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년 (BC 18) : 여름 5월에 동명왕묘(東明王廟)를...
[번역문]
원년(서기전 18) 여름 5월에 동명왕묘(東明王廟)를 세웠다.
2 년 (BC 17) : 봄 정월에 왕이 여러 신하에게...
[번역문]
2년(서기전 17) 봄 정월에 왕이 여러 신하에게 말하였다.
“말갈(靺鞨)은 우리 북쪽 경계에 연접하여 있고, 그사람들은 용감하고 속임수가 많으니
마땅히 병장기를 수선하고 양곡을 저축하여 막아 지킬 계획을 세워야 할 것이다.”
3월에 왕은 재종숙부[族父] 을음(乙音)이 지식과 담력이 있으므로 우보(右輔)로 삼고 군사 업무를 맡겼다.
3 년 (BC 16) : 가을 9월에 말갈이 쳐들어 왔다.
[번역문]
3년(서기전 16) 가을 9월에 말갈이 북쪽 경계를 쳐들어 왔다. 왕은 굳센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급히 쳐서 크게 이겼다.
적으로서 살아 돌아간 자가 열에 한둘이었다.
겨울 10월에 우뢰가 쳤고 복숭아꽃과 오얏꽃이 피었다.
4년 (BC 15) : 봄과 여름에 가물었다.
[번역문]
4년(서기전 15) 봄과 여름에 가물어 기근이 들고 전염병이 돌았다. 가을 8월에 사신을 낙랑(樂浪)에 보내 우호를 닦았다.
5 년 (BC 14) : 겨울 10월에 북쪽 변방을 순행하고...
[번역문]
5년(서기전 14) 겨울 10월에 북쪽 변방을 순행하고 위무하며 사냥하였는데 신비스러운 사슴[神鹿]을 잡았다.
6 년 (BC 13) : 가을 7월 그믐 신미에...
[번역문]
6년(서기전 13) 가을 7월 그믐 신미에 일식(日食)이 있었다.
8 년 (BC 11) : 봄 2월에 말갈 적병 3천 명이 와서...
[번역문]
8년(서기전 11) 봄 2월에 말갈 적병 3천 명이 와서 위례성(慰禮城)을 포위하자 왕은 성문을 닫고 나가 싸우지 않았다.
열흘이 지나 적이 양식이 다 떨어져 돌아가자, 왕은 날랜 군사를 뽑아 대부현(大斧峴)까지 쫓아가 한번 싸워 이겼으며,
500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가을 7월에 마수성(馬首城)을 쌓고 병산책(甁山柵)을 세웠다. 낙랑태수(樂浪太守)의 사자가 고하여 말하였다.
“근래에 서로 예방하고 우호를 맺어 뜻이 한 집안과 같았는데 지금 우리 영토에 접근하여 성과 목책을 만들고 세우는 것은
혹시 야금야금 먹어 들어올 계책이 있어서인가? 만일 옛 우호를 저버리지 않고 성을 허물고 목책을 깨뜨려 버린다면
시기하고 의심할 바가 없겠지만, 혹시 그렇지 않다면 청하건대 한번 싸워서 승부를 결정하자.”
왕이 회답하였다.“요새를 설치하여 나라를 지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떳떳한 길인데
어찌 감히 이로써 화친과 우호를 저버림이 있을 것인가. 의당히 집사(執事)가 의심할 바가 아닌 것 같다.
만일 집사가 강함을 믿고 군사를 낸다면 우리 나라[小國]도 또한 이에 대응할 뿐이다.”
이로 말미암아 낙랑과 우호를 잃게 되었다.
10 년 (BC 9) : 가을 9월에 왕이 사냥을 나가서...
[번역문]
10년(서기전 9) 가을 9월에 왕이 사냥을 나가서 신비로운 사슴[神鹿]을 잡아 마한(馬韓)에 보냈다.
겨울 10월에 말갈(靺鞨)이 북쪽 경계를 노략질하였다. 왕은 군사 200명을 보내서 곤미천(昆彌川) 가에서 막아 싸우게 하였다.
우리 군사가 패배하여 청목산(靑木山)을 의지하고 스스로 지켰다.
왕이 친히 정예 기병 100명을 거느리고 봉현(烽峴)으로 나아가 구원하니 적이 보고는 곧 물러갔다.
11 년 (BC 8) : 여름 4월에 낙랑이 말갈을 시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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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년(서기전 8) 여름 4월에 낙랑이 말갈을 시켜 병산책(甁山柵)을 습격하여 깨뜨리고는 100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가을 7월에 독산책(禿山柵)과 구천책(狗川柵)의 두 목책을 세워 낙랑과의 통로를 막았다.
13 년 (BC 6) : 봄 2월에 서울[王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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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년(서기전 6) 봄 2월에 서울[王都]에서 늙은 할멈[老嫗]이 남자로 변하였고, 다섯 마리의 범이 성안으로 들어왔다.
왕의 어머니가 죽었는데 나이가 61세였다.
여름 5월에 왕이 신하에게 말하였다.“우리 나라의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 영토를 침략하므로
편안한 날이 적다. 하물며 이즈음 요망한 징조가 자주 나타나고 국모(國母)가 돌아가시니 형세가 스스로 편안할 수 없도다.
장차 꼭 도읍을 옮겨야 하겠다. 내가 어제 순행을 나가 한수(漢水) 남쪽을 보니 땅이 기름지므로
마땅히 그곳에 도읍을 정하여 길이 편안할 수 있는 계책을 도모하여야 하겠다.”
가을 7월에 한산(漢山) 아래로 나아가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민가들을 옮겼다.
8월에 사신을 마한에 보내 도읍을 옮긴 것을 알리고 마침내 강역을 구획하여 정하였는데
북쪽으로는 패하(浿河)에 이르렀고, 남쪽으로는 웅천(熊川)을 경계로 하였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막혔고, 동쪽으로는 주양(走壤)에 이르렀다.
9월에 궁성과 대궐을 세웠다.
14 년 (BC 5) : 봄 정월에 도읍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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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년(서기전 5) 봄 정월에 도읍을 옮겼다.
2월에 왕은 부락을 순행하며 위무하고 농사를 힘써 장려하였다.
가을 7월에 한강 서북쪽에 성을 쌓고 한성(漢城)의 백성을 나누어 살게 하였다.
15 년 (BC 4) : 봄 정월에 새 궁실을 지었는데...
[번역문]
15년(서기전 4) 봄 정월에 새 궁실을 지었는데 검소하되 누추하지 아니하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았다.
17 년 (BC 2) : 봄에 낙랑이 쳐들어 왔다.
[번역문]
17년(서기전 2) 봄에 낙랑이 쳐들어 와서 위례성을 불질렀다. 여름 4월에 사당[廟]을 세우고 국모(國母)에게 제사지냈다.
18 년 (BC 1) : 겨울 10월에 말갈이 갑작스레 습격하여...
[번역문]
18년(서기전 1) 겨울 10월에 말갈이 갑작스레 습격하여 왔다. 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칠중하(七重河)에서 맞아 싸워
추장 소모(素牟)를 사로잡아 마한에 보내고 그 나머지 적들은 모두 [산채로] 구덩이에 묻어 버렸다.
11월에 왕이 낙랑의 우두산성(牛頭山城)을 습격하려고 구곡(臼谷)에 이르렀으나 큰 눈을 만나 곧 돌아왔다.
20 년 (AD 2) : 봄 2월에 왕이 큰 단[大壇]을 설치하고...
[번역문]
20년(서기 2) 봄 2월에 왕이 큰 단[大壇]을 설치하고 친히 천지(天地)에 제사지냈는데 이상한 새 다섯 마리가 와서 날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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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국사기 원본 출처: http://koreandb.nate.com/history/saki/saki?kind=b
2. 해설과 분석
1) 온조왕 원년에 동명왕묘를 세운 것은 백제가 고구려 동명왕(추모, 주몽)에서 갈라져 내려 왔으니 자기들의 뿌리를 추모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온조왕 원년에 동명왕(추모, 주몽)은 이미 죽었고, 백제 왕가(王家)가 그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 할수 있다.
2) 2년조, 3년조, 8년조, 10년조, 11년조, 18년조에 말갈에 관한 기사가 계속해서 나오는데 이는 용어가 잘못된 것이다.
말갈이라는 용어는 중국사서 북사 물길전에서 처음 등장하는 말이다.
북사는 627년에서 659년 사이에 저술된 책이므로 기원전 17년에는 말갈이라는 용어 자체가 없었다.
말갈족은 한나라 시대 이전에 숙신, 한나라 시대에 읍루라고 불리웠고 남북조시대 초기에 물길이라고 불리웠다가
북사가 쓰여진 627년에서 659년 사이에 비로소 말갈이라고 처음 불리웠다.
따라서 627년부터라도 서기전 17년이면 644년 전인데, 그때는 말갈족이라는 이름이 있지도 않았다.
따라서 서기전 17년에 말갈이 나타났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은 명백히 잘못된 것이다. 왜 이런 잘못이 나왔을까?
이에 대하여 단재선생께서는 ‘조선상고사’에서
『.....예(濊)라 쓰지 않고 말갈(靺鞨)이라 썼는데, 이것은 신라 말엽에 예(濊)를 말갈이라고 한 당(唐)나라 사람의 글을 많이 보고
마침내 고기(古記)의 예(濊)를 모두 말갈로 고친 것이다.』라고 말씀해 주심으로써 뭐가 무엇인지 속시원히 알려주셨다.
즉, 우리민족에게 전해 내려오는 사서인 고기(古記)에는 ‘예(濊)’라고 되어 있었는데
신라말엽에 신라 사람들이 당나라 사람들이 예(濊)를 말갈이라고 쓴 글을 많이 보고
드디어 고기(古記)의 예(濊)를 모두 말갈로 고쳤기 때문에 이와 같은 잘못이 나왔다는 것이다.
3) 그 다음, 8년조(서기전 11년) 가을 7월 기사를 보면 「낙랑태수(樂浪太守)」가 나오는데 이것은 어떻게 된 것인가?
이 역시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속 시원히 말해주신 분이 단재 신채호 선생인데 그분의 저서‘조선상고사’를 보면
『백제 본기에 낙랑왕(樂浪王)이라, 낙랑태수(樂浪太守)라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백 몇십 년의 연대를 줄인 뒤에 그 줄인 연대를 가지고
중국의 연대와 대조한 결과로 낙랑을 한군(漢郡)이라 하여 낙랑태수라고 쓴 것이다』
이렇게 알려 주셨다. 즉, 낙랑태수라는 말이 나오게 된 것은
첫째, 백제의 연대를 백 몇십 년을 줄인 결과이고
둘째, 그 줄인 연대를 중국연대와 대조한 결과,
셋째, 낙랑국을 한나라 낙랑군으로 인식하여 낙랑왕을 낙랑태수라고 썼다는 말이다.
다시말해서 고기(古記)에는 낙랑왕이라고 쓰여져 있었는데 백제역사를 백 몇십년 줄이다 보니 낙랑왕을 낙랑태수로 고쳐 썼다는 말이다.
참고로 단재선생이 말씀하신 고구려 연대를 보면
『주몽의 고구려 건국 원년 갑신년은 한 문제 후원 7년(기원전 157년, 갑신)에 상당하며,
유리왕(제2대 왕) 원년 임인년은 한 무제 건원 2년(임인, 기원전 139년)에 상당하고,
대무신왕(제3대 왕) 원년 무인년은 한 무제 태초 2년(무인, 기원전 103년)에 상당하며,
모본왕(제5대 왕) 원년 무신년은 한 무제 본시 원년(기원전 73년, 무신)에 해당한다.』
이다(출처: 사론, 조선상고 문화사: 비봉출판사 2008년판)
백제의 건국이 고구려 건국과 그렇게 멀리 차이나지 않으니, 온조왕 원년에 이미 동명왕 사당을 지었으므로 동명왕 사후이고
온조왕 8년이면 유리왕 8년 이후가 될터이니 대략 기원전 130년 전후가 될 것이다.(위에 있는 단재선생의 말씀에 의하면)
낙랑국이 멸망한 해는 대무신왕 15년이므로 기원전 88년에 해당한다. 따라서 기원전 130년 전후이면 낙랑국이 존속했던 때이므로
온조왕 8년조(서기전 11년) 가을 7월 기사의‘낙랑태수(樂浪太守)’는‘낙랑왕(樂浪王)’이라고 고친 것은 잘못된 것이다.
(삼국사기가 비록 기존에 내려오는 사서, 고기(古記) 등을 재단하여 편집한 책이지만, 고기(古記) 자체가 이미 신라 사람들이 연대를 줄이고
사실을 이리저리 옮겨 놓았기 때문에 삼국사기를 올바르게 보려면 조선상고사와 조선상고 문화사 안에 있는 글을 봐야하는 것이 필수임)
4) 도읍을 옮겼다는 14년조의 기록에 대하여...
전편 백제 시조 온조왕 본기- 1을 보면 『온조는 하남(河南-한수 남쪽)의 위례성(慰禮城)에 도읍을 정하고』이렇게 되어 있으니
온조가 처음 도읍을 정한 곳이 하남 위례성이다.
그런데 13년 봄 2월조를 보면 『내가 어제 순행을 나가 한수(漢水) 남쪽을 보니 땅이 기름지므로
마땅히 그곳에 도읍을 정하여 길이 편안할 수 있는 계책을 도모하여야 하겠다.』라고 말함으로써 또다시 한수 이남
즉, 하남에 도읍을 정하겠다고 말하고 이어서,가을 7월조를 보면
『한산(漢山) 아래로 나아가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민가들을 옮겼다. 8월에 사신을 마한에 보내 도읍을 옮긴 것을 알리고...』
이렇게 되어 있어 하남 위례성으로 도읍을 옮기겠다는 말을 실행하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하남 위레성에서 하남 위례성으로 도읍을 옮긴 것인데 이것은 어떻게 된 것인가? 이 역시 조선상고사를 봐야한다.
조선상고사 제4편 열국의 쟁웅시대 제2장 열국의 분립 3. 백제의 건국과 마한의 멸망편을 보면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백제 본기(百濟本紀)는 고구려 본기보다 더 심하게 문란하다. 백 몇십 년의 감축은 물론이고, 그 시조와 시조의 출처까지 틀린다.
그 시조는 소서노 여대왕(召西奴女大王)이니 하북(河北) 위례성(慰禮城)--지금의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그가 죽은 뒤에
비류(沸流) ·온조(溫祚) 두 아들이 분립하여 한 사람은 미추홀(彌鄒忽 : 지금의 仁川)에, 또 한사람은 하남(河南) 위례홀(慰禮忽)에 도읍하여
비류는 망하고 온조가 왕이 되었는데, 본기에는 소서노를 쑥 빼고 그 편(篇) 첫머리에 비류 ·온조의 미추홀과 하남 위례홀의 분립을 기록하고,
온조왕 13년에 하남 위례홀에 도읍하였음을 기록하였으니, 그러면 온조가 하남 위례홀에서 하남 위례홀로 천도한 것이 되니
어찌 우스갯소리가 아니랴 ? 이것이 첫째 잘못이요,』
따라서 백제 본기가 그 시조 소서노의 행적을 빼다보니 그렇게 우스운 소리가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즉 백제의 시조는 소서노이고, 소서노가 하북 위례성에다가 도읍을 정했는데,
소서노가 죽은 뒤에 온조가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했다는 것이다.
백제가 하북 위례성에서 하남 위례성으로 도읍을 옮겼다는 사실은 이렇게 단재선생의 설명을 들어봐야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바르게 알수 있다. 아무튼 우리역사는 단재선생이 없으면 안된다, 알수가 없다.
5) 13년조 2월
「우리 나라(백제)의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라는 이른바 동유낙랑(東有樂浪) 문제는
‘조선사연구초’에 있는 ‘삼국사기 중 동서 양자의 상환 고증’에 자세히 나와 있으니
그곳을 참조하면 됨( http://blog.daum.net/cdh571/181 이하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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