使者)를 보내어 악공(樂工)을 헌상(獻上)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