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고구려와 중국의 관계-213, 당나라때-37 (10. 신당서 고조본기②)

상 상 2014. 3. 19. 17:29

 

고구려와 중국의 관계-213, 당나라때-37 (10. 신당서 고조본기②)

 

차례

 

1. 구당서 돌궐전

2. 구당서 고조본기

3. 구당서 태종본기(상)

4. 구당서 태종본기(하)

5. 구당서 고종본기(상)

6. 구당서 고종본기(하)

7. 구당서 동이열전

8.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당과의 관련부분)

9. 신당서 돌궐전

10. 신당서 고조본기

11. 신당서 태종본기

12. 신당서 고종본기

13. 신당서 동이열전

14. 신구당서 돌궐전 분석 및 해설

15. 신구당서 고조본기 분석 및 해설

16. 신구당서 태종본기 분석 및 해설

17. 신구당서 고종본기 분석 및 해설

18. 신구당서 동이열전 분석 및 해설

19.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분석 및 해설

20. 고구려와 당나라의 관계

 

 

10. 신당서 권1 고조본기②

1) 원문 출처: 新漢籍全文(http://hanchi.ihp.sinica.edu.tw/ihp/hanji.htm)

※ 원문에 들어가는 방법: 위 홈페이지/ 免費使用/ 史/ 正史/ 新唐書/ 本紀/ 卷一

번 역 문

원 문

617

이때,유무주는 마읍에서 들고 일어났고,임사홍은 예장에서 들고 일어났으며,유원진은 진안에서 들고 일어나,모두 황제를 칭하였다.;주찬은 남양에서 들고 일어나,초나라 (황)제라 일컫고;이자통은 해릉에서 들고 일어나,초왕이라 일컬었으며;소강해는 기주를 근거로 하여,신평왕이라 일컫고;설거는 금성에서 들고 일어나,서진패왕이라 일컫고;곽자화는 유림에서 들고 일어나,영락왕이라 일컬었으며;두건덕은 하간에서 들고 일어나,장락왕이라 일컫고,왕수발은 긍과 정에서 들고 일어나,만천왕이라 일컫고;왕화는 신안에서 들고 일어나고,두복위는 회남에서 들고 일어나,모두 오왕이라 일컬었으며;이밀은 공에서 들고 일어나,위공이라 일컫고;왕덕인은 업에서 들고 일어나,태공이라 일컫고;좌재상은 제군에서 들고 일어나,박산공이라 일컬었으며;나예는 유주를 근거로,좌난당은 경(주)를 근거로,풍앙은 고와 나를 근거로 하여,모두 총관이라 일컬었으며;양사도는 삭방을 근거로,대승상이라 일컫고;맹해공은 조주를 근거로,녹사라고 일컫고;주문거는 회양을 근거로,유엽군이라 일컫고;고개도는 북평을 근거로,장장손은 오원을 근거로,주조는 상락을 근거로,양사림은 산남을 근거로,서원랑은 연주를 근거로,양중달은 예주를 근거로,장선상은 이와 여를 근거로,왕요한은 변주를 근거로,시덕예는 위씨를 근거로,이의만은 평릉을 근거로,기공순은 청과 내를 근거로,순우난은 문등을 근거로,서사순은 임성을 근거로,장홍도는 동해를 근거로,왕박은 제군을 근거로,장선합은 운주를 근거로,전류안은 장구를 근거로,장청특는 제북을 근거로,장군상은 해주를 근거로,은공수은 서주를 근거로,주법명은 영안을 근거로,묘해조는 영가를 근거로,매지암은 선성을 근거로,등문진은 광주를 근거로,상스러운 두목 양세략은 순과 조를 근거로,염안창은 파동을 근거로,영장진은 울림을 근거로,그 별의별 칭호로 여러 도둑들이 왕왕 산과 내에 모였다. 그런데 유무주는 분양궁(태원의 서부에 수양제의 이궁,離宮)을 공격하여,고조가 이에 장수와 관리를 소집하여 호소하며 말했다.:「지금 내가 (태원)유수를 하고 있는데,적들이 이궁(분양궁)을 근거지로 삼고 있으나,적을 쫒아(가서) 토벌하지 못하지만,(그들의) 죄는 당연히 사형이다. 그러나 병력을 출동시키려면 반드시 회보를 기다려야하는데,지금 강도(수양제가 있는 곳)는 동떨어지게 멀어서,다음 시기가 어떠한가?」장수와 관리 모두 말하였다.:「국가의 이로움을 오로지 할수 있는 사람은,공입니다.」고조가 말하였다.:「훌륭하다.」이에 병사를 모집하니,열흘 사이에 무리 1만명을 얻었다. 부유수 호분랑장 왕위와 호아랑장 고군아는 병사를 크게 모집하는 것을 보고,변고가 있을까 의심스러워,의도적으로 고조에게 진나라 사당에서 비가 오기를 빌자고 모의 하였다. 고조가 깨닫고,비밀리에 준비하였다.

是時,劉武周起馬邑,林士弘起豫章,劉元進起晉安,皆稱皇帝;朱粲起南陽,號楚帝;李子通起海陵,號楚王;邵江海據岐州,號新平王;薛舉起金城,號西秦霸王;郭子和起榆林,號永樂王;竇建德起河間,號長樂王,王須拔起恆、定,號漫天王;汪華起新安,杜伏威起淮南,皆號吳王;李密起鞏,號魏公;王德仁起鄴,號太公;左才相起齊郡,號博山公;羅藝據幽州,左難當據涇,馮盎據高、羅,皆號總管;梁師都據朔方,號大丞相;孟海公據曹州,號錄事;周文舉據淮陽,號柳葉軍;高開道據北平,張長愻據五原,周洮據上洛,楊士林據山南,徐圓朗據兗州,楊仲達據豫州,張善相據伊、汝,王要漢據汴州,時德叡據尉氏,李義滿據平陵,綦公順據青、萊,淳于難據文登,徐師順據任城,蔣弘度據東海,王薄據齊郡,蔣善合據鄆州,田留安據章丘,張青特據濟北,臧君相據海州,殷恭邃據舒州,周法明據永安,苗海潮據永嘉,梅知巖據宣城,鄧文進據廣州,俚酋楊世略據循、潮,冉安昌據巴東,甯長真據鬱林,其別號諸盜往往屯聚山澤。而劉武周攻汾陽宮,高祖乃集將吏告曰:「今吾為留守,而賊據離宮,縱賊不誅,罪當死。然出兵必待報,今江都隔遠,後期奈何?」將吏皆曰:「國家之利可專者,公也。」高祖曰:「善。」乃募兵,旬日間得眾一萬。副留守虎賁郎將王威、虎牙郎將高君雅見兵大集,疑有變,謀因禱雨晉祠以圖高祖。高祖覺之,乃陰為備。

5월 갑자일,고조와 (왕)위、(고)군아가 일을 살피자,개양부사마 유정회가 (왕)위、(고)군아가 반란을 일으켰다고 알리니,즉시 우두머리가 잡혔다. 병인일,돌궐이 변경을 침범하니,고조가 군중에 명령하며 말하였다.:「사람들이 (왕)위、(고)군아가 돌궐을 불렀다고 고발하였는데,지금(보니) 과연 그렇구나.」마침내 일으킨 병사들로 (왕위와 고군아를) 죽였다. 유문정을 돌궐에 사신으로 보내,연합하여 화친을 맺기로 약속하였다.

五月甲子,高祖及威、君雅視事,開陽府司馬劉政會告威、君雅反,即坐上執之。丙寅,突厥犯邊,高祖令軍中曰:「人告威、君雅召突厥,今其果然。」遂殺之以起兵。遣劉文靜使突厥,約連和。

6월 기묘일,(태원의) 모든 군(郡)에 격문을 띄우며,의병이라 칭하고,대장군부를 개설하고,삼군을 설치하였다. 아들 (이)건성을 농서공、좌령군대도독으로 삼아,좌군에 예속시키고;(이)세민을 돈황공、우령군대도독으로 삼아,우군에 예속시켰으며;(이)원길을 고장공으로 삼아,중군에 예속시켰다. 배적을 장사로 삼고,유문정을 사마로 삼았으며,석애현장(石艾縣長) 은개산을 연리(掾吏)로 삼고,유정회는 속리(屬吏)로 삼았으며,장손순덕、왕장해、유홍기、두종은 통군으로 삼았다. 창고를 열어 궁핍한 자들을 구휼하였다.

六月己卯,傳檄諸郡,稱義兵,開大將軍府,置三軍。以子建成為隴西公、左領軍大都督,左軍隸焉;世民為燉煌公、右領軍大都督,右軍隸焉;元吉為姑臧公,中軍隸焉。裴寂為長史,劉文靜為司馬,石艾縣長殷開山為掾,劉政會為屬,長孫順德、王長諧、劉弘基、竇琮為統軍。開倉庫賑窮乏。

7월 임자일,고조가 백기를 잡고,들에서 무리에게 맹세하였는데,병사 3만이 있었다,(이)원길을 태원유수로 삼았다. 계축일,태원을 출발하였다. 갑인일,장군 장륜을 보내 이석、용천、문성의 3개 군(郡)을 순찰하도록 하였다. 병진일,이어서 영석에 도착하여,가호보에 진영을 꾸렸다. 수나라 호아랑장 송노생의 읍(邑)이,의로운 군대를 막았다. 병인일,수나라의 응양부사마 이궤가 무위에서 들고 일어나,대량왕이라고 일컬었다.

七月壬子,高祖杖白旗,誓眾於野,有兵三萬,以元吉為太原留守。癸丑,發太原。甲寅,遣將張綸徇下離石、龍泉、文城三郡。丙辰,次靈石,營於賈胡堡。隋虎牙郎將宋老生邑,以拒義師。丙寅,隋鷹揚府司馬李軌起武威,號大涼王。

8월 신사일,송로생을 곽읍에서 패퇴시켰다. 병술일,임분군에 내려갔다. 신묘일,강군을 쳐서 이겼다. 계사일,이어서 용문에 가자,돌궐이 와서 위로하여 맞이하였다.

八月辛巳,敗宋老生于霍邑。丙戌,下臨汾郡。辛卯,克絳郡。癸巳,次龍門,突厥來來逆。

10월 신사일,이어서 장락궁에 가니,무리가 20만이 있었다.수나라 유수 위문승 등이 대왕 (양)유를 받들고 (수나라) 서울 성을 지키니,고조가 사신을 보내 타일렀으나,회보하지 않았다. 이에 성을 포위하고,영을 내려 말하였다.:「수나라 7묘(수나라 황제의 윗대 일곱 조상을 모신 사당)와 종실을 범하는 자는,3족을 멸하는 벌을 주겠다.」병신일,수나라의 나산령, 소선이 스스로 양공이라고 일컬었다.

十月辛巳,次長樂宮,有眾二十萬。隋留守衞文昇等奉代王侑守京城,高祖遣使諭之,不報。乃圍城,下令曰:「犯隋七廟及宗室者,罪三族。」丙申,隋羅山令蕭銑自號梁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