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년 (AD 4) : 가을 8월에 석두성(石頭城)과 고목성(高木城)의...
[번역문]
22년(서기 4) 가을 8월에 석두성(石頭城)과 고목성(高木城)의 두 성을 쌓았다.
9월에 왕이 기병 1천 명을 거느리고 부현(斧峴) 동쪽에서 사냥하다가 말갈 적(賊)을 만났다.
한번 싸워 격파하고, 생구(生口)를 사로잡아 장수와 군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24 년 (AD 6) : 가을 7월에 왕이 웅천책(熊川柵)을 세우자...
[번역문]
24년(서기 6) 가을 7월에 왕이 웅천책(熊川柵)을 세우자 마한 왕이 사신을 보내 나무라며 말하였다.
“왕이 처음 강을 건너 왔을 때 발디딜 만한 곳도 없었으므로 내가 동북쪽의 100리의 땅을 떼어 주어 편히 살게 하였으니
왕을 대우함이 후하지 않았다고 할 수 없다. 마땅히 이에 보답할 생각을 하여야 할 터인데,
이제 나라가 완성되고 백성들이 모여들자 나와 대적할 자가 없다고 하면서
성과 못을 크게 설치하여 우리의 영역을 침범하니 그것이 의리에 합당한가?”왕은 부끄러워서 드디어 목책을 헐어버렸다.
25 년 (AD 7) : 봄 2월에 왕궁의 우물물이 갑자기 넘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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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서기 7) 봄 2월에 왕궁의 우물물이 갑자기 넘쳤고,
한성(漢城)의 민가[人家]에서 말이 소를 낳았는 데 머리 하나에 몸은 둘이었다.
일관(日官)이 말하였다. “우물물이 갑자기 넘친 것은 대왕이 우뚝 일어날 징조요,
소가 머리 하나에 몸이 둘인 것은 대왕이 이웃 나라를 병합할 징조입니다.”
왕이 듣고 기뻐하여 드디어 진한(辰韓)과 마한을 병탄할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26 년 (AD 8) : 가을 7월에 왕이 말하였다.
[번역문]
26년(서기 8) 가을 7월에 왕이 말하였다.
“마한은 점점 쇠약해지고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마음이 갈리어 그 형세가 오래 갈 수 없을 것 같다.
만일 남에게 병합된다면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는 격[脣亡齒寒]이 될 것이니 후회하더라도 이미 늦을 것이다.
차라리 남보다 먼저 [마한을] 손에 넣어 훗날의 어려움을 면함만 같지 못할 것이다.”
겨울 10월에 왕이 군사를 내어 겉으로는 사냥한다고 하면서 몰래 마한을 습격하여 드디어 그 국읍(國邑)을 병합하였다.
다만 원산성(圓山城)과 금현성(錦峴城)의 두 성만은 굳게 지켜 항복하지 않았다.
27 년 (AD 9) : 여름 4월에 두 성이 항복하자 그 백성들을...
[번역문]
27년(서기 9) 여름 4월에 두 성이 항복하자 그 백성들을 한산(漢山) 북쪽으로 옮기니, 마한은 드디어 멸망하였다.
가을 7월에 대두산성(大豆山城)을 쌓았다.
28 년 (AD 10) : 봄 2월에 맏아들 다루(多婁)를 태자로 삼고...
[번역문]
28년(서기 10) 봄 2월에 맏아들 다루(多婁)를 태자로 삼고 중앙과 지방[內外]의 군사 업무를 맡겼다.
여름 4월에 서리가 내려 보리를 해쳤다.
31 년 (AD 13) : 봄 정월에 나라 안의 민가들을 나누어서...
[번역문]
31년(서기 13) 봄 정월에 나라 안의 민가들을 나누어서 남부(南部)와 북부(北部)로 삼았다.
여름 4월에 우박이 내렸다. 5월에 지진이 일어났다. 6월에 또 지진이 일어났다.
33 년 (AD 15) : 봄과 여름에 크게 가물었다.
[번역문]
33년(서기 15) 봄과 여름에 크게 가물었다. 백성이 굶주려 서로 잡아먹고 도적이 크게 일어났다. 왕이 이를 위무하고 안정시켰다.
가을 8월에 동부(東部)와 서부(西部)의 두 부(部)를 더 설치하였다.
34 년 (AD 16) : 겨울 10월에 마한의 옛 장수 주근(周勤)이...
[번역문]
34년(서기 16) 겨울 10월에 마한의 옛 장수 주근(周勤)이 우곡성(牛谷城)에 근거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왕은 친히 군사 5천 명을 거느리고 이를 토벌하였다. 주근이 스스로 목매어 죽자 그 시체의 허리를 베고 그의 처자도 아울러 죽였다.
36 년 (AD 18) : 가을 7월에 탕정성(湯井城)을 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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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년(서기 18) 가을 7월에 탕정성(湯井城)을 쌓고 대두성(大豆城)의 민가들을 나누어 살게 하였다.
8월에 원산성(圓山城)과 금현성(錦峴城)의 두 성을 수리하고, 고사부리성(古沙夫里城)을 쌓았다.
37 년 (AD 19) : 봄 3월에 우박이 내렸다.
[번역문]
37년(서기 19) 봄 3월에 우박이 내렸다. 크기가 달걀만 하여 참새같이 작은 새들[鳥雀]이 맞으면 죽었다.
여름 4월에 가물었는데 6월에 이르러서야 비가 왔다.
한수(漢水)의 동북쪽 부락에 기근이 들어 고구려로 도망해 간 자가 1천여 집[戶]이나 되니,
패수(浿水)와 대수(帶水) 사이가 텅비어 사는 사람이 없었다.
38 년 (AD 20) : 봄 2월에 왕이 [지방을] 순행하고 위무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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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년(서기 20) 봄 2월에 왕이 [지방을] 순행하고 위무하여 동쪽으로는 주양(走壤)에 이르렀고,
북쪽으로는 패하(浿河)에 이르렀다가 50일만에 돌아왔다.
3월에 사신을 보내 농사짓기와 누에치기를 권장하고 급하지 않은 일로 백성을 괴롭히는 일은 모두 없애도록 하였다.
겨울 10월에 왕이 큰 단[大壇]을 쌓고 천지에 제사지냈다.
40 년 (AD 22) : 가을 9월에 말갈이 술천성(述川城)을...
[번역문]
40년(서기 22) 가을 9월에 말갈이 술천성(述川城)을 침공해 왔다.
겨울 11월에 또 부현성(斧峴城)을 습격하여 100여 명을 죽이고 약탈하였다. 왕이 날쌘 기병 200명에게 명하여 이를 막아 치게 하였다.
41 년 (AD 23) : 봄 정월에 우보(右輔) 을음(乙音)이 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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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년(서기 23) 봄 정월에 우보(右輔) 을음(乙音)이 죽자 북부의 해루(解婁)를 우보로 삼았다.
해루는 본래 부여 사람으로 식견[神識]이 깊었고, 나이가 70세를 넘었으나 기력이 쇠하지 않았으므로 등용한 것이었다.
2월에 한수 동북쪽의 여러 부락 사람으로 나이 15세 이상을 징발하여 위례성(慰禮城)을 수리하고 조영하였다.
43 년 (AD 25) : 가을 8월에 왕이 아산(牙山) 벌판에서...
[번역문]
43년(서기 25) 가을 8월에 왕이 아산(牙山) 벌판에서 5일 동안 사냥하였다.
9월에 기러기(鴻雁) 100여 마리가 왕궁에 모였다. 일관(日官)이 말하였다.
“기러기는 백성의 상징입니다. 장차 먼 데 있는 사람이 투항해 오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겨울 10월에 남옥저(南沃沮)의 구파해(仇頗解) 등 20여 가(家)가 부양(斧壤)에 귀순하니[納款] 왕이 이들을 받아들여
한산(漢山) 서쪽에 안치하였다.
45 년 (AD 27) : 봄과 여름에 크게 가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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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년(서기 27) 봄과 여름에 크게 가물어 풀과 나무가 타고 말랐다. 겨울 10월에 지진이 일어나 백성들의 집을 넘어뜨렸다.
46 년 (AD 28) : 봄 2월에 왕이 죽었다.
[번역문]
46년(서기 28) 봄 2월에 왕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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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국사기 원본 출처: http://koreandb.nate.com/history/saki/saki?kind=b
2. 해설 및 분석
1) 온조왕 26년(서기 8년) 겨울 10월에 마한의 도읍을 병합하고 이어서 온조왕 27년(서기 9년) 여름 4월에 마한을 멸망시킴
2) 31 년 (AD 13) : 남부(南部)와 북부(北部)를 설치하고
33 년 (AD 15) : 동부(東部)와 서부(西部)의 두 부(部)를 더 설치하였다.
⇒ 전국을 5부로 나누어 설치하는 것은 우리민족 고유의 풍습임.
고구려에서도 전국을 5부로 나누어 동서남북중 또는 상하좌우중 부(部)로 불렀다.
3) 37 년조에 나오는 한수(漢水)는 지금의 한강이 틀림없는데 패수(浿水)와 대수(帶水)는 어디인가?
이 문제는 너무나 유명하고 너무나 복잡하고 어려운 패수(浿水) 문제인데 이 문제는 단재선생께 알아봐야 한다.
우선 단재선생의 저서「삼국사기 중 동서 양자 상환 고증」에서는 “패수는 대동강이요, 대수는 임진강이면...”이라고 언급하셨다.
하지만, 「평양패수고」를 보면
평양과 패수는 다같이 우리말 “펴라”를 이두문으로 표기한 것으로서
평양은 육지, 패수는 강이나 서로 매우 가까워 같이 붙어 다니는 말인데,
『평양(패수)의 위치가 시대를 따라 다르니,
첫번째는 삼조선 시대의 평양이요,
두번째는 삼국시대와, 동북국(통일 신라와 발해) 시대, 양 시대의 평양이요,
세번째는 고려 이후의 평양이다.』
라고 말씀하시면서
“고려 이후의 평양은 지금 평양이니... 그 위치에 대하여는 문제가 없거니와,
삼조선의 평양인 고평양(古平壤)은
비상한 노력을 들이지 아니하면 도저히 그 위치를 알 수 없으므로 가장 어려운 문제요,
삼국시대와 동북국(통일신라 발해) 시대의 평양은
혹 고평양(古平壤)을 가리킨 평양이라 한 기록도 있고,
혹 지금 평양을 가리켜 평양이라 한 기록도 있는 평양이므로 다음 어려운 문제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삼조선 시대의 고(古) 평양 고(古) 패수에 대해서는
『고(古) 평양은 해성(海城) 고(古) 패수는 헌우락(蓒芋灤): 전부 지금의 요녕성』
이라고 말씀하셨고,
지금 온조왕 본기 37 년조에 나오는 패수(浿水)는 위에서 나오는 말씀에 의해 삼국시대의 평양(패수)이니
지금 대동강을 가리킨 기록이라고 이해하면 되겠다.
(보다 자세한 사항은 ‘평양패수고’와 ‘조선상고사’를 참고하시기 바람)
4) 43 년조에 나오는‘남옥저(南沃沮)’도 김부식이 중국사서를 보고 쓴 것으로서 단재선생에 의하면‘남동부여’이다.
5) 끝으로 백제의 도읍지에 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삼국사기, 잡지, 백제, 지리지 백제강역 편을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동명왕(東明王)의 셋째 아들 온조(溫祚)가 전한(前漢) 홍가(鴻嘉) 3년 계묘(서기전 18)에 졸본부여(卒本扶餘)로부터
위례성(慰禮城)에 이르러 도읍을 세워 왕을 일컫고 389년을 지냈다.
13세 근초고왕에 이르러 고구려의 남평양(南平壤)을 빼앗아 한성(漢城)에 도읍하고 105년을 지냈다.
22세 문주왕에 이르러 서울을 웅천(熊川)으로 옮기고 63년을 지냈다.
26세 성왕에 이르러 서울을 소부리(所夫里)로 옮기고 나라 이름을 남부여(南扶餘)라고 하였으며,
31세 의자왕에 이르기까지 지낸 햇수가 122년이었다.』
백제역사가 삼국사기에 의하면 서기전 18년에서부터 서기660년까지 678년간 지속되었는데
그중에서 위례성을 도읍으로 삼은 기간이 389년간이라고 하니 백제 역사의 반 이상이다.
그리고 「고구려의 남평양(南平壤)을 빼앗아 한성(漢城)에 도읍하고 105년을 지냈다.」고 한다.
위례성이란 온조왕 본기에 의하면 하남 위례성이고, 단재선생에 의하면 그 전에 소서노가 백제를 개국하고 도읍한 곳이
하북 위례성이다.
하북 위례성은 서울 송파구 몽촌토성 또는 풍납토성으로 보고,
하남 위례성을 하남시 춘궁동으로 본다면
고구려의 남평양인 한성은 또 어디인가? 지금의 서울 종로구 일대라고 보는 견해가 있던데
그렇다면 백제의 도읍지 위례성과 고구려의 남평양(남서울)이 매우 가까이 있었으면서 389년간이나 지냈다는 말이다.
그리고 「한성(漢城)에 도읍하고 105년을 지냈다.」는 것은 근초고왕 본기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기록이다.
근초고왕 26년(AD 371)조를 보면 「서울[都]을 한산(漢山)으로 옮겼다.」
<원문: 移都漢山>라고 되어 있어 지리지의 기록을 기록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史實)을 학교에서는 왜 안가르치는가?
백제가 서울을 한성으로 옮겼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우리국민 중에서 몇이나 아는가?
이러한 사실을 처음 듣는 사람이 거의 전부일 것이다.
이와같이 우리역사는 일제 식민사관에 물든 자들이 아직도 지배하고 있어서 진짜 우리역사를 가리고 식민사관으로 칠해진
가짜 역사를 우리역사로 배우고, 알고 있는게 지금까지도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다.
또한 위례성에서 389년 한성(漢城)에서 105년, 그러면 지금의 서울 일대에서 494년간이나 도읍하고 있었으니
백제의 역사는 거의 지금 서울의 역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공주와 부여에 도읍을 옮긴 것이 185년간 뿐이니 공주 부여 백제는 백제 역사의 마지막 짧은 역사이다.
그런데도 백제하면 짧은 시기였던 공주 부여를 떠올리니
이것 역시 식민사관주의자들이 백제 역사를 짧게 보이려고 한 장난으로 저질러진 일이라고 할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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