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 건봉(乾封) 원년(A.D.666; 高句麗 寶藏王 25)에 장(藏)이 아들 남복(男福)을 보내어 천자(天子)의 태산(泰山)의 봉선(封禪)에 참여하고 돌아갔다. [그때 마침] 개소문(蓋蘇文)이 죽고, 아들 남생(男生)이 대신하여 막리지(莫離支)가 되었다. 남건(男建)· 남산(男産) 두 아우가 있어 서로 사이가 나빴다. 남생(男生)이 국내성(國內城)을 점거하고 아들 헌성(獻誠)을 보내어 입조(入朝)하여 구원을 청하니, 개소문(蓋蘇文)의 아우 정토(淨土)도 역시 땅을 베어 항복할 것을 청해 왔다. 이에 조서(詔書)를 내려 계필하력(契苾何力)을 요동도안무대사(遼東道安撫大使)로 삼고, 좌금오위장군(左金吾衛將軍) 방동선(龐同善)과 영주도독(營州都督) 고간(高偘)을 행군총관(行軍總管)으로 삼는 한편,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 설인귀(薜仁貴)와 좌감문장군(左監門將軍) 이근행(李謹行)[註135]을 후속 부대로 떠나 보냈다. 40) ○ [건봉(乾封) 원년(元年: 666)] 9월에 [방(龐)]동선(同善)이 고(高)[구(句)]려병(麗兵)을 쳐부수니 남생(男生)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합류하였다. 조서(詔書)를 내려 남생(男生)에게 특진(特進) 요동대도독(遼東大都督) 겸(兼) 평양도안무대사(平壤道安撫大使)를 제수(除授)하고, 현도군공(玄菟郡公)에 봉하였다. 또 이적(李勣)을 요동도행군대총관(遼東道行軍大總管) 겸(兼) 안무대사(安撫大使)로 삼아 계필하력(契苾何力)· 방동선(龐同善)과 협력케 하였다. 조서(詔書)를 내려 독고경운(獨孤卿雲)을 압록도행군총관(鴨淥道行軍總管)으로, 곽대봉(郭待)封을 적리도행군총관(積利道行軍總管)으로, 유인원(劉仁願)을 필렬도(畢列道)[註136]행군총관(行軍總管)으로, 김대문(金待問)을 해곡도(海谷道)[註137] 행군총관(行軍總管)으로 각각 삼고, [이(李)]적(勣)에게 절도(節度)[사(使)]를 주는 한편, 연(燕)· 조(趙)에 있는 군량을 요동(遼東)에 날라다 쌓게 하였다. 이듬해 1월에 [이(李)]적(勣)이 [제(諸)]도(道)를 이끌어 신성(新城)에 진주(進駐)하고, 여러 장수들을 모아 계획하기를, “신성(新城)은 적(賊)의 서쪽 변경의 요충이므로 [신성(新城)을] 먼저 함락시키지 않으면, 다른 성(城)도 쉽게 함락되지 않을 것이다.” 하고, 드디어 서남쪽 산에 올라가서 성(城)에 바짝 닿아 성벽(城壁)을 [쌓자,] 성중(城中) 사람이 추장(酋長)을 묶어 가지고 나와서 항복하였다. [이(李)]적(勣)은 계속 진격하여 16성(城)을 빼앗았다. 한편 곽대봉(郭待封)은 주사(舟師)를 이끌고 바다를 건너 평양(平壤)으로 향하였다. 41) ○ [건봉(乾封)] 3년(A.D.668) 2월에 [이(李)]적(勣)이 [설(薜)]인귀(仁貴)를 이끌고 가서 부여성(扶餘城)을 빼앗으니, 다른 30성(城)이 모두 항복하였다. [방(龐)]동선(同善)과 [고(高)]간(偘)은 신성(新城)을 지키고 있었는데, 남건(男建)이 군대를 보내어 습격하였다. [설(薜)]인귀(仁貴)는 [고(高)]간(偘)을 구원하느라 금산(金山)에서 싸움을 벌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고(高)[구(句)]려군(麗軍)이 북을 울리며 진군(進軍)하는데, 예봉(銳鋒)이 날카로왔다. 인귀(仁貴)가 측면을 공격하여 크게 쳐부수어 머리 5만급을 베었다. 남소(南蘇)· 목저(木底)· 창암(蒼岩)의 3성(城)을 빼앗아 군사를 이끌고 땅을 점령한 다음 [이(李)]적(勣)과 합류하였다. 시어사(侍御史) 가언충(賈言忠)이 군사작전 관계로 [요동(遼東)에서] 돌아왔다. 고종(高宗)이 군중(軍中)의 상황을 물으니, 이렇게 대답하였다.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 지난날 선제(先帝)께서 문죄(問罪)할 적에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은 오랑캐에게 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속담에 ‘군(軍)에 내응(內應)하는 자가 없으면 중도에 돌아서라(군무매軍無媒, 중도회中道回)’고 하였습니다. 오늘 날 남생(男生)의 형제가 집안 싸움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인도하여 주고 있으니, 우리는 오랑캐의 내부사정을 다 알 수 있으며, 장수들은 충성을 다하고 군사들은 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臣은 반드시 이긴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高)[구(句)]려(麗)의 비기(秘記)에 ‘9백년이 못되어 80대장에게 멸망한다(불급구백년不及九百年, 당유팔십대장멸지當有八十大將滅之)’고 하였는데, 고씨(高氏)가 한(漢)나라때부터 나라가 있은지 지금 9백년이 되고, [이(李)]적(勣)의 나이가 또 80입니다. 고구려는 기근(飢饉)이 거듭되어 사람들은 서로 약탈하여다 팔고, 지진(地震)으로 땅이 갈라지며, 낭호(狼狐)가 성중(城中)에 들어가고 두더지가 성문(城門)에 굴을 뚫어, 인심(人心)이 불안에 떨고 있으므로, 이번 걸음에 다시는 출전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남건(男建)이 군사 5만으로 부여(扶餘)[성(城)]을 습격하자, [이(李)]적(勣)은 살하수(薩賀水) 위에서 그를 쳐부수어 5천급((千級)의 머리를 베고, 3만명을 포로로 사로잡았다. 기계(器械)와 우마(牛馬)도 이에 맞먹었다. 진격하여 대행성(大行城)을 탈취하였다. 유인원(劉仁願)이 [이(李)]적(勣)과 합류하기로 약속하고 뒤늦게 도착하였다. 소환(召還)하여 마땅히 목을 벨 것이나, 용서하여 요주(姚州)로 귀양보냈다. 계필하력(契苾何力)은 [이(李)]적(勣)의 군대와 압록(鴨淥)에서 합류하여 욕이성(辱夷城)을 탈취한 다음, 모든 군사를 이끌고 평양(平壤)[성(城)]을 포위하였다. 42) ○ [건봉(乾封) 3년(668)] 9월에 [고(高)]장(藏)이 남산(男産)에게 수령(首領) 1백명을 주어 보내며 흰 깃발을 세워 항복을 청하는 한편, 입조(入朝)도 청하므로 [이(李)]적(勣)이 예의를 갖추어 맞아들였다. 그러나 남건(男建)은 오히려 [성(城)을] 굳게 지키며 나와 싸웠으나, 여러번 패하였다. 대장(大將)인 승(僧) 신성(信誠)이 첩자를 보내와 내응(內應)을 약속하였다. 닷새만에 성문이 열렸다. 군사들이 [북을 울리고] 고함을 지르며 들어가서 성문에 불을 놓아 화염(火焰)이 사방에서 치솟으니, 남건(男建)은 다급한 나머지 스스로 몸을 찔렀으나 죽지 않았다. 이에 [고(高)]장(藏)· 남건(男建) 등을 사로잡고 5부(部)의 1백 76성(城)과 69만호(戶)를 몰수하였다. 조서(詔書)를 내려 [이(李)]적(勣)에게 지름길을 택하여 소릉(昭陵)에 헌부(獻俘)하고, 개선(凱旋)하여 돌아오게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